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누이와의 만남
도청 산림과 임도계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임도계원을 따라 횡성군 서원면으로 출장간 적이 있다. 당시에는 횡성읍에서 서원면 소재지인
창촌리까지 도로가 없어서 오솔길을 걸어서 갔는데 중간에 굉장히 높은 재를 넘어야 했다. 그 길은
횡성읍에서 춘천방향으로 2㎞쯤 가서 서쪽으로 또 2㎞쯤 가면 바로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 산
을 넘어야 창촌리로 가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그 산이 멀리 보이는데, 저 산을 어떻게 걸어서 넘었을까 할 정도로
높은 산이다.
창촌리에서는 임도 개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우리는 그 공사의 진행상황을 보러 갔었다.
그후 나는 혼자서 이 창촌리로 간 일이 있다. 혼자서 그 놓은 산을 넘었지만 별로 무섭다는 생각은
없었고, 땀을 흘리며 험한 재를 넘는 게 도리어 즐거웠던 것 같다.
창촌리에서 며칠 일을 보다가, 여기서 문막면 동화리까지는 30여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귀청길에 동화리를 거쳐 가기로 하였다. 길도 모르는 초행길이지만 물어물어 혼자서 걸어갔다.
길이 조그만 시내를 따라 나 있어서 고개도 없는 평지길이다. 동화리에서 큰 누이를 만났다.
어릴 때 보고 10여년 만이다.
여기서 둘째 누이가 문막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내친김에 그 길로 문막까지 갔다. 별로 피곤한 줄 몰랐다.
문막서 둘째 누이를 만났다.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내 헤어진 후 소식도 모르고 서신왕래
도 없다가 만났으니 그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매형 되는 분도 처음 인사를 하게 되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 누이는 지난날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의 형은 과묵하고 엄하게만 느껴지는 분이어서 나의 어릴 적 이야기는 별로 들려주지 않았는데,
여기서 나는 놀랍고도 새로운 사실을 많이 듣게 되었다.
우리는 문막으로 이사 오기 전에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에서 살았다. 여주에는 원 씨 집안이 많이 살고
있으며 우리 집도 대대로 그 곳에서 살아왔다.
할아버지는 益자 常자 되시는 분으로 구한말에 병과(兵科)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사또를 역임하고,
함경북도 길주목사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여주에서 사셨다.
우리 조상님들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의 벼슬을 하신 분이 많이 계셨는데, 문과(文科) 보다는 병과
(兵科)에 오른 분이 더 많으셨다. 그리고 한 가지 묘한 것은 19대 백규(百揆) 할아버지가 무과에 급제
하여 선북경사(善北兵使)를 지내신 다음부터는, 한 분이 벼슬을 하시면 다음 분은 벼슬을 못하셨다.
그러니까 20대 할아버지는 벼슬을 못하시고, 21대 의진(毅鎭) 할아버지가 병과에 급제하여 충청수사
(忠淸水使)를 지내시고, 고조부인 23대 찬(粲) 할아버지가 역시 병과에 급제하여 조그만 벼슬을 하시고,
그 다음 대인 증조부는 벼슬을 못하시고, 25대인 할아버지는 병과에 급제하여 길주목사를 하신 것이다.
이처럼 홀 짝수에 따라 벼슬을 하거나 못하였는데, 아버지는 한학을 많이 하셨으면서도 한일합방으로
과거제도가 없어진 탓도 있겠지만, 어떻든 짝수 대가 되어서 그런지 벼슬을 못하셨다.
이제 우리 형제는 27대인 홀수 대가 되었으므로, 지금 홍전군청에 다니는 오빠는 도청에도 있었고 여러
군을 다니고 있으므로 벼슬을 하게 될지 모른다.
