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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鄭鑑錄)】 1. 감결(鑑訣)
정감록은 정본이 없다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이본이 많다.
온갖 도참서가 다 섞인 형태로 전해지지만, 정감록 모든 판본에 포함되기 때문에 아마도 원형이리라 추측하는 것이 감결(鑑訣)이다.
그리고 감결은 내용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또는 가야산)에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정감록이라는 제목 때문에 세간에는 정도전이 저술했다고도 하고, 혹은 정여립이 저술했다고도 하지만 설득력은 없다.
정몽주나 그 후손이 썼다는 설도 있는데, 조선왕조 건국 직후 불안한 민심을 배경으로 이 책이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정씨 성을 가진 구세주인 정도령이 조선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기본 줄거리 자체는 이미 16세기 말, 정여립의 난을 일으킨 정여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울러 인조 9년(1631) 2월 3일자 인조실록에 의하면 옥천에 사는 권대진이라는 자가 예언을 믿고 모반을 일으켰는데, 그와 한패인 권락과 권계 등은 '영남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한(澣)이고,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역시 권대진과 한 패인 양천식은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 날 기이한 사람을 보았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한(澣)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새로운 도읍의 주인이 될 만하였다.'라면서 장차 충청도의 계룡산을 새 도읍으로 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18세기 영조, 정조 무렵에 나왔다고 추측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역사 기록들 중에서 정감록이 최초로 언급된 예는 조선 영조 15년(1739) 6월 9일자 승정원일기인데, 여기서 영조 임금은 "정감록은 도적들이 믿는 책이니 매우 교활하고 사악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감록이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그 이전에도 정감록의 원형으로 추정, 포함되는 예언서들은 전해졌다고 추측한다.
세조 3년(1457) 5월 26일자 세조실록 기사를 보면,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노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수찬기소(修撰企所),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들을 개인이 갖지 말고, 나라에 바치도록 명했다."라는 내용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 민간에서 계속 돌아다녔고, 조선왕조가 무너진 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정조 9년(1785)에 일어난 이율, 양형, 홍복영의 모반 사건(정감록 모반 사건)에 정감록이 확실히 등장하기 때문에, 분명히 그 이전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정도령의 모델이 실제로 청나라에 대항해 명나라를 복원하려고 한 정성공이나 그의 아들 정경이라고 보는 최근 학설에 의하면, 17세기 중반(인조 말 - 효종 연간)까지 성립연대를 올려 보기도 한다.
그 증거로 숙종실록 숙종 23년(1697) 1월 10일 3번째 기사 장길산의 난 항목을 보면 "중국인 승려 운부가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정진인 신앙이 숙종 대에는 확실히 있었고, 정성공이 주창한 반청복명 사상과 연관이 있다는 한 가지 증거가 된다.
그러나 정성공이 반청복명 활동으로 유명해진 때는 아무리 빨리 잡아야 명나라가 망하고 그가 무장투쟁을 시작한 1647년 이후부터다.
인조실록이 기록되던 17세기에는 인터넷도, TV도, SNS도 없었던 때였는데 과연 조선인들이 고작 7살밖에 안 된, 그것도 먼 남의 나라에 사는 외국인 아이를 구세주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정경이라는 7살짜리 어린 아이가 있음을 알기나 했을까? 물론 정성공이란 인물이 알려진 뒤에는 그 명성이 해상진인이나 해도진인 전설에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도령 자체가 정성공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자 논리비약이다.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내걸고 전쟁을 벌이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인들은 스스로 성이 정씨라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영웅을 그려낸 것이다.
정감록에 '이씨가 망한다.'는 구절이 있으므로 조선왕조에 반대하는 의도를 내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부 학자들은 정감록이 성리학을 위시한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형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런 내용 탓에 조선 시대에는 금기시되었지만 민간에는 암암리에 퍼졌다.
