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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프럼, 자금성 천추정, 앙코르와트, 이누야마성, 종묘정전 外
캄보디아 타프럼
종이에 먹펜, 41X58cm, 2010
캄보디아에는 폐허가 된 석조 사원이 전국에 널려 있습니다.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천년만년 권세를 누리겠다고 돌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망한 권력의 유물은 망각의 늪에서 폐허가 되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사원에 나무의 뿌리가 돌 틈으로 파고들어 자라면서 틈새가 크게 벌어집니다. 이 뿌리가 썩어 공간이 되면 건물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잘 볼 수 있는 곳이 ‘타프럼’입니다. 크메르 왕조의 가장 걸출한 왕인 쟈야바르만 7세(1125~1218)가 1186년 어머니를 위해 지은 불교 사원입니다. 승려와 종사자 5500여 명이 살았던 크고 화려한 사원이었답니다.
그러나 800년이 넘는 세월에 자이언트팜나무 뿌리가 문어발처럼 건물을 감싸고 있는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마치 마법에 걸린 사원처럼 보입니다. 무너진 석재들이 무더기로 쌓여 발길을 가로 막습니다. 회랑 벽과 천장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여 겁이 납니다. 폐허의 아름다움은 공포가 있어야 제 맛이 납니다. 타프럼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시려면 아침 일찍 가세요. 앤절리나 졸리가 출연한 영화 ‘툼 레이더스’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관광객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중국 베이징 자금성 천추정, 황제의 정원에 핀 둥그런 ‘기와 꽃’
자금성 천추정, 종이에 먹펜, 41X58㎝, 2010
자금성의 많은 건물 중 볼수록 예뻐 보이는 것이 천추정(天秋亭)입니다. 모란꽃이 만발한 후원에 백옥으로 기단과 난간을 만들고, 십자형 건물에 둥근 지붕을 올렸습니다. 짙은 적색 칠에 청회색 단청을 하고 황색 기와를 얹었는데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습니다. 문틀에 금박을 올린 안목도 뛰어납니다. 중국 건축물에서 자주 보이는 둔탁함이나 번잡함이 없습니다.명대에 세워 청대까지 사용하던 정자로, 내부 구조와 천장도 볼 만합니다. 추녀마루의 잡상(雜像)이 무척 사실적입니다. 현장법사는 상투를 틀고 관을 쓴 모습에 색칠까지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 많은 원형 건물이 우리나라에는 없는 이유가 궁금하지요. 원형 건물은 황제국에서만 쓰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대한제국을 선언한 뒤에 지은 원구단 정도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은 말할 때 생략을 잘한답니다. 주어를 생략하기도 하고, 머리카락 대신 머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언어는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한국인은 건축에서도 생략을 잘합니다. 한국인이 원형 건물 대신 팔각 건물을 짓는 이유는 복잡한 재료와 공정을 생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형 건물에는 기와만 해도 수십 가지가 필요하지만 팔각 건물에는 보통 기와 몇 종류만 있으면 됩니다. 문인방 등에 쓰이는 목재를 곡선으로 가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잡상이 한국에 와서 두루뭉술해진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하늘에 바치는 웅장한 꽃다발
종이에 먹펜, 42X58㎝, 2010
세계건축문화재 펜화 기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 앙코르 와트였습니다. 사진만 보아도 마음이 설렜습니다. 올봄 직접 만난 캄보디아 유적은 모두 경이로웠습니다. 그중 앙코르 와트는 규모와 완성도에서 최고였습니다.
앙코르 와트 내 프라샤트 사원에 있는 모두 12개의 탑 중 중앙탑은 높이가 60m로 20층짜리 빌딩과 맞먹습니다. 탑신에 5층 상륜(불탑의 윗부분에 있는 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을 쌓고 그 위에 3층 연꽃과 봉오리를 얹었습니다. 상륜마다 32개, 합쳐서 160개의 조각상을 올려 전체가 하나의 돌로 만든 꽃다발 같습니다.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왕인 수리아바르만 2세가 서기 1113년에서 1150년 사이에 브라만교 사원과 왕궁을 겸해 세웠답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본디 모습이 제대로 남아 있는 조각이 드뭅니다. 검토 끝에 복원도를 그리기로 하였습니다. 중앙탑 하나 그리는 데 열흘이 넘게 걸렸습니다. 취재 때 찍은 3000여 장의 사진과 10권의 책, 인터넷 정보를 다 참조했지만 그림을 제대로 그리기에는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문틀 위 상인방(창이나 건물 입구 등의 위에 가로로 댄 구조물)과 박공(건물의 입구 위쪽과 지붕 사이에 위치한, 삼각형의 마감 장식을 한 건물 벽)의 세밀한 조각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림 좌측 2개의 탑은 복원해 그린 것입니다. 검게 변한 돌의 색을 원래대로 그렸기 때문에 다소 어색해 보일 것입니다. 펜화를 시작한 이래 가장 세밀한 작품입니다.
