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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의 1899년(대한 광무(光武) 3년) 8월 17일의 "법규 교정소 총재 이하를 인견하다."라는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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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규 교정소 총재(法規校正所總裁) 이하를 인견하였는데【총재 윤용선(尹容善), 의정관(議政官) 서정순(徐正淳)·이종건(李鍾健)·이윤용(李允用)·권재형(權在衡)·박용대(朴容大)·이선득(李善得)·브라운〔柏卓安 : J. McLeavy Brown〕·성기운(成岐運)·김영준(金永準)·구례(具禮), 위원(委員) 김익승(金益昇)·고희경(高羲敬)·현상건(玄尙健)이다.】
윤용선(尹容善)이 주본(奏本)을 올리고 이어서 아뢰기를,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반드시 정치(政治)가 어떠하고, 군권(君權)이 어떠한가 하는 것으로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천하에 소상히 보인 뒤에야 신하와 백성에게 그대로 따르고 어김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은 천명을 받들어 왕업을 창시하여 왕통을 전하였으나 아직도 이러한 법을 정하여 반포하지 못한 것은 거기까지 손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폐하는 뛰어난 성인의 자질로서 중흥의 업적을 이룩하여 이미 보위에 올랐고 계속하여 국호를 개정하였으니, ‘주(周) 나라는 비록 오래된 나라이지만 그 명이 새롭다.’는 것입니다. 억만 년 끝없는 행복이 실로 여기에 기초하였으니 선왕조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이것이 이 법규 교정소를 설치한 까닭입니다.
이제 조칙을 받드니, 본소(本所)에서 국제(國制)를 잘 상량하여 세워서 보고하여 분부를 받으라고 하였으므로 감히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고 공법(公法)을 참조하여 국제 1편을 정함으로써 본 국의 정치는 어떤 정치이고 본 국의 군권은 어떤 군권인가를 밝히려 합니다. 이것은 실로 법규의 대두뇌이며 대관건입니다. 이 제도를 한 번 반포하면 온갖 법규가 쉽게 결정될 것이니 그것을 교정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이에 본 소에서 모여 의논하였으므로 삼가 표제(標題)를 개록(開錄)하여 폐하의 재가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다 보신 후 하교하기를,
“이 주본에 대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이 같으며 외국인의 의견 역시 옳다고 하는가?”
하니, 용선이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같으며 외국인들의 의견도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쓰라고 명하고 비답하기를,
“이번에 정한 제도를 천하에 반시(頒示)하라.”
하였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제1조 대한국(大韓國)은 세계만국에 공인된 자주 독립(自主獨立)한 제국(帝國)이다.
제2조 대한 제국(大韓帝國)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 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다.
제3조 대한국 대황제(大皇帝)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 공법에 이른 바 정체(政體)를 스스로 세우는 것이다.
제4조 대한국 신민이 대황제가 지니고 있는 군권을 침손(侵損)하는 행위가 있으면 이미 행했건 행하지 않았건 막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한다.
제5조 대한국 대황제는 국내의 육해군(陸海軍)을 통솔하고 편제(編制)를 정하며 계엄(戒嚴)과 해엄(解嚴)을 명한다.
제6조 대한국 대황제는 법률을 제정하여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고 만국(萬國)의 공통적인 법률을 본받아 국내의 법률도 개정하고 대사(大赦), 특사(特赦), 감형(減刑), 복권(復權)을 한다. 공법 이른바 율례를 자체로 정하는 것이다.
제7조 대한국 대황제는 행정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관제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며 행정상 필요한 각 항목의 칙령(勅令)을 발한다. 공법에 이른바 치리(治理)를 자체로 행하는 것이다.
제8조 대한국 대황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과 임면(任免)을 행하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및 기타 영전(榮典)을 수여 혹은 박탈한다. 공법에 이른바 관리를 자체로 선발하는 것이다.
제9조 대한국 대황제는 각 조약국에 사신을 파송주재하게 하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및 제반 약조를 체결한다. 공법에 이른바 사신을 자체로 파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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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 국제는 한국 최초의 헌법이자, 동시에 시대착오적 전제군주정을 명시하는 악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전제정치”, “무한한 군권”을 운운하는 걸 보면 뭔가 소름끼칠 정도 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는 법이 왜 등장한 것일까요?
