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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인터뷰]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② 시인 이육사의 딸 李沃非 “아버지는 위대한 시인이었으나 우리 집은 몰락해”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사진 : 徐炅利 月刊朝鮮 기자
⊙ “陸史의 6형제 중 3형제가 《조선일보》 기자… 6형제 중 4형제가 獄苦 ⊙ 이데올로기의 離散… 원기·육사는 독립유공자, 원일·원조·원창은 越北 ⊙ “아버지 행방 쫓는 日警의 추궁에 어머니는 ‘소박데기여서 나는 모른다’”
[편집자 주] 20세기 한국의 문인만큼 치열하게 산 이들도 드물다. 나라를 잃었고 문자를 빼앗겼으며 이념의 소용돌이와 전쟁의 극한(極限)을 모두 체험했다. 더러는 친일(親日)로, 더러는 붓을 꺾었으며 순수와 이념문학의 길로 흩어졌지만 이들의 내면세계는 쉽게 재단할 수 없다. 이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한국 근대 문인가족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 생존한 가족의 입을 통해 문인들의 인간적 면모와 일화를 소개한다.
〈청포도〉 〈광야〉 〈절정〉의 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의 딸 이옥비(李沃非·75) 여사를 만나러 경북 안동으로 향했다. 새벽 눈발이 날린 국도를 시외버스가 엉금엉금 기어갔다. 도산서원을 지나 ‘땅재’를 가까스로 넘은 버스가 다다른 마을이 안동 도산면 원천리. 육사가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 노래한 마을이다. 저 눈이 녹으면 어딘가 알알이 익어 가는 청포도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문득 감정이 벅차 올랐다. 눈 덮인 ‘이육사문학관’을 50m가량 내려와 ‘목재(穆齋) 고택’에서 여사를 만났다. 이 고택은 조선후기 문신(文臣)이자 퇴계(退溪) 후손인 목재 이만유(李晩由·1822~1904)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택 아래 펼쳐진 겨울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음자 한옥의 자그마한 마당을 가로질러 안채로 들어가 이옥비 여사와 마주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안은 몰락한 집안이었어요. 친구들은 아버지가 투사고 시인이라며 부러워했지만 속으로 지게꾼이라도 좋으니 곁에 계시면 좋겠다고 원망했어요. 삼촌들이 월북(越北)하고 집안에 피해가 많았어요. 연좌제 때문에…. 아버지나 삼촌의 흔적을 찾고 싶었지만 행여 어린 아이들에게 해(害)가 될까 봐 침묵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왔어요.”
목재 고택 앞 〈청포도〉 詩碑.
육사는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첫째 원기(源祺), 둘째 원록(源祿), 셋째 원일(源一), 넷째 원조(源朝), 다섯째 원창(源昌), 여섯째 원홍(源洪)이다. 둘째 원록이 바로 이육사다. 이들 6형제 중 3형제가 일제시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는데 육사가 대구주재, 원조가 본사 학예부 담당, 원창이 인천주재 기자로 활약했다. 형제는 민족의식도 투철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이 터졌을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까지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너무 어려 잡혀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광복과 6·25를 거치며 셋째 원일과 넷째 원조는 월북했고, 다섯째 원창은 셋째 형을 만나러 북으로 갔다가 소식이 끊어졌다. 황해도 해주에서 폭격을 맞아 숨졌다고 한다. 이데올로기의 이산(離散)으로 육사 집안의 내력은 오래 불문(不問)에 부쳐졌었다.
陸史 집안 내력은 불문에 부쳐져
‘민족시인’ 이육사의 생전 모습. 왼쪽은 1943년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친지들에게 돌렸다는 사진. 오른쪽은 1934년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찍힌 사진.
