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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5 - 헤라클레이온 항구에서 베네치아 요새를 구경하고 기로스에 맥주를!
2024년 4월 27일 미코노스에서 비행기로 아테네를 거쳐 크레타섬의 헤라클레이온 Heraklion
에 도착해서는 시내 버스를 타고 엘레프타리아스 광장에 내려 명품거리를 걸어서
베니젤로 광장 Plateria Venizelou 에 도착해 엘 그레코 호텔 El Greco Hotel 에 체크인을 합니다.
여기 베니젤로 광장의 모로시니 분수대 Morosini Fountain 는 주민들에게 매일 식수
를 공급해 주었으니, 라이온스 광장(Lions Square) 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400년전 중앙 수조를 지탱하는 네 마리 사자의 입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 입니다.
성 마르크 바실리카 Saint Mark's Basillica 와 시청 City Hall 에 성 티투스 교회 Church
of Saint Titus 를 보고 8월 25일 거리 25th Avgoa Stou 를 북쪽으로 걸어
엘 그레코 공원 El Greco Park 을 지나 언덕길을 내려가니 헤라클레이온 항구가 나타납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방파제에는 육중하고 견고해 보이는 베네치아 성채 Koules Ventian Fortress & Walls
가 보이는데... 헤라클리온은 중세풍 성곽에 둘러쌓여 요새화 되었으니 성채
1층에 군인 숙소와 식량, 무기고로 사용된 26개 방이 있고 2층에 성 마르코의 상징인 사자상이 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 요새 ‘Koules Fortress’ 는 “도시를 수호하는 사자의 이빨” 로 불리는데 16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운 요새로 도시를 수호하는 방어벽이자 힘과 번영의 상징이니 2유로를
내고 베네치아 요새로 들어가는데, 베네치아가 이 섬을 수중에 넣은후 요새를 쌓고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의 서진으로 부터 유럽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유적들이니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작은 도시국가인 베네치아가 어떻게 해서 이 머나먼 에게해 남쪽의 섬인 크레타를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데.... 중세 시대에 동방무역에 나선 도시국가들은
제노바와 피사에 아말피와 베네치아 및 크로아티아 서남부에 라구사라 불리웠던 두브로브니크 입니다.
세월이 흘러 세 도시를 물리치고 살아 남은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십자군 전쟁의 와중에서도
동방무역 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상대방 배를 공격해 선원들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는 해적질을 하면서 네차례나 큰 전쟁을 벌였으니 20회에 달하는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1198년에 프랑스왕 필립 오귀스트의 조카로 상파뉴 백작인 22세의 청년 티보 성주가 상파
뉴에서 마상 창시합을 주관하니....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가 보낸 수도승
이 나타나서는 성지 예루살렘 수복을 위한 십자군을 제창하니 제4차 십자군이 태동합니다.
베네치아에 집결한 4차 십자군의 숫자는 예정 인원의 3분지 1에 불과하니 “재정문제” 가 발생하자
베네치아의 단돌로는 십자군이 배 운임을 지불하지 못하는 것을 약점으로 잡아 헝가리
도시 자라를 공격하고 이어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여 전리품을 나눕니다.
몽펠라토 후작, 플랑드르 백작, 블루아 백작, 생폴 백작등 십자군 지도부는 비잔틴 함락 후에는 왕과
귀족이 되어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영토를 서로 나누어 가졌으니.... 콘스탄티노플에는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6세의 라틴 제국, 몬페라토 변경백 보니파시오의 테살로니카 왕국에
프랑스 기사 오토 드 라 로슈의 아테네공국과 조프루아 드 빌라르두앵이세운 아카이아 공국 입니다.
이 추악한 전쟁에서 교황과 동로마 라는 두 기독교 세력을 제치고 큰 이익을 본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해의 여왕' 정도가 아니라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으니 제 4차 십자군 전쟁은 베네치아 공화국이 해상제국으로 변모한 기점이 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제노바의 갈라타 조계와 같은 많은 요지를
분배받았으니 아드리아 해에 접한 코르푸, 케팔로니아 섬 등은
물론이고 에게해에 있는 크레타를 필두로 하는 수많은 섬들이 베네치아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 외 육지의 주요한 항구 및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는 갈리오폴리스 까지 획득해 흑해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고 동로마 장인들을 납치해 유리 등 기술집약적 산업까지 국산화하는데 성공했으니 이후 동로마
와 베네치아는 원수관계가 되었고, 재건되었다가 멸망할 때까지 동로마의 반베네치아 정서는 굳건했습니다.
