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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왕 죽음의 애도 속에서 즉위한 새 왕
한 가정에서도 가장(家長)의 죽음은 커다란 충격이며, 집안의 많은 변화를 수반한다.
그렇기에 전근대시대 왕의 죽음이 당시 사회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왕의 죽음과 관련된 의례들은 한 가정의 죽음 의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규모가 성대하고 보다 복잡하며, 의례 기간이 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인 절차 및 용어는 비슷하다.
순종황제 국장 행렬
조선시대에는 모든 의례를 기록한 의궤가 자세히 남아 있다.
다만 의궤에 현장 그림 자체는 남겨져 있지 않다. 조선시대 마지막 고종과 순종의 경우에는 근대화의 산물로서 장례 절차와 관련된 현장 사진이 남아 있어 참고가 된다.
장례 행렬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왕의 장례가 얼마나 커다란 사건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왕이 죽으면 새로운 왕이 즉위한다.
새 왕의 즉위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즉위와 관련된 의궤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실제 즉위식도 간략히 진행된 것은 바로 전 왕의 장례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즉위하기 때문이었다.
전 왕의 죽음에 대한 애도 속에서 이처럼 다음 시대 왕의 즉위가 있고, 그와 관련하여 긴박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진행된다는 것이 사실상 왕의 죽음과 관련된 가장 커다란 사건일 것이다.
순종황제 즉위식 장면
즉위식은 전왕의 국상 중에 이루어지므로 이처럼 간소하게 진행되며, 즉위식과 관련된 의궤 또한 따로 남겨지지 않았다.
“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 국장의 절차
유교는 명분(名分)을 중시하므로 항상 대상에 따라 용어가 다르다.
죽었다는 표현도 『예기』에 의하면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서민은 사(死)라고 규정했다.
조선의 왕은 제후에 해당하므로 ‘훙’이란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데, 실록에서는 통상 “상(上)이 승하(昇遐)했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장례에 대한 용어도 달랐다.
국왕과 왕비의 장례는 국장(國葬), 세자와 세자빈의 장례는 예장(禮葬), 황제의 장례는 어장(御葬)이라고 했다.
왕이 사망하면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과 염습 등 관련 사무를 관장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 설치되어 각각 업무를 나누어 담당했다.
국장이 끝나면 도감마다 의궤를 작성했다. 현재 남아 있는 의궤를 참고하면서, 다양한 의례에 담긴 의미를 중심으로 국장 절차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국왕이 사망하면 내시가 국왕이 평소 입던 옷을 가지고 궁궐 지붕에 올라가 세 번 “상위복(上位復)”이라 외친다.
유교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혼이 몸속에 함께 있는 상태를 말하며, 몸에서 혼이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했다.
죽은 자에서 떠난 혼은 죽은 자의 혼들이 모여 있는 북쪽으로 간다. 전깃불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죽은 자에서 혼이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것을 최명희의 소설 제목으로도 유명한 ‘혼불’이라고 한다.
‘상위복’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님의 혼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죽은 자가 평소 입던 옷을 흔드는 것은 자신의 채취가 밴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왕비의 경우는 ‘중궁복(中宮復)’이라고 소리쳤다.
이 풍속은 일반에서도 있었는데, 통칭 가는 혼을 부른다는 의미에서 ‘초혼(招魂)’이라고 한다. 김소월의 시 ‘초혼’은 그야말로 혼을 부르는 심정으로 그리운 이를 노래한 것이다.
유교의 예법에서 떠난 혼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역시 대상에 따라 달라서, 천자는 7일, 제후는 5일, 일반인은 3일이었다.
조선시대 왕은 제후에 해당했으므로, 5일을 기다린 후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닷새간은 한편으론 장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습(襲), 옷과 이불로 시체를 감싸는 소렴(小殮)과 대렴(大殮)이 진행되었다.
대렴이 끝나면 시신을 관에 넣었는데, 국왕의 관을 재궁(梓宮)이라고 했다.
일반인의 상례 때에는 빈소에 관을 그대로 두지만, 국장에서는 찬궁(梣宮)이라는 큰 상자를 만들어 그곳에 재궁을 모셨다.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나오는 찬궁도
입관 후에는 상복을 입게 되는데, 그것을 성복(成服)이라고 한다.
상복은 확실히 사망했다고 본 시점에서 입는 것이므로, 입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새 국왕의 즉위식은 상복을 입은 상태에서 거행되었고, 자연히 전왕에 대한 추모로 슬픔이 큰 자리이기도 했다.
입관 후 왕은 유교 예법에 따라 5개월 만에 국장을 치렀다.
이 기간 동안 시신을 모시는 곳을 빈전(殯殿)이라고 하는데, 일반인들의 빈소와 같은 의미다.
