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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고향
조 정 래
어머니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리라고는, 그것도 상행 야간 열차 속에서 객사를 하시게 되리라고는 우리 3남매 중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갑작스러움이 몰고 온 끝없는 허망함과 객사가 불러일으키는 안타까운 죄책감이 전신을 비틀리게 했다. 어머니―막연하고도 까닭 모르게 슬픈 그 이름이 마침내 절절히 맺히고 아픈 슬픔의 근원이 되었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고유명사였던 그 이름이 이제 추상명사가 되었다. 그 형체 없음의 막막함과 허망함 앞에서 나는 갈 데 없는 미아(迷兒)였다.
어머니가 막내인 여동생이 살고 있는 이리로 떠나신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날 아침 나는 아무런 예감도 없이 어머니를 전송했고, 어머니도 다른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팔을 넓게 휘젓는 약간 촌스러운 걸음걸이로 바삐 떠나셨다. 어머니의 왼쪽 손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검정 비닐 가방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게감을 담고 들려 있었다. 나는 그 가방이 너무 낡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나 언제 갈아드려야 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도 할 겨를이 없이 빈 택시를 향해 뛰었다
어머니와 나눈 몇 마디 대화도 지극히 틀에 박힌 것이었다.
“오래 계시지 말고 곧 올라오세요.”
“그래야지.”
“강 서방한테 안부 전하시구요.”
“그래야지.”
“속 비면 멀미하시니까 뭘 좀 사잠수시구요:”
“알고 있다.”
이 말은 몇 년 동안에 걸쳐 무수히 되풀이되어 온 메마른 대사였다. 어머니가 대구에 사는 남동생네로 떠나는 경우에 ‘강 서방’이 ‘계수씨’로 바뀔 뿐이었다.
천 리 가까운 길을 칠십 노인네 혼자 떠나시게 했다는 사실이 불효스러운 짓일 수 있었다. 그러나 벌써 몇 년에 걸쳐 계속되어 오고 있는 그 여행 아닌 여행에 일일이 동반할 방법이 묘연했디. 그리고 어머니는 그 연세에 비해 건강하신 편이었다. 소화 기능이 약간 좋지 않은 것 같았지만 어머니는 소량을 꼭꼭 씹어 오래 잡수시는 지혜로 그 덫을 피해나갔다. 어쩌다 속이 불편해지면 활명수 한 병을 사다 잡수시는 것으로 시원해하시곤 했다. 어머니의 노쇠는 아침저녁으로 팔다리에 얼굴을 내비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신경통은 아니었다. 정성스런 손으로 주물러드리면 풀리곤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조근거림이었다. 어머니는 내 마음과는 달리 사십이 넘은 아들의 주무름 받기를 민망해하셨고, 더구나 며느리의 주무름은 부담스러워하셨다. 그래서 천상 그 일은 세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물이 흐르는 생리처럼 정이라는 것은 아래로만 흐르게 마련인가 세 아이들은 이내 싫증을 냈고, 귀여운 손자들이 꺼리는 일을 할머니는 계속시킬 리 없었다. 나무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다, 괜찮다. 괜한 애들 귀찮게 말아라. 이 할미 미워할라 주무르는 것도 그때뿐이고…… 어디 따끈따끈한 데 지지면 좀 나을 텐데……. 어머니는 말끝을 흐리셨고,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스팀 장치된 아파트에 따끈따끈한 아랫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작으로 군불을 땐 따끈따끈한 아랫목을 어머니는 그리워하고 계셨다. 궁여지책으로 전기장판을 사왔고, 아쉬운 대로 어머니는 조근거림을 면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큰 효도의 방법이라도 발견해 낸 것처럼 두 동생에게도 전기 장판을 마련하라는 연락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다 말고 머쓱해지고 말았다. 두 동생네 집은 아파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가장 불효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장남인 나 자신이었다.
새벽녘이었디. 꿈결인 양 멀게 전화 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끈적끈적하게 늘어붙는 잠의 휘장을 헤쳐내느라고 애쓰고 있었다. 전화 벨은 계속해서 울려왔다.
“여보, 여보, 전화 온 거 아닌가?”
“그런 거 같지요? 꿈이 아니지요?”