일본 나고야 이누야마성,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나고야의 자존심
종이에 먹펜, 42X58cm, 2010
펜화를 좋아하는 분들의 모임이 일본에도 생겼습니다. 저의 호를 따서 ‘늘샘가족’이라 하는데 회장을 맡은 가와하라 히데아키(川原英章)씨가 나고야 분입니다. 나고야 사람들의 애향심과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일본 3대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두 나고야에서 태어났거든요. 성적이 우수해도 도쿄대에 가지 않고 나고야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면 주니치신문사에 취직하는 것이 나고야 젊은이들의 꿈이랍니다. 나고야 지역신문인 주니치신문은 발행부수 350만부로 전국지인 요미우리, 마이니치, 아사히신문과 어깨를 견줍니다.
가와하라 회장이 안내해준 문화재가 이누야마성(犬山城)입니다. 나고야성이 훨씬 크고 화려하지만 전쟁 때 폐허가 된 것을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 한 것이어서 원형 보존이 잘된 이누야마성을 추천한 것입니다. 이누야마성은 1537년 오다 노부나가의 숙부 오다 노부야스가 기소가와 강변 절벽 위에 지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천수각은 작지만 일본 국보입니다. 천수각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 일품입니다. 둘러보신 후에는 강 건너편에 가서 절벽 위의 성을 바라보세요.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성 앞 유라쿠엔(有樂苑)에 국보로 지정된 다실 조안(如庵)이 있어 일본 전통다실이 어떤 모습인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종묘 정전, 조선의 기품 드러낸 101m 영혼의 공간
조선의 임금이 몽진(蒙塵: 피란)을 갈 때 금은보화나 식량보다 우선하여 챙기는 것이 선대왕들의 신주(神主)입니다. 왕권의 근간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할 때도 신주를 모시는 종묘(宗廟)를 궁궐보다 먼저 지었습니다.태조 4년(1395)에 지은 종묘는 7칸의 태실에 4대 조상을 모셨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셔야 할 신주가 늘자 영녕전(永寧殿)을 추가로 짓고, 정전을 여러 번 증축했습니다. 그 결과 정전은 태실 19칸에 협실 각 3칸, 동·서월랑 각 5칸씩이 딸린 길고 아름다운 건물이 되었습니다. 길이가 101m에 달하여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라고 하였으나 일본 교토의 ‘33칸당’이 120m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세계 2위로 물러났습니다.임진왜란에 불타버린 뒤 선조 41년(1608) 중건을 시작하여 증축을 거듭한 종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정전에 49분의 신주가 모셔져 있고, 영녕전에 34분이 있어 총 83위의 신주가 있습니다. 종묘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어 가깝고 친근한 휴식 공간이 되었습니다. 정문인 창엽문을 들어서면 길 가운데 박석을 깐 길이 있습니다. 가운데 높은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향로(神香路)랍니다. 그 오른쪽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이고 왼쪽 길은 왕세자의 세자로입니다. 이 박석길은 정전에 들어서면서 진한 회색의 전돌로 바뀝니다.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지내는 종묘제례에는 제관들이 조선시대 복장을 그대로 갖추고 진행하는 모습이 무척 장엄하여 볼 만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이며, 제례 때 연주하는 종묘제례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입니다.‘
일본 교토 헤이안신궁 태평각
나무로 만든 정자형 다리 나래 편 봉황 솟아오를 듯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간무(桓武·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과의 혈연을 인정했습니다. 사실은 간무 천황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 고닌(光仁) 천황도 백제 성왕의 손자였습니다.간무 천황은 혼란했던 일본을 강력한 통치력으로 안정시키고, 훌륭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도읍을 헤이안(平安·교토)으로 옮기고, 신사를 지어 백제 성왕·비류왕·초고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헤이안 천도 1100주년이던 1895년 일본은 간무 천황을 일본 문화의 국조신으로 모시기 위해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세웠습니다. 일본에서 제일 큰 도리이(鳥居:신사나 신성한 곳의 입구에 세우는 일종의 문)를 세우고, 외배전 좌우 행랑 끝에 아름다운 다층 누각을 붙였습니다. 신궁을 둘러싼 정원은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남신원에서 시작해 서신원·중신원을 거쳐 동신원에서 끝나는 정원에는 일본 정원의 진수가 몽땅 담겨 있습니다. 남신원은 봄 벚꽃으로 알아주고, 서신원은 꽃창포를, 중신원은 가을 단풍과 멋진 징검다리의 어울림을, 동신원에는 태평각의 설경을 절경으로 손꼽습니다.동신원 큰 연못을 가로지르는 태평각은 헤이안신궁의 백미입니다. 동심원 큰 연못에 장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좌우 긴 익랑이 딸린 정자형 다리입니다. 중심 건물 지붕 위에는 봉황이 나래를 펴고 막 날아오르려 합니다. 목조 건축의 천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명작입니다.
