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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부녀회 스크랩 독립운동가 최용신기념관 - 소설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을 찾아
조우옥-새마을부녀회 추천 0 조회 10 17.11.11 07: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용신(1909~1935,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선생은 독립운동가이며 농촌계몽운동에 26세라는 짧은 생애를 바쳤습니다. 안산시가 2007년 건립한 공립박물관(경기도 08-박-08호)이며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13-1-23)입니다. 선생이 샘골마을사람들과 함께 세운 ‘샘골강습소’가 있던 곳에 건립되었습니다. 지상의 외형은 샘골강습소를 복원한 형태라고 합니다.






주요 전시 유물은 선생의 건국훈장, 유언장, 상록수 초판본(1936년) 등이 있으며, 관련 사진 및 생존제자의 영상에세이, 영화 상록수가 담긴 영상물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영상관은 무료 체험 공간으로 무궁화 족자 만들기, 최용신 퍼즐 맞추기, 산가지 놀이 등의 다양한 활동들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최용신은 1934년 『여론』'농민의 하소연'에서 샘골마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수원역에서 수인선에 몸을 싣고 인천쪽으로 오십리쯤 달리면 일리(一里)라는 시골의 촌정거장에 내릴 수 있다. 여기서 되돌아 가까운 5리쯤 걸으면 적은 언덕아래 20호가 될락말락한 가난이 흐르는 촌이 곧 문제의 샘골(泉谷)이다. 뒤 언덕에 올라서면 앞으로 바닷물 드나드는 포구가 멀리 보이며 주위에는 붉은 산이 눈에 띄기는 하나 제법 울창한 솔밭도 곳곳에 있어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근방에는 구룡동(九龍洞)ㆍ각곡(角谷)ㆍ이동(梨洞)ㆍ오목동(梧木洞)ㆍ후곡(後谷)들의 마을들이 둘러있다. 샘골은 아마 이 여러 마을 가운데에서도 제일 가난한 마을이 아닌가한다”




조선의 부흥은 농촌에 있고, 민족의 발전은 농민에 있다"
최용신 선생은 함남 덕원(德原)에서 태어났습니다. 1928년 함남 원산의 루씨여고보(樓氏女高普)를 졸업하고 협성여자신학교(協成女子神學校)에 재학하면서, 일제 식민지 수탈에 의해 피폐된 농촌사회의 부흥을 위해 농촌계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29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총회 때 협성학생기독교청년회의 대표로 참가하였습니다. 황해도 수안(遂安)과 강원도 포항에 파견되어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31년 10월 YWCA 파견교사로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반월면(半月面) 샘골(천곡; 泉谷)에 파견되었습니다.




동아일보사는 창간 15주년 장편소설 공모전에 응모한 심훈의 상록수는 1935년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중에는 교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협성여자신학교 재학 시절 철저한 민족주의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스승인 황애덕은 3ㆍ1혁명 당시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애국자였습니다. 일본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신념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그러나, 각기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귀국과 동시에 샘골로 달려가 이전처럼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교복, 모자 등


다림판


자수로 수놓은 한반도 지도


최용신 선생은 예배당을 빌려 한글ㆍ산술ㆍ재봉ㆍ수예ㆍ가사ㆍ노래공부ㆍ성경공부 등의 학습을 시작하였습니다. 1932년 5월 정식으로 강습소 인가를 받았습니다. 동년 8월 천곡학원(泉谷學院) 건축발기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지역 유지들과 YWCA의 보조로 학원 건축을 시작하여 1933년 1월 15일 낙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1934년부터 YWCA의 보조금이 끊어지며,  학원의 운영이 극도로 어려워졌습니다. 지나친 과로로 1935년 1월 23일 사망하였습니다.


유언장 - 내 몸뚱이는 샘골과 조선을 위한 것이다



유 언(1935. 채록 안홍팔, 글씨 전재풍)
한 때 110여명에 달해는 강습생으로 붐비던 샘골강습소가 자금난으로 힘들어졌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생이 다해가는 순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샘골[천곡;泉谷]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십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샘골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최용신양을 기리는 글(류달영, 1974. 11. 30.)


일제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계몽의 선구로 불사조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상록수여 민중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샘골강습소 주춧돌


최용신 선생이 심은 나무들


심훈의 문학기념비


최용신 선생이 남기신 말씀


선생의 장례는 사회장(1935. 1. 23.)으로 치러졌습니다. 강습소 뒤편 양지바른 언덕(일리공동묘지)에서 모셔졌습니다.



최용신 선생 묘


최용신 선생은 샘골강습소에 대한 탄압에도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민족운동 차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동생 용경도 그녀 유훈을 받들고자 샘골학원 교사로서 자원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안김


만남


향함


이끎


만남 ~ 이끎 ~ 향함 ~ 안김 조형물이 상록수역에서 최용신기념관까지 이어져있습니다. 선생과 제자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릅니다. 최용신 선생은 한국YWCA 농촌지도사로서 샘골에 지원하였습니다. 주민들의 냉담한 반응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먼저 주민들에게 다가가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겸손ㆍ겸양과 헌신에 주민들은 감동했고,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는 영원한 ‘불사조’로 선생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은 후손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용신 기념관
홈페이지 : http://choiyongsin.iansan.net/
문의 : 031-481-3039
주소 : 경기 안산시 상록구 샘골서길 64
관람료 : 무료
관람시간 : 매일 09:00 - 18:00
휴무일 : 월요일 휴무1월1일, 설날, 추석연휴 휴관
찾아가는 길 : 4호선 상록수역 1번 출구 (500m)

 


<취재 : 청춘예찬 부모기자 이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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