아내는 잠에 담가진 음성으로 반문했다. 아내도 혼미한 의식 속에서 전화 벨 소리를 들으며 꿈인지 생시인지 명확한 구분을 미처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가서 받아보지 그래.”
“잘못 걸린 전활 거예요. 이 한밤중에 전화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나 아내의 의도를 묵살하듯이 전화 벨은 한결 투명한 색감으로 계속 울려대고 있었다.
“나가서 받아보라니까. 잘못 걸렸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줘야 끊길 것 아닌가 이 시간에 전화하는 용건이면 저쪽에서 지쳐 끊을 리는 없잖아.”
“아유 미치겠네. 어떤 바보 같은 것이…….”
아내가 짜증을 울컥 쏟아내며 일어났고, 나는 그 짜증을 피하기라도 하듯 얼른 몸을 사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내가 방문을 열어둔 채 거실로 나갔는지 전화 벨 소리는 무슨 작고 견고한 물체들처럼 와그르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내의 비명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를 소리가 나를 화닥닥 끌어 일으킨 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 뒤였다.
“여보! 여보! 전화 받아요, 전화!”
뭐야 뭐, 뭐 하며 내가 허둥지둥 뛰어나왔을 때 아내는 송수화기를 가슴에 붙들어 안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박준배 씨죠?”
“그런데요…….”
“사모님한테 말씀드린 사항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여기는 수원역입니다. 선생님의 모친께서 열차 내에서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확인과 동시에 시신을 본역에서 하차시켰으니 신속히 출두하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수원역 입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지금 몇 신가?”
나는 곧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은 탈진감을 가까스로 떠밀며 물었다. 그러나 내 눈길은 이미 벽시계로 옮겨가 있었다.
새벽 5시가 다되어 있었다.
“빨리 애들 깨우고 준비해야지.”
나는 헛짚이는 발걸음을 옮기며 아내를 일깨웠다. 아내는 식물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택시가 고속도로로 진입해서 질주하기 시작했을 무렵에야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에 대해 다소나마 추리력을 모을 수 있었다. 야간 열차, 이리, 여동생…… 그러나 추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리에 도착한 지 겨우 이틀 만에 왜 야간 열차를 타시게 되었는지, 그 첫 매듭부터가 풀리지 않았디. 이리는 남동생네 집이 아니라 여동생의 집이었던 것이다. 막내라서 그런지, 아니면 딸이라서 그런지 어머니는 두 아들보다는 막내딸에게 유난히 마음을 쓰셨다 딸은 시집가서 비로소 어머니의 마음 깊이를 헤아리고 이해하게 된다는 말을 실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동생이 어머니에게 쏟는 정은 살뜰하고도 시큰한 데가 있었다. 당당한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남동생네에서보다 옹색한 손님 자리가 되게 마련일 딸네 집에서 어머니가 더 오래 머무르시곤 하는 것도 다 여동생이 지성으로 가꾸어 키우고 있는 정의 울타리가 실한 탓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틀 만에 야간 열차를 타신 것일까 어딘가 불편한 기미가 보였더라면 어머니 혼자 야간 열차를 타시게 했을 여동생이 아니었디. 어머니는 죽음을 예감하고 서둘러 큰아들에게 되돌아오다가 변을 당하신 것일까 그러나 지병도 없는 분에게 죽음의 예감이라는 것이 어둠 속의 불빛처럼 그렇게 확실한 것일 수 있을까 ……어머니의 사인(死因)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내 이름과 전화 번호…¨. 나는 치받쳐 오르는 울음 덩이를 씹었다. 어머니는 닥쳐온 죽음을 견디다 못한
마지막 순간에 낯모를 그 누구에겐가 큰아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유언으로 남기셨을 것이다. 달리는 밤기차 속에서 버림당한 것처럼 혼자여야 했던 어머니가 죽음의 순간 감당해 내신 고적과 적막의 무게가 어떠했을까 허름한 비닐 가방 하나만을 들고 세 자식의 집을 떠돌음하시듯 했던 어머니의 발길을 진작 막지 못했던 후회가 가슴에 생혈(生血)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립병원 영안실에 허망의 그림자로 변해 누워계셨다. 한눈에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떠나버리셨음을 번연히 알아보았으면서도 나는 어머니의 팔을 덥석 잡아 손목의 맥을 짚었고, 그것이 시원찮아 허둥허둥 가슴에 귀를 가져다댔다. 뒤늦게 이런 부질없는 짓밖에 할 수 없는 내 가슴에서 마침내 뜨거운 서러움의 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어머니이…….”