국장 기간 동안 후계왕은 빈전 옆의 여막에 거처하면서 수시로 찾아와 곡을 함으로써 어버이를 잃은 자식의 슬픔을 다했다.
고종황제 빈전 모습
고종은 1919년 정월에 승하하였다.
이 사진은 1919년 3월 경성일보사에서 발행한 『덕수궁 국장화첩』과 이 책을 재편집하여 1980년 10월에 화신출판사에서 출간한 『대한제국 고종황제 국장화첩』에 실려 있는 것이다.
고종의 빈전인 함령전 앞에 세운 여막
국장 기간이 긴 것은 왕릉 조성에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왕릉 공사는 5000명이 넘는 인원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사로, 모든 과정을 산릉도감에서 담당했다.
왕릉 조성이 이루어지면, 빈전에서 발인이 시작되어 왕의 관이 궁궐을 떠나고 노제(路祭)를 거쳐 장지에 이른다.
만 명이 뒤따른 국장 행렬
왕의 시신이 빈전을 떠나 장지에 이르는 길은 백성들의 커다란 슬픔 속에서 진행되지만, 그 국장 행렬 자체는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엄숙함과 왕의 권위가 어우러진 성대한 의식이었다.
이 과정은 『국장도감의궤』 반차도에 잘 나타나 있다.
1800년에 있었던 정조의 국장 행렬을 그린 반차도에는 총 40면에 1440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다.
뒤에 1897년의 명성왕후 국장 반차도에는 총 78면에 2035명의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의 황실 행사였으므로 그 규모가 더욱 커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 속에 나온 인원만이고, 통상 국장 행렬에는 군인, 상여꾼, 왕과 신료 등 근 1만 명의 대인원이 참여했다.
무엇보다 엄숙하고 장중하게 치러야 하는 행사였기에, 수많은 참가자는 미리 반차도를 통해 도상 연습을 하고 행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숙지했다.
참고로 정조의 국장 행렬을 보면 맨 앞에 경기감사가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장지가 화성이었으므로, 이 지역을 관장하는 경기감사가 선도에 선 것이다.
그 뒤로 국장을 집행하는 기관의 고위 책임자들이 상복을 입고 따르고 있으며, 그 뒤로는 군인 400명이 정복에 소총을 휴대하여 뒤따르고 있다.
계속하여 다양한 깃발, 악대, 제기, 의장물, 각종 책, 도장, 가마 등이 뒤따른다.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4인의 방상시(方相氏)인데, 이들은 악귀를 쫓는 역할을 했다.
고종황제 국장 행렬 시 실제 사용했던 방상시 사진이 있는데, 머리에 곰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네 개의 번쩍이는 황금 눈이 있는 방상시 탈을 쓴 사람을 수레에 태워 창과 방패를 휘둘러 귀신들을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정조국장도감의궤』 반차도의 앞부분
맨 앞에 경기감사라고 쓰여 있다.
『정조국장도감의궤』 반차도의 앞부분
그 뒤로 앞쪽에 국장을 집행하는 고위 책임자들이 따르고 있다.
행렬 중심부에는 국왕의 이름을 밝힌 명정을 앞세우고, 대여(大轝)가 지나간다.
대여는 국왕의 시신이 있는 가마이므로 규모가 크며 행렬의 가장 중심이 된다.
대여의 양 옆에는 6개의 삽이 호위하고, 그 옆에 24명의 군사가 등불을 밝히고 그 바깥에는 호위 군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삽이란 일종의 나무 부채로, 관의 좌우에 세워 해를 가리거나 먼지가 끼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사용했다.
삽은 흰 천에 수놓은 문양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궁자 모양이 서로 등을 대고 있는 문양은 불삽, 도끼 문양은 보삽, 구름 문양은 운삽 혹은 화삽이라고 했다.
유교 예법에서 국장 행렬에 사용하는 삽의 종류는 천자는 8개, 제후는 6개를 사용했다.
제후국이었던 조선의 왕은 불삽, 보삽, 화삽 각 2개씩 총 6개를 사용했다.
행렬의 후반부에는 각급 관리, 궁녀, 군인 등이 뒤따랐다. 곡을 담당한 궁녀는 모두 베일을 쓰고 얼굴을 가렸으며, 이들의 바깥에는 다시 휘장을 둘러 도로변에서 볼 수 없도록 했다.
고종황제 국장 때의 방상시
고종황제 국장 시 동대문을 지나는 대여와 삽 사진
불삽과 화삽이 잘 나타나 있다.
‘잉(孕)’과 ‘강(岡)’을 중시한 왕릉
왕릉의 입지는 배산임수(背山臨水)와 사신사(四神砂)를 기본으로 하는 일반적인 풍수의 명당 선정과 동일했다.
