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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연원록 (韓氏淵源錄)
고려 개국공신(高麗 開國功臣)태위 한 란 전(太尉 韓 蘭 傳(通史))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유래(由來)는 후조선(後朝鮮)인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기원 (起源)한다. 마한(馬韓)원왕(元王)의 아들 3인이 있어 우평(友平),우량(友諒),우성(友誠)이니, 나라가 쇠(衰)하자 우평은 고구려(高句麗)에 입사(入仕)하여 북원선우씨(北原鮮于氏)가 되고,우량은 신라(新羅)에 입사하여 상당한씨(上黨韓氏)즉 청주한씨가 되었고, 우성 은 백제(百濟)에 입사하여 덕양기씨(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한씨는 모두 기자(箕子)의 후예(後裔)가 되는 것이다. 기자는 은(股)나라의 종실(宗室)로서 주왕(約王)의 숙부(叔父)가 된다.
주왕(約王)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국정(國政)이 쇠퇴함으로 주나라 무왕(周.武王)이 이를 토멸하고 기자(箕子)에게 치국(治國)하는 대도(大道)를 청문하기에 홍범(洪範)을 자문하여 주고, 의리상 신복(臣僕)이 될 수는 없다하여 고조선(古朝鮮)에 망명(亡命)하였는데 때마침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종말을 고하게 되자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후조선(後朝鮮)을 건국하고 예의(禮儀)로 교화(敎化)하여 예의군자국(禮儀君子國)이 되었다고 한다.
청주한씨 시조 한 란(韓 蘭)은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탄생하여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청주 방정리에 무농정(務農亨)을 세우고 농업을 권장하여 마침 내 부농을 이루었는데 이때에 왕건(王建)이 고려를 창업하는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 (開國功臣)이 되었으니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이다.
천지는 신묘(神妙)한 위광(威光)으로 강산의 기이(奇異)함을 만들고 사람은 영웅(英雄)의 자품을 타고나서 나라의 훈업을 이루었으니 한 란(韓 蘭)그의 시호는 위양(威襄·或 威烈)이라 하였다.
속리산맥을 타고 내려와 황간(黃澗)땅에 이르러 우뚝 솟은 지장영봉(芝庄靈峰)은 사위(四圍)를 거느리고 멀리 백리에 뻗쳐 영기(靈氣)가 모였으니 이곳에서 당대의 위인 (偉人)한 란(韓 蘭)이 탄생하셨다.
옛부 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청주 고을에 당도하자 태위공께서 군례(軍禮)를 갖추고 이를 맞이하여 창고에 비축한 곡식을 풀어 10만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고려 왕조의 터전을 다졌으니 참으로 위대한 분이다. 이세(二世)영(潁)의 벼슬이 용호군 교위(龍虎軍 校尉)이고, 삼세(三世)상휴(尙休) 는 별장 동정(別將 同正)이다.
그리고 여음(餘陰)이 후세까지 끼쳐 공경대부(公卿大夫) 가 이어 왔으니 묘(墓)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안장하였고 묘비·신도비(神道碑)와 청주시 방서동의 무농정(務農亭)과 방정(方井)제단비(祭檀碑)는 후손들의 정성 의 표상이다. 특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입구(入口)에는 태위공의 탄생지 유허비l (遺墟碑)가 세워졌으며 공(公)의 묘하(幕下)에는 세일재(歲一齋)가 세워져 있다.
청주 한씨의 연원(淵源)과 유사(遺事)
청주 한씨(상당 한씨)는 마한(馬韓)원왕(元王)의 아들 우량(友諒)이 신라(新羅)로 들어가 탈해왕(脫解王)에 입사(入仕)하여 상당 한씨(上黨 韓氏·청주 한씨)라 하였으니, 우리나라 한씨의 득성기원(得姓起源)이 여기서 계출되었고 그 종원(宗源)이 기자 (箕子)로 부터 유래(由來)하였으므로 한씨는 기자의 후예(後裔)가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이 1200여년으로 종말을 보게되자, 기자(箕子)가 그 뒤를 이어 후 조선을 창건하여 예의(禮儀)로 교화하고 생업(生業)을 계도하여 3천년 후인 오늘에도 예의군자국(禮儀君子國)으로 지칭을 받고 우리가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국기(國基)를 열어 준 성군(聖君)이니 그의 업적(業績)은 비단 동국사서(東國史書) 에만 기전되어 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책(史策)위략(魏略)위지(魏志)에도 소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와같은 기자 이후 마한(馬韓)원왕(元王)까지는 사책(史策)의 명문 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고증될 수 있으나, 원왕의 아들 우량(友諒)이 신라에 망명한 이 후 태위공 이전까지의 계파(系派)나 소목(昭穆)이 미상한 아쉬움이 있다.