나는 마음 놓고 울 수조차 없는 죄책감에 사무치며 영혼이 떠난 어머니의 싸늘한 육신을 붙안고 어머니의 죽음을 현실로 확인하고 있었다.
심장마비였다는 의사의 짤막한 사인 규명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었다. 내 감정은 이미 가눌 길 없는 허망함과 견뎌낼 수 없는 막막함 속을 질정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하얀 시트로 어머니의 얼굴을 덮고 돌아서다가 나는 멈칫 한곳에 시선을 모았다. 검정 비닐 가방은 어머니의 발치께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낡고 퇴색한 가방은 유난히도 남루하고 추워 보였다. 그건 어머니 생전의 전 재산이었고, 사후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아니, 그건 단순한 물건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몸 일부이거나, 어머니가 애완하던 어떤 생명체였다. 그건 주인의 시신을 지키는 충견(忠犬) 같기도 했고, 주인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의 생명을 포기해 버린 어떤 영특한 짐승 같기도 했다. 그 가방은 어머니와 함께 4년이 넘도록 방랑도 여행도 아닌 길을 헤매 다닌 것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황혼을 타박거리며 걸어간 어머니의 긴 그림자 속에 감추어진 적막이나 그늘이나 서성임의 뜻 같은 것을 낱낱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방의 흡인력에라도 끌리듯이 다가갔고, 어머니의 몸을 그리했듯이 가방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몸이 절망적인 물체감으로 굳어져 있었듯 가방도 이미 어머니의 체온을 간직하고 있지 못했다.
이리로, 대구로, 두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리로 전화를 걸면서는 매제를 찾을 작정이었다. 여동생이 부엌에라도 나가 있는지 마침 전화를 받은 것은 매제였다. 아니, 뭐라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매제의 당황하고 놀란 음성이 뜨겁게 커졌고, 그 다음 터져 나온 것은 여동생의 참담한 외침이었다. 큰 오빠 엄마가 어떻게 되셨다구요? 나는 고문당할 때의 신음처럼 돌아가셨다는 말을 밀어냈고, 전화기 속에서는 여보, 여보, 정신 차려, 다급한 매제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여동생은 끝내 기절을 한 모양이었고, 나는 또 어금니 사이에서 신
침처럼 흘러나오는 울음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는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나서야 고향을 떠나 우리 집으로 오셨다.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신명나게 한 일이 아니라 더이상 고향 땅에 머무르셔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본래 말수가 적은 분이긴 했지만 우리 집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더욱 말을 적게 하시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바뀐 환경 탓이겠거니, 일일이 신경을 쓰면 오히려 부담을 느끼실지 모른다 싶어 나는 일부러 무관심해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우울해지시고 몸도 축이 나는 것 같았다. 아내에게 물었더니 점심이나 저녁 식사의 양도 자꾸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저는 한다고 하는데…… 어머님은 서울이 싫으신가 봐요.”
아내는 걱정 반 변명 반으로 말끝에 힘이 없었다.
“어머니, 노인정에 나다니시며 친구도 좀 사귀고 하세요.”
내 말을 받은 건 어머니가 아니라 막내였다
“아빠, 할머니는 노인정에 못 가세요. 엘리베이터를 얼마나 무서워하신다구요. 히히히…….”
국민학교 4학년짜리의 히히거리는 입 가린 웃음은 다분히 경멸적이고 무시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나는 그 웃음의 버릇없음을 꾸짖으려다가 말고 어머니를 두둔하는 쪽으로 말을 바꾸었다.
“할머니가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시긴 뭐가 무서워해, 처음이시니까 그렇지. 넌 아파트에 이사 와서 처음부터 잘 조종 했었니?”
