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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而災殃(재이재앙)
財;재물 재, 而:또 이, 災:재앙재, 殃:앙화 앙.
어의: 재물이 곧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어렵던 환경에 있다가 생활이 풍요로워지면 노력을 소홀 히 하게 된다는 뜻.
문헌: 일성록(日省錄),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8대 현종(顯宗) 때 형조판서와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맡았던 김학성(金學性.1807~1875)은 본관이 청풍(淸風)이고, 호는 송석(松石)이며,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라 1829년 정시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1872년에는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삯방아와 삯바느질을 해서 아들들을 공부시켰다.
비가 내리는 어느 여름날, 학성의 어머니가 방아를 찧고 있는데, 추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곳을 파보았더니 쇠항아리가 나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놀랍게도 백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몹시 기뻤으나 멈칫하고는 다시 생각을 했다.
“지금 아이들이 고생을 참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스스로 장래를 개척하려는 정신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재물이 생기면 게으른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어머니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땅을 더 깊이 파고 항아리를 도로 묻어버렸다. 그후 학성은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했다.
아들들이 각자 벼슬에 올라 안정되자, 어머니는 비로소 백금 항아리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난 학성이 말했다.
“어머니도 딱하십니다. 그때 그 백금을 처분하여 살림에 썼더라면 어머님은 그렇게 고생을 하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저희들도 좀 더 좋은 환경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자 어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때 너희들은 시래기죽일망정 고맙게 생각하며 맛있게 먹으면서 가문을 훌륭하게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것은 다 역경을 이기겠다는 강한 의지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너희들 뒷바라지를 하면서 고생도 오히려 즐거웠었느니라. 그런데 만일 그때 그 백금을 살림에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너희들은 큰 재물을 거저 얻은 사실에 마음이 흔들려 학문에 지장이 있었을 것이고, 나 또한 지금까지의 고생을 잊고 편안한 호사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사람은 본디 가난이 무엇인지 알아야 재물의 참다운 가치를 알게 되느니라. 갑자기 손에 들어오는 재물은 재액의 근원임을 명심하여라.”
어머니의 말씀에 학성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爭犬得猴(쟁견득후)
爭;다툴 쟁, 犬:개 견, 得:얻을 득, 猴;원숭이 후.
어의; 개들의 다툼에 원숭이가 이익을 챙기다. 즉 이해 당사자가 재물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데 정신이 팔려 있
으면 제삼자가 이익을 취한다는 뜻. 어부지리(漁父之利)와 비슷한 의미다.
문헌: 아동문학(兒童文學)
황구(黃狗.누렁이)와 흑구(黑狗.검정개)가 배가 고파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맛있는 고기 냄새가 풍겨왔다. 누렁이는 코를 벌름거리면서 냄새나는 쪽을 향해 쏜살같이 뛰어갔다.
그곳에는 먹음직한 고깃덩어리가 종이에 싸인 채 떨어져 있었다. 누렁이가 얼른 종이를 찢고 고기를 먹으려 하는데 그때 어디선가 검정개가 나타났다.
“야, 나도 배가 고프다. 그러니 좀 나누어 먹자! 멍멍!”
“무슨 소리, 이건 내가 발견한 거야. 멍멍!”
“그러지 말고 좀 나누어 먹자.”
“안 된다니까.”
둘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원숭이가 나타나 말했다.
“둘이 그렇게 싸울 게 아니라 내가 공정하게 나누어 주마.”
누렁개는 좀 억울했지만 그냥 싸우기만 하다간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승낙했다.
“좋다. 그렇게 하자.”
검정개도 이미 누렁개가 차지한 뒤에 끼어든 판이니까 손해 볼 것 없겠다 싶어 원숭이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
원숭이가 고기를 반 토막으로 뚝 잘라 저울대 위에 올려놓으니 한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그러자 원숭이가 말했다.
“한쪽이 약간 무거운데 무거운 만큼은 내가 먹어도 되겠지?”
누렁이와 검정개는 그까짓 것쯤이야 괜찮겠지 생각하고 그러라고 했다. 원숭이는 무거운 쪽에서 고기를 싹둑 잘라서 낼름 먹어 치웠다. 그리고 자른 고기를 다시 저울대 위에 올려놓으니까 이번에는 자르지 않은 쪽이 무거웠다.
“이번에는 이쪽이 무겁군.”
원숭이는 다시 그쪽을 잘라 입에 넣고 우물우물하면서 다시 달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 잘라 먹은 쪽이 또 무거웠다. 원숭이는 또 무거운 만큼만 먹겠다며 잘라 먹었다.