이 여사는 아버지 6형제의 우애가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형제는 용감했고, 정도 넘쳤다. “퇴계 후손들이 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자존심이 강하다. 잘 안 굽힌다. 삼촌이 우리 집에 오면 유토피아 세계를 들려주셨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6·25 전까지 원일·원조·원창이 삼촌이 한 달에 세 번은 우리 집에 오셨어요. 우리 어머니(안일양)를 위로하려고요. 삼촌들이 어머니께 술·담배를 다 가르치셨어요. ‘형수가 아니라 누나’라면서…. 삼촌 주량이 꽤 쌨는데도 나중에는 어머니가 대작할 정도가 되셨어요. 오시면 정치 얘기도 하고, 나라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어머니도 그런 사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나 봐요. 아버지는 아나키스트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형제간 우애가 워낙 좋았으니 사상을 공유했을 겁니다.” 육사가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과 임시감옥에서 순국할 당시 아내 안일양(安一陽)씨의 나이는 38살이었다. 육사는 1921년 경북 영천이 고향인 안씨와 결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평생 흰옷만 입으셨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아 부잣집 침모 노릇을 하며 한 달에 비단 두루마기를 40~50벌 지으셨지만 자신은 무명옷만 입으셨죠. 환갑이 지나시고, 제가 자꾸 권하니까 회색 옷을 입으시다가 나중엔 차츰 옥색도 걸치시긴 했어요.” 이런 일도 있다. 1934년 육사와 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 동기인 처남 안병철이 자수한 뒤 1기생들이 연이어 잡혀갔다. 육사도 그해 3월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됐다. 처남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아버지가 제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장인과 처삼촌에게 두루마리 편지 6장을 써서 보냈대요. ‘더러운 혈통을 물려받은 딸과 함께 살 수 없으니 데려가라’고요. 우리 집에 와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문안인사만 하고, 잠은 집 근처 여관에서 주무셨어요. 무려 7년 동안이나요. 우리 어머니 참 마음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버지가 워낙 강인하시니까…. 어머니는 하도 수치스러워 여러 번 목숨을 끊으려 하셨대요. 할머니가 말리지 않았다면 살 수 없었어요. 고부(姑婦) 사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 아버지 같은 분이야 모진 고문도 다 이겨낼 수 있었지만 외삼촌(안병철)은 힘이 드셨을 거예요. 외삼촌은 배우를 하면 딱 맞을 분이셨어요, 젊었을 때 무대에서 ‘아리랑’ 공연도 하셨대요. 그 일이 있고 외삼촌은 제게 미안해하셨어요. 어디 출타하셨다가 돌아오면 꼭 제게 선물을 사 주셨어요. 처음 두 분의 관계를 몰랐다가 중2 때 처음 알았어요. 큰 충격이었습니다.”
李活, 大邱二六四, 肉瀉·戮史·陸史
이육사(왼쪽)와 동생 이원창.
?‘저항의 시인’답게 육사는 평생 꼿꼿하게 사셨네요. 형제들은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 투척을 한 ‘장진홍의거 사건’에 연루돼 6형제 중 4형제나 구속됐다. 1년6개월 형을 받은 둘째 원록의 수인번호가 ‘264’다. 그때부터 자신의 이름 대신 ‘이육사’로 불렸다. “어린 다섯째와 여섯째 삼촌을 빼고 4형제가 잡혀갈 때 아버지는 그저 ‘사과밭에 서리하러 간다. 놀러간다’고 하셨대요. 그날 대구에선 신문 호외(號外)가 돌고, 일경의 호루라기가 요란할 정도로 사건이 컸다고 해요. 아버지는 붙잡혀서 고문을 당해도 ‘나는 모른다’고만 하셨대요. 돌아가실 때 마지막 작성된 조서에도 ‘나는 모른다, 뭐든지 모른다’고 하셨답니다.” ?아버지의 필명에 대해 들은 게 있나요. 육사의 필명은 여러 개를 썼다.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 육사(肉瀉·戮史·陸史) 등 다양하다.