“치이, 아빤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그래. 할머닌 엘리베이터 말고도 아파트도 무서워해요. 무너질까 봐 우리가 뛰지도 못하게 해요. 그래서 큰형이 아파트가 얼마나 튼튼한지를 과학적으로 설명을 했지만 할머니는 믿으려 하지 않고 계속 무서워한다구요. 제 말이 진짠지 가짠지 아빠가 할머니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나는 차마 어머니 쪽으로 얼굴을 돌릴 수가 없었다. 과학적 설명이라는 말과 어머니와의 사이에 놓여 있는 생경한 거리감이 기묘한 슬픔으로 내 가슴을 찌르르 울렸다. 기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높은 건물에 대한 불안감은 어머니로서는 당연한 조건 반사였다. 어머니의 평생을 통해서 손수 다루어본 기계가 무엇이 있을 것이며, 도시생활에 매끈하게 길들여진 사람도 어쩌다 치켜 올려다보면 속이 메슥거리는 드높은 건물 층층이에 사람들이 밥해 먹고 자식 키워가며 사는 집이 박혀 있음이 비정상으로 보이는 어머니의 판단은 분명 올바른 것이었다. 아파트라는 집단 주거 환경을 모색한 것부터가 인구 팽창과 한정된 땅 사이의 역비례를 극복하자는 궁여지책이 아닌가
“어머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처음엔 그것을 타려면 어릿어릿했어요. 지금도 우리 아파트 것이 아니고 딴 데 것을 타면 문을 닫아야 되는데 열리는 단추를 누르는 실수를 하곤 해요. 그리고 아파트라는 집도 그래요. 여러모로 편리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지 꼭 사람 살 만한 곳은 아니거든요. 저도 창문을 열다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눈앞이 아찔해지는 게 영 좋질 않아요.”
“아니, 아범아. 그게 참말이냐?”
어머니는 갑자기 물으셨는데 그 얼굴은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것 같은 슬픈 기운의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그러믄요. 이 아파트 살 돈으로 단독 주택을 사게 되면 에미가 연탄을 갈아야 하고 온 식구가 춥고 불편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가 돈을 더 많이 벌어 아파트처럼 스팀이 나오는 단독 주택을 장만할 때까지만 어머니, 아파트가 맘에 안 드시더래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세요.”
“기다리지, 기다리고말고.”
어머니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크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진작 어머니를 이해시키고 위안하지 못한 것을 죄스럽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며느리뿐만이 아니라 아들까지 아파트를 좋아한다고 단정하신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무섬증을 다스리든지 엘리베이터를 타려 하실 것이고, 아파트가 무너질 염려가 없다는 쪽으로 스스로의 생각을 고치려고 애쓰실 것이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어머니, 제가 엘리베이터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드릴 테니 염려마세요.”
“그건 나도 알고 있지.”
어머니는 나이가 쑥스러울 만큼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히히, 할머니 겁쟁이, 메릉”
막내는 끝말에다가 장난기 넘치는 곡선의 가락을 붙여대며 제 할머니한테 혀를 길게 빼내 보이고는 얼른 돌아앉았다.
“옛끼, 저놈은 이 할미를 순 바보로 안다니까”
막내 손자를 향해 헛주먹질을 하는 어머니의 표정은 우리 집으로 옮겨오신 이후로 최초로 보는 밝은 것이었다.
“이 아파트 바닥에 트럭을 한꺼번에 다섯 대를 쌓아 올려도 내려앉지 않을 만큼 단단해요.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로 튼튼하구요.”
어머니는 신뢰감이 넘치게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우울한 표정은 가셔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우울의 근원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좀 사귀셨어요?”
어머니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셨다.
“마음에 드는 분이 없으셨나 부죠?”
“다 늙어 친구 만드는 것도 귀찮고…….”
어머니는 방바닥만 내려다본 채 혼잣말처럼 흘리셨다.
“귀찮긴요, 늙을수록 친구만큼 좋은 게 없다던데요.”
“아범아…….”
어머니는 무언가 망설이시는 눈치가 분명 했다.
“말씀하세요, 어머니.”
“나 이리에 좀 내려갔으면 싶으다.”
어머니는 이 말을 하는데 왜 그렇게 힘을 들이시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시죠. 어머니 좋으신 대로 언제나 다녀오세요.”
