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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녕왕(武寧王) 對 예군(禰軍) 墓地石의 銘文 比較 [半島 百濟는 없다]
[수(隋) 장수(將帥)와 진(晉)의 장군(將軍)이 칼을 잡고, 웅진(熊津)의 강(江)을 건너다]
2026년 04월 21일
○ 「무녕왕(武寧王, AD 462~523)」과 「예군(禰軍, AD 613∼678)」의 묘지(墓地)에서 발굴(發掘)된 “묘지석(墓地石)”의 “명문(銘文)”을 비교(比較)해 보자.
사실(事實) 「왕릉(王陵)에서 발굴(發掘)된 묘지석(墓地石)」과 「일개(一介) 장군(將軍)의 묘지(墓地)에서 나온 묘지석(墓地石)」 자체(自體)를 비교(比較)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말이 하나의 일관(一貫)된 논의(論議)로 되지 못함. 즉, 말이 이치(理致)에 맞지 않음을 뜻함】과도 같은 것이다.
즉(卽),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리(論理)에 따르더라도 :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에서, ● 「요서(遼西)에 진출(進出)하여 진평(晋平) 2군(郡)을 두고 경략(經略)했으며」, ● 「중원대륙(中原大陸)에 진출(進出), 산동(山東), 안휘(安徽), 강소(江蘇), 절강(浙江), 복건(福建) 등(等)의 “강좌(江左)” 지역(地域)을 정복(征服)하고, 각 지역(地域)에 제후왕(諸侯王)과 태수(太守)를 두어 다스렸으며」, ● 「22개소(個所) 담로(擔魯)를 두어 왕족(王族)을 보내어 통치(統治)하였다」라고 할 정도(程度)의 막강(莫强)한 ‘백제(百濟) 왕(王)’이 남긴 묘지석(墓地石)을 비교(比較)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現實)은 : 국내(國內) 사학계(史學界) 자칭(自稱) ‘무녕왕릉(武寧王陵)’이라는 곳에서 발견(發見)된 묘지석(墓地石)의 명문(銘文)과 그 내용(內容)을 보면 : 황당무계(荒唐無稽)함을 감출 수가 없다.
국내(國內) 사학계(史學界)에서는 역사적(歷史的)인 일이라고까지 하면서 연구자(硏究者)들이 대륙(大陸)의 여러 묘지석(墓地石) 명문(銘文)을 들이대며 설명(說明)하고 있지만 : 이해(理解)할 만한 내용(內容)은 없다. 있는 것은, 화려(華麗)한 말 잔치와 알 수 없다는 식(式)이 전부(全部)다.
더구나 명문(銘文)을 보면 : 몇 글자 되지 않고, 그것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權力)을 가지고 있던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에서 왕(王)의 무덤이 들어설 땅까지도 돈을 주고 샀다는 그런 내용(內容)이라니… …이건 말 그대로 역설적(逆說的)으로 『당시(當時)의 백제(百濟) 왕릉(王陵)이 아니다』라는 내용(內容)일 수 있다는 것이다.
☛ 더욱 황당무계(荒唐無稽)한 것은 「“19세기(世紀) 말(末)∼20세기(世紀) 초(初)에 만들어졌다”라고 까지도 폄하(貶下)를 받는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출처불명(出處不明)의 기록(記錄)으로 무녕왕릉(武寧王陵)을 고증(考證)하고 있다」라는 것인데… …다른 말로 바꾸면 : 「그 어떤 다른 사서(史書)도 이를 고증(考證)하지 못하고 있다」라는 증거(證據)다. 오직 ‘일본서기(日本書紀)’뿐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없었다」라면 : 「무녕왕릉(武寧王陵)은 고증(考證)될 수 없고, 그것을 증거(證據)로 취(取)할 수 없는 일이다.」 곧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었기 때문에 “무녕왕릉(武寧王陵)이 되었다”라는 고증(考證)을 할 수 있었고, 증거(證據)할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기록(記錄)이라고 전(傳)해지는데, 그렇다면 : 이것을 가지고 고증(考證)했다는 무녕왕릉(武寧王陵) 또한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왕릉(王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본국(本國)【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보낸 ‘왕사(王使)=왕사(王師)’였을 가능성(可能性)도 크지만 : 명문(銘文)으로 보면 일개(一介) 태수(太守)의 것만도 못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자연환경(自然環境)의 주요(主要) 요소(要所)인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대(氣候帶), 토산물(土産物), 방위(方位) 등은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變化)가 없다」라고 과학자(科學者)들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세(地勢), 기후대(氣候帶), 방위(方位) 등은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오늘의 무녕왕릉(武寧王陵)은, 그저 21세기(世紀)의 무녕왕릉(武寧王陵)일 뿐, 6세기(世紀) 당시(當時)의 무녕왕릉(武寧王陵)일 수 없다』라는 것이다.
☛ 국내(國內) 사학계(史學界)가 아무리 호들갑을 떨고, 말 잔치를 벌여도 「지세(地勢), 기후대(氣候帶), 방위(方位), 토산물(土産物)」 등(等)에 대해서 설명(說明)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실(事實)은 이게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 요소(要素)’들이란 것을 반도(半島) 사학계(史學界)는 전혀 모르고 있다. 그저 미친 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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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말하기를 : 《무령왕릉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부터 백제의 옛 왕릉으로 간주되어 오던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의 송산리고분군 내, 6호 전축분 북쪽의 얕은 구릉에 위치해 있다.》라고 하여 : ☛ 「무녕왕릉(武寧王陵)이 그곳에 있어야 할 그 당위성(當爲性)을 말하고 있는데,
〈이 설명(說明)의 전제조건(前提條件)은, 반도(半島) 웅진(熊津)【공주(公州)】땅이 “옛 우이(嵎夷) 땅”이어야 하고, “해구(海口)에 있었다”라는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충족(充足)해야 가능(可能)한 것이다.〉
즉(卽), 아래의 조건(條件)을 충족(充足)해 줘야 “반도(半島) 땅에 웅진(熊津)이 있었다”라는 것을 입증(立證)할 수 있는 것이다.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참 답답한 학계(學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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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웅진(熊津) 땅이 “옛 우이(嵎夷)=우이(于夷)”의 땅인가?