삼한세대(三韓世代)까지는 아직 태고(太古)시절이어서 인문(人文)이 미비하였던 관계도 있고 또는 연면(連綿)50세(世)의 왕손(王孫)으로서 망국의 한(恨)을 품은 생활에서 명리(名利) 를 은피(隱避)하여 온 연유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태위공의 태생지 토란리(土蘭里)
토란리는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蘭谷里)의 옛 마을 이름이다. 마한 원왕(馬韓 元王)의 아들 우량(友諒)이 나라를 백제(百濟)에 공탈(攻奪)당한 후 신라에 망명하였으므로 그 주거지가 신라의 영역임은 물론이며 망국의 한(恨)에 깊이 멍든 왕손으로 명리(名利)를 외면하고 안은(安隱)한 생활을 취하기 위하여는 번잡한 국도(國都)경주(慶州)와 거리가 원격하고 고국땅을 버리고 가는 아쉬움에서 접경지대인 황간(黃間)에 거주지를 선택하게 된 것이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 수긍할 수 있으며 여기서 세거(世居)하던 가문에서 태위공이 탄생한 사실이l 황간읍지(黃間邑誌)에 역기 되어 전래되어 왔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된다. 황간읍에서 동북방 2리 지점에 난곡리가 있으니 난곡리 입구에서 좌편으로 수 백보 지점에 탄생구지(誕生舊地)가 보이는데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한정승 태지(韓政承 胎地) 라고 부른다.
태위공이 탄생할 때 부근 산야 일대의 지면(地面)에서 땀(汗)이 흠씬 흘렸다 하여 이 마을을 토한리(土汗里)로 개칭하였다가 현재는 난곡리(蘭谷里)로 부르고 있다. 난곡리 산등을 넘어서 방화동(訪花洞)이라 하는 층층산봉으로 둘러싸인 산곡간(山谷間)에 한정승 초당(草堂)터가 있는데 태위공이 강도(講道)하던 옛 초당유기(草堂遺基) 로서 부근 토사중에는 천년전의 기와쪽이 지금까지 남아 있어 신기하게 볼 수 있다.
이 초당(草堂)과 본택(本宅)과의 중간에 산록(山麓)이 가로 막혀 있으므로 줄을 늘여 연결하고 양쪽 끝에 방울을 달아 두고 손님이나 식사관계로 용무가 있을 때는 줄을 흔들어 신호를 하였다는 전설은 온 마을 사람이 다 알고 있다고 한다.
방정(方井)과 무농정(務農亭)
태위공의 유기(遺基)가 지금의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방정부락이니 속명(俗名)「대머리」로 호칭하며, 이곳이 길지(吉地)로 마을 앞에 암석(岩石)을 쪼아서 우물을 팟는데 용수(用水)에 쓰게하고 뒷편 고원지대에는 무농정(務農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서 기거하면서 미덕(美德)을 수양하여 몸소 농사에 힘을 써서 수만석의 거부(巨富)가 되었다.
이 때 마침 고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행군이 이곳 청주를 통과하게 되어 문전에 당도하는지라, 태위공이 장검출영(杖劍出迎)하였으니 이는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다. 영웅(英雄)을 찾은 의지와 영웅을 맞이하는 의지가 융연상합(融然相合)한지라 배를 주린 군사에게 음식을 주어 군기를 고취시킨 후 드디어 종군하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개국원훈(開國元勳)이 되었다.
이곳 방정리(方井里)는 태위공의 품성(品性)을 선양하고 지략(智略)을 연마하던 곳이요, 고려 창업(高麗創業)에 협찬하는 제1보를 결행 하였던 곳이며 그 여경(餘慶)을 바탕으로 천지만엽(千枝萬葉)으로 번연(緊衍)한 불억자손(不億子孫)의 뿌리가 깊게 밖힌 영지로서 우리 한씨의 발상지(發祥地)이다.
태위공의 유향(遺香)이 영원히 깃들인 이 구기(舊基)를 후손들이 몇 대나 연면전습(連綿傳襲)하여 왔던가. 또 언제부터 주인 없는 폐허(廢墟)로 몇 백 년이나 지내 왔던가. 문경공 수(文敬公·脩)의 유항집중(柳巷集中)에 내 집이 방정리에 있다는 문구가 있으되 몇 대 또는 몇 년간 거주하였다는 고증이 없으며, 조선조 때에 충성공 명회(忠成公·明澮)이 고향을 그리는 뜻에서 아동리에 찾아와서 세업(世業)을 이어 설단치제(設壇致察)하였다는 유록(遺錄)이 있으니 구원(久遠)을 기약 못하고 또다시 폐허가 되어 이제 방정(方井)의 소재도 아는 자손이 없게 되었다.