어머니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막내딸을 찾아 이리로 떠나셨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안타까운 유랑은 시작되었다. 여동생 집에서 열흘이 넘게 묵고 돌아오신 어머니는 미처 1주일도 못되어 대구 동생네 집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비치셨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시라고 했다. 대구에서 열흘 가까이 머물다 돌아오신 어머니는 또 1주일이 못되어 이리로 떠날 채비를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즐겨서 하시는 일을 막고 싶지가 않았고, 어머니의 건강이 집에 계실 때보다 좋아져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나들이가 단순한 모정의 표현을 지나쳐 내가 장남 노릇을 부실하게 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서운한 의혹을 갖게 했다. 부모가 자식네 집에 드나드는 것이 꼭 무슨 용건 때문일까마는 같은 지역도 아니고 양쪽 다 천리가 가까운 거리를 별다른 용무 없이 빈번하게 내왕한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이리의 매제나 대구의 계수가 나나 아내를 터무니없이 오해할 소지가 다분했다. 나는 어머니의 나들이 횟수를 연간 두 번쯤으로 줄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어머니의 고집은 막무가내였다. 그건 확실히 고집이었다. 별의별 말을 다 하고, 집에 마음을 붙일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어머니는 비닐 가방을 챙겨들고 결연히 일어나시고마는 것이었다.
“니 맘 내가 다 안다만 내 맘도 니가 좀 알아줘야 한다. 이제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겄냐. 한 자식 옆에 앉아서 다른 자식들 보고 싶어 병나느니 아직 힘 남았을 때 찾아다니며 보는 것이 내 낙이고 소원이다. 제발 날 막지 말아라.”
어머니 노년의 낙이고 소원을 나는 더 이상 막을 도리가 없었다. 모성이라는 것은 으레 그런 것이겠지만 특히 어머니에게 있어서 우리 6남매는 서럽고 안쓰러운 덩어리들인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전쟁의 막바지에서 홀연히 떠나시고 말았다. 어머니 혼자의 힘으로 세 자식을 길러내신 고생을 말로 하기는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여동생을 시집보내기까지 25년 세월에 걸쳐 심신으로 겪어내신 고역이 크면 클수록,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 3남매를 해바라기하는 어머니의 정은 그만큼 간절하고 진할 수밖에 없을 터였디. 나는 어찌할 수 없어 두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셔줄 것을 당부하는 긴 편지를 써야 했다.
어머니는 칠십 노구(老軀)를 이끌고 서울을 정점으로 하여 이리와 대구로 이어지는 삼각형꼴의 유랑길을 자유롭게 왕래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식들과 합의된 그 유랑길이 어머니는 편하신지 모르지만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결코 편할 수가 없었다. 자식을 셋씩이나 두고서 가방 하나를 달랑 든 채 한 줄기 허허로운 바람이나 정처 없이 흐르는 구름인 양 떠도시는 어머니를 따라 내 마음도 유랑을 하는 것이다.
어머니가 여동생을 데리고 시골에 계실 때만 해도 내 고향은 의당 그곳이었다. 아니,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옮기신 후에도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그곳은 나의 고향이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유랑을 시작하시고부터는 내 고향은 어머니가 머무르시는 곳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머니가 이리에 머무르시면 이리가 대구에 머무르시면 대구가, 나의 고향은 수시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실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그곳이 고향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가을 어머니가 대구에 계실 때였다. 나는 고향에 간다는 마음으로 기차를 탔는데 얼마를 가다 보니 기차는 늦은 가을의 마지막 단풍이 지고 있는 추풍령을 지나고 있었다.
아직 힘 남았을 때 보고 싶은 자식들을 찾아다니며 보기를 소원하셨던 어머니는 끝내 그 유랑의 도상(道上)에서 운명을 달리하시고 말았다. 자식들을 그토록 못 잊어 찾아다니시던 어머니가 단 한 자식에게도 임종을 지키게 하지 못한 채 객사를 해버리신 것을 운명으로 돌리기에는 어머니의 운명이 너무 기구해지는 것 같아 차마 못할 일이었다.
“엄마는 활명수를 사다 잡숩고는 괜찮아하셨어요. 텔레비전도 보셨구요. 그런데 갑자기 서울에 가야 된다고 하셨어요. 급한 일이 있다구요.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직접 가셔야 된다고 했어요. 그때 어머니는…… 난 몰라, 엄마아ㅡ-.”