대개 이런 취지의 이야기였는데 흥미로운 누이의 이야기는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우리는 유복하게 살았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벼슬이 길목주사였으므로
우리 집 택호는 『길주댁(吉州宅)』으로 불리웠다. 여주에 사는 많은 일가친척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
들도 우리를 “길주댁!” “길주댁!”하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5남매를 두셨다. 남자는 큰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 이렇게 셋이고 두 분의
고모가 계셨다. 그때 우리는 굉장한 부자였다. 그러던 것이 어쩌다가 큰아버지가 재판 문제로 그 많던
재산을 몽땅 날려버려 졸지에 알거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비교적 장수를 누리시어 일흔 둘에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그 전해에 돌아가셨다.
내 나이 일곱 살 때였고 동생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 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살기가 어려워 원주군 문막면 건등리로 이사를 했는데 동생이 세 살 때였다.
병약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둘째 누이와 셋째누이는 이내 결혼을 하였는데, 셋째 누이는 지금
영월군 수주면 강림리에서 살고 있다.
누이의 긴 이야기는 놀랍고도 슬프고 또 분하기도 하다. 큰아버지는 어쩌다 재산을 잃어 우리를 이
고생을 시키는 것인가.
나는 귀청 후 즉시 셋째 누이에게 편지를 띄웠다. 내용은 나의 근황과 어릴 적 두 누이와 논에 나가
보리개떡을 먹으며 참새를 쫒던 그런 거였다.
훨씬 뒤에 문막 사는 둘째 누이에게서 듣기를, 셋째 누이는 나의 편지를 읽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어릴 때 헤어져서 10여 년이나 생사를 모르던 동생의 안부를 듣게 되고, 그 동생이 자라서 도청에
다니고 있다니 그 기쁨 얼마나 컸으랴. 그러면서도 찢어지게 가난하여 혼례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고
외딴 산골로 시집가서 모진 고생을 다 겪고, 동기간의 왕래는 물론 안부도 모른 채 살아왔으니 그 동안
쌓인 슬픔이 한꺼번에 복받쳤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리개떡 먹은 이야기로 가난했을망정 세 남매가
의좋게 지내던 지난날의 생각이 되살아나 슬픔을 더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셋째 누이를 만나기까지는 6년이라는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6·25 전쟁 중 도청이 원주에서 피난
살이를 할 때에 누이네 식구가 원주로 이사와 살게 되어 비로소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형(兄)은 지금 그 어디에
『형제』란 그 누구보다도 사랑과 우애로운 피붙이인 동시에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부자 다음으로
밀접한 피붙이요 부부 다음으로 사랑과 우애로운 사이이며,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친구이다.
나는 5남매 중 남자 형제는 형과 나, 단 둘이므로 그 어떤 형제보다도 우애롭고 사랑스런 친구이어야
했는데, 우리 형제는 그렇지를 못했다. 열두 살의 나이 차는 그리 큰 것은 아니었지만, 철이 들기 전에
부모 없이 형과 형수 밑에서 자라다보니, 형과 서로 욕하고 싸우며 논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나는 형을 한번도 ‘형’이라 불러보지 못하고 언제나 ‘형님’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형제처럼 지내는 게
아니라 부자(父子)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형은 과묵한 편이어서 집에서는 벌로 말이 없었고, 잔소리나 꾸중을 하는 경우도 없어서 어렵게만
느껴졌다. 형은 18세 때부터 원주군청에 다녔다. 학교라고는 문막보통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으므로
말단 임시직원으로 있었는지 모른다.
중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 한학은 많이 한 것 같다. 당시 최 선생이라는 저명한 한학 선생이 있어서
그 밑에서 공부한 것으로 듣고 있다.
우리나라 원로 정객의 한 분인 윤길중(尹吉重)씨는 서예부문에서도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 윤길중 씨와 같이 최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형도 윤길중 씨 못지 않게 붓글씨를 잘 썼다.
형은 20세 전부터 원주군청을 시작으로 경성임업시험장, 횡성군청, 양양군청, 양구군청, 강원도청
그리고 다시 양구군청, 홍천군청을 전전하며 관리생활을 했다. 학벌은 없었지만 글씨를 잘 쓰고 성실
했으므로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여러 곳을 다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형은 말단직원으로 있어서 생계는 항상 궁핍했다. 그러면서도 당신이 배우지 못한 한이 맺혀 동생
만큼은 어떻게든지 상급학교에 진학을 시키고자 공부를 잘 하라고 타이른다.