▪ ‘고고학적(考古學的) 증거(證據)’인 “우이(嵎夷)=우이(于夷)”의 땅이 반도(半島) 웅진(熊津)인가? ☛ 그러나 「반도(半島) 땅에 구이(九夷)중의 하나인 ‘우이(嵎夷)가 있었다’라는 그 어떤 서지적(書誌的), 고고학적(考古學的) 증거(證據)가 없다.」
▪ 구이(九夷) : 《동래집(東萊集) : 견이(畎夷)ㆍ우이(嵎夷)【우이(于夷)이다】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남이(藍夷)【풍이(風夷)이다】ㆍ양이(暘夷)【양이(陽夷)이다】 칭호(稱號)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 구이(九夷) : 《후한서(後漢書) ; 夷有九種,曰畎夷,於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라고 하였고, 《孔安國尚書注曰「東方之地曰嵎夷。暘谷,日之所出也」。: 공안국(孔安國)이 상서(尙書)의 주(注)에서 말하기를 : 동방(東方)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한다. 양곡(暘谷)은 해가 돋는 곳이다》라고 하였는데,
동방(東方)의 땅이 반도(半島)인가? 해가 돋는 곳이 양곡(暘谷)이라고 했는데, 반도(半島) 땅을 “양곡(暘谷)”이라고 불렀다는 서지적(書誌的) 증거(證據)는 없다. 「유일(唯一)하게 존재(存在)하는 것은, “한글 해설서(解說書)”뿐이잖은가!」
반도(半島)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방(東方)의 땅(東方之地)에 구이(九夷)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걸 반도(半島) 땅이라고 콕 집어서 말하는 자(者)들이 바로 ‘매국(賣國) 사학자(史學者)’들이다. 동방지지(東方之地)가 아덯게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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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하는 「웅진(熊津)의 땅이 반도(半島)의 공주(公州)인가?」 하는 기본적(基本的)인 문제(問題)를 입증(立證), 해결(解決)해야만 한다.
➊ “웅진(熊津)은 해구(海口)”라고 하였다 : 반도(半島) 땅의 웅진(熊津)【공주(公州)】은, 내륙지방(內陸地方)에 있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하고 있는 웅진(熊津)【공주(公州)】은,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➋ “고려(高麗) 때는 하남도(河南道)에 속(屬)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반도(半島) 땅의 어떤 하(河)의 남(南)쪽 땅에 있었다는 것인가? 반도(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보면 : ‘한강(漢江)=한수(漢水)’ 이남(以南)의 땅은 경기도(京畿道), 충청도(忠淸道) 땅이다.
하천(河川)의 이름으로 보면 : 강남(江南) 곧 한강(漢江)의 이남(以南)이 되는데, 강(江)의 남(南)쪽이라서 강남도(江南道)는 또 무엇인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곧 반도(半島) 땅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는 이를 설명(說明)할 수 없으니, 「당 태종(太宗)이 천하의 지형을 반영하여 정한 십도(十道)는, ‘관내(關內) · 하남(河南) · 하동(河東) · 하북(河北) · 산남(山南) · 농우(隴右) · 회남(淮南) · 강남(江南) · 검남(劍南) · 영남(嶺南)’ 등이다.」라면서 서두(序頭)에 말하고 있지만 : “이는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반도사학(半島史學)’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고려(高麗)는 “당(唐)”을 이은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왕조(王朝)였다는 뜻과 같다.」 반도(半島) 고려(高麗) 땅의 행정구역(行政區域)을 말하는데, 뚱딴지같이 당태종(唐太宗)은 뭐고, 십도(十道)는 또 뭔가?
➌ 형승(形勝) 편(篇)에서는 : “웅천(熊川)은 바다에 접해 있다【熊川連海,鷄嶽柱天。李益朴詩】라고 하였고, ▪ 고적 :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웅진은 옛날 백제국의 바다 어구에 있는데, 당(唐)나라에서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하였다. 【熊津都督府。《大明一統志》云: 熊津在故百濟海口。唐置都督府於此】
☛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대해서는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인용(引用)하여, 《백제(百濟)의 해구(海口)에 있다》라고 하였다. 해구(海口)와 하구(河口)를 혼동(混同)하지 말자. 분명(分明)하게도 해구(海口)【바다의 후미진 곳이나 항만(港灣)으로 들어가는 어귀】라고 하였다. 공주(公州)와 웅진(熊津)은 전혀 다른 성격(性格)의 다른 땅을 말하고 있다.
➍ 《능현(陵峴) / 주 동쪽 5리에 있다. 옛 능터가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인데, 속설에 백제의 왕릉(王陵)이라 전해 온다. 【陵峴。在州東五里,有古陵基,故名。諺傳百濟王陵。】 ▪ 향교(鄕校) / 주 서쪽 3리에 있다. 서편에 옛 능(陵)이 있는데【릉의 터】, 속설에 전하기는 백제의 왕릉이라 하나, 어느 왕인지 알 수 없다. 【鄕校。在州西三里。西有古陵基。諺傳百濟王陵,未知何王。】 》라고 하였는데,
백제(百濟)의 릉(陵)이 존재(存在)했다는 것이 아니라, “릉(陵) 터”가 있었다는 것이다. 「릉기(陵基)」란 : 왕릉(王陵)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왕릉(王陵)의 터로 보이는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버’하지 말자.
