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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오류 원문보기 글쓴이: 상감마마
하루를 시작하며...
그동안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를 찾아 그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예술 작품들 속에 숨겨진 뜻을 찾아 사색하며 삶의 내면을 살찌우고자 노력을 해왔었다. 그리곤 그것들이 잊혀질까 욕심내어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우리 역사의 아픈 근대사적 시각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그것은 때론 답답했으며 무기력한 사회 정치적 상황을 애써 피하기 위한, 진정으로 숨김없는 나의 현실적 소망을 과거란 돌이킬 수 없는 답답한 역사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픈 역사, 기막힌 사연들, 꺾여버린 개혁과 진실로 숨겨진 역사에 감추어진 기구한 사건들이 우리의 진실된 근대사라는 굳어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란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어떤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된 조선후기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사회·정치사적 구조와 늘 대물림 되는 순종의 역사 속에서 변화의 소용돌이 중심에 선 하층민들의 삶의 언저리에 애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며, 비참하고 처참하고 비루한 오욕의 역사라 할지라도 우리의 것이란 사실이다. 비난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비판에 지혜를 찾고 새롭게 정립하며 잘못된 역사적 인식을 바로 잡아, 양지가 그늘이 되고 그늘이 양지가 되는 오류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그것이다. 우리 민초들의 생각과 사상들을, 또한 그들이 살아왔던 구석진 삶의 모습들을 찾아보는 일이 그것으로 인해 미래를 위한 지혜를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자면 봉건적 모순과 반봉건 반제운동이었으며, 일본침략에 항거한 주권적 자유의 쟁취를 위한 항쟁, 조선 후기 수탈에 저항했던 농민항쟁의 역사를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수많은 자생적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나 그 중 1894년 정읍에서 도화선이 되어 전국으로 번져간 갑오년 동학농민항쟁의 그 역사적 현장을 찾아보는 일 또한 나에게 있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결코 가볍지 않은 길을 그렇게 되새기며 답사란 명목으로 정읍을 향해 가는 길이다. 마음과 달리 초봄의 햇살은 따스했다. 부안에서 향하는 길이라 시대적 사건의 순서를 따라 답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 했다. 때문에 부안에서 정읍 초입으로 동선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갑오농민항쟁 당시 농민군이 집결해 함성과 함께 결의를 다졌던 백산과,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의 현장인 물세 부당징수로 인해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던 만석보터, 그리고 고부봉기 함성의 현장 말목장터, 녹두장군 전봉준의 옛집을 찾아보고, 그러한 역사적 아픔을 딛고서 여전한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는 은선리 삼층석탑을 양념처럼 찾아 볼 생각이다. 그리고 고부관아터, 황토재 전적비와 더불어 우리 옛 민초들의 소박한 민간신앙의 원백암 장승과 남근석을 차례로 둘러볼 예정이다. 농민항쟁의 역사적 현장과 우리 민초들의 소박한 신앙, 때론 꺼질듯 한 한숨까지도 녹여내는 민간신앙까지 연결시켜 찾아 내면과 함께 오락가락 할 생각을 하니 알 수 없는 묘한 흥분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전라북도 정읍은 지리적으로 전주와 광주의 중간적 지리에 위치해 있다. 때문에 호남과 서해안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예부터 기름지고 드넓은 동진평야를 두고 있다. 그만큼 광활하고 기름진 땅에서 소출이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하니 역사적으로 수탈의 중심에 서 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조선후기 사회에 이곳 관리로 부임되기를 줄을 대어 기다릴 정도였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 싫어서 중앙의 세도가에게 뇌물을 써서 수탈을 나누었으니 이곳의 민초들의 서러움이야 상상이 될 법하다. 어딜 가나 붉은 황토밭이 넓게 펼쳐지면서 옛날 그 서러웠던 한의 색상처럼 마음 또한 그렇게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김지하의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이토록 붉게 내 뱉은 “황톳길”을 기억해 낸다. 어쩌면 이리도 역사적 사실을 함께 한 듯 표현할 수 있을까? 시기와 존경과 질투를 섞었던 부러운 기억이었다.
정읍이란 이정표를 반갑게 지나친다. 백제 때는 정촌井村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정읍으로 불리게 되었다는데 땅을 한 자만 파도 물을 길어 올릴 수 있을 만큼 지하수가 넉넉하기 때문에 고을 이름에 우물정井자가 들어간다.
정읍하면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가요이며,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가요 중 가장 오래 된 것인 정읍사井邑詞가 있다. 백제여인의 애절한 마음씨가 담겨있으며,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동안 돌아오지 않은 남편에 대한 의구심을 감추지 않은 시샘의 마음을 절곡하여 노래한 여인을 상상하며 내가 남편이 된 듯 미소를 짓는다. 장삿길에 나선남편을 기다리며, 자꾸만 고개 드는 의구심을 ‘달이여, 높이 돋아 멀리 비춰주세요.’ 라고 노래한다. 그리워 기다리던 여인은 외롭고 그리움의 애잔함에 해학의 아름다움으로 달래고 반전과 익살 섞인 애정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있다. 아마 일상의 삶에 희망을 자근자근 담아 노래하였던 그런 여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근대사 농민항쟁의 역사에 함성의 소리와 겹쳐지면서 스스로 사치의 허영에 정리되지 않는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각설하고, 19세기 후반 들어 조선사회는 농민항쟁이 활발했던 사회였다. 잠시 척 하자면, 농민항쟁은 당시 사회적 모순에서부터 시작된다. 농업이 발달하고, 상품화폐와 상업이 발달하고, 수취제도가 변하고, 신분제도가 변동하고, 민란이 시작된다. 그리고 늘 혼란은 각성과 성숙을 위한 선전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개혁과 파괴와 선동이 주도한다. 그 선동은 정치권력의 형태든, 사상과 이념의 형태든, 신앙의 형태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언제고 어느 글에서 메모해 놓았던 글이다.