鄭鑑錄(정감록) - 鑑訣(감결)
“完山伯有三子 長曰淋 次曰沁 三曰淵 與鄭勘 遊於八道山水
완산백유삼자 장왈임 차왈심 삼왈연 여정감 유어팔도산수
上金剛山飛簾臺 相謂曰 天地陰陽 先爲周張
상금강산비렴대 상위왈 천지음양 선위주장
鄭曰 自崑崙 至白頭 平壤 己過千年之地 運移於松岳 五百年之地 妖僧宮姬作亂
정왈 자곤륜 지백두 평양 기과천년지지 운이어송악 오백년지지 요승궁희작란
地氣衰敗 天運否塞 移於漢陽 其略曰
지기쇠패 천운부색 이어한양 기략왈
干戈未定君臣死 南渡蛟龍人何去 瑞日乾坤長夜明 須從白兎走靑林
간과미정군신사 남도교룡인하거 서일건곤장야명 수종백토주청림
李曰 來脉運於金剛 至太白小白 山川鐘氣 入於鷄龍 鄭哥八百年之地
이왈 래맥운어금강 지태백소백 산천종기 입어계룡 정가팔백년지지
元脉伽倻 趙哥千年之地 全州 范哥六百年之地 至於松岳 王氏復興
원맥가야 조가천년지지 전주 범가육백년지지 지어송악 왕씨복흥
其後未詳 不可考 坐三角白雲臺 某歲某年 有知覺者生 無知覺死
기후미상 불가고 좌삼각백운대 모세모년 유지각자생 무지각사
李曰 何時 其然也
이왈 하시 기연야
鄭曰 余子孫末 宮中寡婦意自專 殿下嬰兒手自推
정왈 여자손말 궁중과부의자전 전하영아수자추
國事將非 軍身無依 村村水杵 家家人蔘 家家及第 人人進士 世人偕后
국사장비 군신무의 촌촌수저 가가인삼 가가급제 인인진사 세인해후
有賢人以自乏論 士子橫冠 神人脫衣 順其理也 走邊橫己 聖諱加入
유현인이자핍론 사자횡관 신인탈의 순기리야 주변횡기 성휘가입
鷄龍石白 草浦行丹 黃霧黑雲 赤陽三日 慧星出於軫頭 入干河間
계룡석백 초포행단 황무흑운 적양삼일 해성출어진두 입간하간
起於紫微 移於牛星間 諸大中小中偕亡
기어자미 이어우성간 제대중소중해망
李曰 三角爲窺峰 白岳爲主峰 漢江爲腰帶 稽山爲靑龍 冠岳爲案山 王宮三火
이왈 삼각위규봉 백악위주봉 한강위요대 계산위청룡 관악위안산 왕궁삼화
冊子起炎 上憂下撓 吏殺太守 綱常永殄
책자기염 상우하요 리살태수 강상영진
李曰 明年春三月 安竹之間 積屍如山 聖世 秋八月 仁富之間
이왈 명년춘삼월 안죽지간 적시여산 성세 추팔월 인부지간
夜泊千艘 龍仁驪唐之間 人影絶跡 隋唐之間 鷄犬無聲
야박천소 용인려당지간 인영절적 수당지간 계견무성
鄭曰 是何言也
정왈 시하언야
李曰 保身之地 有十處 一曰豊基 二曰安東 三曰開寧龍宮 四曰伽倻 五曰丹陽
이왈 보신지지 유십처 일왈풍기 이왈안동 삼왈개령용궁 사왈가야 오왈단양
六曰公州定山三尋麻谷 七曰鎭木 八曰奉化 九曰醴泉乃永居之地賢相良將
육왈공주정산삼심마곡 칠왈진목 팔왈봉화 구왈예천내영거지지현상량장
継継而出 十曰太白
계계이출 십왈태백
沁曰 求穀種於三豊之間 求人種於大小白之間 此十處 兵火不入 凶年不入
심왈 구곡종어삼풍지간 구인종어대소백지간 차십처 병화불입 흉년불입
逢白衣賊人則 結婚姻兄弟話語樂談 永嘉之間 和氣融融 永嘉此山內也
봉백의적인즉 결혼인형제화어락담 영가지간 화기융융 영가차산내야
金剛之西 五臺之北 十二年賊穴 九年之水 十二年兵火 人何避之乎
금강지서 오대지북 십이년적혈 구년지수 십이년병화 인하피지호
入於十勝之地者 觀其時而徃 日暮西歸 言之長也 歸于西庵 明日又自金剛
입어십승지지자 관기시이왕 일모서귀 언지장야 귀우서암 명일우자금강
至伽倻
지가야
鄭曰 富者多財之故 負薪入火 貧者無恒産之故 安徃而不得貧乎 稍有知覺者
정왈 부자다재지고 부신입화 빈자무항산지고 안왕이불득빈호 초유지각자
觀其勢而往
관기세이왕
李曰 漢南百里人影永絶 黃平兩西則 三年之內 千里無烟 幾內東峽爲空墟
이왈 한남백리인영영절 황평양서즉 삼년지내 천리무연 기내동협위공허
賊民自全州起兵 華澤之間 萬艘橫江 此大患也 又曰末世則 吏殺太守
적민자전주기병 화택지간 만소횡강 차대환야 우왈말세즉 리살태수
小無忌憚 上下分裂 滅絶綱常 出主少國(危)疑孑孑之際 世祿之臣 有死而己
소무기탄 상하분열 멸절강상 출주소국위의혈혈지제 세록지신 유사이기
鄭曰 末世之事 吾末詳細然 九歲大歉 人民食木皮而生 四歲染氣人命除半
정왈 말세지사 오말상세연 구세대겸 인민식목피이생 사세염기인명제반
淵曰 後世愚眼 必以龍門爲隱身之方 盖山水之法以年言之則 有生氣己脫於漢陽
연왈 후세우안 필이용문위은신지방 개산수지법이년언지즉 유생기기탈어한양
其中氣穴勢皆死穴故 後人若居此則 五臺之北 賊民搜出 不一年內萬命灰死
기중기혈세개사혈고 후인약거차즉 오대지북 적민수출 불일년내만명회사
沁曰 若有知覺者 入於十勝地 必有愚夫愚婦挽留無論公私 大小禍福 何可盡諭
심왈 약유지각자 입어십승지 필유우부우부만류무론공사 대소화복 하가진유
鄭曰 鷄龍石白 平沙三十里 南門復汝子孫末鼠面虎目 大歉時至 虎患害人
정왈 계룡석백 평사삼십리 남문복여자손말서면호목 대겸시지 호환해인
魚搤至貴 泉渴山崩則 白頭之北 胡馬長嘶 両西之間 寃血漲天 漢南百里人何居焉
어염지귀 천갈산붕즉 백두지북 호마장시 양서지간 원혈장천 한남백리 인하거언
『沁曰 木覓山 乃産陰形地 士大夫 添累則 一國無禮 此則奈何
심왈 목멱산 내산음형지 사대부첨누즉 일국무례 차즉내하
鄭曰 此則無憂 陰風防塞 黃氏無后(後)
정왈 차즉무례 음풍방색 황씨무후
沁曰 鷄龍開國 卞相裵將 開國元勳 房姓牛哥 如手如足
심왈 계룡개국 변싱배장 개국원훈 방성우가 여수여족