만약(萬若) 「이곳에 정말로 백제(百濟)가 있었다」라고 한다면 : 어찌 단 하나의 ‘왕릉(王陵)의 터’가 있다고 전(傳)해오겠는가?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는 제정신을 좀 차려야 되지 않을까? 언제까지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래의 내용(內容)을 보면 : 황당(荒唐) 하다못해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지경이다.
➎ 《산천(山川) / 금강(錦江) 조(條)에서 이르기를 : 「고려(高麗) 정지(鄭地)의 시에, “수(隋) 나라의 하약필(賀若弼)과 진(晉) 나라의 조 장군(祖將軍)은 칼을 짚고 강물을 건너면서 해를 가린 구름을 쓸고서야 돌아오리라 맹세했네.” 하였다. 【高麗鄭地詩:隋家賀若弼,晉室祖將軍。杖劍過江水,歸來誓掃雲.】 」》라고 하였는데, 도대체 이게 뭔 말인가?
【‘정지(鄭地)’ : 고려(高麗) 말기(末期)의 무신(AD 1,347~1,391)으로, 부패한 수군을 쇄신하였고, 여러 번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았 으며,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에 동참(同參)하여 이등공신(二等功臣)이 된 인물(人物)이다.】
▪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사람으로, 수(隋)의 대신(大臣), 고금곡(古琴曲) “양소인(良宵引)”의 저자(著者)로 알려진, 또 ‘비방조정죄(誹謗朝政罪)’로 AD 607년에 처형(處刑)된 수(隋)나라 관리(官吏) “하약필(賀若弼)”과 “웅진(熊津) 또는 공주(公州)”와 뭔 관련(關聯)이 있다는 것인가? 또 진(晉)나라의 조장군(祖將軍)은 반도(半島) 땅 “웅진(熊津)”과 무슨 관계(關係)가 있다는 것인지… …황당(荒唐)할 따름이다.
「수(隋) 왕조(王朝) 관리(官吏)였던 하약필(賀若弼)과 진(晉)의 조장군(祖將軍)이 칼 짚고, ‘금강(錦江)’을 건너면서 ‘해를 가린 구름을 쓸어버리고 돌아간다’라고 하였다니 : 그럼 백제(百濟)가 태양(太陽)을 가린 구름(雲)이었다는 뜻인가? 그래서 수(隋) 왕조(王朝) 관리(官吏)였던 하약필(賀若弼)과 진(晉)의 조장군(祖將軍)은 구름을 깨끗하게 쓸어버리고 돌아갔다는 것인가?
참 웃기는 이야기다. ➥ 《하약필(賀若弼)은, AD 588年【수(隋) 개황(開皇) 8年】겨울 11월에, 수군(隋軍)을 이끌고 대거(大擧) 건강(健康)【남경(南京)】을 공격(攻擊)하고, 과주진(瓜洲鎮)을 건너(渡), 경구(京口)【강소성(江蘇省) 진강(鎭江)】를 공략(攻略)하고, 종산(鐘山)【남경(南京)의 자금산(紫金山)】으로 진군(進軍)하여, 한때 고전(苦戰)하였으나, 진(陳)나라 주력군(主力軍)을 쳐 무너뜨리고, 그 대장 ‘소마가(하)(蕭摩訶)’를 생포(生捕)하였다. 그 공(功)으로 상주국(上柱國)이 되고, 나아가 송국공(宋國公)이 되고 재상(宰相)도 되었으나, 후(後), 고발(告發)당해 처형(處刑)된 인물(人物)이다.》라고 전해진다.
웅진(熊津)【공주(公州)】의 땅을 흐르는 강물을 건너면서 “하약필(賀若弼)”이 했다는 말을 들어보면 : 당시(當時)의 태양(太陽)은 수(隋)였고, 태양(太陽)을 가린 구름은 진(陳)나라였다는 말이 된다.
➥➥ 그렇다면 “하약필(賀若弼)”은 당시의 백제(百濟) 웅진(熊津)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곳은 반도(半島) 땅이 아니라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백제(百濟)가 초해(草海)를 건너(渡) 차지한 ‘강좌(江左)’ 땅일 수밖에 없다.』 왜곡(歪曲), 조작(造作)되지 않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밖에 없다.
▪ 이러한 설명(說明)에 따르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로, 「반도(半島) 지리지(地理志)’가 아니다」 : 「중원대륙(中原大陸) 동국(東國)의 지리지(地理志)라는 것을 증거(證據)하고 있다.」 이걸 외면(外面)하고 반도(半島) 동국(東國)을 외쳐 봤자, 헛소리로 치부(恥部)될 뿐이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良宵引,又名‘良宵吟’,是一首古琴曲, ‘天聞閣琴譜’ 載其作者為賀若弼.》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賀若弼(544年∼607年8月27日),複姓賀若,字輔伯,河南郡洛陽縣人。隋朝大臣,一說為古琴曲《良宵引》的作者。其父賀若敦為北周將領,任金州(今陝西省安康)刺史。北周保定五年(565)十月,賀若敦因口出怨言,為北周權臣晉公宇文護所不容,賜自盡,臨死前,曾囑咐賀若弼說:「吾必欲平江南,然此心不果,汝當成吾志。且吾以舌死,汝不可不思」,並用錐子把賀若弼的舌頭刺出血,告誡他慎言。少時驍勇,善騎射,博涉書記。封當亭縣公,為小內史。▪ 北周大象元年(579年)助行軍元帥韋孝寬攻取陳朝淮南之地,拜為壽州(今安徽省壽縣)刺史,封襄邑縣公。隋朝建立後,因高熲薦舉,乃委任賀若弼為吳州總管,鎮守廣陵。開皇八年(588年)冬十一月,隋軍大舉伐陳,為行軍總管,主攻建康(今南京)。率軍自瓜州(今江蘇揚州西南瓜洲鎮)偷渡,攻拔京口(在今江蘇鎮江),進軍直抵鍾山(今南京紫金山),一路苦戰,擊潰陳軍主力,生擒其大將蕭摩訶。以功封上柱國,進爵宋國公。 ▪ 開皇十二年(592年)賀若弼自以功高,應該官至宰相,自有不平之鳴,為言官劾,被免官,年餘復官,不復重用。開皇十九年(599年)隋文帝於仁壽宮賜宴王公,賀若弼為五言詩,詩中詞意憤怨。隋煬帝楊廣即位,更加被疏遠。 ▪ 大業三年(607年)七月從隋煬帝至榆林(今內蒙古托克托西南),楊廣命人制一可容納數千人的大帳蓬,招待突厥啟民可汗,賀若弼與高熲等議論煬帝奢侈無度,為人告發,二十九日(607年8月27日)以「誹謗朝政罪」與高熲、宇文弼一同被處死。時年六十四,他的妻兒為官奴婢,群從徙邊。楊廣還是太子時,曾經問賀若弼說:「楊素、韓擒虎、史萬歲三人,俱稱良將,優劣如何?」賀若弼說:「楊素是猛將,非謀將;韓擒虎是鬥將,非領將;史萬歲是騎將,非大將。」楊廣又問誰是大將?賀若弼說自己就是太子選擇的人。言下之意,只有他賀若弼一人能稱大將。▪ 李淵建立唐朝之初,即在武德元年(618年)八月,追贈一批隋朝官員官位[2],賀若弼受贈上柱國、杞國公[3]。陳子良代王季卿寫給他外甥王仁壽的信中,則提及賀若弼受贈官職為光祿大夫、揚州總管[4]。》
➏ 토산(土産) : 「수철(水鐵)ㆍ동철(銅鐵)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라고 하였는데, 맞는 말인가? 헛소리인가?