도박에 가까운 모험 끝에 가장 큰 이득을 보아 '베네치아 공화국' 이자 '달마티아의 공작' 이라는 칭호는 물론,
'로마 제국의 3/8의 주인' 이라는 칭호까지 획득하게 되었으니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기까지 300년간
동지중해의 독점적 지배권을 누렸으며, 1669년의 크레타 함락 전까지 해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전후처리 과정에서 황제로 선출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는데 당시 황제 추대
위원회 위원 12명 중 6명이 베네치아인이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꽤 높았다고 합니다.
이밖에 단돌로의 후임 도제 피에트로 지아니는 아예 수도를 베네치아에서 콘스탄티노플
로 이전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니 사실상 로마제국을 계승해 보자는
견해였으나 다른 세력의 견제가 우려되는등 현실적인 고려로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베네치아는 여기 크레타섬에 헤라클레이온과 하니아 그리고 레팀논에 견고한
성채를 쌓고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가 서진하는 것을 온 몸으로 막아내어
유럽이 이슬람화 하는 것을 막아냈으니 유럽 기독교 세계의 은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1645년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 공화국령 크레타 섬을 침공하여 25년간이나 전쟁을 하게 되는데.....
오스만 제국이 해상에서 벌인 최후의 대규모 정복 전쟁으로, 이 전쟁으로 오스만은
크레타를 정복해 1898년까지 2백여년간 통치을 하게 되니 지중해 동부는 이슬람의 바다가 됩니다.
베네치아는 크레타섬을 지키기 위해 막대한 국부를 퍼부었음에도 지난 400여년 동안 동지중해의
여왕으로 있게해 준 보루였던 크레타를 잃으면서 위신상으로도 재정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백년 동안 농업, 수공업, 관광업 등으로 유지하다가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1644년 9월 28일, 이슬람의 성지 메카를 순례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코스탄티니예로
돌아오던 오스만 선단이 로도스섬 근해에서 구호기사단(몰타 기사단) 함대에 의해 나포되었습니다.
선단을 턴 몰타섬의 요한 기사단은 순례객들을 대부분 죽이고 남성 350여명과 여성 30여명은
노예로 팔아 치우기 위해 생포했는데, 본거지인 몰타로 돌아가는 길에 식수 확보와 구출한
그리스인 노잡이 48명을 풀어주기 위해 베네치아령 크레타 섬 남부의 한적한 마을에 정박합니다.
오스만 제국과 불안한 평화를 유지해 나가던 베네치아 당국은 20일이 지나서야 이
일을 알게 되었고, 당장 기사단 함대를 추방하는데.... 하지만 베네치아 측이
간과했던 사실이 있으니, 기사단이 턴 오스만 선단에 탄 승객들의 정체였습니다.
기사단이 죽인 사람들 중에는 오스만 제국 황궁에서 일하던 전직 흑인 환관장이 있었고, 포로로 잡은 이들 중에는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술탄의 하렘에 속한 여인과 그녀와 술탄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은 오스만의 술탄 이브라힘은 격노해 톱카프 궁전에 각국 대사들을 모아 항의하면서,
베네치아 대사 소란초에게 20일간 기사단 선박들을 눈 감아주고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점은 제국
에 대한 배신이라고 맹비난하면서 베네치아 측에서 기사단과 짜고 일을 꾸민 것이 아니냐고 몰아붙입니다.
혐의에 대해 베네치아는 극구 부정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감시를 소홀히 한 장교를 총살형
에 처하고 술탄에 용서를 구했지만 무슬림으로서, 남자로서 구겨진 그의 자존심은
회복되지 아니했으니..... 이전 부터 크레타섬을 노리던 조정 신료들 또한 이번
사건을 크레타를 정복하기 위한 좋은 명분으로 보고 술탄을 부추겨 주전론에 불을 지핍니다.
1645년 새해가 밝자 1월 3일에 소란초가 시도한 교섭은 재상 세미즈 메흐메트 파샤의 문전박대를 당하며 무산
되었고 오스만 조정은 전쟁을 결정했으니, 명목상의 정벌 대상은 몰타였지만 코스탄티니예의 외교관들
은 이번 전쟁의 목표가 동지중해에 마지막 남은 '베네치아의 항공모함' 크레타 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니예의 살벌한 기류를 감지한 베네치아령 크레타 총독 안드레아 코르나로는 기존 성채를 시찰,
보수하고 그리스 용병을 각지에 배치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으며 베네치아 본국은 1월
4일에 식량과 엔지니어, 2천 5백의 군대를 크레타로 보냈고 2월에는 10만 두카트의 자금을 보내줍니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10만 두카트는 큰 원군이라! 3월이 지나 출정식 당일까지도 오스만 투르크
조정의 선전포고 대상은 그대로 몰타 였는데.... 4월 30일에 5만 대군을 이동시킬 80척의
갤리선단과 250척의 수송선이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의 항구를 떠나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납니다.
