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은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2001년 봄 김훈
어떻게 이런 글을 쓸까요.
서문에서 보여지는 문장만으로도 김훈은 이미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네요.
당대에 문장으로 김훈에 필적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평생 읽어본 작가중에 최고의 문장인건 확실하네요.
예전에 읽어보고 전율했던 칼의 노래 서문이 문득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고 또 한번 놀라서 옮겨봅니다.
첫댓글 정말 문장력은 탁월한 사람입니다.
문장력은.. 탁월하죠. 다만 작가의 사고방식이나 이런것들이 좀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통찰해내는 그런것이 없죠.솔직히 김훈 인터뷰 읽고 인간적으로 실망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오로지 글재주 하나만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감합니다. 저도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솔직히 인간 김훈의 사고방식은 '에러'라고 생각되더군요. 특히 그 어이없는 남성우월주의는 ㄷㄷㄷ
그 남성이라는 것이 생물학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남성. 즉 기득권의 우월주의라는 것이 문제겠죠. 문체 자체는 절대미문입니다.
남성 우월주의 뿐 아니라 신군부 독재시절 기자로서 찬양글 쓴것에 대해서도 잘못이라는것은 알면서도 변명만 늘어놓는 태도, 여러 사회적 담론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변명과 도피하기 식으로밖에 얘기하지 않더군요.
애초에 김훈은 사회적 담론 같은걸 거부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제가 본 김훈씨는 변명이랑은 참 안어울리는 사람이였는데.. 서문에 적혀있듯, 자신의 오류들을 이미 세상 누구보다 더 크게 느끼고 있고 그 한계를 인정하는 분이지, 자신의 한계와 오류를 변명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죠.
김훈이 사회적 담론을 거부하지는 않죠. 거부하는 척 하는 것 뿐이고 실제로는 언급을 많이 합니다.
변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김훈씨 굉장히 면피성 발언을 많이 합니다. 또 작가라는 방패로 쓱 숨어버리죠.
작가가 무슨 방패씩이나 될까요 ㅋ 여기 댓글만봐도 알수 있듯, 작가이기 때문에 더 많은 걸 요구하는 분들이 많은게 사실인데 그게 과연 방패가 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김훈이 사회적 담론을 거부하는건, 자신의 생각이 이야기가 논리적으로 현실적으로 전혀 맞지 않다는걸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다만 자꾸 언급이 될수 밖에 없는건 물으니 그대로 가감없이 답하는게 김훈의 인터뷰고, 그걸가지고 거부하는척하는 위선인냥 표현하는건 아주 잘못된듯 하네요.
인터뷰는 물어도 대답 안하면 됩니다. 그리고 김훈이 자신의 생각이 현실과 논리적으로 안맞는다고 생각하다니요?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네요. 김훈은 기본적으로 기득권을 옹호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힘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그에 대한 거부를 굉장히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정의, 사랑 이런 것등을 언어가 빚어낸 신기루라 생각하고 있고, 그런 허무주의 속에는 기득권의 카르텔을 형성시키는 위험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김훈씨 책중에 칼의노래도 좋지만 현의 노래라는 노래도 그에 못지 않더라구요.. 이 분 글은 그냥 읽다보면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책도 그렇구요..
근데 또 이런 작가도 있어야 문장력에 대한 전환도 되고 하는거죠. 담고 있는 사상이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은게 아니라 시대가 바뀐만큼 형식도 바껴야 된다고 생각을 해서.. R.A.T.M. 이나 NoFX, Rise Against 같은 세련된 사회음악을 듣고 싶습니다.
남성스러운 필력. 참 멋있죠.
문장은 정말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멋져요. 칼의노래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