잠시 답사를 떠나기 전 정리해 놓았던 자료들을 살펴보면, 18세기부터 조선의 농촌사회는 이양법 실시로 소출이 많아지고 상품생산 경제가 발전되면서 관작 농민이 출연하며, 봉건사회의 해체징후가 사회전반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부세문제가 농민들에게 집중되면서 중간수탈이 늘어나고 이것이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바로 삼정문란 중 환곡문제가 농민들의 요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수령이나 서리, 토호배들의 사적 수탈 등 봉건적 수탈에 대한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인 저항으로 나타난다. 1862년 전국적 농민항쟁이 2월 단성, 진주를 시작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산되며 70여개 고을에서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 후로도 전국에서 크고 작은 항쟁이 일어난다. 즉, 19세기는 민란의 시대였다. 19세기 농촌 사회는 그리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어느 시기든 농민들의 삶은 어려웠다. 그런데 조선후기부터 토지를 둘러싼 불평등 부세賦稅의 불균등이 지속되면서 농민들은 몰락해 갔다. 그러나 일부 유력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권시대의 부패한 조선왕조는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수탈 속에서 농민들은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지배과정과 경제변동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성장해 갔다. 그들에게 있어서 저항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 농민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자각하기 시작했고, 불균등하고 불편등한 사회에 대해 시정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억울한 농민들은 관가에 집단소송을 제기하고, 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횃불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수백 명의 농민들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리거나 남산에서 시위를 벌이고, 왕에게 고을의 폐단을 호소하며 해결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때로는 농기구를 들고 관가로 뛰어들어 수령을 위협하고 이서들을 공격하는 일들도 벌어졌다. 일찍이 정약용이 “농민들이 항상 난을 생각하고 있음”을 걱정한 것이 현실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국내정세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다. 19세기부터 풍양조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자행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소수 문벌관료집단이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가운데 통치체제는 완전히 이완되게 된다. 어느 시기든지 발 빠르게 움직이는 부류들이 있다. 이것을 놓칠세라 이에 편승한 봉건지배세력들은 착취의 강도와 범위를 더욱 넓혀갔으며. 이에 따라 수취체계는 극도로 문란해지고 국가 재정은 궁핍해 졌으며, 농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져갈 뿐이었다.
그러면 조선을 둘러싼 대외정세는 어떠했는가. 18세기 후반 제국주의 손길은 조선에까지 뻗치게 된다. 원자재의 공급지로서, 또한 선진문물이라 대변되는 상품의 시장을 찾아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으며,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를 시작으로 군사적 약탈도 마다하지 않았다. 1876년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게 된다. 이후 미국, 중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과 통상을 맺으며 결국 조선은 열강들의 수탈의 한 가운데 서있게 되는 비운이 시작되었다.
또한 조선후기에 들어와 사회모순의 심화로 인해 조선봉건사회의 유일한 지배이데올로기인 유교적 사유체계에 대해 커다란 반발이 야기되고 있었다. 특히 국문소설·시조·판소리·가면극·민화 등이 농민사이에 향유되었고, 19세기에 들어와 문학작품의 상품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농민들의 반봉건적 의식세계가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의 명분론을 근저에서 부정하는 천주교의 발호와 함께 각종 예언이나 도참의 형식을 취한 미래구원적인 정감록사상과 동학이 크게 성행하였다.(중략) 이 시기 민간신앙은 현실의 모순구조 속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해 전망을 회구하던 농민들의 사회사상이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미래불로 연상되는 미륵신앙과 후천개벽사상까지 맞물려 당시 고단했던 민중의 삶 속에서 동학이라는 큰 물줄기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듯 국내외 정세와 백성들의 사유체계에 까지 변화의 바람에 맞물려 결정적 조선후기 사회의 대표적 농민전쟁으로 일컬어지는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이 이곳 정읍에서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것은 끝이 보이지 않은 기막힌 현실에 대하여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아픈 질곡의 역사현장을 답사란 명목으로 한가하게 찾는 내가 한편으론 죄스럽고, 또 한편으론 교묘하게 진화되어 방법과 여건만 달라졌을 뿐 여전한 수탈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며,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란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가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며, 약자의 편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역사만 가지고 보았을 때 ‘신은 죽었다.’ 그러나 절망하기엔 숨겨진 희망이, 소박한 아름다움이 더 벅차게 세상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나는 늘 염두에 두며 살고 있다. 개혁과 혁명의 차이라던가? 폭력을 동반한 과격한 방법으로 얻은 정의보다, 선한 방법을 통한 점진적으로 얻은 정의를 택하기를 원하는 선한 우리의 민족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많이 춥지요?
그래도 가슴 활짝펴고 건강 챙기시길~!
첫댓글 부산 함 안 오시는교?잘 읽고 갑니다.
교과서보다 더 나은 지식 얻어갑니다. 글씨체가 달라져서 그런지 글에서도 힘을 느낍니다.
초시 님, 내년에는 좋은 일만 있으시길 빕니다.
초시님 덕분에 동학농민 항쟁 현장기 잘 일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그려 자주 올려 줘라 잘 지내는 갑네
만석보터에는 눈부신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겠네요...말목장터의 작은 감나무는 잘 자라고 있던가요??
역사를 모르고 예술을 논할수 없죠~상세하게 올려 주셔서 몰랐던 공부 하고 갑니다~~~
동학의 고장 상주에도 오셨나요?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
초시님 글을 통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 공부를 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의식을 깨우쳐 주는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