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리 전투
너무 깊이 들어왔던 중공군
미 3사단은 경기도 광주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였다. 따라서 이들이 짧은 시간 안에 기동을 시작해 강원도 횡성 일대에 도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작전이 아니었다. 우선 시간이 촉박했다. 중공군은 맥없이 물러서는 한국군 3군단의 후미를 쫓아 현리를 넘어 속사리에 진출한 뒤 새로운 돌파구 확대에 나선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선두는 이미 속사리까지 진출한 상황이었다. 동쪽에서는 내가 이끄는 국군 1군단이 신속한 기동을 펼쳐 대관령을 막아 중공군 공세의 선봉을 꺾으려 했고, 그 서쪽에서 경기도 광주로부터 이동한 미 3사단이 현리에서 속사리로 이어지는 국도를 차단해 중공군 공세의 확산을 막으려 하는 모습이었다. 용평의 한국군 3군단 간이 비행장에서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홀연히 날아와 지시를 내렸고, 그 내용을 수령한 사람이 한국군 1군단장인 나와 미 3사단의 유진 라이딩스 장군이었다. 미 3사단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지시가 내려지기 전에 먼저 기동을 시작했다.
- 중공군 공세를 꺾기 위해 경기도 광주에서 강원도 횡성 일대로 급격 기동한 미 3사단은 중공군 허리를 끊고 저들의 5단계 2차 공세를 막았다. 사진은 미 3사단이 중공군에게 공격을 가하는 모습이다.
육군본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중공군 지도부는 공세를 벌이고 난 뒤 이틀이 지난 5월 18일에 공격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최고 수뇌부의 공격 중지 명령이 전선 부대에게 직접 전해진 시점은 5월 22일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미 중공군에게는 아주 불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선 중공군의 보급에는 현저한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5월 22일이라고 한다면 중공군의 총공격이 벌어진 뒤로 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중공군은 보급 능력에 문제가 있어 공세를 벌이다가도 길게는 1주일, 짧게는 4~5일을 이어가지 못했다. 따라서 그 무렵의 중공군은 모든 전선에서 공격력이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놀라운 미군의 기동
그런 상황에서 미 3사단의 기동은 매우 적절했다. 그들은 5월 17일 기동을 시작한 뒤 5월 19일에는 예하 7연대와 65연대를 강원도 평창의 장평리에 집결시킬 수 있었다. 결코 순조로운 기동은 아니었다. 내가 나중에 미군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일거에 막대한 사단 병력과 장비를 동부전선으로 옮기기 위해 중간 구간을 설정한 뒤 셔틀 방식으로 트럭을 몰고 또 몰았다. 주간은 물론이고 밤에도 계속 차를 몰아야 했던 까닭에 수송부대 요원이 그를 다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경우에는 일반 전투 사병 중 트럭을 몰 줄 알았던 대원이 나서서 차를 몰았다고 한다. 내가 알기에는 그렇게 이동한 거리가 약 500리,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200㎞를 상회했다고 한다.
지금의 상황에 견주면 별것 없는 거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아주 열악했던 도로사정, 더구나 그곳이 대개 산간과 협곡으로 이어지는 경기 북부와 강원도 산간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놀라운 기동 속도였다. 미 3사단은 그렇게 부지런히 길을 달려 강원도 일대에 집결해 중공군 추격에 나섰다. 강원도에 집결한 뒤 미 10군단에 새로 배속한 미 3사단의 공세는 자연스레 속사리까지 진출한 중공군의 후미(後尾)를 끊는 일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 추가 병력의 진입을 차단한 뒤 앞에 진출한 중공군을 섬멸하면서 공세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②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