일본 교토 은각사(銀閣寺)
다도와 철학을 낳은 어머니 배 속 같은 절
교토를 찾는 외국 관광객의 대다수가 금각사(金閣寺 : 긴카쿠지)를 필수 코스로 삼는 대신 은각사(銀閣寺: 긴카쿠지)는 빼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박을 입힌 화려한 금각사에 비해 은각사는 은박도 없고 규모도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본인 중에는 은각사를 더 좋아하는 이가 많답니다. 왜 그럴까요.은각사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자소사(慈昭寺: 지쇼지)는 무로마치 막부 제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지은 산장을 그가 죽은 뒤 절로 개조한 것입니다. 이 절 도큐도(東求堂) 안에 도닌자이(同仁齋)라는 차실이 있습니다. 일본 최초의 차실로 다다미 4장 반 크기의 좁은 방입니다. 그 뒤 도닌자이가 일본 차실의 표준이 됩니다. 인간은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다고 하듯이 좁은 차실이 같은 역할을 하나 봅니다. 은각사는 작은 차실로 일본인의 소중한 정신적 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일본 국보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은각사에서 눈여겨볼 것이 관음전 앞에 모래로 만든 지센카이유식 정원입니다. 모래를 파도 모양으로 너울지게 한 은사탄(銀沙灘)과 후지산을 상징한다는 향월대(向月臺)는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조형물입니다. 일본인들이 무척 자랑하는 것이니 그 의미를 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각사 앞 ‘철학의 길’이라는 산책로를 걸어 보세요. 니시다 기타로라는 철학자가 산책을 했다는 길입니다. 개울을 따라 30분쯤 걸을 수 있어 데이트 코스로 일품입니다. 산책로 주변에 카페가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문을 닫은 곳이 제법 있었습니다.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았더니 경제가 어려워 그렇게 되었는데 회복될 가망이 없어 걱정이랍니다.
일본 나라 도다이지 대불전
16층 높이 목조건물 건축가는 신라 사람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은 일본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전(大佛殿)입니다. 가로 57m, 세로 50.48m에 높이 48.74m로 현대 건물 16층 높이와 맞먹습니다. 쇼무 천황 때인 745년에 처음 지었을 때는 1.5배나 더 컸습니다. 100m 높이의 7층 쌍탑도 있었답니다. 건물만 큰 것이 아니라 안에 모신 비로자나 부처상도 대단히 큽니다. 앉은키 14.98m, 얼굴 길이 5.33m, 귀 길이 2.54m로 모든 것이 큼직큼직합니다. 일본인들의 자랑이 대단합니다. 일본 국보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입니다.쇼무 천황은 왜 이렇게 큰 부처와 법당을 지었을까요. 서기 737년 일본 전역에 천연두가 무섭게 퍼졌습니다. 흉흉한 민심 속에 규슈 지역에서 반란까지 일어났습니다. 천황은 민중의 신망이 높은 교키(行基) 스님에게 큰 절을 지어 불심으로 국가를 안정시켜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보시를 받아 도다이지를 세우고, 세계 최대의 법당과 불상을 조성해 천황의 권위를 세워줬습니다. 또 700여 신을 모시던 일본인들에게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보여줬습니다.아셔야 할 것은 도다이지를 지은 건축가가 신라 사람 이나베노모모요(猪名部百世)이며, 불상을 만든 장인은 백제 사람 구니나카노키미마로(國中公麻呂)라는 것입니다. 대불에 입힐 황금을 모은 이도 백제 왕 경복(敬福)이라는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의 부호와 권력자 중 많은 수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키 스님도 백제인으로 일본 최고의 승직인 대승정(大僧正)에 올랐으며, 천황 스스로 스님의 제자로 출가를 했습니다.