▪ “수철(水鐵), 동철(銅鐵)” : 반도(半島) 땅에서 수철(水鐵)과 관계(關係)되는 수철리(水鐵里)는 몇 곳에서 발견(發見)되는데, 충청도(忠淸道) 아산(牙山)에서 예로부터 삼국시대(三國時代)로부터 철(鐵)이 많이 산출(産出)되어 지명으로 되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곳은 전형적(典型的)인 농촌(農村) 마을이다.
충청도(忠淸道) 아산(牙山) 땅에 삼국시대(三國時代)로부터 채굴(採掘)한 철광산(鐵鑛山)으로 유명(有名)했다? 또 ‘수철(水鐵)과 동철(銅鐵)’은 철광산(鐵鑛山)에서 채굴(採掘)하는 것이 아니라 제련(製鍊)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➐ 누정(樓亭) / 「취원루(聚遠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옛날의 관정정(觀政亭)이다. 중략(中略). 물이 용담(龍潭)ㆍ무주(茂朱) 두 고을에서 발원하는데 금산(錦山)에서 합류하여 영동(永同)ㆍ옥천(沃川)ㆍ청주(淸州) 세 고을을 지나 공주에 이르러서는 금강(錦江)이 되고, 꺾여 사비강(泗沘江)이 되어서는 더욱 큰 물을 이루어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웅진이라 한다. 중략(中略).
「길게 구불구불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웅진(熊津)이라 한다」라고 하였으니, 대부분(大部分) 하천(河川)이 바다로 들어가는데 이를 “웅진(熊津)‘이라 했다면 : 고유지명(固有地名)이 될 수 없다. 웅진(熊津)은 큰 하천(河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도 있을 수 있는 지명(地名)이었다는 뜻이다. 곧 ”웅진(熊津)은 공주(公州)“란 말은, 헛소리였다는 뜻과 같다.
➑ 「독락정(獨樂亭)」 주 동쪽 30리 삼기촌(三岐村)에 있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중략(中略), “하루는 나에게 말씀하기를, ‘내 집이 여러 대를 두고 공주 금강 상류에서 살아왔는데, 경상ㆍ전라ㆍ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이곳을 「삼기(三岐)」라 이른다.【獨樂亭。在州東三十里三岐村。一日語余曰:‘吾家世居公之錦江上游,慶尙、全羅、忠淸之江,至此合流,故名其地曰三岐】”라고 하였는데,
☛ 《慶尙、全羅、忠淸之江,至此合流,故名其地曰三岐。: 경상ㆍ전라ㆍ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이곳을 삼기(三岐)라 이른다.》라고 하였다는데… …그곳이 도대체 어딘가?
삼기촌(三歧村)은, 연기군(燕岐郡)을 말하며, 오늘날의 ’세종시‘를 말한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곳에 「“慶尙, 全羅, 忠淸之江, 至此合流, 故名其地曰三岐”하는 강물이 없다.」 이게 문제(問題)다. 반도사학(半島史學)은 늘 이런 식(式)이다.
▪ 공주목(公州牧)의 설명(說明)이니, ’웅진강(熊津江)=금강(錦江)‘이 연기군(燕岐郡) 남(南)쪽을 지나는 곳을 말하는 것 같지만 : 문제(問題)는, 「이곳에는 경상도(慶尙道)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없다」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건 뭐라는 것일까?
