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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캉1 - 바이외역에서 기차를 타고 노르망디의 캉에 도착해 걸어서 성에 오르다!
5월 27일 루앙 Rouen 에서 기차를 타고 노르망디의 캉 Caen 에 내려서 기차를
갈아 타고 12시 18분에 바이외 Bayeux 에 도착해 노트르담 대성당
Cathedrale Notre Dame 을 보고 정복왕 윌리엄 센터 Centre Cuillaume
le Conquerant 를 찾아서 영국을 정복한 "윌리엄의 태피스트리" 를 구경합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의 서쪽 오마하 비치 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동쪽 주노 해안
에는 영국과 캐나군이 상륙해 미군 3천명과 영국군 1,500명등 4,500명이
전사했으며 독일군은 9천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전쟁이면 따라 다니는게
영웅 만들기 인가 한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외에도 생각나는게 있으니.....
"미국의 미식 축구 스타 패트릭 틸먼의 이야기 가 심금을 울린다. 틸먼은
2002년 3월 애리조나 카디널스와의 360만 달러 계약을 앞뒀지만
자원입대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에 참전한다. 2004년 4월 비극이 일어났다."
“틸먼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접경 지역에서 순찰 도중에 매복 중이던
적과의 교전 도중 동료 병사들을 구하고 장렬하게 전사 했다 는
것이었다. 이것이 공식발표였다. 틸먼은 일약 아프간 전쟁의 영웅 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2007년 4월 열린 미 하원 청문회는 이런 영웅담이 조작임을 낱낱이 까발렸다.
틸먼을 적으로 오인한 미군 부대 부대장의 사격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군의 오인 사격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 조작
사건의 진상조사를 요구한 이가 바로 틸먼의 가족 이었다는 것이 심금을 울린다."
"틸먼의 어머니 는 “영웅담을 조작함으로써 진정한 영웅의 의미를 축소 시키고 있다”고
분노했다.‘조작된 영웅 만들기’가 오히려 고인이 된 아들의 명예를 실추 시켰다는
것이다. 틸먼 은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영웅’ 으로 거듭났다."
그러고는 배낭을 메고 걸어서 바이외 기차역 에 도착해 14시 26분 기차를 타고는
불과 24분 만에 14시 50분에 캉 역에서 내리는데 역시나 이 역에도
코인 라카 Left Luggage, Consignas 가 없는지라 배낭을 메고는 관광 하기로 합니다.
노르망디 Normandie 는 노르만족 바이킹 이 프랑스에 상륙해 파리를 공격해 프랑스왕
으로 부터 땅을 양도 받은데서 유래하며... 2016년 전국 13개 레지옹(주) 중
하나로 주도는 루앙 이고 망슈(Manche), 칼바도스(Calvados), 오른(Orne),
외르(Eure), 센마리팀(Seine-Maritime) 5개 데파르트망(Départmen 군)으로 구성됩니다.
주요 도시는 센마리팀 데파르트망의 루앙 이며 그외 주요 도시는 르아브르, 에브뢰,
셰르부르 옥트빌, 알랑송, 캉인데 캉은 칼바도스(Calvados) 데파르트망
(군) 의 군청소재지로 오른강을 끼고 있으며.... 북쪽 15km 지점의
영국 해협과는 운하로 연결 되기 때문에 항구 가 있고 무역이 성하다고 합니다.
잉글랜드왕 노르망디공 윌리엄의 거성(居城) 이 있었던 곳으로 1346년과 1417년에 영국
에 점령 되었으나 1450년 프랑스령 으로 돌아왔으며 프랑스혁명 때 지롱드파(派) 의
거점이 되기도 했는데 2차 세계대전 때 노르망디 작전의 영향으로 큰 피해 를 보았습니다.
캉역 구내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서는 트램 티켓 을 달라고 하니 없다기에 오늘이
일요일 이라 버스 외에 트램도 다니지 않는가 보다? 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니,
옆에 있던 청년이 말하기를 트램이 공사중이라 아예 다니지 않는다고 말해 줍니다?
청년은 버스도 일요일이라 드물게 다니니 걷는게 좋겠다고 말하는데... 해서 기차역 정문
으로 나와서는 트램 선로 가 있으니 누구에게 더는 물어볼 필요없이 걸으니 선로는
조금 가다가 구부러지는데... 오른쪽 기차역 쪽을 보니 후문 인 것 같은데.... 그럼
처음 부터 정문으로 나올게 아니라 후문으로 나왔으면 가까운데 괜한 수고를 했나 봅니다?
조금더 걸으니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 오고 날은 더워 등에 땀이 젖는데다가 걷는
속도가 느리니 이러다가는 구경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로... 마침 강변 에
도착하니 마눌은 여기 강변 그늘에서 쉬겠다기에 배낭을 지키라 이르고는 혼자 나섭니다.
여기 생 피에르 운하 Bassin St. Pierre 강변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며 사이클링
하는 사람도 많은데다가 배들도 더러 다니는데... 보트 놀이 를 하는
가족들도 있어 그늘에 앉아 쉬면서 구경하노라면 눈이 심심치는 않을 것 같네요?