먹·펜·종이가 어울리다. 한국의 선이 살아나다
‘창덕궁 열고관(閱古觀)과 개유와(皆有窩)’, 종이에 먹펜, 36X48㎝. 열고관과 개유와는 정조가 공부하던 서재다.
주로 중국책을 보관해 열람하던 곳으로 정조의 향학열과 중국에 대한 관심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서양 전통 필기구인 펜을 사용해 한국의 전통문화재를 재현해온 ‘펜화가’ 김영택 화백(65·사진). 그의 그림 속엔 무수한 선이 등장한다. 가는 선을 반복해 그어서 면을 만들고 입체감을 나타내며 이미지를 창출한다. 펜화를 그리면서 그는 서양화의 투시도법과 인간의 시각이 다른 점을 발견했다고 한다.“투시도법은 사진의 원리와 같아서 앞 쪽에 위치한 사물이 크고 세밀하게 표현되잖아요. 하지만 인간의 눈은 달라요. 보고자 하는 중심부분만 명확하게 보이고, 주위는 흐릿하게 보이죠. 그런 방식으로 사물의 상하좌우를 훌터본 후, 그것을 두뇌에서 복합적인 이미지로 기억을 하죠. 중요한 사물은 크게 기억하기도 합니다.”그는 인간 시각의 특성을 적용해 펜화를 그린다. 예컨대 전남 해남 미황사를 그릴 때 대웅보전의 배경인 달마산을 15%쯤 확대했다. 달마산의 특징인 입석들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사진을 찍으면 대웅보전만 크게 나오고 달마산은 작게 보이는 원근법이 그의 그림속에서는 해체된다. 그는 현장의 감흥을 중시한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감흥은 달마산 입석이 동시에 강조될 때 제대로 살아난다고 보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이 사물을 보고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에 그는 ‘인간시각투시도법’이란 이름을 붙였다.경남 합천 영암사 터를 그릴 때는 쌍사자 석등이 5% 가량 확대됐다. 중요한 사물이 더 크게 기억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 카메라 앵글의 비례가 무시되는 것이다. 문화재를 가리는 나무, 해설판, 보호시설 등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요소는 빼거나 옆으로 옮기거나 하는 식으로 처리한다. 그는 궁극적으로 동양 전통의 ‘관념화법’을 지향한다. 관념화법은 사물이 놓인 현장의 생동하는 기운을 중시한다.
그의 펜화전이 23일부터 10월 18일까지 서울 관훈동 통인화랑에서 열린다. 그가 2007∼2008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펜화로 복원한 한국 건축문화재’의 원화 20여점이 전시된다. 그가 만들어가는 ‘한국적 펜화’의 현주소를 감상해볼 수 있다. 02-733-4867.
창덕궁 주합루와 어수문
정조가 큰 공부를 했던 이 작고 섬세한 도서관
세계건축문화재를 펜화로 그려 연재하면서 한국 건축문화재 중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을 꼽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창덕궁 후원 주합루(宙合樓) 일대입니다. 부용지 북쪽 양지바른 언덕에 장대석으로 석단을 쌓고, 정면 5칸, 측면 4칸 2층 누각을 지었습니다. 아래 위 모두 사방에 툇간을 내고 계자각 난간을 두른, 잘생긴 건물입니다. 정조 즉위년(1776)에 짓고 직접 이름까지 써서 달았습니다.정조는 1층 규장각에 책을 보관하고, 2층 주합루를 열람실로 만들어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는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공부가 열심이었다는 정조는 신하들과 부용지에서 고기잡이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열성의 결과로 정약용·채제공·박제가·유득공 등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됐습니다.주합루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은 한국의 문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공예품처럼 정교하며, 문인방 위 투각(透刻)과 창방 아래의 낙양 등은 최고급 장치입니다. 기와를 만든 김영림씨에 따르면 건물이 워낙 작고 섬세하다 보니 기와를 만드는 틀이 없어서 모두 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주합루와 어수문, 석계와 주변 풍광의 어울림은 한국 건축 백미 중의 백미입니다.근래 어수문 옆에 취병(翠屛)이라는 담장을 복원했습니다. 취병은 나무로 짠 틀에 식물을 키운 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없애 버려 1820년대에 그린 동궐도에만 남아 있었습니다. 어수문 옆 작은 문들은 일본식으로 만든 것이라 동궐도대로 고쳐 그렸습니다. 석계도 동궐도 그림에 맞추어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제거해 옛 자취를 되살렸습니다. 주합루 동북쪽의 제월광풍관과 서쪽의 서향각도 제대로 보이게 그렸습니다.