▪ ’독락정(獨樂亭)‘에 대해 : 「Naver AI」답변(答辯) : 《독락정(獨樂亭)은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101(금남교 인근)에 있는 정자로, 조선 전기 양양도호부사 임목이 1437년(세종 19) 건립한 누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강변 경관을 조망하는 위치에 자리하며, 정면 3칸·측면 2칸의 평면과 홑처마 팔작지붕이 특징입니다》라고 하는데, 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내용과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답(答)일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이곳 어디에 경상도(慶尙道)에서, 충청도(忠淸道)에서, 전라도(全羅道)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합쳐지는 곳이 어디냐?』하는 것이다.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忠淸道 右道, 公州鎭 / 公州牧 : 「독락정(獨樂亭)」 : 주 동쪽 30리, 삼기향(三岐鄕)에 있다. 양양 부사(襄陽府使) 임목(林穆)의 별서(別墅)이다. 「금강(錦江) 상류의 두 물이 서로 만나는 곳에 작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강물에 임해 우뚝 솟아 있고 정자가 그 위에 있다. 강산이 맑고 환하여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남수문(南秀文)이 기문을 지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중략(中略)【在州東三十里,三岐鄕。襄陽府使林穆別墅。錦江上流二水交會有小峯,臨流特峙,亭在其上。江山淸曠,極有勝致。南秀文作記。○徐居正詩】하였는데,
☛☛ 「경상도(慶尙道)에서, 충청도(忠淸道)에서, 전라도(全羅道)에서 흘러오는 세 강물이 합쳐지는 곳이 없다」라는 것이고, 「금강(錦江) 상류(上流) 두 강(江)에서 흘러오는 강물이 만나는 곳」이라고 하였으니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말하는 공주목(公州牧)은, 반도(半島) 공주(公州)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東文選 81권 / 記 / 獨樂亭記, 남수문(南秀文) : 《余故父事侯有年。日語余曰。吾家世居公之錦水上游。實慶尙,全羅,忠淸三道之衝。江至此合流。故名其地曰三岐。所居南五里許。有斷山自北而南。行可二里許。峙爲小峯。脩篁茂松。葱蒨可愛。三江蜿蜒。自東蛇繞其下。吾嘗過而異之。試一登焉。: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공주 금강 상류에 거하였는데, 실은 경상ㆍ전라ㆍ충청도의 요충이요, 강이 이곳에 와서 합류하기 때문에 지명(地名)을 삼거리라 한다. 사는 데서 남으로 5리쯤 나가면 끊어진 산맥이 있어 북으로부터 남으로 2리쯤 가다가 우뚝이 솟아서 작은 봉우리가 되어 미끈한 대와 무성한 솔이 새파랗게 늘어서서 퍽이나 사랑스럽고, 세 강이 꼬불꼬불 동으로부터 그 아래를 둘러 흐르므로 나는 일찍이 그 곳을 지나다가 기이하게 여기고 시험삼아 한 번 올라보니∼ ∼중략(中略)》하였으니,
➥ 『반도(半島) 공주목(公州牧)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숨길 수 없기 때문이고, 왜곡(歪曲) 또는 조작(操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필자(筆者)는,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 학자(學者)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 정도(程度)의 지형지세(地形地勢) 문제(問題)도 해결(解決)하지 못한 째, 「이곳 땅에 있는 왕릉(王陵)이 “무녕왕릉(武寧王陵)의 것이다.”」라는 해설(解說)을 어떻게 할 수 있나? 「얼굴이 화끈거리고 뜨겁지 않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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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발굴(發掘)되었다는 묘지석(墓地石)과 그 명문(銘文)
➥ [출처(出處)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교감판독문 [출처(出處) : 한국고대사료 DB / 금석문·문자자료 /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비 지석 (公州 武寧王陵 武寧王妃 誌石)]
(뒷면)
[01] 錢一万文右一件
[02] 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
[03] 百濟斯麻王以前件錢▨土王
[04] 土伯土父母土下衆官二千石
[05]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
[06] 不從侓令
[07]
☛ 《돈 1만 문, 우(右)의 1건. 을사년 8월 12일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 건의 돈으로 토왕, 토백, 토부모, 지하의 질 이천 석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서남쪽 땅을 사서 묘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권(券)을 세워 증명으로 삼으니, 따르지 않으면 율령에 의거하여 처분한다.》라고 하였다고 설명(說明)한다.
(앞면)
[01] 丙午年十一月百濟國王太妃壽
[02] 終居喪在酉地己酉年二月癸
[03] 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04] 志如左
[05]
[06]
[07] ◎註 009
[08]
[09]
[10]
[11]
[12]
[13]
☛ 《병오년 11월 백제국 왕태비가 수명을 다하셨다. 거상(居喪)은 서쪽 땅에 있었다. 기유년 2월 계미삭 12일 갑오에 다시 장례를 치르고 대묘로 돌아가셨다. 묘지를 기록한 것이 좌(左)와 같다.》라고 하였다고 설명(說明)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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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보 제163호’로 지정된 무령왕릉지석 탁본(전면). 지석 뒷면에는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 닢을 주고 능을 만들 땅을 샀다는 토지매매 문서 성격의 내용이 있다. 이런 이유로 매지권(買地券)으로 보기도 한다. 35.2×41.5×4cm |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 출처 : 경향신문】
특이(特異)한 점은, 묘지석(墓地石) 가운데에 “조그만 원형(圓形)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없었기 때문에 국내(國內)의 학자(學者)들 또한 “알 수 없다”라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곧, 많은 묘지석(墓地石)을 보았지만 : 무녕왕(武寧王, 462~523)의 묘지석(墓地石)은 특이(特異)하고 또 특이(特異)하여 설명(說明)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왕(王)이 죽어 왕릉(王陵)을 조성(造成)하는데 : 토지매매(土地賣買) 문서(文書) 성격(性格)의 내용(內容)이 있어 이런 이유로 매지권(買地券)이라고도 부른다고 하였는데… …설사(設使) 그것이 사실(事實)이라고 하더라도 묘지석(墓地石)에 그것에 왜 필요(必要)했을까?
그것이 없다면 누군가가 “내 땅”이라고 하면서, 파헤칠까 염려(念慮)한 것인가?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백제왕(百濟王)이 아닌 태수(太守) 또는 자사(刺史)의 지석(誌石)도, 이 정도(程度)보다는 더 나을 것 같다.