“이육사라는 필명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받은 수인번호(264)에서 나왔다고 해요. 어떤 분은 성씨가 ‘이씨’고 수인번호가 64라고 하는데, 전혀 사실과 다른 얘기입니다. 처음 필명을 ‘죽을 육(戮)’ 자를 써서 육사라 썼다고 합니다. 역사가 일제 역사니까 일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인가 봐요. 그걸 두고 한학자이신 집안 어른이 아버지에게 ‘네 뜻은 가상하지만 그렇게 쓰면 시를 발표하기 전에 잡혀간다. 대신 땅육(陸) 자를 써라. 이 자는 우리 옥편이나 일본 한자사전에 나와 있지 않지만 중국 자전에는 육(戮)자와 같은 의미’라고 하셨대요. 그 뒤로 육사(陸史)를 쓰셨다고 합니다.”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의 삶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요시찰 인물이니까 무슨 일이 터지면 아버지부터 잡아갔대요. 어머니도 덩달아 끌려가 따귀를 맞고…. 순사가 아버지 행방을 추궁해도 어머니는 ‘모른다’고만 하고, ‘그것도 모르냐’고 때리면 ‘소박데기여서 나는 모른다’고 맞섰대요. 한번은 아버지가 체포되자 어머니가 잣죽을 끓여 갔더니 ‘소박데기가 왜 왔냐’며 또 따귀를 때리더래요. 어머니가 ‘비록 소박은 맞았어도 남편이 위급할 때 도리를 다하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이라시며 ‘임부(姙婦) 따귀를 때렸으니 천황에게 고발하겠다’고 엄포를 놓으셨어요. 당시 저를 배셨는데 임부는 때려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나 봅니다.” 독립운동가를 남편으로 둔 ‘죄’로 육사 아내는 늘 일경에 끌려가 따귀를 맞았고 청상과부로 수절해야 했으나 1984년 사망할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여장부였다는 것이 이 여사의 회고다.
이육사의 조카가 평양시장이 되다?
맏형 이원기가 남긴 간찰.
육사의 형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첫째 원기는 3명의 동생과 함께 대구 조선은행 폭파사건에 주범으로 검거돼 대구형무소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불구의 몸이 돼 종신(終身)토록 고생했다고 한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육사보다 앞서 1942년 순국했다. 1930년 12월 24일 이원기가 보낸 간찰(簡札)이 남아 있는데, 상(喪)을 당한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동생이 격문(檄文)으로 구속된 정황을 언급했다.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파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흉년으로 부모와 형제가 곤란을 겪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 원일(셋째)은 어제 저녁에 그곳(대구형무소)에서 병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것은 기쁘지만 병든 것은 놀라워 곧바로 의사로 하여금 증세를 진단하니 증세가 얕지 않다고 합니다. 또 활(活·이육사) 군도 옥살이 하는 속사정을 탐문해 보니 고통당하는 것이 예사롭지 아니하여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위독한 것을 생각하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무슨 사람의 일입니까? …〉
경주 불국사에서 친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 끝이 맏형인 이원기이고 오른쪽 앞에 앉은 이가 이육사다.
이 여사의 말이다. “큰아버지도 글이 좋으셨대요. 남겨진 글들이 지금도 간혹 나오고 있어요. 슬하에 2남3녀를 두셨는데 장남이 이동영(李東英·작고) 부산대 명예교수입니다. 큰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어머니와 사촌들하고, 대구 삼덕동 한집에서 같이 살았어요. 우리 집은 밥 먹는 식구가 언제나 스물이 넘었어요. 대구 살 때 주소가 삼덕동 88번지였는데 다들 ‘88여관’이라 불렀지요.” ?셋째 원일씨 가족 얘기를 들려주세요. “셋째 삼촌은 그림을 잘 그려 서화가셨다고 해요. 숙모님이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1412~1456) 가문이셨는데 6·25 전에 돌아가셨어요. 슬하에 남매를 뒀는데 사촌언니 동탁이는 정말 재주가 좋았대요. 7살 때 가사를 썼어요.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가사 두루마리를 보관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요. 제가 두 돌 지나고 어머니가 병에 걸려 격리치료를 받느라 저를 그 집에 맡기셨는데, 언니가 저를 두루마기까지 해 입혔대요. 9살짜리가 말이죠. 그렇게 재주가 좋았는데 장질부사 앓다가 시름시름 죽었어요. 동선이 오빠는 아버지(원일)를 찾으러 혼자 북으로 가셨대요. 그분이 북에서 자신을 ‘육사 아들’로 소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이 ‘육사가 젊은시절 중국을 많이 오갔으니 아마 그때 혈맥을 떨어뜨렸나 보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동선이 오빠는 나중 김일성대학을 나와 평양시장이 됐다는 얘기가 있어요. 옛날 허흡(許洽) 대구시장도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요.” 이 여사는 “원일이 삼촌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뒤 6·25가 나고 조선노동당 재산담당 직책을 맡아 남한으로 내려왔다는데 고향인 안동까지 오진 못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덕혜옹주 6촌동생과 결혼한 이원조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이원조.