에게해를 지나며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령 티노스 섬에 정박하여 물과 식량을 공급받았고,
6월 23일에 크레타 북해안에 나타났는데.... 함대는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쪽의 나바리노(180여년후 해전에서 대패를 겪는 곳. 현재 필로스) 에 정박 합니다.
나바리노는 그리스에서 몰타로 향하는 항구였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베네치아 당국은 오스만 조정이 진심으로
몰타를 공격한다고 희망을 품었지만 터키 함대는 항구를 나오자마자 왔던 길을 되돌아가 크레타 방면인
동남쪽으로 향하였고, 3일 후인 6월 23일에는 섬의 3대 요새 중 하나인 하니아 (Χανιά) 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크레타섬의 서부 하니아(Chania) 는 예나 지금이나 칸디아(이라클리오, 헤라클레이온)에 이은 크레타 제2의
도시였고 베네치아는 하니아 항구를 요새화하고 부두의 수만 14개에 이르는 조선소를 세웠는데,
오스만 함대는 '베네치아 항' 이라 불리는 하니아 주 항구에서 서쪽으로 20여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합니다.
해안을 방어하던 크레타 민병대는 도주하였고 도시를 향해 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던 오스만 군대는 하니아를 5km 앞두고 행군을 멈추었으니....
썰물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섬에 조성된 산 테오도로 요새가 거슬렸던 것입니다.
간조가 되자 2천명의 오스만 소총부대는 60명의 수비대가 배치된 작은 요새를 공격
하였는데, 함락이 임박하지자 수비대장 플라시오 줄리아니는 화약고에
불을 붙였으니.... 성벽을 기어오르던 5백여명의 오스만 병사들과 함께 자폭합니다.
장애물을 제거한 오스만 군대는 하니아를 포위하였고 56일에 이르는 공성전이 시작되었는데, 나바제로
가 지휘하는 1천에 이르는 수비대는 주민들의 협력을 얻어 성공적으로 모든 공격을
격퇴해내었하지만..... 땅굴을 파고 화약을 채워 폭파시키는 전술에 성벽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하니아가 버텨내며 벌어준 2개월 시간동안 베네치아 당국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영국,
네덜란드등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독일에서 여러나라가 참여해 가톨릭과 개신교
세력간에 벌어진 30년 종교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라....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측은 교황청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 스페인과 벨기에 및 독일의 가톨릭 제후이고
개신교측은 독일 개신교도 제후와 덴마크 및 스웨덴군인데 영국이 군자금을 댔고 프랑스는 가톨릭이니
국내에서는 개신교도 위그노들을 사탄이라며 잡아죽이면서 독일에 군대를 파견해 엉뚱하게도 개신교
편에 서서 가톨릭교도들을 마귀라고 죽이니.... 신성로마제국 세력이 커지면 포위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만이 10만 두카트를 보내주었고 오히려 베네치아 공화국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교황청이
5척에 몰타 기사단, 나폴리 왕국과 토스카나 대공국이 지원 병력과 소수의 전함을 보내주었지만 지원군이
출항할 즈음인 8월 22일, 식량과 탄약이 고갈된 하니아는 수비대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합니다.
두달간 1만명의 희생을 치렀지만 오스만 제국은 크레타에 확고한 거점을 얻었는데, 9월에 그리스 서남부
자킨토스(잔테) 섬에 집결한 지원 함대는 폭풍으로 오스만 함대가 흩어진 틈을 타서 하니아를
수복하려 하였으나 교황의 조카이자 사령관인 니콜로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실패하고 섬에 묶여버립니다.
1645년 10월 1일에 이르러서야 베네치아 해군이 합류하여 9 0여척이 모인 연합군은
하니아 수복에 나섰으나 지체된 한 달간 준비를 완료한 오스만 측의 방어에
막혀 격퇴되었고, 연합군은 서로를 탓하다가 와해되어 각자의 국가로 돌아가 버립니다.