살림이 어려워 학용품 등은 넉넉히 마련해주지 못했지만, 양구학교 6학년 때 춘천에 출장갔다 올 때
중학교 입시 문제집과 탁상시계를 사다 주었다. 나는 그 문제집이 신기하고 좋아서 전부를 암기하다
시피 되풀이 풀어보았다.
탁상시계는 일본 정공사(精功社) 제의 자명종이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마분지로 케이스를
만들어 애지중지 보관을 했다. 그 시계는 춘농 재학 시절은 물론 도청에 다닐 때에도 가지고 있다가
6·25 전쟁 때 잃어버렸다.
아주 먼 훗날, 그러니까 내가 공직생활을 마치고 춘천에 돌아와 살 때이다, 천전학교 어느 동기생이
졸업사진 한 장을 인화해서 준다. 6·25 전의 사진이라고는 거의 없을 때여서 그 사진은 매우 반가웠다.
교사를 배경으로 앞줄에 교장과 담임 등 선생들이 앉고, 그 뒤로 우리 졸업생이 모여 서서 찍은 사진
이다. 남학생 68명, 여학생 12명 모두 80명이다.
남자 선생은 까까머리에 국민복 차림이고 일본 여선생은 양장, 한국인 여선생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있다. 남학생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간혹 양복을 입은 아이도 있으며 여학생은 전부
검정치마 저고리이다.
맨 뒷줄 한가운데에 나의 앳된 모습이 보인다. 양복차림이다. 몇 안 되는 양복 차림 학생 중에 내가
끼어있다. 양복은 부잣집 아이들이나 입던 시절인데 형은 나에게도 값비싼 골덴 양복을 사주었던
것이다. 엄하기만 하고 별로 말이 없는 형이었지만 마음 속 으로는 이처럼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던
것이다.
형은 8·15 광복 직전에는 홍천군청 내무과 행정계 군속(郡屬)으로 있었다. 지금의 행정계장이다.
그 때 형의 나이 30대 초였으므로 그대로 있었으면 시장 군수도 했을는지 모른다.
조국이 해방되던 직전인 1945년 8월 10일 경, 형은 강원도 광공과로 전보되었다.
해방 후 형이 모시던 홍천군수가 강원도 경찰국장으로 오게 되고, 그 국장이 우리 형을 경찰국
보안과 교통계장으로 발령을 했다. 그런지 얼마 후 경찰국장이 중앙청 경무부로 올라가자 형도
경무부 보안과 교통계장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6·25 사변 직전, 즉 1950년 6월 8일 주사에 임명되어 지방과 행정계 차석으로 배치되었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행정계 차석이 된데 대해 나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즉시 서울의 형에게 편지를 띄웠다. 형도 그게 대견했던지 즉시 잘 됐다는 답장이 왔다.
아아! 그러나 이것이 형의 마지막 소식이 될 줄이야. 북괴의 6·25 남침으로 서울시민이 철수할 때에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북괴군에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요즘도 TV나 라디오에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가 흘러나오면, 형이 그 속에 끼어 끌려가는 환영
(幻影)을 보고 불현 듯 눈물짓는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하얀연기 앞을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울며 가신 이고개여 한많은 미아리고개
형은 말단 직원으로 박봉에 시달리며 한 평생을 불우하게 살아왔다.
형수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으므로 자식 키우는 재미도 모른 채, 얼마 안 되는 봉급은 동생 학비에
쪼개 쓰느라 생계는 어려웠고, 집 한 칸 없이 일생을 셋방살이로 지내왔다.
이제 관직도 올라가고 동생도 자립을 해서 이제부터는 인생을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때,
뜻하지 않은 북괴의 남침으로 생사조차 모르니 참으로 슬프고 원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