그 후 조선조 선조(宣祖)38年(1605)에 구암·백겸(久菴·百讓)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도임(到任)즉시 여러 종인들과 탐색하여 설단수비(設壇竪碑)하고 제전(祭典)을 매입하여 매년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할 기틀을 마련한 바 있었는데 그 후 12년이 되는 정사년에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이 서원현감(西原縣監)으로 내임하게 되어 상구(床具)를 마련하여 세일제 봉행(歲一祭 奉行)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장소가 방정리의 인접 부락인 월오리(月午里)로서 지금도 이 비석은 월오동 후산록(後山麓)에 충청북도(忠淸北道)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第169號로 지정(指定)되어 우뚝 서있다.
여명공 진영(여溟公 震英)은 충간공·리(忠簡公·理)의 후예로서 전·판서(前·判書) 이시발(李時發)의 질서(侄壻)가 된다.
광해·무오(光海·戊午:1618)에 이 판서가 장차 은퇴할 택지(宅地)를 구하려고 청주 동남방지대를 순역(巡歷)하다가 한 지점에 당도 하여 주위를 관망하던 중 일폐의한사(一廢衣寒士)가 나타나 이르되 여기는 한태위(韓太尉)의 유허 방정리(遺墟 方井里)인즉 한씨가 아니면 점거(占居)할 수 없다. 하기에 이 판서가 이 사실을 질서인 여명공에게 전하니 여명공은 이 말을 듣고 우리 한씨문중(韓氏門中)의 숙원(宿願)이 이제야 성취됨을 환희불금(歡喜不禁)하여 즉시로 방정리에 찾아가서 황량한 옛터를 다듬어서 가옥을 세우고 방정(方井)을 준설하여 솔권반이(率眷搬移)하니 이것이 흥폐(興廢)가 무상한 세월속에 천년 구기(舊基)방정리(方井里)가 다 시 옛 주인을 찾게 된 연유(緣由)이고, 이후 방정(方井)은 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84호 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농정(務農亭·충청북도 지방 기념물 85호)은 청주시 동북방에 웅자한 상당산을 등 에 지고 남서편으로 전개되는 30여리나 큰“벌”무농평야(務農平野)를 향하여 금반옥 안형(金盤玉案形)으로 유명한 승지(勝地)방정리후록(方井里後麗)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도시개발로 무농정이 자리한 곳이 대머리(大村·대-마을)공원으로 책정되어 문화 공간(文化空間)이 되었다. 태위공께서 이 정자를 창건하고 여기서 기거하면서 농업을 권장하고 제세경륜(濟世經 論)을 연마하던 도장(道場)이니 방정과 아울러 공의 여향(餘香)이 연면히 흐르고 있는 유적인 것이다.
이후 천여 년에 사물의 소장성쇠(消長盛哀)가 무상한 바 방정리가 일시 폐허로 황량한 처지에 있게 되니 무농정의 소재를 더구나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조선조 숙종(關宗)년간(1688)에 방정리 종중의 발기로 전국 종문의 성의를 모아 정 자를 증건하였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인한 관리 소홀로 원형보전(原形保全)이 어렵 게 되자 지난 무진년(1988)에 중앙 종친회가 주관하고 청주시가 고려 건축양식에 따라 원형대로 설계하여 정부보조금과 후손들의 성금으로 재 중건하였다.
참고자료(參考資料) 무열공, 배현경 전(武烈公 裵玄慶 傳)
2 註.왕건태조(王建太祖)가 고려(高麗)를 건국(建國)한 태조(太祖)원년(元年)8월 신 해(辛亥)일에 공(功)을 표시(表示)하며 조(詔)에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좌시(佐時)의 기략(奇略)을 움직여 개세(蓋世)의 높은 공훈(功勳)을 세우는 자는 분모(分茅)와 조토(昨土)를 포상으로 주고 준질(峻秩)과 숭반(崇班)으로 높이는 것은 이것이 백대(百代)의 상전(常典)이요, 천고(千古)의 굉규(宏規)이다.
