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ㅡ 청천강 전투
중국군 인해전술(1950년)
요약 ~~~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그날,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며 전쟁에 개입했다. 유엔군은 중국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청천강에서 중국군으로부터 크게 기습을 당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맥아더 원수의 치명적 오점이 되었다.
한국군과 유엔군, 38선 이북 공산군을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문제만 남겨두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10월경 한국전쟁 상황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여세를 몰아 북한 지역 깊숙이 청천강 선까지 진격해 들어감으로써 그해 말까지는 전쟁을 끝내고 한국인들의 소원인 남북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과 낙동강에서부터 진격한 제8군은 38선 이남의 적을 거의 섬멸하고, 이제 그들에게는 38선 이북에 대한 군사작전을 어떻게 펼쳐서 김일성의 공산군을 완전히 제거하느냐는 문제만 남게 되었다.
미국, 38선 이북에서의 작전에 신중한 행동을 취하다
한국정부는 일찍부터 38선은 적 남침으로 말미암아 이미 무너졌으므로 여건이 성숙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것을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나, 미국정부는 38선 돌파에 대해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에서 성공한 후 미국정부는 작전을 38선 이북으로 확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다만 중요한 몇 가지 사항을 지키면서 작전을 벌일 것을 맥아더 장군에게 당부했다.
첫째, 소련군이나 중국군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만 북진하고 여하한 경우에도 한만 국경선 또는 소련과의 국경선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둘째, 국경 근처에서는 한국군으로 하여금 북한군 잔적을 소탕하도록 한다.
셋째, 군사작전 종료 후 한국의 정치적 통일문제는 유엔의 조치를 기다려야 한다.
맥아더, 복잡한 상륙작전 계획으로 시간을 허비하다
맥아더는 제8군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도록 하고, 제10군단은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하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원산 상륙은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여 10일에는 원산을 점령함으로써 그 의미를 잃고 말았다. 이는 복잡한 상륙작전보다는 모든 부대가 38선에서부터 진격했더라면 훨씬 좋은 결과에 도달했으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다
한편 10월 19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바로 그날 처음으로 중국군이 압록강을 은밀히 건너오기 시작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으로 변했다. 중국이 전쟁에 개입한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들은 북한 땅에 미국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그들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장차 소련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스탈린으로부터의 참전 요청을 수락해야만 했다. 스탈린은 소련이 직접 나서게 되면 미 · 소 간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을 염려하여 중국이 대신하여 북한을 지원해주기를 원했었다.
미국, 자만한 가운데 허술한 정보체제를 가지고 청천강에서 중국군과 맞닥뜨리다
미국은 중국 당국이 경고를 보냈음에도 단순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이 감히 도전하지 못하리라는 깊은 자만심과 방심에 빠져 있다가 청천강에서 중국군과 충돌했다. 미국 정보부서는 중국군이 한반도에 침투한 지 약 열흘이 지나는 동안에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할 정도로 정보체제가 허술했다.
유엔군, 숨어 있던 중국군의 야간 기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다
10월 25일경 중국군과 최초 충돌한 뒤에도 유엔군은 적 규모와 기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격적 공세를 준비하기 위하여 은밀한 곳으로 자취를 감춘 중국군에 대하여 유엔군은 적이 겁먹고 전투를 회피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리하여 11월 24일에는 국경선을 향한 총공격을 재개했다.
그러나 25일 밤 청천강 북방과 묘향산 지역 일대에 숨어 있던 중국군으로부터 크게 기습을 당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중국군은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어대고 야수처럼 괴성을 지르며 쇄도해왔다. 야간에 방어하는 측의 불안감을 최대로 증폭시키는 고도의 심리전과 함께 인해전술을 사용한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은 말 그대로 아닌 밤중 홍두깨식 습격을 당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청천강 전투의 패배로 유엔군과 국군, 사기를 잃고 평택까지 물러서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중국군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국군 제2군단으로서, 예하 3개 사단이 거의 모든 진지에서 와해되었다. 미 제2사단도 군우리에서 중국군 포위망에 걸려들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패배로 인한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11월 말부터는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무조건 철수하고 보자는 심리에 빠졌으며, 12월 15일경에는 모두 38선 이남으로 철수했다.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그들은 과연 38선마저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자신을 잃었다. 1951년 신정 때는 다시 중국군 공세를 당하여 서울을 포기하고 평택까지 물러섰다. 그 후 한참 지난 다음에야 그들은 충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간신히 38선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맥아더, 청천강 전투의 패배와 반성하지 않는 태도로 해임 당하다
청천강 전투에서 패배는 미국의 명장 맥아더 원수에게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그의 명예스러운 50년 군대생활은 사령관직 해임이라는 불명예로 끝을 보게 되었다. 무려 30만 명이 넘는 적의 침투 사실을 모르고 무리한 작전을 취하다가 기습을 당했고, 또한 전투다운 전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철수만 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더욱이 패배 후에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노골적으로 본국정부 정책을 비판하기만 한 것은 최고위 군인답지 않은 행위로서, 이듬해 4월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해임을 당하는 모욕을 입게 되었다.
맥아더의 후임 사령관 리지웨이, 전투력을 회복하여 중국군을 잘 막아내다
맥아더 이후 다행히도 한국전쟁에서는 새로운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훌륭한 지휘 하에 유엔군과 국군은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을 극복하고 전투력을 회복하여 중국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첫댓글 종갑형,
청천강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내 친구 허광웅이 번역한 책을 읽은적이 있어서 잘 알고 있어요.
정말 맥아더에게 큰 오점을 남겼던 전사지요.
출장 가던중에 인천공항에서 읽습니다.
9일날 파기스탄으로 出場간다고 했는데ㅡ지금,가고 있군요~~~
역마살이 끼였다고 自慰하는 桐谷ㅡ그 역마살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부러운지를 桐谷은 모를거요
~~~~~~~~~ 鵬程萬里 ~~~~~~~~
인디언 掃蕩戰에서부터 不敗의 神話를 일구어온 USA의 戰史~~~ 단, 두 번의 敗北ㅡ6`25와 越南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