☛ 「장안(長安) 근교(近郊)에서 출토(出土)되었다」라는 “백제(百濟) 웅진인(熊津人)【우이인(嵎夷人)】예군(禰軍)”의 ‘묘지석(墓地石) 명문(銘文)을 보면서, 한 번 생각을 좀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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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안(長安) 근교(近郊)에서 발굴된 예군【禰軍 : AD 613∼678】의 묘지석 명문
➠ 이미지 출처 : ‘더 위키’ 예군(禰軍·613∼678)
☛ 祢軍墓誌 678年 / 大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祢公墓誌銘 〈并序〉【引用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公諱軍,字温,熊津嵎夷人也。: 공(公)의 이름은 군(軍)이고 자(字)는 온(溫)이며, 웅진(熊津)의 우이(嵎夷) 사람이다. 其先与華同祖,永嘉末,避亂適東,因遂家焉。: 그 선조는 화[華]와 조상이 같은데, 영가(永嘉) 말에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가 이로 인하여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若夫巍巍鯨山,跨青丘以東峙,淼淼熊水,臨丹渚以南流。: 무릇 숭고하고 위대한 경산(鯨山)은 청구(青丘)에 걸터앉아 동쪽으로 우뚝 솟았고, 끝없이 아득한 웅수(熊水)는 단저(丹渚)에 임하여 남쪽으로 흘렀다. 浸煙雲以樆英,降之於蕩沃,照日月而榳悊,秀之於蔽虧。靈文逸文,高前芳於七子,汗馬雄武,擅後異於三韓。華構增輝,英材継響,綿圖不絶,弈代有聲。
曾祖福,祖譽,父善,皆是本藩一品,官号佐平。並緝地義以光身,佩天爵而懃國。忠侔鐵石,操埒松筠。範物者,道德有成,則士者,文武不墜。
公狼輝襲祉,䴏頷生姿。涯濬澄陂,裕光愛日。干牛斗之逸氣,芒照星中,搏羊角之英風,影征雲外。
去顯慶五年,官軍平本藩日,見機識變,杖劍知歸。似由余之出戎,如金磾之入漢。聖上嘉歎,擢以榮班,授右武衛滻川府折衝都尉。
于時日本餘噍,據扶桑以逋誅,風谷遺甿,負盤桃而阻固。萬騎亘野,与盖馬以驚塵,千艘橫波,援原虵而縱沵。以公格謨海左,龜鏡瀛東,特在簡帝,往尸招慰。公侚臣節而投命,歌皇華以載馳。飛汎海之蒼鷹,翥凌山之赤雀。决河眥而天吴靜,鑿風隧而雲路通。驚鳧失侣,濟不終夕。遂能說暢天威,喻以禑福。千秋僭帝,一旦稱臣,仍領大首望數十人將入朝謁,蒙恩詔授左戎衛郎將,少選遷右領軍衛中郎將兼檢校熊津都督府司馬。
材光千里之足,仁副百城之心。舉燭霊臺,器標於芃棫,懸月神府,芳掩於桂苻。衣錦晝行,富貴無革。雚蒲夜寢,字育有方。
去咸亨三年十一月廿一日詔授右威衛將軍,局影彤闕,飾躬紫陛。焏蒙榮晉,驟歷便繁。方謂克壯清猷,永綏多祐。豈圖曦馳易往,霜凋馬陵之樹,川閲難留,風驚龍驤之水。
以儀鳳三年歲在戊寅二月朔戊子十九日景午遘疾,薨於雍州長安縣之延壽里第。春秋六十有六。
皇情念功惟舊,傷悼者久之,贈絹布三百段,粟三百斛,葬事所須,并令官給,仍使弘文館學士兼檢校本衛長史王行本監護。
惟公雅識淹通,温儀韶峻,明珠不纇,白珪無玷。十步之芳,蘭室欽其臰味,四鄰之彩,桂嶺尚其英華。奄墜扶摇之翼,遽輟連舂之景。
粵以其年十月甲申朔二日乙酉葬於雍州乹封縣之高陽里,禮也。
駟馬悲鳴,九原長往,月輪夕駕,星精夜上。日落山兮草色寒,風度原兮松聲響。陟文榭兮可通,随武山兮安仰。愴清風之歇滅,樹芳名於壽像。
其詞曰:
胄胤青丘,芳基華麗。
脉遠遐邈,會逢時濟。
茂族諄秀,奕葉相継。
獻款夙彰,隆恩無替。〈其一〉
惟公苗裔,桂馥蘭芬。
緒榮七貴,乃子傳孫。
流芳後代,播美來昆。
英聲雖歇,令範猶存。〈其二〉
牗箭驚秋,隟駒遄暮。
名將日遠,德随年故。
慘松吟於夜風,悲薤哥於朝露。
霊轜兮遽轉,嘶驂兮跼顧。
嗟陵谷之貿遷,覬音徽之靡蠹。〈其三〉》
○ 대당(大唐) 고(故) 우위위(右威衛)·장군(將軍)·상주국(上柱國) 예공(禰公) 묘지명(墓誌銘) 및 서(序) [출처(出處) / 한국고대사료 DB, 금석문•문자자료]
공(公)의 이름은 군(軍)이고 자(字)는 온(溫)이며, 웅진(熊津)의 우이(嵎夷) 사람이다. 그 선조는 중화[華]와 조상이 같은데, 영가(永嘉) 말에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가 이로 인하여 마침내 일가를 이루었다. 무릇 숭고하고 위대한 경산(鯨山)은 청구(青丘)에 걸터앉아 동쪽으로 우뚝 솟았고, 끝없이 아득한 웅수(熊水)는 단저(丹渚)에 임하여 남쪽으로 흘렀다. 아스라이 먼 곳에 가라앉아 빼어난 재주를 펼치니 넓고 큰 옥토에 내려왔다. 해와 달을 비추어 명철함을 이루니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에서 우뚝 솟았다.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진귀한 문장은 높이기 전에도 칠자(七子)보다 훌륭했다. 준마의 용맹하고 씩씩함은 독보적으로 빼어난 후에도 삼한(三韓)에서 남달랐다. 아름다운 건물이 더욱 빛나고 빼어난 재주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계속해서 헤아리는 것이 끊어지지 않으니 대대로 명성이 있었다.