나는 측미(測微)한 지위(地位)로 나와서 재식(才識)도 용화한데 진실로 군망(群望)을 취하여 극히 홍기(弘基)를 이행하였으니 그 포주(暴主·포악한 군주)를 폐할 때를 당하여 충신의 절(節)을 극진히 하는 자는 마땅히 상뢰(상을 준다는 뜻)를 행하여 훈노 (勳勞)를 추장(推漿)하여야 되는 것이니, 홍유(洪儒,賜名 股悅·남양홍씨 시조), 배현경(裵玄慶·경주배씨 중시조), 신숭겸(申崇謙·평산신씨 시조), 복지겸(卜知謙·면천복씨시조)으로 제1등에 지정하고, 견권(堅權)·능식(能寔)과 권신(權愼)·염상(廉湘)·김낙(金樂·당악김씨 시조), 연주(連珠)·마난(麻煖)·최응(崔凝·개성최씨 원조)·유금필(庾금弼·평산유씨 시조)·김선평(金宣平·안동김씨 시조)·장길(張吉·賜名 貞弼·안동장씨 시조)·류차달(柳車達·문화류씨 시조)· 이도(李桃·전의이씨 시조)·함규(咸規·양근함씨 시조)·김선궁(金宣弓·선산김씨 시조)·왕희순(王希順)·김훤술(金萱述·해평김씨 시조)·윤신달(尹莘達·파평 윤씨 시조)·박윤웅(朴允雄·울산박씨 시조)·왕식염(王式廉)·진평(陳評)·박희술(朴希術)·김홍술(金洪述)·박수경(朴守卿)·홍규(洪規·홍주홍씨 시조)·총일 (總逸)·강궁진(姜弓珍·금천강씨 중시조)·이총언(李총言·벽진이씨 시조)·이능희(李能希·청주이씨 시조)·이견웅(李堅雄·수안이씨 시조)·지중익(池重翼·賜姓 魚重翼·충주어씨 시조)·예언(倪言)·제궁(제弓)·사도귀(思道貴)·최준옹(崔俊邕)·한 란(韓 蘭·청주한씨 시조)·전종회(田宗會)·관준(寬駿)·만세(萬歲)· 조암(趙岩·改名 孟·풍양조씨 시조)·경함필(卿含弼)·영준(英俊)·김길(金吉· 광산김씨 선조)·김철(金哲)·금강(금剛)·곡긍회(曲矜會)·배운태(裵運泰)·국현 (國鉉)·적철(狄鐵)·열평(烈評)·황보선장(皇南善長)·송회(宋會)·석담(昔淡).조창(曺昌)·유지방(柳志防)·황승(黃勝)·홍관(洪瓘)·석광(昔光)·임정(林程).장개(葬凱)·염쾨(廉쾨)등을 제2등으로 지정하고 각각 금은기(金銀器)와 금수기 (金繡綺),피욕(被褥)과 능라(綾羅)와 포백(布帛)과 곡미(穀米)를 차별있게 하사 하였다. 태조 2년 동(冬)10월에 배현경이 글을 올려서 평양(平壞)에 축성(築城)하는 이 점 을 의논하여 태조가 그의 말대로 염 상(廉 湘)과 한 란(韓 蘭)에게 영을 내리고 현지로 가서 독려토록 했는데 때마침 염 상은 중도에서 병이 생겼기에 강윤형(康 允 珩)과 함께 감독하여 완성하였다. 태조 11년(928)에는 태조가 후백제 견 훤(甄 萱)을 정벌하려 남행할 때에 한 란 (韓 蘭)이 방정리(方井里)에서 왕건태조를 환영하고 10만 군사에게 하루동안 휴식 하는데 필요한 모든 주육급식(酒肉給食)을 베풀었으며 후삼국 통합에 혁혁한 공헌 을 하였다. 태조 13년(930)동 12월에는 신흥사(新興寺)를 중수(重修)하고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동서벽에 도화하였는데 그의 수는 29명에 달하였 다고 하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 유(洪 儒·賜名 股悅) 남양 홍씨 시조·배현경(裵玄慶) 경주 배씨 중시조, 유 금 필(庾금弼)무송 유씨 시조, 복지겸(卜知謙) 면천 복씨 시조, 신승겸(申崇謙) 평산 신씨 시조, 김선궁(金宣弓) 선산 김씨 시조, 이총언(李悤言) 벽진 이씨 시조, 김선평(金宣平) 안동 김씨 시조, 권행(權 幸)안동 권씨 시조, 윤신달(尹莘達) 파평 윤씨 시조,최준옹(崔俊邕) 동주 최씨 시조, 문다성(文多省) 남평 문씨 시조, 이능희(李能希) 청주 이씨 시조, 이 도(李 桃) 전의 이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양천 허씨 시조, 구존유(具存裕)능성 구씨 시조, 원극유(元克猷) 원주 원씨 시조, 금용식(琴容式) 봉화 금씨 시조, 김훤술(金萱術) 해평 김씨 시조, 한 란 (韓 蘭) 청주 한씨 시조, 강여청(姜餘淸) 금천강씨 시조, 손긍훈(孫兢訓) 밀양 손씨 시조, 방계홍(房係弘) 남양 방씨 시조, 나총례(羅聰禮) 금천 나씨 시조, 이희목(李希穆) 부평 이씨 시조, 염나명(廉那明) 서원 염씨 시조, 최필달(崔必達) 강릉 최씨 시조, 김홍술(金弘述)의성 김씨 시조 등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연원(淵源)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옛 부터 한국 최고(韓國 最古:가장 오래된)의 성씨(姓氏)로 알려져 왔다.