일본 효고현 히메지성 천수각
강한 돌 부드러운 나무 둘이 만나 예술이 되다
일본은 영주들끼리 수많은 전쟁을 하면서 성을 쌓는 기술이 발전합니다. 특히 천수각(天守閣: 덴슈카쿠)은 한국과 중국에도 없는 독창적인 양식의 건물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12개입니다. 그중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히메지(姬路)성(城) 천수각은 빼어난 아름다움에 일본 최고의 성으로 꼽힙니다. 히메지성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인 이케다 데루마사가 1609년 크게 개축한 성입니다. 히메야마에 14.85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세운 높이 31.5m짜리 7층 천수각은 당시 일본의 목조건축 기술이 최고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줍니다.히메지성은 교묘한 나와바리(繩張: 평면계획)로 적군이 천수각에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진입로의 폭이 넓었다 좁았다 하며 구불구불하여 진격이 쉽지 않고, 무작정 내달리다 보면 반대쪽에서 들어오는 아군과 마주치게 됩니다. 천수각 외부의 모든 벽은 누리고메(塗籠: 회를 두텁게 바르는 공법) 처리를 하여 화공을 방지했습니다. 출입문은 두터운 목재에 철판을 씌워 철옹성이 따로 없습니다. 그 밖에도 곳곳에 기기묘묘한 방어시설이 있어 해설사와 함께해야 참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히메지성은 한 번도 전투를 치른 적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막부 말기 천수각을 포위한 신정부군에 상인 기타가제 쇼조가 15만 량을 헌상하여 전투를 막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때 천수각이 백색 건물이라 미군의 폭격을 받기 쉽다고 생각해 검은 망을 씌웠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인 1945년 7월 3일 소이탄이 천수각에 떨어졌습니다만 주민들의 염원 덕분인지 불발됐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무사한 천수각을 본 히메지시 주민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1993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일본 나라 야쿠시지(藥師寺)동탑
6층 같은 3층탑에 켜켜이 쌓인 1200년 역사
일본에 불교가 자리 잡은 것은 요메이천황이 백제계인 소가 씨족과 손잡고 불교에 귀의하면서부터입니다. 서기 593년 섭정을 맡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는 백제에서 많은 장인을 불러 여러 절을 짓습니다. 이때를 ‘아스카(飛鳥)시대’라 하며, 1탑 1금당 형식이었습니다.건메이(元明)천황이 710년 나라지역으로 천도를 한 후 ‘나라(奈良)시대’가 시작됩니다. 쌍탑 1금당이 주류로 야쿠시지(藥師寺)가 그 대표작입니다. 1528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서탑은 1976년 재건되었고, 금당도 화재 뒤 최근에 복원된 건물입니다. 사방불을 모신 동탑만이 1200년 고색창연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3층 목탑입니다만 각층마다 모코시(裳階:차양칸)가 있어 6층으로 보입니다. 탑의 처마 끝이 나오고 들어감이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입니다. 펜화에는 여러 번의 보수공사로 줄어든 높이 50cm를 되살렸습니다.야쿠시지는 법상종 총본산으로 종정(管長)을 뽑는 의식이 엄격하기로 유명합니다. 시험이 있는 날, 큰스님 200여 명이 긴 무쇠 주장자를 끌고 절로 모일 때 나는 쇳소리를 나라 사람들은 ‘지축을 흔드는 소리’라고 합니다. 스님들은 범패(梵唄-높낮이가 없는 불교 성악)와 같은 음률로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추운 겨울, 백색 법복 한 벌만 걸친 후보는 7시간 동안 법상에 미동도 없이 앉아서 모든 질문에 범패 소리로 답을 합니다. 이때 답이 막히면 법상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전 종정인 다카다 고인(高田好胤) 스님과 에이인 야수다(安田暎胤) 현 종정 겸 주지(管主) 스님 모두 일본의 큰스님으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야쿠시지는 큰 행사 때 한국식 된장국을 내는 등 여러 가지로 우리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천황 스스로 ‘한국인의 피가 섞였다’고 밝힌 것처럼 황실의 원사(願寺)였기 때문은 아닐까요.
금박 입은 절집, 세계문화유산 된 일본의 자랑
일본 교토 로쿠온지 긴카쿠(鹿苑寺 金閣)
로쿠온지 긴카쿠, 종이에 먹펜, 41X58㎝, 2009
서울 숭례문에 방화로 화재가 발생하자 일본에서 다시 화제가 된 것이 교토 로쿠온지(鹿苑寺) 금각(긴카쿠·金閣)입니다. 금각은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1358~1408)가 통치권을 양도한 뒤 1397년 기타야마 별저를 호화롭게 조성할 때 세운 누각입니다. 그가 죽은 후 유언에 따라 로쿠온지라는 절로 바뀌었으나 사리전인 금각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금각사라는 별칭이 더 유명해졌습니다.