넷째 원조는 일제시대 ‘냉혹한 비평가’로 당대에는 이육사보다 더 유명했다. 1935년 일본 호세이대(法政大) 불문과를 나와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활약했다.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에게 혹독한 비평을 가해 그의 펜은 화제가 됐다. 그는 광복 후 좌파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임화·김남천·설정식과 함께 박헌영(朴憲永)을 따라 1946년 월북했다. “셋째 삼촌은 조부에게 한문을 배우고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문하에도 들었는데 위당께서 ‘장안(長安) 3재(才)의 1인’으로 꼽았을 정도로 똑똑했다고 해요. 당시 명망 높으셨던 이관용(李灌鎔)의 따님과 결혼(주례 조병옥 박사)했어요.” 이관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손녀인 이정원(李貞媛)과 이원조의 결혼은 ‘국혼(國婚)’이었다. “넷째 숙모님은 덕혜옹주의 6촌 동생이셨는데, 슬하에 딸 셋을 데리고 남편을 찾으러 월북하셨어요. 왕족이었으나 현대여성처럼 서글서글하게 생기셨대요. 큰애 이름이 혜정이고 둘째가 정소, 셋째 이름은 기억이 안 나요. 원조 삼촌은 1955년 옥사(獄死)했다는데 숙모님도 따라 숨졌다고 해요. 아마 자손이 북한에 남아 있을 겁니다.” 이원조는 비평만이 아니라 1928년, 1929년 연속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이 당선될 정도로 문재(文才)가 출중했다. 다섯째 원창은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일했다.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자 지방특파원 방담기사에서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한 일화가 회자한다. 그는 광복 후 《인천신문》 창간에 참여해 사회부장을 지냈으며 1946년 미(美)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필화를 겪기도 했다. “다섯째 삼촌은 조봉암 비서를 지냈다고 하고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고 해요. 6·25전쟁 때 셋째 삼촌(원일)을 만나 보고 온다고 이북으로 갔는데 소식이 끊어졌어요. 해주에서 폭격에 맞아 죽었다고 해요. 원조 삼촌이 조용하고 위트 있는 성격이라면, 원창 삼촌은 호탕했다고 합니다.” 여섯째 원홍은 19살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여사는 “삼촌들이 막내에게 문학을 권했으나 싫어했다”고 말했다. “문학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셨대요. 원일 삼촌이 어느 미술선생에게 막내가 그림소질이 있는지 1주일만 봐달라고 맡겼는데, 사흘만에 ‘소질이 있다’고 찾아왔대요. 첫 출품한 전국미술대회에 입선으로 당선됐다고 해요. 삼촌들이 모두 모여 빈대떡을 굽고 잔치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했대요. 삼촌들이 ‘니가 흥분해서 체했나 보다’며 등을 두드리는데 쓰러졌대요. 그 길로 돌아가셨어요. 요즘으로 치면 심장마비였다고 합니다.” 이옥비 여사의 이름은 ‘기름져서는 안 된다(沃非)’는 뜻을 갖고 있다. 육사가 손수 지었다고 한다. 이념으로 찢긴 ‘몰락한 집안’을 그녀는 육사가 지어 준 ‘경계의 이름’으로 버텨 왔다. 2007년 육사의 고향에 ‘이육사문학관’이 세워지자 안동에 정착했다.
“삼촌의 사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어요. 당대 지식인이 그랬듯 공산주의를 유토피아로 보았던 거죠. 그분들이 독립투쟁을 하며 헌신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을지 모릅니다. 좌우 이념이 경직된 시대에 태어난 것이 불행하고 한스러워요.”⊙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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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로 피해본 사람들 많습니다. 친일파로 몰려 고생한 사람들도 많구요.
한가지 꼭 알아야합니다. 말은 안해도 이리저리 얽혀서 아마 주위에 10사람중 하나는 있을 겁니다.
내 동창중에도 꿍꿍이로 말 안하다가 친구 어머니에게서 사실얘기를 들어 알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정 때 고위 순사였다고..." 법대 안가고 의대 갔습니다.
또 남자 중에 남자고 대단한 기상인데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그렇게 가고 싶어 했습니다. 못 갔지요. 누구라면 다 알만한 노동운동가로 변신했습니다. 삼촌 때문에. "동지들~~~" 치켜뜬 눈이 참 무섭드라고요. 한이 맺혀 그랬나 참 열심히 하더군요.
함부로 친일파, 빨갱이하면 안됩니다. 다 내 이웃이고 친구고 아저씨,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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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