즉, 그 원류(源流)를 살펴보면 고대 기자조선(古代 箕子朝鮮)이래 마한 왕국(馬韓 王國)을 거처 신라 말기(新羅 末期)에 한지원(韓智原)의 아들 四兄弟분이 있는데 셋째 아들 휘 란(諱 蘭)이 淸州 韓氏의 시조(始祖)이다.
(註:蔓(만),簡(간),英(영) 세분은 居中國으로 되어 있음)
성(姓)이 생긴 근원을 상고함
위략(魏:中國의 옛 나라 略史)에 이르기를 기자(箕子)후 四十餘世에 이르러 준왕 (準王)이 연(燕)나라에서 망명(亡命)하여온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좌우궁인 (左右宮人)을 거느리고 한지(韓地:지금의 全北 益山)에 정착(定着)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더니 그 후에 또 나라가 망하였으나 지금도 한인(韓人)이 그 제사를 받드는 자가 있다고 한다.
위지(魏志:위나라 기록)에 이르기를 기자(箕子)의 후손 중에 우평(友平) 과 우량(友諒)과 우성(友誠)이 있었는데 우평(友平)은 북원(北原:강원도 원주)에 들어가서 선우씨(鮮宇氏)라 칭(稱)하고 우량(友諒)은 그대로 마한 구제(馬韓 舊制)에 따라 상당 한씨(上黨 韓氏)라 칭(稱)하고 우성(友誠)은 평강(平江:강원도 평강)으로 들어가 덕양기씨(德陽奇氏)라 칭(稱)하였다고 전(傳)한다.
즉(卽) 마한말(馬韓末) 원왕(元王)의 아들 三人이 있으니 友平, 友諒, 友誠이다. 나라가 망하니 友平은 고구려에 가서 유리왕조(琉璃王朝)에 벼슬하면서 북원 선우씨(北原 鮮宇氏)가 되고 友諒은 신라(新羅)에 가서 탈해왕조(脫解王朝)에 벼슬하면서 상당 한씨 (上黨韓氏)가 되고 友誠은 백제(百濟)로 가서 온조왕조(溫祚王朝)에 벼슬하면서 덕양기씨(德陽 奇氏)가 되었다고 운운(云云:이른다)하였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조선조 인조때의 문신)는 世世로 끊임없이 혁혁(赫赫)한 업적(業蹟)을 이어오면서 오래갈수록 더욱 번창(緊昌)한 가문(家門)은 바로 청주 한씨 (淸州 韓氏)가 제일(第一)이라고 극찬하였다.
청음 김상현(淸陰 金尙憲:조선 선조 때 학자)은 이르되 韓氏는 상당(上黨)에서 계출 (系出)하였다.
太尉公 蘭이 高麗 太祖를 보필(輔弼)하여 三韓을 통합(統合)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호(號)를 받은 이래(爾來)에 子孫이 번성(繁盛)하여 七百餘年동안 공후 장상문학무공(公候 將相文學武功)이 배출(輩出)되기 十三代를 연면계속(連線繼續)하니 명문귀족(名門貴族)을 차례로 따져 보아도 이보다 앞선 者가 別로 없었으리라고 하였으니 미수 허 목(眉수 許 穆:조선조 숙종때 문신)은 이르되 韓氏는 上黨人이니 상당 한씨(上黨 韓氏)는 기자(箕子)로부터 계출(系出)하였다. 箕子王朝가 쇠퇴(衰退)하여 마한 (馬韓)이 되었더니 그 子孫이 上黨에 居住하였으므로 上黨 韓氏라 칭(稱)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주 한씨(淸州 韓民)의 본관(本貴)
시조 태위(위양)공(始祖 太尉(威襄)公께서 청주 방정리(淸州 方井里)에 사셨으므로 그 후 자손(子孫)들이 마침내 청주로 본관(本貴)을 삼으니 혹은 상당(上黨)또는 서원 (西原)이라 함은 청주의 구명(舊名)인 것이다.