1842년 아편전쟁이 끝나고 중국은 본격적으로 서양의 국제법 체계로 편입됩니다. 이른바 조약시스템이 완성되어가는 것이죠. 이미 네르친스크 조약이나 캬흐타 조약을 통해서 근대적 조약을 맺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근대법적 질서인지도 몰랐고 스스로도 국제법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후 국제법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게 되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등장한 용어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국제법(國際法, inter-national한 law)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고 번역되었죠. 실제로는 휘튼의 <국제법 원리>를 <만국공법>으로 번역한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만국공법은 “만국(모든 나라)이 마땅히 지키는 공법(公法, 私法에서 말하는 공법에 가까운)”이라는 뜻입니다. 국제법은 서로의 국가 주권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 대전제이고 따라서 모든 국가에게 “강제”되는 것이 아닌 반면, 만국“공법”은 이른바 “국내법적 질서”를 국제사회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 조선, 일본을 모두 가리지 않고 만국공법에 대한 초기 인식은 국가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국내법적 질서의 확장판”으로 나타납니다. 안중근 선생님이 자신을 만국공법에 의거한 포로로 취급해달라는 말을 했을 때, 만국공법은 당연히 모든 국가가 당연히 지킬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었죠. 물론 이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가면서 국제법적 질서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힘에 의한 외교, 약육강식의 논리를 직접 보게 되자 만국공법에 대한 초기의 환상을 접고 “국제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대한국 국제입니다. 대한국 국제에 보면 중간 중간 공법(公法)을 운운하는 부분이 보입니다. 이게 곧 만국공법적 시각에서 국제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과정에서 대한국 국제가 나왔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이미 그 기사의 앞에서 나오듯 전근대사회에서 군주의 권리를 규정하는 법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것은 무한한 군권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국제법적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國家(nation)를 규정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군주정체 아래서 군주의 권리를 굳이 문서화하는 일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대한국 국제이고, 결과적으로 뭔가 국내에 적용될 헌법적인 구성이 아니라 국제법적인 이해만을 나열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 이 대한국 국제 내용의 기원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이건 1889년에 흠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입니다. 이 헌법은 독일 헌법을 참고해서 만든 것으로, 국내에서 한창이던 입헌운동에 맞서서 천황의 대권을 강고히 하는 헌법이었습니다. 종래 메이지 정부의 인사들은 천황의 대권을 규정하는 것이 불경이라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이를 계속 거부하다가, 국내의 반발이 심하고 국제적인 조약개정운동에 헌법이 필요한 것을 알고 헌법반포에 나서게 됩니다. 조약개정운동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일본이 지속적으로 추구한 것인데, 영사재판권 개정을 서구에서 일본 국내법의 미비로 거부하자 일본은 서둘러 국내법 체계를 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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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천황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2조와 유사)
제3조 천황은 신성하여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4조와 유사)
제4조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하고, 이 헌법의 조항에 따라 이를 행한다.(3조와 유사)
제6조 천황은 법률을 재가하며, 그 공포와 집행을 명령할 수 있다.(6조와 유사)
제10조 천황은 행정 각부의 관제와 문무관의 봉급을 정하고 문무관을 임면할 수 있다. 단 헌법이나 다른 법률에 정해져 있는 것은 그 조항에 따른다.(7조, 8조와 유사)
제11조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5조와 유사)
제12조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와 예산을 정할 수 있다.(5조와 유사)
제13조 천황은 전쟁을 선언하고, 강화하며 제반 조약을 체결한다.(9조와 유사)
제14조 ① 천황은 계엄을 선포한다. ②계엄의 요건 및 효력은 법률로 정한다.(5조와 유사)
제15조 천황은 작위와 훈장, 그 외 영전을 수여할 수 있다.(8조와 유사)
제16조 천황은 대사, 특사, 감형, 복권을 명할 수 있다.(6조와 유사)
(2장 이하 생략, 자세한 내용은 http://cafe.naver.com/historygall/728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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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천황(이라고 쓰고 총강이라고 읽어야하는)만을 옮겨 놓았습니다. 여기서 빠진 항목들은 의회와 관련된 것과 제 2조의 장자세습조항 뿐입니다. 대한제국에서 의회는 중추원이었는데, 국제 반포 이전에 중추원 관제개정이 무산되면서 이와 관련된 부분이 일괄적으로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걸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끄냐면, 일본 메이지 헌법을 참고하고 국제법적인 논리를 차용한 대한국 국제는 무한한 군권을 실제로 규정하고 강고히 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속된 말로 옆에서 하니까 나도 따라서 좀 해보자하는 심리에서 나온 것이고, 이게 요새에 와서는 헌법이라고는 하지만 그 당시에는 헌법적인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온 겁니다. 헌법은 최상위의 국내법이고 이후에 세워지는 모든 법의 기본이 됩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뭐가 많죠. 그런데 이 국제란 놈은 일단 메이지 헌법에서 의회는 차치하더라도 사법재판과 행정기능에 대한 조항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일종의 헌법총강만 딱 카피뜬 거에요. 그 말인 즉슨 만든 사람들이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란 겁니다. 실제로 다른 법들에 의해서 보충이 되는 거고, 당연히 여기서 뭔가 더한 의미를 이끌어 내는 건 맥락이 없는 일이 됩니다. 만든 사람들이 그걸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닌데 말이죠. 이걸 만든 사람들은 국제법적 관계에서 대한제국을 규정할 방법을 찾다가 그냥 일본꺼가 있으니까 따라하자 해서 만든 거고, 어느 정도 군권강화가 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전제군주정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니란 겁니다.