사신사란 무덤을 뒤에서 보호해주는 현무(주산), 앞에서 보호해주는 주작(안산), 왼쪽에서 보호해주는 청룡, 오른쪽에서 보호해 주는 백호라는 네 개의 산을 말한다.
풍수의 사신사(四神砂)의 기본 개념도
그런데 조선 왕릉은 이러한 조건 외에 특히 ‘잉(孕)’과 ‘강(岡)’을 중시했다.
뒷산의 주맥이 내려와 뭉친 무덤 바로 뒤에서 맺혀 볼록한 지형을 입수(入首) 혹은 잉이라고 한다.
또한 앞산의 영향으로 무덤 바로 앞이 둥글게 맺힌 것을 전순(前脣) 혹은 강이라고 한다. 조선 왕릉은 비교적 높지 않은 산자락에 위치하되, 특히 잉과 강이 발달한 곳을 선택했다.
그 결과 어느 곳에 위치한 조선 왕릉이라도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더욱 우람해 보인다.
이러한 왕릉의 입지에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왕릉은 살아생전 남면(南面)하던 왕의 지위에 맞게 원칙적으로 남향으로 축조되었으며, 그에 따라 위의 조건에 맞는 곳이라도 남향이어야 했다.
조선 왕릉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세 단계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실 등이 있는 곳은 죽은 자가 묻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진입 공간이다.
이 진입 공간의 끝에는 금천교가 있다. 돌다리인 금천교를 지나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붉은색의 커다란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홍살문이라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 왕릉을 지키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수복방이 배치된 곳은 제향 공간이다.
이 제향 공간에서 언덕(잉) 위의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공간은 죽은 자가 안치된 능침 공간이다.
능침 공간의 조성은 봉분을 중심으로 다양한 석물(石物)이 배치되었다.
먼저 봉분을 둘러싸고 곡장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얕은 계단을 만들어, 층마다 다른 석물들을 세웠다.
가장 낮은 층에는 무인석과 석마(石馬)를 두었으며, 그 위에는 문인석과 석마 그리고 불을 켜는 장명등을 두었다.
맨 위층에는 석상과 망주석을 설치했다.
왕릉의 석상은 일반 묘에서 제사 음식을 차리는 상석과는 달리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왕릉에서는 제사음식은 정자각에 차렸으며, 봉분 앞의 혼유석은 몸을 찾아온 혼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이다.
혼유석 좌우의 망주석은 몸을 찾아오는 혼이 멀리에서도 왕릉을 알아볼 수 있도록 높직이 세운 돌기둥이다.
곡장 안 북쪽에 두 개의 석호(石虎)를 세웠는데, 곡장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이 돌호랑이는 북쪽에서 각종 잡귀들을 막는 역할을 했다.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석양(石羊) 둘을 세우고 그 사이에 석호(石虎) 하나를 배치했다.
둥근 봉분도 병풍석·난간석이 있고, 봉분 안에 시신을 안치한 석실(현궁)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왕릉 공간의 다양한 구성물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의 규정대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조선 왕릉은 언뜻 보면 마치 기계로 찍어낸 듯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살펴보면 석물의 구성뿐 아니라 모양에 있어서도 모두 차이가 있어, 각 왕릉에는 시대적 흐름이 담겨 있다.
왕릉 배치도
특히 세조는 자신의 왕릉 조성 시에 석실 대신 회격실로 할 것과 무덤을 보호하는 병풍석을 사용하지 말 것을 생전에 지시했고, 부부합장묘 대신 각각 따로 조성하는 것을 선호했다.
흔히 이러한 조치는 능제의 간소화 정책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그 속에 담긴 실제 뜻은 풍수사상의 신봉에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시신이 명당 터의 기운을 직접 받고자 석실을 만들지 않았으며, 병풍석으로 봉분에 하중을 주면 물이 찰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방지하고자 했고, 왕과 왕비 묘를 따로 조성함으로써 양쪽에서 풍수 기운을 받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조왕릉(광릉)
왕릉의 조성은 엄청난 규모였을 뿐 아니라 많은 석물이 동원됨으로써 엄청난 인력이 투입되는 거대한 공사였다.
드디어 국장 행렬이 장지인 왕릉에 도착하면 관을 정자각에 모시고, 찬궁에서 관(재궁)을 꺼내어 하관했다.
그런데 왕릉은 봉분의 규모가 커서 일반 묘의 하관과는 달랐다.
재궁을 석실에 안치할 때에는 윤여(輪輿)라고 하여 둥그런 나무들이 회전하도록 만든 수레바퀴를 이용해 옆으로 들여놓았다.