선대(先代)로부터 한씨(韓氏)는 단일본 (單一本)이었다고 전(傳)하여 왔는데 근세(近世)에 이르러서(1)예빈윤연(禮實尹連)을 비조(鼻祖:元祖 또는 始祖라고 하나 우리 문중으로서는 파조(派祖)로 해석함이 옳다고 본다) 안변한씨(安邊韓氏)(2)평산백(平山伯)후지(候抵)를 비조로 하는 平山韓氏 (3)평장사(平章事) 자희(自憙:浚)를 비조로 하는 면천(沔川:唐律)한씨(韓氏) (4)시랑(待郞)언공(彦恭)을 비조로 하는 장단 한씨(長湍 韓氏) (5)통사랑(通仕郞) 근(瑾)을 비조로 하는 당진 한씨(唐律 韓氏) (6)첨사(詹事)원서(元서)를 비조로 하는 한양한씨(漢陽韓氏) (7)중찬(中贊)희유(希愈)를 비조로 하는 가주 한씨(嘉州韓氏) 이상 七派가 본관(本貴)을 달리했던 문중(門中)이고 그 외 부안(扶安), 양주(楊州), 금계(錦溪) 교하(交河), 신평(新坪)등 본관(本貫)을 달리했던 소문중(小門中)도 있었으나 제6교 대동족보 편찬시(第六校大同族諸編簒時:이미 오래 전에 청주로 합본한 바도 있음)에 청주(淸州)로 환본(還本:合本)하고 다만 평장사(平章事)예(銳)를 비조로 하 는 곡산한씨(谷山韓氏)가 많지 않은 수를 이루고 있으나 청주 한씨와는 본(本)을 달리하는 씨족(民族)이다.
위와 같이 본(本)이 다른 한씨(韓氏)처럼 삼았던 옛날(족보가 없었던 시절)봉작(封爵 :벼슬을 받은 위계, 또는 직책)을 받은 군읍(郡邑)이나 거주(居住)하는 곳을 각기 본 (本)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청주(淸州)의 연혁(沿革)
청주(淸州)는 본래 백제 상당현(百濟 上黨縣)이니 일명 낭비성(娘臂城)이라고 하며 또한 낭자곡(娘子谷) 또는 낭성(琅城)이라고 한다.
신라 신문왕(新羅 神文王)이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더니 경덕왕(景德王)이 격(格)을 높혀 서원경(西原京)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가 지금(至今)의 명칭(名稱)청주(淸州)로 개칭(改稱)하였는데 혹(或)청주(淸州)라고도 한다.
성종(成宗)이 목사(收使)를 배치(配置)하였더니 얼마 아니있다가 절도사(節度使)를 배치(配置)하고 전절군(全節軍)이라 호칭(號稱)하였다.
朝鮮 世宗이 관찰사(觀察使)를 배치(配置)하고 목사(收使)를 겸무(兼務)케 하였더니 얼마 아니 있다가 폐지(廢止)되었다.
고려 태조(高麗 太祖)는 청주(淸州)의 토지(土地)가 비옥(肥沃)하고 인물(人物)에 호걸(豪傑)이 많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서)현재(現在)는 청주군(淸州郡)을 분할(分割)하여 중심부(中心部)는 청주시(淸州市)가 되고 둘레의 各面은 청원군(淸原郡)이 되니 시조(始祖)의 유기(遺基)와 묘소(墓所)는 청원군(淸原郡)에 속(屬)한다.
시조부군(始祖府君)의 태생지(胎生地)
우리 淸州 韓氏의 대동족보(大同族譜)가 조선조 광해 9년(朝鮮朝 光海 九年:단기 3950·서기 1617)에 초간(初刊)된 이래 6회에 걸처 간행(刊行)되었고 선조(先祖)의 유사(遺事)에 유관(有關)한 기록(記錄)은 여러 가지로 있으되 시조부군(始祖府君)께서 시거청주(始居淸州)라 하여 처음 청주(淸州)에 복거(卜居:살만한 곳을 가려서 정함 (卜地))하신 이후의 사적(事蹟:사실의 자취)으로부터 기록(記錄)이 있을 뿐이고 그 이전(以前)의 탄생(誕生)과 성장과정(成長過程)에 있어서의 기사(記事)는 일찍이 보지 못 하였다.