4만여 평 로쿠온지 중심에 있는 약 2000평 넓이의 교코치 연못은 무로마치 시대 지천회유식 정원의 대표작입니다. 이 연못에 비친 금각의 아름다운 모습은 일본의 자랑이었으나 1950년 한 사미승의 방화로 전소돼 온 일본이 충격에 빠집니다. 총력을 들여 5년 뒤 복원하였으나 금박이 벗겨지는 등 흉한 모습이 되자 87년 대대적으로 보수를 합니다. 전보다 옻칠을 5배나 더 두껍게 바른 위에 4배나 더 두꺼운 금박지를 붙여 창건 때보다 더 화려한 모습으로 재현했습니다.금각은 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으나 일본 문화재 자격은 잃었습니다. 완전히 불타버린 다음에 새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서울 숭례문은 돌을 쌓은 부분과 목조 누각 중 누각 2층의 일부와 지붕만 손실됐기 때문에 복원 후 국보 제1호 자격은 그대로 유지됩니다.금각은 세계적 명소가 됐으나 너무 화려하다고 등을 돌린 일본인도 많다고 합니다. 서울에도 금박을 붙인 절이 있다기에 ‘절을 왜 호화찬란하게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부처님에 대한 공경’이라고 하더군요. 입다 버린 헌 옷만 입고, 밥그릇 하나에 평생 무소유로 사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호화찬란한 법당에 마음 편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베이징 천단 기년전
19층 빌딩 높이 풍년 빌던 제단
종이에 먹펜, 41cmX58cm, 2009
중국 베이징(北京)을 상징하는 건물로 고궁(자금성)의 천안문과 천단의 기년전을 손꼽습니다. 많은 분이 고궁의 크기에 놀랍니다. 그러나 천단은 고궁의 세 배로 여의도 넓이와 맞먹습니다. 베이징에는 고궁을 중심으로 동쪽에 일단(日壇:르탄), 서쪽에 월단(月壇:웨탄), 남쪽에 천단(天壇:톈탄), 북쪽에 지단(地壇:디탄)을 두어 해와 달,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18년(1420)에 세우고, 청나라 건륭제 14년(1749)에 확장 개축한 천단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는 원구단(圓丘壇-위안치우탄), 원형 건물에 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皇穹宇-황충위), 풍년을 위한 제례를 지내던 기년전(祈年殿-치넨뎬)이 남으로부터 북쪽으로 일직선상에 있습니다.원구단은 애엽청석으로 바닥을 깔고 한백옥으로 난간을 두른 3단의 넓은 원형 제단으로 건물이 없어 단조롭습니다만 기년전은 더 큰 월대 위에 세운 3층 원형 목조건물로 높이 58m, 19층짜리 현대식 건물과 맞먹는 높이로 보는 이들을 압도합니다. 하늘을 상징하는 짙푸른 청색 기와에 용과 봉황으로 구성된 금색 단청이 잘 어울립니다. 바닥 중심부의 용봉석이 사람의 눈길을 끕니다. 직경 88.5cm 천연 대리석에 용과 봉황의 형태가 완연합니다.
그림을 그리다 문득 천단의 기년전과 황궁우는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인데 왜 서울에 있는 원구단 황궁우는 8각이며, 우리나라에 원형 건물이 없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원형 건물에는 중심 부분의 작은 기와부터 테두리의 큰 기와까지 크기가 다른 수십 장의 기와를 따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와를 올릴 때에도 암키와·수키와 모두 크기별로 맞추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니지요. 조선의 목수들은 미닫이문보다 여닫이문을 선호했습니다. 미닫이문은 잘 건조한 결이 고른 목재를 써야 하는데 조선 목수들이 이런 까다로움을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조선 와장들이 원형 지붕을 기피한 것이 아닐까요. 8각 건물에는 보통 기와를 쓸 수 있거든요.