大小白之間 舊斑復古 盖人世避身 不利山 不利水
대소백지간 구반복고 개인세피신 불리산 불리수
最好兩弓 汝子孫末 國祚盡於八壬 乱於木卜 終於我子孫
최호양궁 여자손말 국조진어팔임 란어목복 종어아자손
沁曰 我子孫 殺汝子孫 汝裔殺我裔
심왈 아자손 살여자손 여예살아예
淵曰 十勝尤好 人世避身 然鳥及大路奈何
연왈 십승우호 이세피신 연조급대로내하
鄭曰 鳥嶺築城 大軍浮海船 南入全州 湖中賊民聚黨則 華澤兩西人命殺害故
정왈 조령축성 대군부해선 남입전주 호중적민취당즉 화택양서인명살해고
此十處 不入兵火凶年 捨此何居
차십처 불입병화흉년 사차하거
鄭曰 張氏倡義 首乱之期在 庚炎有知覺者 去十勝之地 然先入者還 中入者生
정왈 장씨창의 수란지기재 경염유지각자 거십승지지 연선입자환 중입자생
後入者死 此十勝處 兵火不入 六道之民 有死而己 四面如是如是
후입자사 차십승처 병화불입 육도지민 유사이기 사면여시여시
歉歲九年 此處不入凶年 盖山水之法 奇哉奇哉 後有知覺者 行乞入而可
겸세구년 차처불입흉년 개산수지법 기재기재 후유지각자 행걸입이가
壬臘壬三 無事僥倖 雖有事 鄕野何安
임랍임삼 무사요행 수유사 향야하안
鄭曰 鷄龍之南外四郡 亦避身之一段 尤踰畿東峽
정왈 계룡지남외사군 역피신지일단 우유기동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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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감록 - 감결(鑑訣)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 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완산백(完山伯)으로 임명된 한 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 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 라고 말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 라고 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 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 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 진성(軫星)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 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말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 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 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 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 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 라고 말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 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 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 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 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 라고 말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무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 라고 말하자, hl2tci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 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 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 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 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 라고 말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 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 라고 말했다.

첫댓글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