그러나 대인(大人:큰 어른·훌륭한 위인)의 행적(行跡:지난 자취)은 일시적(一時的)인 회현(晦顯:세상에 알려짐과 알려지지 않음)은 있을지언정 영원히 인몰(湮沒: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림)되지 않는 것이 대자연의 법칙(法則)인지라 부군(府君)의 태생지(胎生地:태어난곳)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라는 사실이 천년(千年)후인 지금에 이르러 국가기관에 비치(備置)된 공문서와 현지의 지명(地名)과의 관련과 동 리(洞里)의 노인(父老)과 부녀(婦女)들 사이에 어제와 오늘일과 같이 구전(口傳)되는 사실이 생생하게 입증(立證)되므로 근래(近來)에 와서는 보첩(譜牒)에 올려서 우리로 하여금 현지(現地)에 살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영동군지 초(永同郡誌 妙)
“토란리(社蘭里:지금의 난곡리 옛 이름)는 황간면(黃潤面)에 있고 고려 태위 한 란 (高麗 太尉 韓 蘭)의 태지(服地:태생지)이기에 이렇게 불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
황간읍지 초(黃澗邑誌 妙)
한태위 휘 란(韓太樹 諱 蘭)의 태생지(胎生地)가 본읍 동면 토란리(本邑 東面 吐蘭里)에 있으니 지금(至今)까지 그 집은 해읍(該邑)으로부터 매년 개초(每年 盖草)를 하여 천추(千秋)에 전(傳)하도록 한다. (原文·韓太템譯蘭服生地本로東面n土蘭里至予今正寢基地멈該눔每年蓋草以傳千秋)
황간읍(黃澗邑)의 연혁(沿草)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소라현(召羅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때에 영동군(永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더니 고려 현종(高麗 顯宗)때 경산부(京山府)로 성주(星州)에 속(屬) 하였고 조선조 태종(朝鮮朝 太宗)때 청산(靑山)과 병합(倂合)하여 황청현(黃靑縣)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번천 하여 조선조말엽 고종(朝鮮朝末葉 高宗)때에 황간군(黃淵郡)으로 승격(昇格)되었더니 일정(日政)때에 영동군(永同郡)으로 병합(倂合)되어 황간면(黃澗面)이 되었다.
시조부군(始조부君)의 탄생(鍵生)과 토란리(士蘭里)
토란리(吐蘭里)는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忠淸北道 永同郡 黃澗面 吐 蘭里)의 구명(舊名:옛 이름).마한(馬韓) 원왕(元王)의 아들 우량(友諒)이 나라를 백제(百濟)에 잃은 후 신라(新羅)땅으로 삶을 옮기니 국도 경주(國都 慶州:신라의 수도)와 거리가 먼 신라, 백제 (新羅,百濟)의 접경지(接境地)인 황간(黃澗)에 거지(居址:살 곳)를 택정(擇定)하게 된 것이 당시의 정세(情勢)로 보아서 족히 수긍(首肯)할 수 있으며 여기서 세거(世居: 대를 이어 삶)하던 가문(家門)에서 시조부군(始祖府君)이 탄생(誠生)하신 사실이 황간 읍지(黃澗邑誌)에 실려 전(傳)해 옴을 알게 되었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난곡리 마을 로 들어서면 좌편(左便)으로 부군의 탄생하신 터(垈)가 있는데 이곳을 동리 사람들은 한정승(韓政丞)태지(胎地:나신 곳)라고 부른다. 부군(始祖府君)께서 탄생하실 때 부근 산야 일대(山野 一帶)의 지면(地面)에서 땀 (汗)이 흠씬 흘렀다 하여 이 마을을 토한리(吐汗里)로 부르게 되었더니 뒷날 토란리(吐蘭里)로 바꾸어 부르다가 현재는 난곡리(蘭谷里)로 되어 있다.
※부군(府君)이 사셨다는 대지(垈地)가 약 400여평 되어 중앙종친회가 이를 복구(復舊)하고자 매입(買入)하려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이 대지에 살고 있는 3인중 한사람의소유분(황간면 난곡리 227-7)539㎡(163평)만 1991년 4월 매입하여 보존(保存)하고 있음을 첨기 한다.
시조부군(始祖府君)의 강당지(講堂址)
난곡리(蘭谷里)옆 산등(山嶝)을 넘어서 방화동(方花洞)이라는 옛 마을터로 알려진 산간(山間)에 한정승 초당(韓政丞 草堂)터가 있으니 부군께서 강도(講道:글을 가르침)하시던 옛 터전으로 이 부근 토사(土砂)중에는 오랜 옛날의 기와 쪽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본다.
이 초당(草堂)과 본댁(本宅)과의 중간에는 산등(山嶝)이 가로 막혀 있으므로 줄을 늘려 연결하고 양쪽 끝에 방울(鈴)을 달아 연락을 요할 때에는 줄을 흔들어 신호(信號)로 하였다는 전설(傳說)도 온 마을이 다 알고 있는 설화(說話)이다.
시조부군(始祖府君)의 방정리(方井里)유기(遺基:옛 터)
시조부군이 사시던 유기(遺基:옛 터)가 지금의 청주시 방서동(淸州市 方西洞)인 속칭(俗稱)“대머리”로 불리는 마을이다.
부군께서 처음에 이 길지(吉地)를 택(擇)하여 마을 앞에 암석(岩石)을 쪼아 방정(方井:돌을 네모각으로 다듬어서 우물 밑으로부터 정사각형으로 쌓아 올림)을 파서 용수(用水)로 쓰고 뒷산마루(後麓高原)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여기서 자기(自己)수양(修養)과 훈학(訓學)으로 몽매(豪昧)한 후진(後進) 을 일깨우는 한편 황무지(荒撫地)를 개간(開墾)하고 농사(農事)를 권장(勸奬)하니 부농 (富農)을 이루었다.