여동생은 다시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여동생의 말대로 어머니는 분명한 예감에 쫓기고 계셨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장남인 나를 찾아, 우리 집에 당신의 마지막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한 사실일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파트를 무서워하셨고, 언젠가 이삿짐을 실어 오르내리는 곤돌라에 관이 실려 10층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셨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장남의 집에서 끝맺고자 하신 것이리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엄마를 악착같이 붙들었을 거예요. 그럼 임종을 지키는 건데……”
여동생은 안타까운 후회를 못 견뎌 하고 있었다. 그 마음 아픔이 어떠할 것이며 그 죄책감이 얼마나 큰 것일지는 헤아리고도 남는다. 여동생은 저녁밥이 탈이 나서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학적 죄의식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지나친 생각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어쩌면 고생을 한 것에 비해서 오래 사신 것인지도 모른다.
대구에서 달려온 남동생은 이미 눈이 부어 있었다.
“어머니는 너무하시는군요.”
남동생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유난히 정이 많은 그는 항상 어머니를 흡족하게 해드리지 못하는 것을 아파해왔던 것이다. 그는 대구의 지사 근무가 끝나고 승진해서 서울로 올라올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월급도 올라 어머니한테 잘할 수 있고, 어머니가 대구까지 내려오시는 수고를 덜 수가 있으니 일거양득이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흡족해 하셨다. 어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신 건 어쩌면 생전에 바라신 것인지도 모르지. 어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니까.”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항시 깨끗한 죽음을 부러워하셨다. 몹쓸 병에 걸려 오래오래 앓다가 자식들 고생시키고 재산 금가게 하고 죽는 죽음을 두려워하셨다.
“그래도 이렇게 객지 장례를 치르게는 하지 말았어야지요.”
남동생은 새로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우리 정성을 다하면 다를 게 없다.”
장례는 자연히 간소해지고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생전에도 가난과 남루를 면하지 못한 생활을 오래 했으면서 마지막 가는 길까지 그렇게 마감하시고 말았다.
아버지의 산소 옆에 어머니를 모시기로 하고, 나는 어머니의 비닐 가방을 챙겨 들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나는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밀었다. 거기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래전에 어머니 몰래 한번 뒤져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 보잘것없는 내용물들을 보고 어머니가 가엾고 안쓰러워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져 있었다. 치마저고리가 한두 벌, 속옷이 두어 벌, 언젠가 구해드린 강위산(强胃酸)이 한 병, 약간 눅눅한 느낌이 드는 수건에 빗과 손거울이 싸여 있었다. 그리고 귤과 사과, 부스러기가 다된 과자와 껌, 사탕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 과일이나 사탕 종류는 간식으로 드린 것을 모아둔 것이었다. 다음 집에 갈 손자들을 위한 준비였다. 새며느리가 지어드렸을 새 버선이 셀로판 종이에 싸인 채로 있었고, 꼭꼭 접어둔 몇 장의 지폐도 눈에 띄었다. 그 가방은 그러니까 어머니의 옷장이었고 경대였고 분합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가방에서는 전과 색달라진 물건을 아무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가방 안은 더 가난해져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주 특이한 데가 있으셨다. 가난하고 고적하게 살았으면서도 전혀 욕심이 없으셨다. 돈 욕심은 물론 마음의 욕심도 없으셨다. 자식을 키워 며느리를 보았으면 시어머니 노릇을 어느 정도 할만도 한데 어머니는 전혀 그렇지를 않으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는 삶을 체념해 버리신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결코 삶을 체념하신 분이 아니었다. 삶을 체념하셨더라면 자식들을 찾아 그 먼 길을 그리도 오래 유랑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역시 어머니의 유랑은 현명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자주 대하면서 고루 사랑을 나눔으로써 당신의 죽음 다음에 자식들이 한을 갖지 않게 만드신 것이었다.
입관이 끝나고 못질하는 소리가 차갑게 흩어져나갔다. 그 소리가 가슴을 치는 아픔을 느끼며 나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나의 마음의 바람벽은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움직이던 고향도 정지를 해버렸다. 나는 혼자가 되었고 동시에 우리 집안의 맨 앞에 서게 되었다. 끝없는 허망함과 막막함 위에 새로운 바람벽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해내야 될 새로운 일일 것 같았다.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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