교토 기요미즈데라
139개 나무 기둥 위에 ‘부처의 마음’을 얹다
교토는 오랫동안 일본의 수도였기 때문에 건축문화재가 많습니다. 그중에서 교토 시민이 즐겨 찾는 곳이 기요미즈데라(淸水寺)입니다. 서기 778년 창건되었으나 여러 번의 화재를 겪으며 1633년 재건된 절로서 유네스코 등록 문화재입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가장 볼 만한 건물이 오토와산 절벽에 139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본당과 부타이(舞台)입니다. 높이 15m짜리 기둥을 5층 구조로 짜 맞추고 본당의 절반과 목조 마루를 지은 것입니다. 일본인의 건축 기술과 우수한 목재인 노송나무(편백)가 있어 가능하였지요. 가로로 쓰인 보에 작은 지붕을 올려서 썩지 않도록 한 장치는 눈여겨볼 점입니다. 부타이에서 바라보는 교토의 야경은 교토 시민의 자랑입니다. 봄철 벚꽃이 필 때에는 부타이에 사람이 넘쳐납니다. 부타이의 목조 기둥들이 숲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기에 나뭇가지들을 삭제하고 그려 제멋을 살렸습니다.본당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히와다부키)을 여러 겹 붙인 일본 특유의 지붕입니다. 볏짚을 올리는 초가는 매년 갈아야 하지만 히와다부키는 수명이 길고 가벼워서 일본의 주요 건물에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무겁고 투박한 기와와 달리 가공하기도 쉬워서 지붕의 선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본당 옆 절벽에서 떨어지는 세 줄기 물을 받아먹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이 폭포 때문에 청수사란 이름이 생겼다는데 장수, 사랑, 학문의 소원을 이루어 준답니다.일본에서는 절(寺)을 ‘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법륭사를 ‘호류지’라고, 약사사를 ‘야쿠시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요미즈데라 스님 앞에서 ‘기요미즈지’라고 했다가는 눈총을 받게 됩니다. ‘데라’라는 이름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나 봅니다. ‘데라’라는 이름이 우리말 ‘절’이 변한 것을 스님은 알고 계실까요? 일본인들이 ‘ㄹ’ 받침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기 때문에 ‘데라’가 되었답니다.
일본 우지 뵤도인 봉황당
위엄 있는 좌우대칭 절집, 봉황이 나래 편 듯
뵤도인 봉황당, 종이에 먹펜, 41×58㎝, 2009.
교토 동남쪽 우지(宇治)시의 뵤도인(平等院) 봉황당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절은 수행공간이어서 너무 아름답게 지으면 흉이 됩니다만 봉황당은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957년 전인 서기 1053년 당시 관백 후지와라 요리미치가 부친의 별장을 절로 개축하면서 지은 법당입니다.
본당 좌우에 회랑을 붙여 지은 모양이 봉황이 나래를 편 모습을 닮았다고 봉황당이라고 합니다. 회랑이 ‘ㄱ’자 모양으로 꺾어지는 부분에 사모지붕의 2층을 올려서 멋진 좌우대칭 건물이 되었습니다. 좌우대칭 건물은 아름다움과 함께 권위를 상징합니다. 청와대와 대법원 건물을 비교해 보세요. 2층은 용도가 없는 멋내기 건물입니다.봉황당 자리에 일본인의 장기인 조경 기술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연못가에 자갈을 깔고 자연석을 박아 놓아 넓은 바다 한가운데 섬에 지은 건물처럼 보입니다. 1991년부터 12년간 발굴 조사한 결과에 따라 헤이안 시대의 사주(砂洲)정원으로 복원한 것입니다. 물에 비친 봉황당의 아름다움을 펜화로 표현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습니다. 좌측의 다리는 헤이안 시대의 모습처럼 복원해 그린 것이며, 근래에 지은 건물들은 그림에서 삭제했습니다.법당 용마루 좌우 끝에 청동으로 만든 화려한 봉황이 서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해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용봉대향로 뚜껑의 봉황과 형제처럼 닮았습니다. 법당에 모신 아미타부처와 광배, 천장 닫집 등 모든 표면에 금박을 입혀 놓았던 흔적이 보입니다. 온전한 상태라면 얼마나 휘황찬란할까요.광배에 붙인 12구의 비천상과 벽에 걸린 운중공양보살상(雲中供養菩薩像)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조각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52구의 공양보살 중 일부가 경내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을 올라탄 보살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일본 호류지 금당과 5층탑
꿋꿋하게 버텨온 1400년 왠지 낯익은 처마 곡선 …
호류지 금당과 5층탑 호류지 금당과 5층탑 복원도, 종이에 먹펜, 40X57cm, 2009.