때마침 고려 왕건 태조(高麗 王建 太祖)가 견훤(甄萱:後百濟의 始祖)을 정벌(征伐)할 때 청주에서 머문 고려 10만 대군에게 군량(軍糧)을 대어주고 드디어 종군(從軍)하시니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개국 원훈(開國元勳)이 되셨다.
이는 고려 건국 11년의 일이니 시조부군이 평양성(平壞城)을 축성(築城)할 때 독려관 (督勵官)의 책임(責任)을 맡으셨던 훨씬 후의 일이다.註:裵武烈公(裵玄慶)本傳 抄 이렇듯 이곳 방서동(方井里)은 시조(始祖)께서 고려창업(高麗創業)에 협찬하신 곳이요 천지만엽(千技萬葉)으로 번창한 자손(子孫)들의 뿌리가 내린 영지(靈地:신성한 땅)이다.
시조유기(始祖遺基)방정리(方井里)봉심전말(奉審顚末)
方井里(方西洞)는 시조부군(始祖府君)이 길지(吉地)를 잡아 처음 이곳에 정착(定着) 하사 권농(勸農:농사를 권장)하며 훈학(訓學:글을 가르침)하신 고지(故地:연고의 땅)이다.
그러나 시조 이후 대(代)를 이어 이곳에 살던 형편이 못되어 오랜 세월이 흐른 사이 주인을 잃고 풍상(風霜)속에 묻혔다가 실로 380년 만에 확실하게 찾은바 되니 그 앞뒤를 살펴보면 연대(年代)는 미상이나 문경공 수(文敬公:諱 修) 이 쓴 유항문집(柳巷文集)에 내 집이 方井里에 있다는 구절(句節)이 있고 충성공(忠成公:諱 明澮)이 고향(故鄕)을 그리는 뜻에서 方井里를 찾아와서 세업(世業)을 이어 설단치제(設壇致察)하였다는 기록(記錄)이 있으며 그 후 광해 10년(단기 3951·서기1618)에 이랑공(吏曹正郞公) 후(后)여명공(여溟公·諱 震英)이 이판서(李判書·李時發)의 전언(傳言)으로 方井里를 찾아가서 옛 터를 다듬고 方井(우물)을 개수(改修)하고 일가권속(一家眷屬)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으니 시조(始祖)의 천년구기(千年舊基)를 찾은 것이다.※여명공 진영(여溟公 震英)은 충간공 휘·리(忠簡公 諱·理)의 후예(後裔)로서 전판 서 이시발(前判書 李時發)의 질서(至壻)가 된다.
光海 戊午(檀紀 三九五一.西紀 一六一八年)에 李判書가 장차 은퇴(隱退)할 택지(宅地)를 求하려고 청주 동남방지대 (淸州東南方地帶)를 순력(循歷)하다가 한 地点에 당도(當到)하여 주위(周圍)를 관망 (觀望)하던 中 일페의한사(一弊衣寒士)가 나타나서 이르되 여기는 한태위(韓太尉)의 유허 방정리(遺墟 方井里)인즉 韓氏가 아니면 점거(占居)할수 없다하거늘 李判書 이 事實을 질서(侄壻)인 여명공(여溟公)에게 傳하니 여명공은 이 말을 듣고 吾韓門中의 숙원(宿願)이 이제야 성취(成就)됨을 환희불금(歡喜不禁)하야 卽時로 方井里에 찾아가서 황량(荒凉)한 옛터를 다듬어서 家屋을 세우고 方井을 준설(浚渫)하여 솔권반이(率眷搬移)하니 이것이 흥폐(興廢)가 무상(無常)한 歲月속에 千年舊基 方井里 가 다시 옛 主人을 찾은 전말(願末)이다.
청주읍지 초(淸州邑誌 妙)
방정리(方井里)는 청주읍 남방 육리(淸州邑 南方 六里)쯤 무농평(務農坪)동쪽에 있으니 한태위(韓太尉 시조부군)가 살던 곳이다.
太尉가 아직 出世할 기회(機會)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 (田園)에 은거(隱居)하면서 몸소 농사(農事)에 힘써 수 만석 거부(累萬石 巨富)가 되었더니 여 태조(麗 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征伐)하러 갈 때 그 行軍이 門前에 이르거늘 太尉公이 장검 영접(仗劍 迎接)하여 十萬大兵을 배불리 먹이고 드디어 종군(從軍)하여 용력(勇力)을 떨치며 지모(智謨)를짜서 백제(百濟)를 토벌(討伐)하고신라(新羅)를 강복(降伏)받아 통합(統合)하는 훈업(勳業)을 성취(成就)하였다.
출처 청주한씨 찬성공파 카페
[출처] 한씨 연원록 (韓氏淵源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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