이렇게 이쪽저쪽을 번갈아가며 잘라 먹다보니까 고기는 다 없어졌고, 원숭이는 쏜살같이 도망쳐버렸다.
어떤 일이든 욕심을 부리면 잘해야 본전이고, 그렇지 않으면 통째로 날릴 수도 있다는 교훈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猪頭無罪(저두무죄)
猪;돼지 저, 頭:머리 두, 無:없을 무, 罪:허물 죄.
어의: 돼지머리는 죄가 없다. 연산군 시절 돼지 머리를 보고 웃은 기녀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장순손 고사
에서 유래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경우를 이른다.
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한국인(韓國人)의 지혜(智慧)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의 치세가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말해주는 이야기다.
한 나인이 종묘에서 제사에 올리려고 돼지머리를 진설하고 있었다. 그때 연산군 옆에 있던 기생이 그 돼지머리를 보더니 갑자기 깔깔거리고 웃었다. 연산군은 화를 벌컥 내면서 물었다.
“왜 웃느냐?”
그러자 기생은 여전히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오라 성주(星州) 문관 장순손(張順孫.1457~1534)은 얼굴이 꼭 돼지머리같이 생겨 사람들이 그를 장저두(張猪頭)라 부르는데 지금 저 돼지머리를 보니 문득 그 사람 생각이 나서 웃었나이다.”
그 기생은 성주에서 뽑혀 올라온 미녀로서 연산군의 귀염을 받고 있는 터였다.
연산군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더욱 성을 냈다.
“네가 돼지머리를 보고 장순손을 생각하는 것은 필연코 그놈과 정을 통할 때를 회상해서일 게다. 과인의 계집과 정을 통한 그런 무엄한 놈은 그냥 둘 수 없다.”
하고는 금부도사(禁府都事)에게 당장 장순손을 잡아 올리라 했다. 금부도사가 내려간 뒤 화를 참지 못한 연산군은 다시 금란사령(禁亂使令)에게 바로 뒤쫓아가서 아예 처단해 버리라고 했다.
그런데 먼저 내려갔던 금부도사는 장순손을 압송하여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함창의 공검지란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난데없이 고양이 한 마리가 지름길로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것을 본 장순손이 금부도사에게 간절히 청했다.
“여보시오. 내가 전일 과거를 보러 올라가는 길에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과거에 급제하였소. 이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잡혀 가는 길에 또 고양이가 지나가는 것을 보니 혹시 그길로 가면 무슨 좋은 수가 생길지도 모르겠소. 그러니 나의 청을 들어 주시어 지름길로 갑시다.”
금부도사도 장순손의 무죄함을 아는 터였으므로 그만한 청쯤이야 괜찮겠지 생각하고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뒤미처 내려간 금란사령은 장순손일행이 지름길로 갔기 때문에 길이 어긋나 만날 수가 없었다. 금란사령이 허둥지둥 장씨의 집에 도착하니 그는 이미 잡혀 올라간 뒤였다.
한편 장순손을 압송해 올라오던 금부도사는 연산군의 왕위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짐작했던 터이므로, 죄인이 몹시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서 일부러 늦장을 부렸다.
그렇게 그들 일행이 수원부에 당도했을 때 반정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억울하게 형을 받게 된 사람들이 모두 방면되었다.
몽두(蒙頭. 조선시대에 죄인의 얼굴을 가리던 가리개)를 벗은 장순손은 그 뒤 춘추관의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삼남지방 순찰사를 지냈다.
나중에 김안로(金安老)의 최측근이 되어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533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賊喊捉賊(적함착적)
賊:도둑 적, 喊:꾸짖을 함, 捉:잡을 착.
어의: 도둑이 도둑을 잡아 꾸짖는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속담과 같은 의미로, 결국은 그
게 그것이라는 뜻이다.
문헌: 경연일기(經筵日記), 고금청담(古今淸談)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17년, 경기도 양주의 백정(白丁)출신 임꺽정(林巨正)은 관리들의 부패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그 피해자들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의 곡식을 가져다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의 사회는 지배 계급인 양반들 등살에 일반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극도로 피폐해져 모두들 아사지경(餓死之境)에 있었다.