증조부인 복(福), 조부인 예(譽), 부친인 선(善)은 모두 본번(本藩)의 일품(一品)으로 관호(官號)는 좌평(佐平)이었다. 땅의 바른 도(道)를 모아 몸을 빛내고 천자가 내려주신 작위를 받아 나랏일에 힘쓰기를 한결같이 했다. 충성은 쇠와 돌에 견주었고 지조는 소나무와 대나무에 비겼다. 사람의 모범이 되는 것에는 도덕이 이루어짐이 있었고 선비의 본이 되는 것에는 문무(文武)가 실추되지 않았다. 공(公)은 낭성(狼星)이 빛나듯 복을 물려받았고 제비의 턱과 같이 모습이 생겨났다. 물가의 깊음이 못을 맑게 했고 넉넉한 빛이 해를 감쌌다. 우수(牛宿)와 두수(斗宿干)를 꿰뚫은 뛰어난 기상은 별 가운데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회오리바람을 탄 영용한 풍모는 구름 밖으로 비치듯 나아갔다. 지난 현경(顯慶) 5년 관군(官軍)이 본번을 평정하던 날 (일의) 조짐을 보고 변화를 알아 검을 잡고 귀의할 곳을 알았으니, 유여(由余)가 융(戎)에서 나온 것과 유사했고 김일제[金磾]가 한(漢)으로 들어온 것과 같았다. 성상(聖上)께서 기뻐 찬탄하며 영화로운 반열로 발탁하니 우무위(右武衛)·산천부(滻川府)·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했다. 이때 일본(日本)의 남은 무리가 부상(扶桑)에 의거하여 징벌을 필해 달아났다. 풍곡(風谷)의 살아남은 백성들이 반도(盤桃)에 의지하여 견고하게 지켰다. 1만의 기병이 들판에 펼쳐지니 갑주를 두른 말과 함께 먼지를 일으켰다. 1천의 배가 파도를 가로지르니 원사(原蛇)에 의지하여 물이 가득한 곳으로 쳐들어갔다. 공이 해좌(海左)에서 계책을 궁구하여 영동(瀛東)에서 본보기가 되니 황제에게 특별히 발탁되어 가서 초유(招諭)하고 위무(慰撫)하는 일을 주관했다. 공은 신하의 절조를 두루 보이며 목숨을 바쳤고, 사신가는 일을 찬미하며 빠르게 달려갔다. 바다 위를 날아서 건너가는 푸른 매였고, 높이 날아올라 산을 넘는 붉은 새였다. 강이 만나는 곳의 물길을 여니 천오(天吳)가 조용해졌고, 바람이 돌아나가는 곳을 뚫으니 구름길이 통했다. 놀란 오리가 짝을 잃은 것처럼 저녁이 끝나기 전에 건너갔다. 드디어 천자(天子)의 위엄을 충실히 설파할 수 있었으니 변방의 복이 영원함을 깨우쳐주었다. 참제(僭帝)가 하루아침에 신하라고 칭했다. 이에 명문 대귀족 수천 인을 거느리고 장차 조정에 들어와 알현하려 하였다. 특별히 은혜로운 조서를 받아 좌융위(左戎衛)·낭장(郎將)을 제수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령군위(右領軍衛)·중랑장(中郞將)겸(兼)검교(檢校)·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로 옮겨갔다. 재주는 천리마처럼 빛났고 어짊은 여러 성읍의 마음에 부합했다. 궁벽한 곳[靈臺]에서 촛불을 드니 풀이 무성한 곳에 기량이 드러났다. 신선이 사는 곳에서 달을 거니 계수나무 수풀에 향기가 덮였다. 비단옷을 입고 낮에 다니니 부귀(富貴)가 바뀜이 없었다. 갈대와 부들이 밤에 잠드니 돌보아 키우는데 방도가 있었다. 지난 함형(咸亨) 3년 11월 21일에 조서를 내려 우위위(右威衛)·장군을 제수하였다. 붉은 칠을 한 궁궐에서 그림자를 움츠렸으며 자주빛 섬돌에서 몸가짐을 다스렸다. 영예로운 승진을 자주 받았고 누차 역임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바야흐로 현명한 계책을 강성하게 하여 여러 번 돕는 일을 길이 안정시켰다고 일컬었다. 어찌 해가 지나가면 쉽게 왕생하여 마릉(馬稜)의 나무에서 서리가 사라지고, 물이 모이면 머무르기 어려워 용양(龍驤)의 물줄기에서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의봉(儀鳳) 3년 무인(戊寅)년 초하루가 무자(戊子)일인 2월 19일 경오(庚午)에 병에 걸려 옹주(雍州) 장안현(長安縣) 연수리(延壽里)의 저택에서 훙거(薨去)했다. 나이는 66세였다. 황제의 마음에 공적이 떠올라 옛일을 생각하니 애도하는 마음이 오래 이어졌다. 견포(絹布) 3백단과 조 3백곡을 보내주고 장사지내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관에서 공급하게 하니, 이에 홍문관(弘文館)·학사(學士)겸검교본위(檢校本衛)·장사(長史) 왕행본(王行本)을 시켜 감독하게 했다. 공의 고명한 식견이 막힘없이 두루 통한 것과 온화한 뜻이 아름답고 준수한 것을 생각하니 밝은 구슬에 흠이 없었고, 흰 옥으로 만든 홀에 결점이 없었다. 열 걸음의 향기는 여인의 방에서도 그 내음을 공경했고, 사방의 광채는 계수나무 우거진 고개에서도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숭상했다.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날개를 갑자기 잃어버리니, 절구질이 이어지던 정경이 급박하게 멈추었다. 이에 그 해 갑신(甲申)이 초하루인 10월 2일 을유(乙酉)에 옹주 건봉현(乾封縣) 고양리(高陽里)에 장사지내기를 예를 갖추어 시행했다. 수레를 끄는 네 필의 말이 슬프게 우니 저 세상으로 영영 떠나갔다. 둥근 달이 저녁에 떠올랐고, 별의 정기가 밤에 올라왔다. 해가 산에 떨어지니 풀빛이 차갑고, 바람이 들판을 건너가니 소나무 소리가 울리는구나. 글귀가 새겨진 나무에 오르니 뜻이 통할 수 있고, 무예를 닦는 산을 끼고 가니 우러러보기가 편하구나. 맑은 바람이 다하여 없어짐을 매우 슬퍼하며 향기로운 이름을 축수(祝壽)하는 형상(形像)을 세웠다. 그 사(詞)에서 말하였다.