하니아를 함락한 오스만 군대는 동쪽으로 진군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리스의 해군 기지로 쓰이는
수다의 육지 항구를 손에 넣었는데, 오스만 군대가 다가오자 함대 사령관 카펠로가 절반의
함대와 잔테 섬으로 도주했지만.... 만의 중간에 위치한 섬에 세워진 요새에는 40척의
갤리선과 4척의 갈레아차, 10척의 범선이 건재해 해군이 약한 오스만 제국은 함락하지 못합니다.
이후로도 수다 요새와 섬 동단의 스피나롱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버티게 되는데.....
한편, 여전히 서유럽 측의 지원을 못받은채로 크레타를 방어하던 베네치아 측은
해가 바뀌어 1646년 초엽이 되자마자 80세의 도제 프란치스코가 사망하는 악재를 맞습니다.
73세의 나이로 신임 국가원수가 된 조반니 카펠로가 취임하는 것과 동시에 베네치아 수뇌부는 오스만 제국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크레타에 주둔한 3만이 넘는 오스만 군대를 말려죽이기로 하고 1646년 3월 토마스
모로시니가 이끄는 22척의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의 테네도스섬을 공격해 해협을 봉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5월에 오스만 측의 해군 제독 코자 무사 파샤가 80척의 전함을 이끌고 맞섰지만 패배
하였으나.... 이후 코자 무사 파샤는 풍향이 바뀌길 기다렸고 6월 초에 강한 북풍이 불자
그대로 함대를 돌격시켜 봉쇄를 뚫고 크레타에 보급품과 군대를 내려놓는 데에 성공합니다.
베네치아의 도제 카펠로는 난국을 타개하고자 그해 8월, 하니아에 정박해 있던 오스만 함대를 공격해 보기도
했으나 격퇴당하였고, 여름부터 포위되어 있던 크레타 제3의 도시 레티모(레팀논)를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
했으며 결국 1646년 10월 20일에 함락되었고 요새화 된 시타델은 한달을 더 버티다가 11월 13일에 항복합니다.
1646년 말 ~ 1647년 초의 겨울에는 역병이 돌아 양측 모두가 피해를 입었는데, 비슷한 수가
죽었지만 증원이 힘든 베네치아 측에게 더 큰 타격이었으며 게다가 1647년 1월,
베네치아 해군 제독 토마스 모로시니가 오스만 함대 기습을 받아 전사하는 피해도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기세가 꺾인 오스만 군대는 서두르지 않았으니.... 1647년에는 6월에 수십명의 오스만 분견대가
지나가던 베네치아 측 토스카나 용병대 천여명을 격파한 일을 제외하곤 기록될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칸디아(헤라클레아온) 를 제외한 베네치아령 요새들은 더디고 출혈이 컸지만 하나
하나 함락되었고 1648년 4월에 이르면 칸디아 자체와 섬 몇개를 제외한 모든 크레타섬
요새들이 오스만 사령관 가지 휘세인 파샤의 수중에 있었으며 1648년에 이르면
전란과 역병으로 크레타 인구의 40% 가 사라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전쟁은 계속 이어집니다.
22년간 이어진 역사상 가장 길었던 칸디아(이리클리오, 헤라클레이온) 공성전에 대해서는 유명한 말이 있으니,
“저건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25년간 죽은 베네치아 인들이 되살아나 유령이 되어 싸우는 것이다.”
1648년 초여름, 4만 대군이 6천 수비대가 지키는 칸디아(이라클리온)를 포위하였는데 베네치아 측은 술탄
이브라힘 암살까지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648년 8월 모후 쾨셈 술탄의 쿠데타로 이브라힘은 폐위, 살해
되지만 새 술탄 메흐메트 4세와 실권자 쾨셈 술탄은 전쟁을 중간에 어정쩡하게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측은 달마티아를 통한 베네치아 본국에 대한 육로 공격까지 시도하였으나 그역시 격퇴
되었고 오히려 성 몇개를 빼앗겼으며 그리고 1653년과 1656년의 종전 시도는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베네치아 해군은 크레타에 군량 및 지원군을 보내는 오스만 보급 함대와 세 차례 (1651, 55, 56년) 충돌
하여 모두 승리하였으나 오스만 주둔군은 스스로 농사를 짓고 원주민들과 잘 지내며 양식을
보급받아 버텨 내고 있었으니, 칸디아를 제외한 섬 대부분은 오스만 행정력 하에 놓였고,
오스만 관료들은 관용적인 통치를 하며 앞으로 200년 넘게 이어질 크레타 지배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과 피레네 조약으로 유럽에 평화가 회복되자 10년 넘게 이교도와 싸우는 칸디아를 돕고자
프랑스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귀족 자제들이 의용군이 되어 도우러 왔지만 그들의 도움은 제한적이었고,
대부분은 불편한 숙식 환경과 지지부진한 공성전에 지쳐서 1년도 못되어 돌아가는 자가 부지기수 였습니다.