모든 왕릉 절차가 끝나면 혼을 위로하는 우제(虞祭)를 지내고, 가신주(假神主)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혼전(魂殿)에 두었다. 혼전에서 삼년상을 지낸 후, 혼전에 모신 가신주를 꺼내어 종묘 터에 묻고 새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모셨는데 이를 부묘(祔廟)라 한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국장이 완결된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추모하는 것은 일반이나 왕실이나 같다.
3년상이라고 해도 부모가 돌아가신 지 3년째 되는 날까지 상을 치르는 것으로, 만으로 따지면 2년이다.
그런데 3년이 되었다고 하여 바로 탈상하는 것은 아니고 일정 기간의 유예를 두었으므로, 흔히 3년상의 기간은 만 26개월 정도 되었다.
이러한 3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 기초하여, 역시 부모를 추모하는 데에 3년이라는 시간을 바치고자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양반들, 목숨 걸고 풍수를 공부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의례와 왕릉 조성의 기본 정신은 왕의 죽음을 성대하면서도 깊은 애도 속에 추모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법과 관련된 논쟁이 벌어지고 왕릉 입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정치 세력들은 바로 이러한 장례와 관련된 예법과 왕릉 선정을 상대 당파에 대한 정치적 공격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법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건은 비록 왕은 아니었지만, 16대 국왕 인조의 계비였던 조대비(趙大妃, 1624~1688)의 복제(服制) 문제였다.
그녀가 아들인 효종, 며느리인 인선왕후, 손자인 현종의 상례 때 입을 상복을 두고 몇 차례의 대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유교적 상례에 있어 친족들이 망자(亡者)를 위해 입는 상복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었다.
이를 오복제(五服制)라고 하며, 참최·자최·대공·소공·시마로 나뉘어 상복을 입는 기간과 방식에 전부 차이가 있었다.
조대비의 상복이 처음 문제가 된 것은 조선 왕조 의례의 전범이라고 할 『국조오례의』에 국왕의 상에 모후가 입을 상복을 규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대비가 어떤 종류의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예법의 문제는 처음에는 유교 예학의 학술 논쟁처럼 전개됐으나, 점차 당파적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정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그 결과 이 논쟁은 1659년 제1차 예송(기해예송), 1674년 제2차 예송(갑인예송), 그리고 1675년 을묘예론까지 3번의 커다란 정변을 야기했고 온 조정이 몇십 년씩 분열되었다.
예법과 관련된 논쟁보다 더욱 정치적이고 지속적인 문제를 야기한 것이 왕릉 입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중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안로는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자 권력을 남용하고 다녔고, 그러한 행동이 문제를 일으키자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정적을 공격하고자 했다. 이리저리 골몰하던 김안로는 자기를 유배시킨 자들이 바로 22년 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릉인 희릉의 책임자였다는 것을 알았다.
김안로는 중종 32년에 희릉 속에 큰 돌이 깔려 있어 흉지라는 발언을 하며, 이를 천장(遷葬, 묘를 옮기는 것)시켜야 한다고 상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이제 풍수 논쟁이 전개된다.
얼핏 보면 풍수서와 풍수가가 동원되는 학술 논쟁의 형태를 띠지만 결국은 정치 논쟁으로 비화되는 것이고, 힘 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김안로가 제기한 이 사건도 끈질긴 풍수 논쟁이 전개되다가 마침내 천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되어 당시 희릉을 담당했던 관리들은 대역 죄인이 되어 자손들까지 옥에 갇히는 변고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의 무덤 하나가 생사람까지도 잡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정치적 이슈가 바로 왕릉의 입지였다.
그러므로 양반들은 풍수 공부를 목숨 걸고 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의 풍수 논쟁은 실록에 중요하게 나온 것만도 100여 건에 이른다.
평균 5년에 한 번꼴이니, 풍수가 조선시대 사대부의 필수 교양과목이 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흔히 최고의 풍수가가 동원된 조선 왕릉이 어떻게 전부 명당이 아닐 수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의 일화에서 보듯이, 실제 왕릉의 입지 및 천장은 대단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결정된 것이 많았다. 또한 왕릉으로 선정되면 주변 10리 정도는 모두 비워야 했으며, 이는 사대부의 선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양반들은 가능하면 왕릉을 이왕 쓴 곳 옆에 다시 잡고자 했다.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등 여러 왕릉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그 결과 입지 조건이 떨어지는 왕릉도 많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처럼 왕의 장례와 왕릉 조성이라는 전왕에 대한 지극한 의례의 이면에는 불꽃 튀는 정치사적 논쟁이 개입되어 있다.
더욱이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라면, 여기에 더해 누구를 새 왕으로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엄청난 궁중 암투가 전개된다.
그것은 왕의 죽음에 수반된 새 왕의 즉위가 너무나 커다란 정치적 변동이기 때문이며, 새 왕의 즉위를 계기로 정치 주도세력의 변화를 모색할 소재가 장례 예법이나 왕릉입지에서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