6월 6일 대로 Ave. du 6 Juin 를 따라 조금 걸으니 도로에 차단막이 쳐지고 공사중 이라
보니 트램 선로를 일부 뜯어냈고 나머지 선로도 뜯어내려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신형 트램을 도입 하면서 선로 규격이 맞지 않아 철거 하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6월 6일” 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영화 “레 미제라블”의
주요 장면인 1832년 6월 6일의 봉기 에서 나온 이름이니... 루이 14세 국욍은 동생
필리프를 오를레앙공 에 봉해 우대하는데 루이 15세와 16세 는 이 친척의 영향력을
견제하니 루이 필리프는 서운한 마음 을 가졌는데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합니다.
그러자 오를레앙공은 재빨리 변신하니 자신의 작위를 버리고 평민이 되었으며 자신이 살던
궁전인 팔레 로얄을 혁명정원 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들에게 개방하니...‘평등한
필리프(Phillipe Egalité)’라고 불리며 시민의 영웅 이 됐는데, 루이 16세 재판정에
배심원 으로 참여해서 루이 16세에게 사형을 내리는데 찬성해 "가문의 원한" 을 풀었습니다.
혁명때 열아홉살이었던 아들 루이 필리프 는 군에 들어가 육군 중장이 되어 1792년
오스트리아-프랑스 전쟁에 참전 하는데... 이때 그의 상관인 프랑스군 사령관
"뒤무리에는 야심" 이 있었으니,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프랑스로 쳐들어가서
정권을 장악한후 루이 필리프를 국왕에 올리고 자신이 실권을 장악 하려고 했습니다.
이 계획이 누설되어 파리로 소환당하자 두 사람은 처벌이 두려워 오스트리아로 망명 하니
파리 공화파 정부는 아버지인 오를레앙공을 의심해 단두대에서 처형 하는데...
루이 필리프는 가정교사 를 하고 여동생은 삯바느질로 연명하던 중에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프랑스 왕정이 회복 되면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 에 오릅니다.
21년간 망명중이던 루이 필리프 는 루이 18세와 화해를 해서 귀국해 공작 지위와
재산을 되찾았지만, 왕당파에는 들어가지 않고 입헌 군주파를 표방 하니...
오를레앙파 로 불리는데, 신중했던 루이 18세가 죽고 동생 샤를 10세가 왕위 에
올라 프랑스를 절대 왕정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시행 합니다.
산업혁명으로 세상은 이미 달라졌으니 실질적인 힘과 부 를 가진 것은 귀족들이 아니라
상층 부르주아지 였으니, 그들은 1830년 7월 혁명 을 일으켜 샤를 10세 를 왕위에서
내쫓았는데... 프랑스의 정치세력은 첫째는 왕당파 이고 둘째는 공화주의자 였으며
셋째는 입헌 군주제를 원하는 상층 부르주아지 들이니 루이 필리프를 국왕 으로 모십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으니 그들은 공장에 들어가 값싼 임금 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는데, 산업 부르주아지를 유래가 없는 부자가 되었지만
임금 노동자들을 최악의 생존 조건으로 내몰렸는데... 루이 필리프는 상층 부르주아지
에게만 선거권을 줌으로써 하층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을 테러와 폭동으로 내몰게 됩니다.
1832년 6월 5일 혁명의 영웅 라마르크가 죽고 장례식날 노동자와 빈민들이 궐기해 파리에
바리케이트를 쌓는데, 시민들이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루이 필리프는
군대에 진압 을 명하니 6월 6일 생 마리 Saint Merri 로 몰린 시위대는 수도원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80명이 죽고 200명이 부상했으며 500명이 포로가 되니 실패로 끝납니다.
영화“레 미제라블”에서 이 장면을 실감나게 다루고 있는데.... 이후 루이 필리프
국왕은 가혹한 폭력으로 그들을 억누르면서 필리프는 늙은 독재자로 변해가자
마침내 16년후 1848년 하층 부르주아지와 노동자들이 2월 혁명 을 일으켜서는...
루이 필리프를 내쫒고는 임시정부 가 구성되니 공화주의파와 사회주의파가 대립 합니다.
1848년 4월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낙선 하고 6월에
정부가 국립작업장을 폐쇄하자 실망한 노동자들이 바스티유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니
정부는 카베냐크 장군을 보내 시위를 무참히 진압 하는데... 은행가· 대지주· 산업
자본가들이 힘을 되찾아 질서당(秩序黨)을 결성해 온건한 헌법을 의회에서 승인하게 합니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이때 남성 모두에게 보통 선거제도 가 도입되어 농민들이
대거 선거권을 가지게 되자, 도시 노동자에 비하면 아무래도 보수적인 농민들은 예상을
뒤엎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 으로 뽑으니 1852년 친위 쿠데타 로
황제가 되었으나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패배해 왕정이 폐지되고 3공화정 이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 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 끝에 과일가게를 지나니 독일 점령기에 프랑스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이들을 기리는 레지스탕스 광장 Pl. de la Resistance
인데..... 광장 한 가운데에 황금색을 입한 여 전사 가 말을 탄채 칼 을 들고
있으니 혹시 잔 다르크 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님 자유의 여신 인지도?