1667년, 20년을 끌어온 공성전을 끝내기 위해 5월 ~ 11월간 오스만 군대는 32차례에 걸친
총공격을 해왔으니 이에 수비군 측은 4천여명, 공격 측은 2만명이 희생되었는데
하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고, 겨울 휴식을 지나 1668년 봄이 되자 다시 격전이 벌어집니다.
프랑스에서 온 5백 기사들은 12월 16일에 출진했다가 절반을 잃고 격퇴되었고 그해 한 해동안 베네치아는
440만 두카토에 달하는 거금을 투입하고 나서야 칸디아를 지켜낼 수 있었으니.... “지금 우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요새를, 이슬람권의 그 어떤 술탄도 가지지 못할 소중한 진주를 내줄 찰나에 있다”
1669년 가을, 프랑스 등지에서 온 의용군이 본국으로 떠나자 25년간 칸디아 수비를 맡아온
프란체스코 모로시니는 회의를 통해 항복을 결정하였으니... 1669년 9월 6일,
베네치아 공화국은 도시를 포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크레타 종주권을 인정하였습니다.
다만 수다, 스피나롱가, 그람부사 등 크레타 주변에 떠 있는 3개의 요새화된 섬은 연공금 지불을
대가로 여전히 베네치아 수중에 남았으며 달마티아에서 베네치아군이 점령한 지역은
베네치아령으로 확정되었고 배상금은 없는 것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칸디아
수비군은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안전히 챙겨 떠날 수 있다는 술탄의 명령이 내려집니다.
오스만 측은 크레타의 민중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칸디아 포위 때에 이미 크레타의 대주교를
임명하고 토지나 종교, 언어 등 개개인의 삶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으니 많은
원주민들이 무슬림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스어를 사용하였고 동시에 그리스
정교 역시 존중받아 18세기 기준으로 크레타는 그리스 정교가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었습니다.
대놓고 간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니 크레타의 문화는 점차 튀르크화
되었으며, 그로 인해 오늘날 크레타 문화는 그리스 본토 보다는 터키 서부 및 키프로스와 더 비슷해지게
되었으니 굳이 그리스 내에서 크레타와 문화가 비슷한 곳을 찾자면 서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가 있습니다.
두 지역도 크레타와 더불어 그리스 본토에 비해 터키 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곳인데..... 이후 크레타는 1898년
오스만의 자치국인 크레타 자치국이 들어설 때까지 오스만의 지배를 받았으며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그리스가 크레타를 합병하고 1913년 발칸 전쟁의 결과 크레타는 그리스의 영토로 확정됩니다.
칸디아 공방전 당시 서유럽 의용군들이 온 것은 2차 빈 포위 때의 신성동맹과 함께 마지막 십자군으로도 평가
받으며 1688년에 해군 원수이자 베네치아의 도제가 된 모로시니는 대튀르크 전쟁에서 신성동맹군의 한 축
이 되어 오스만 제국에 일격을 날렸고 베네치아는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달마티아와 모레아 반도를 획득합니다.
그러나 18세기 초에 베네치아는 오스만에게 크레타의 마지막 베네치아령 요새인 수다와 그람부사,
스피나롱가, 모레아를 포함해 에게해의 마지막 거점이던 미코노스 섬과 티노스까지 빼앗기며
이후 여세를 몰아 그리스 서북부에 코르푸(케르키라) 까지 공격해 온 오스만 투르크군은
막을 수 있었고, 이것이 3세기 동안 지중해를 진동시키며 이어져 온 양국간의 마지막 충돌이었습니다.
그러고는 8월 25일 거리 25th Avgoa Stou 를 되짚어 되돌아오면서 엘 그레코 공원 El Greco Park을 지나고
베니젤로 광장 Plateria Venizelou 에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라 좀 덜 붐비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갑니다.
"돼지 꼬치 구이" 인 수블라키와 더불어 그리스의 대표적인 율류 요리인 기로스를 시키는데.... 기로스는
돼지고기와 감자 튀김을 쓴다는 점에서 양고기 꼬치구이인 케밥과 다르니 빵에 넣어 야채와 함께
둘둘 만 기로파타와 접시에 담아서 나오는 두 종류가 있는데 우린 2가지에 생맥주를 시켜 적녁을 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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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고맙습니다.
이제 완연한 가을인가 합니다.
즐감해요
지중해는 언제 가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