세계건축문화재를 펜화에 담는 첫 작업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일본 나라의 호류지(法隆寺)를 골랐습니다. 호류지 금당은 아스카 시대인 서기 607년 건립되었으니 1400살이 넘은 건물입니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백제에서 많은 건축가와 장인을 초청해 지은 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호류지 금당은 670년 불에 탄 것을 재건했고, 그 뒤로도 여러 번 보수를 했습니다. 5층탑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입니다.
한국의 총각무를 일본에 심으면 커다란 단무지 무가 되듯이 백제 장인이 지은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이 오랜 세월에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본 순간 오랜 친구를 보는 듯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백제 건축의 원형이 살아 있는 듯 보였습니다. 처마 곡선과 비례 등 한국인의 특성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건물들이 더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다만 두 건물 모두 1층 모양이 무척 어색해 보였는데, 안내를 하던 쇼카쿠 후류야 집사장 스님이 “나라 시대에 덧붙여 지어서 그렇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국 건축물의 복원도를 그리던 것처럼 고쳐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유물 전시관에서 5층탑 원형 모형을 만났습니다. 눈치를 챘는지 스님이 특별 촬영 허가를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이 원형을 바탕으로 펜화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복원도가 일본에서 그린 저의 첫 작품이 되었습니다.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이 어색하고 답답한 겉옷을 벗고 늘씬한 원래 자태를 드러냈습니다.펜화를 시작한 뒤 10여 년 동안은 현장에서 그렸습니다만 이제는 사진을 이용해 연구실에서 작업을 합니다. 호류지 금당과 5층탑은 회랑에 둘러싸여 있어 촬영 거리가 부족해 광각렌즈로 촬영했기 때문에 사진에는 건물 모양에 심한 왜곡이 생깁니다. 가까운 건물은 너무 커지고, 멀리 있는 건물은 아주 작아지며, 건물이 위로 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집니다. 펜화에는 이런 왜곡을 바로잡아 그렸습니다.호류지에서 꼭 보아야 할 것에 고구려 담징 스님이 그린 금당 벽화가 있습니다. 중국 윈강석굴, 경주 석굴암과 더불어 동양 3대 걸작으로 손꼽습니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앙드레 말로가 극찬한 구다라(百濟) 관음상도 꼭 보셔야 합니다. 백제의 장인이 일본에 건너가 만들었다고 추정합니다. 백제 위덕왕이 보낸 구세관음(救世觀音)상도 일본 국보입니다.
새 연재 시작하는 김영택 화백“다음 차례는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것”
본보 week&에 펜화를 연재했던 김영택 화백이 세계건축문화재 연작으로 기행을 이어간다. 격주 기획이다. 일본과 중국의 유명 건축문화재가 출발이다.“한국의 목조문화재 건축기술은 찬란했지요. 신라 때 황룡사 9층탑도 만들었잖아요. 지금의 기술로도 만들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볼 수 없어요. 우리 삼국시대에 만든 일본의 호류지 5층탑은 아직도 튼튼하게 서 있는데 말입니다.”일본의 유서 깊은 도시들을 취재하며 김 화백은 일본의 건축문화재에 남아 있는 우리 고대 문화의 흔적을 읽어냈다. 김 화백은 절집·정자·궁궐·옛집을 비롯한 전통문화재를 주로 그린다. 기억 속에 묻혔던 문화재들이 그의 손끝으로 되살아났다. 서대문, 서소문, 창경궁 열고관, 경복궁 서십자각 등이 그것이다. 살아 있는 문화재는 제 모습을 찾았다. 철저한 자료 조사와 고증의 힘이다. 이를 위해 그는 해외까지 나가 자료를 모았다. 광화문 네거리 ‘고종 즉위 40년 기념비전’의 지붕과 담장 모양이 바뀐 것도 그가 밝혀냈다. 전문가들도 모르고 있던 내용이다. 그의 그림은 세밀하다. 흰 종이 위에서 엇갈리는 수십만 개의 먹선은 하나하나가 다 의미를 담고 있다. 기와 한 장, 벽돌 한 장까지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많은 건축문화재가 설계도도 없이 허술하게 관리되는 걸 보아왔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는 문화재는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림만 보고도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 그의 묘사는 치밀하다.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4일자에 김 화백 소개 기사를 실었다. 광화문 그림과 함께다.“매일 18시간씩 2주일을 작업하면 겨우 그림 한 장을 완성한다 … 고요한 밤에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무심히 움직이는 펜 소리가 불경처럼 들려온다.”그는 지금 펜화를 통해 우리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어떻게 알릴까 고민 중이다. 0.05㎜짜리 펜선. 그 가는 선으로 펼치는 김영택의 펜화 세상은 굵고, 깊고,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