세상 일에는 명암 이 있는법! 우리가 사육신을 찬양 하지만 그 뒷면에는 사육신의 아내와
딸들 은 고귀한 양반가 부녀자에서 하루 아침에 남편과 아버지를 잃고 역적의 자손 으로
"노비가 되어 종살이" 를 했듯, 레지스탕스의 뒷면에는 부역자 가 있으니 왕은철 교수는
동아일보 ‘왕은철 스토리와 치유’ 칼럼에 “고통 소비하는‘사진 관ㅇㅈ’” 글을 올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사진 들이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 과 열애
했던 전설적인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의 사진 들이 그러하다. 그중에 1944년
8월 18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찍은 ‘부역자’ 라는 제목의 사진이 특히나 그렇다."
"이 사진에서 중요한 건 사람들의 시선 이다. 남자들도 더러 있지만 여자들이 대부분
이다.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될 현장에 여자 아이들 도 있다.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 하나의 지점 이 있다. 머리가 깎이고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여자. 모두가 그녀를 쳐다 보며 기뻐하고 있다. 경찰도 그렇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두사람뿐이다. 경멸 대상인 여자와 옷 보따리를 들고 가는 여자의
아버지, 이렇게 둘이다. 아니, 여자가 안고 있는 갓난아이 까지 포함하면 둘이 아니라
셋이겠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욕을 하며 여자를 끌고가는 것은 부역자 이기 때문
이다. 죄목은 1940년에서 1944년까지 프랑스를 점령했던 독일군 병사 아이를 낳았다는 것."
"여자는 독일군이 떠나자마자 머리가 깎이는 치욕 을 당했다. 머리가 깎이는 동안
여자의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옆에 서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
할수 없었던지 여자를 거리로 끌고 다녔다. 프랑스 전역에서 2만명 이상의
여성이 같은 치욕을 당했다. 때로는 아무런 죄가 없는 여성들 도 그렇게 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집단 히스테리의 주동자 는 레지스탕스 운동과는 거리가
먼 젊은 남자들 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은폐 하기
위해 나치의 전매 특허 집단 히스테리를 이용 했다. 나치도 아리안족이
아닌 남자들과 관계를 맺는 모든 독일 여자들의 머리를 깎아 치욕스럽게 했다."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사진 이다. 그런데 머리가 깎여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여성의 눈 에는 이 사진이 어떻게 보일까. 머리를 깎인
것만으로도 치욕스러운데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다니.
수전 손태그 의 말대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 하는 ‘관ㅇㅈ’ 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 이 사진에는 관ㅇㅈ적 요소 가 없지 않다. 그러나 카파의 사진 은 스스로를
폭력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
까지 동원하여, 타인을 향한 집단적 폭력 에 가담하는 모순과 아이러니 를
고통스럽게 응시함으로써.... 관ㅇㅈ 에서 벗어난다. 그러한 응시가 사진의 윤리 다."
그러고는 레지스탕스 광장 반대편에는 나무가 우거진 작은 공원 뒤쪽에 엄청 큰 성당 이
보이는데.... 위용도 대단하려니와 외관도 참으로 멎져 보이지만, 내가 가진 여행
가이드북에서 오려낸 한글 시내 지도에는 유감스럽게도 성당 이름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6월 6일 대로 Ave. du 6 Juin 를 따라 7~8분을 더 걸으니 생 피에르 광장
Pl. St. Pierre 인데, 관광안내소 Office de Tourisme 는 일요일이라 문이 닫혔습니다.
여기 광장 한 켠에도 엄청 큰 성당 이 보이니 생피에르 교회 Eglise St. Pierre
인데..... 이 도시는 교회들이 하도 많고 큰지라 이 정도는 약과 인가 봅니다?
그러고는 광장을 건너 언덕길 을 올라가는데.... 평지인 도시 에서 이 정도 언덕만
해도 적을 방비하기 유리하니..... 오래전 고대 부터 성채 가 세워졌는데
공작성 이라고 불린다니! 그럼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 공작 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공작 성 Chateau Ducal 은 1066년 5천의 기마병을 포함한 1만 5천 병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헤이스팅스 전투 에서 승리해 영국 노르만 왕조 초대왕에 오른 정복왕 Conqueror
윌리엄 1세 가 6년 전인 1060년에 세운 성으로 “정복왕 월리엄성” 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언덕을 오르니 여기서 보는 캉 시내 풍경 도 멋진데... 육중하고 견고하게
생긴 성문을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가니 엄청 넓은 마당이 나옵니다.
큰 마당에 오른쪽은 캉 미술관 Musee des Beaux Arts de Caen 이고, 왼쪽은 노르망디
박물관 Musee de Normandie 인가 봅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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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거운 시간되세요
늘.... 고마운 말씀 입니다!
잘지내시죠
잘보고갑니다
아.... 예! 이제 가을이라는...
여기 성이 참으로 견고합니다!
즐감했습니다
도시 중앙 언덕 위에 고성이 볼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