제가 보기엔 대한국 국제를 두고 전제군주권을 논하기보다는 갑오개혁에서 광무개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왜 중추원의 개방이 이루어지지 못했는가를 두고서 말을 해야 오히려 제대로 된 비판이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대한국 국제는 생각처럼 어마어마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실속 있는 비판을 받을 만한 것도 아닙니다.
첫댓글 대한국 황제권은 실로 입법 사법 행정법 외교와 군사권 까지 가지는 막강한 권한입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황제권은 이미 근대시대 현대시대에 들어선 것으로 즉 국제(법전)에 의해서 황제권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왕권보다 신권이 강하고 역사가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실제 조선의 왕권은 초월한 왕권으로 경국대전에도 명시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왕권은 신성한 것으로 감히 법규로 규제 할 수 없는 특권으로 법률의 구속에 벗어난 권리입니다.(물론 그렇다고 조선의 역대왕 들이 법치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다고 해야 겠군요) 대한제국이 전제군주국이간 근대 군주국인가의 차이는 바로 대
한제국 국제의 의해서 규명이 됩니다. 윗 글처럼 대한제국의 국제는 전제 군주국을 표방한 것이 아닌 좀더 개방적 법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해서 학계에서 대한제국을 전제군주국으로 단정하진 않습니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대체적 조선왕조의 갈등적 대립발전을 설명하기 위해서고 ... 대한국의 국제의 의한 황제권의 규정은 근대국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든 예입니다. 고종황제의 자잘못이나 평가를 하기 위해서 말한것은 아닙니다.
lhsz// "신권이 강한 조선"이라는 말이 웃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lhsz님께서는 [국왕의 권력(= 왕권)]과 [국왕의 권위]를 혼동하고 계십니다. 조선과 중국의 경우는 유교적 정치이념의 정착과 함께 정교한 '관료집단'을 수립함으로써, 함량미달의 저질군주 출현에 대한 대비와 폭군의 막나가는 국정운영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들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왕은 관료집단의 견제를 받게끔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죠(물론 전근대의 사례...). 특히 조선의 경우는 중국에 비해 이런 장치가 꽤나 역할을 제대로 해냈고, 나중에는 역으로 꼬이면서 '세도정치'라는 막장상황으로 흘러가기까지 합니다...ㅋ
말씀하신 구한말의 막장상황은 왕권이 강해서 일어난 사례가 아니라(그러니까, 이걸 왕권이 강한 사례로 들고 나오는 것 자체가 개그...ㅋ), 왕의 인척들이 "국왕의 권위"를 빙자하여 [사권화(私權化)된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되겠습니다...^^; 이는 왕권이 강한 상황이 아니라, 왕의 인척들과 그를 둘러싼 핵심 관료집단들이 조선의 통치체제 하에서 국왕의 권위를 '대행(?)'하면서 나타난 상황이라는 겁니다! 외척세도 기간에는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를 얼굴마담으로 하는 경화거족들의 '과두독재'가 이루어진 것이었고, 대원군 시절에는 얼굴마담이 왕의 아버지로, 민씨시절에는 왕의 마누라로 바뀐 것이었고- 따라서 왕권은 위축되었죠.
조선은 오히려 왕권과 그 친위관료집단의 권력이 망하면서 근대화가 시망한 케이스 중의 하나입니다...^^; 대저 후발근대화국가들 중에서 성공한 사례들을 살펴보면(예컨대 일본...) 강력한 정책실행력을 담보하는 [집권적 정부]의 구성이 근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만, 조선이나 대한제국은 그런 집권적 정부구성에 실패함으로써 근대화의 길을 멀리 돌아가다가 망하죠...-_-;
lhsz의 논리는 그닥 수긍이 되는 바가 없고, 망국의 책임을 따지는 방향도 타당하지가 않은 것 같군요. 조선왕조의 정치구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구비된 상태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뭐 사실 독일제국헌법->일본제국헌법->대한제국헌법으로 이어지는 노정이 아닐까요. 독일 제국의 카이저도 헌법상 보장된 권한이 매우 막강하다고 들었습니다.
