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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요한일서4:13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1. 여러분의 관심을 어디다 두고 사십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빌립보 3:19)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이란 육욕적이고 육신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세상을 자기 관심에 따라 삽니다.
컴퓨터, 여행, 영화, 텔레비전을 보는데는 시간에 모든 것을 사용하면서 세상 친구, 판사, 변호사, 사장 등 이름 있는 사람을 사귀는데 관심이 많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스마트폰에 중독. 일의 중독에 를 눈이 빨갛도록 봅니다. 철처히 육적이면 육적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사도행전 2장 46절 성령 받은 사람은 매일 교회에 가서 찬미하고 싶고, 예배 드리고 싶고, 성도들과 사귀고 싶습니다.영적인 사람인 다윗 왕은 자기의 모든 즐거움이 교회에 있고, 성도들과의 사귐이 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16편 3절을 보십시오.『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자기 영혼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영원에 대해 흥미를 가집니까?
이것들이 여러분을 흥미롭게 합니까?
확신하건대,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거기서 그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관심은 영적입니까?
여러분은 영혼불멸과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까?
요한복음 16장 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진리는 성경입니다. 성령께서는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게 합니다. 설교를 듣게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 두 번째는 죄의식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은, 타락과 죄의 결과로 성령의 감화가 전혀 없는 사람과 그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롬 7: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 스스로를 혐오스러워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18-24)
여러분은 자신에 관해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고 또 만일 여러분 안에 존재하면서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그것을 미워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그분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믿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7-8,10)
롬8;11 ] “그러나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단정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어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이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속한 영역인데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다.이제 새로운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육신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영 안에’ 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다.’ ‘20세기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다.’고. 평화주의자, 무저항주의자.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사람?
- 그는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힌두교인이었다.
알버트 슈바이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인도한 것 아닌가?
국제연맹을 세운 길버트 머레이교수- 기사 제목은 “성도 길버트!”
합리주의적인 불가지론자. 그는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며, 초자연적이나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보지 않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라 부르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속에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이르기를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2:13)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믿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믿을 수 없습니다.
지성과 이해력과 큰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곧 건전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제시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들었지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비천하고 무지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인들이 그것을 듣고서 그 안에서 기뻐함과 아울러 그것으로 인해 변화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설명하기를, 성령께서 이들로 하여금 보고 또 믿게 하셨다고 합니다.
4. 여러분은 자기 안에서 육신과 성령간의 투쟁과 싸움이 진행됨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라디아서 5:17)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성품이 있음을 자각합니까?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자각합니까?
여러분 안에는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을 원하는 새로운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며,
이 두 세력 간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2에서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이 세상 풍속을 좇아 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제 영에 의하여 지배 받고 복종받는 영역에 있다.
롬 5:21에서는 은혜의 왕노릇으로 표현하였다.
은혜의 왕노릇은 성령의 왕노릇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처럼 대조적인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그러한 다툼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옛 사람’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새 사람과 옛 사람간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면, 성령께서 사실상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않는’ 사람이다.
더 이상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는다.
‘육신’이라는 말은, 타락과 죄의 결과로 성령의 감화가 전혀 없는 사람과 그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롬 7:5,“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그것은 육신적인 나타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냄을 의미한다.
“영에 있나니” 육신에 있다는 것의 정반대의 의미이다.
우리의 조건이나 지위를 말함이다.
“육신에 있다”는 것도 죄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짓는다 할지라도 그는 다시 ‘육신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
‘육신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태요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
그의 처지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는 그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에 있다’는 말은 역시 하나의 조건을 지시한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에 ‘육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영’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령이 그를 주관하고 그를 인도하고 있으며, 그는 영 안에서 행하고 있다.그는 ‘영을 좇아 행하고 있다’.
이것은 회심할 때 일어나는 크고 심오한 변화이다.
5.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역사하고 계심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이르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 2:12-13)라고 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달리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 여러분을 감동시키며 인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자기 자신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합니다.
자만하는 것과는 달리,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시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나는 나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올려졌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활동하며 감동시키고, 변화를 일으키며, 인도하고 설득하며, 또한 고무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자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분 자신의 영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 안에서 그런 식으로 그분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6. 성령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항상 어떤 형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는지 혹은 그런 증거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들이 입증됩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분의 삶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희락은 모든 상황에도 아량곳하지 않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화평은 그분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 양선, 온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사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7.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며, “양자의 양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무슨 뜻입니까?아들은 상속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것인데,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니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에도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천국 시민으로 도장 찍어 주신 다음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가만히 계시기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떠나가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하나님의 자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도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떠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주시면서 “얘가 잘못하거든 나오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기에 있으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영원 가운데 멀리 계시는 어떤 막연한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 점을 가리켜 요한은 본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나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