“후손이 청구에 있으니 향기로운 기반이 화려했다. 혈맥이 오래된 것이 아득히 멀었는데, 마침 때를 만나 건너왔다. 번성한 일족이 매우 빼어나니 대대로 서로 계승하였다. 귀순할 뜻을 일찍부터 드러내니 황제의 은가 다함이 없었다. 그 첫 번째이다.
공의 후손을 생각하니 계수나무와 난초의 향기가 짙었다. 시작함이 칠귀(七貴)와 같이 영예로웠으니, 또한 아들에서 손자에게로 전해졌다. 후대에까지 명성을 남겼으니, 후대의 자손에게 아름다운 명성을 퍼뜨려 드날렸다. 영용한 명성은 비록 다하였으나 모범이 될 미덕(美德)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두 번째이다.
창밖으로 본 날아가는 화살처럼 빨리 시들었고, 문틈으로 본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저물었다. 명성(名聲)은 날로 멀어지려 하고 덕행(德行)은 해가 지날수록 옛 것이 된다. 소나무가 밤바람에 탄식하는 것이 서글프고 부추가 아침이슬에 노래하는 것이 비통하다. 관을 실은 수레가 급하게 옮겨 가는데, 구슬프게 우는 세 필의 말이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구나. 언덕과 계곡이 옮겨 다니는 것을 개탄하고, 아름다운 평판이 좀먹지 않기를 바란다. 그 세 번째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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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과 「예군(禰軍)의 지석(誌石)」을 비교(比較)해 보면 : 「“예군(禰軍)의 지석(誌石) 내용(內容)은, 황제(皇帝)의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할 만큼 여러 격식(格式)을 갖추고 있다.
무녕왕릉(武寧王陵)의 지석(誌石)은, 알 수 없는 격식(格式)을 가지고 있다. 즉(卽), 「무녕왕(武寧王, 462~523)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성장(成長)하였으며, 공로(功勞)는 무엇이 있었으며, 어떻게 태자(太子)가 되고, 즉위(卽位)하여, 백제(百濟)를 위해 어떤 일을 하였으며, 누구의 여식(女息)과 혼인(婚姻)하여 자식(子息)은 몇을 두었으며, 말년(末年)에 어떤 이유(理由)로 죽게 되었다」라는 등(等)의 있어야 할 내용은 없고, 무슨 얼어 죽을 ‘땅을 샀다’라는 토지(土地) 매매증서(賣買證書) 형식(形式)을 갖추고 있으니, 황당(荒唐)하다는 것이다.
묘지석(墓地石)을 만들어 무덤에 넣은 목적(目的)은, “무덤에 영면(永眠)하고 있는 주인공(主人公)을 소개(紹介)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묘지석(墓地石)이 왜 필요(必要)하지?”
함에도 “반도(半島) 땅의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出土)된 묘지석(墓地石)”은 앞뒤를 싹둑 잘라버리고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는 것 외(外)는, 토지매매(土地賣買)를 위한 것밖에 없다.
함에도, 이러한 예(例)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누가 저술(著述)했는지도 모르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책자 기록(記錄)으로 고증(考證)된다』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無責任)한 것이다.
예(例)를 들어,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책이 누군가가 고의적(故意的)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하여 배포(配布)한 것이라면 : 그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陷穽)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바로 “열도(列島)는 일본(日本 : 倭), 반도(半島)는 조선(朝鮮)”이라는 함정(陷穽)이 고착(固着)되는데 전적(全的)으로 이용(利用)당하는 것이다.
☛ 안타깝게도 『“웅진(熊津)”은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는 “웅진(熊津)”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곧 “반도(半島) 백제(百濟)는 없었다”라는 것이고, 백제(百濟)는 중원대륙(中原大陸)의 토착왕조(土着王朝)였기 때문이다.
2026년 04월 21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 일본서기에 의해 고증이 되었다면 :
무령왕릉이 아니라,
사마왕릉이 맞는 말이 되어야 한다.
* 여기서 문제는: 일본서기가 '歷史的(역사적) 사실(事實)을 기록한 서서(史書)'냐? 하는 거다.
열도의 일본학자 간에도 이견(異見)이 있을 정도이고, 누가 저술했는지 조차도 모르는, 기년도 없는 출처불명(出處不明)의 책이다.
출처불명의 책자를 가지고 조선사의 고대사 일부를 고증한다?
이건 말 그대로 "헛소리요, 헛빨짓이다"
'반도조선'을 고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자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여기에 반도 땅의 국내사학자들만이 "일본서기"를 애지중지하고 있을 뿐이다.
* 왜?
반도 땅을 파고, 파고, 또 파봐도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반만년 화려한 강산 무궁화 삼천리를 외쳐댔지만 : 그 증거는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 그런다고 없었던 것이 만들어질 수 있나?
당연히 올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감합니다..
안녕하세요. "玄朝"님!
깊은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는젊음이들의 세상입니다.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기둥이지요.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발전, 번영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댁내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건강이 최곱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