첨언하자면 이거 만들어지면서 형벌 관련 법도 다시 개정되는데, 그 내용들을 보면 상당수가 대명률을 거의 본따 만들었습니다. 이런거만봐도 근대법에 대한 정신은 거의 없었다고 보는게 맞겠죠.
일본의 경우도 근대형법의 도입 이전에는 대명률을 기반으로 하는 <신율강령>, <개정률례> 같은 형법체계를 과도적으로 유지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경우도 근대적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근대법 체계가 정착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사유람단이 일본의 사정을 시찰한 후에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하면서 [율례사(律例司)]를 설치한 것을 볼 때, 1880년대에도 근대법에 대한 인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구요.
그런 일이 있었던게 사실이긴 한데.. 저는 이 법의 입법자들이 과연 과도기적 성격으로서 법을 제정했는지에 대해서 상당히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히려 굳이 따지면 반동적이라고 보는게 더 맞지 않을까 싶고요. 말씀대로 조선 내에서도 상당히 근대적 기류가 흐르고 있었고 사실 이 법안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재판소구성법 등이 제정되었던 바가 있습니다. 문제는 실제 그 법이 제대로 시행될 만한 역량을 당시 조선 정부가 갖추지 못했다는 거지요. 실제로 재판소구성법과 그 법에 의해 (그나마 일부나마) 설치되었던 재판소들도 대부분 큰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을 고려할 때, 과연 얼마나 근대적 기능이 작동했는지는 부정적입니다.
약간 논점이 어긋나기는 합니다만 조금 더 깊게 이야기를 한다면, 저 역시 장기적으로 조선이 근대화될 가능성을 부인하는것은 아니고,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조선의 근대화도 상당한 가능성이 있었다고 봅니다.. 마는, 당시 동아시아 국가들에 있어서 주어진 과제는 근대화 그 자체가 아니라, '제한된 시간 내'의 근대화였지요. 결과적으론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넓게는 타이완도)이나 모두 근대화를 이루었습니다만, 일본과 다르게 다른 두 국가의 근대화는 더욱 고통스러웠고 심지어는 나라를 잃-_-기까지 했다는 점을 볼 때 근대화의 내적 역량에 차이가 있기는 하다고 봅니다.
생각해 보니, '반동적'이라는 말씀에 수긍이 갑니다. 오히려 갑오개혁기보다 퇴행하는 상황이 나타나니까요...-_-; 그러나 근대법 체계의 도입이라는 '과정'에서 생각해 보면, 가능성 자체를 배제하기는 이른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근대화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내적역량 보다는 [외부환경]의 역할이 주효하다는 쪽이기 때문에- 전자를 좀 과소평가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서구권 국가의 근대화 착오나 국정의 혼란 등은 꽤나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고, 이는 비판받아 마땅한 일입니다만- 마치 그들의 역량 자체가 함량미달이라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식의 병신논리가 판치는 곳이 또 넷상 아니겠습니까?!...ㅎㅎ;;
또한 일본의 '내적역량'이 과연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서 과연 얼마나 뛰어났는가는 차제하더라도, 근대시기의 한중일은 이미 서구열강에 매인 [종속변수]로 전락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외부환경의 영향이 매우 주효한 만큼, 이쪽의 비중이 그리 작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을 내적역량의 우월을 바탕으로하는 선각적 자력근대화로 규정하고, 중국과 조선의 근대화 과정을 폄훼하는 논의가 꽤나 광범위한 상황인지라- 심적으로 꽤나 불편한 느낌이 많습니다...^^;
선각자적 문제에 있어선.. 국가가 무슨 의지적 존재도 아니고, 설령 국가를 이끄는 그런 존재가 있다고 해도 사회의 상하부구조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는 회의적인지라 저도 그런 의미로 말한거는 아니고, 여기서 말하는 역량(내지는 조건)은 막말 일본 사회의 하부구조가 청이나 조선보다 더 근대화에 적합한 형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미입니다. 아시다시피 근대화라는건 단순한 정치의 변혁과정이 아니고, 사실 정치가들이 근대화를 이루어낸다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굳이 따진다면 시대의 변동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역할 정도가 있을 수 있겠죠.
Charment님의 의견을 보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넷상의 무도한 자들이 그렇다는 애기죠.
물론 일본의 환경이 좀더 근대화에 적합했을 것이라는 점에는 굳이 이의를 달지는 않겠습니다만, 동아시아는 크게 보아 [소농사회]적 특성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만큼- 아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