특히 연산군(燕山君)의 호화 방종한 생활로 인하여 백성들은 피와 땀을 짜고 가죽을 벗기는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에다 병역, 부역, 대역세, 포목세 등 갖가지 세금까지 부담해야 했다. 때문에 농촌 사회는 거의 붕괴 직전에까지 몰렸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히 도적들의 발호를 부채질했다. 그래서 도적들은 적으면 사오 명, 많으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토호와 부자들을 털곤 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집단이 대적 임꺽정 무리였다.
백정의 아들 임꺽정은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청석골을 근거지로 경기, 황해, 평안 등지에서 황해감사나 평안감사가 나라에 바치는 진상 봉물을 털기도 하고, 감사의 친척을 가장하여 수령들을 토색하기도 했다.
임꺽정은 모든 도적 떼 가운데서 으뜸가는 천하장사였다. 그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뜻이 맞는 자들과 의형제로 결연하고, 휘하의 두령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두령 가운데 하나가 체포되어 안성감옥에 갇혔다. 임꺽정은 그를 구하려고 어물 장수로 변장하였다. 그리고 몇 개의 짐 꾸러미를 꾸리어 그 밑바닥에 무기를 넣고, 겉에는 마른 어물로 위장을 하고는 안성을 향해 떠났다.
그의 일행이 해음령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는데 머리에 흰 수건을 질끈 동여맨 수상한 위인 수십 명이 길가 숲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짐을 벗어 놓고 가거라.”
또 다른 도적놈들이 임꺽정의 물건을 탈취하려는 것이었다. 임꺽정은 깔깔 웃었다.
“이놈이 푼수처럼 웃기는……, 어서 짐을 벗지 못하겠느냐?”
그 가운데 제일 큰 위인이 고함을 질렀다. 임꺽정은 수하들의 짐을 모두한테 모아 묶은 다음 번쩍 들어 그들에게 주며 말했다.
“묶음이 커서 못 들을 테니 내가 들어다 드리겠소.”
임꺽정이 그 큰 짐을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니 그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장사 어른을 몰라뵈었습니다. 죽여 주십쇼!”
꺽정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모르고 한 일이니 그만들 일어나시오!”
그들은 모두 투항하여 임꺽정의 부하가 되었다.
임꺽정은 항상 그렇게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했고, 의를 앞세워 세력을 규합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도적이 도적을 꾸짖어 수하로 삼고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는 것을 일러 적함착적(賊喊捉賊)이라 한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切脚心不(절각심불)
切:끊을 절, 脚:다리 각, 心:마음 심, 不:아니 불.
어의: 다리가 부러져도 마음은 부러지지 않는다. 이순신이 말타기 시험 중에 낙마하여 다리가 부러졌으나 불굴
의 의지로 다시 도전했던 고사에서 유래했다. 강인한 의지를 표현할 때 쓰인다.
문헌: 한국위인일화(韓國偉人逸話)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때의 무장(武將)으로, 자는 여해(汝諧)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그가 스물여덟 살 때 훈련원에서 실시하는 무술대회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여타 다른 과목은 그동안 닦은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잘 치르고 마지막으로 말을 타고 달리며 활쏘기, 창쓰기, 칼쓰기 등의 기예를 펼쳐 보일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탄 말이 갑자기 앞발을 꿇으며 쓰러지는 바람에 말 등에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이순신은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떨어지면서 왼쪽다리가 부러져 버렸던 것이다. 이순신은 저려오는 아픔을 참고 엉금엉금 기어 근처에 있는 버드나무로 가서 그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긴 다음 다친 다리를 묶고 다시 말에 올라타 나머지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 참을성과 침착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순신은 그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힘든 과정을 거쳐 최선을 다하여 시험에 응하였기에 섭섭한 마음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그러나 순신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실망해서는 안 된다. 다리가 부러졌다고 마음마저 부러져서는 안 된다. 또 기회가 있지 않은가.”
이순신은 이렇게 자신을 격려했다. 그리고 4년 후 마침내 무과에 급제하여 당당히 벼슬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였다. 원균이 일본군에 패하여 배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유성룡이 이순신에게 물었다.
“이 적은 배를 가지고 싸워 이길 수 있겠소?”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12척의 배를 보수하여 적과 싸웠고,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의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1597년 10월14일.
둘째 아들 열(悅)의 편지로 막내아들 면(葂)이 전사(戰士)한 것을 알았다.
간담이 떨어져 나간 듯하여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이치에 맞는 것을,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치가 어찌 이렇듯 어긋난단 말이냐. 천지가 온통 캄캄해지고 태양도 빛을 잃는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함이 남다르더니만 하늘이 너를 이 세상에 머물게 두지 않았구나.
내 죄가 너에게 미쳤나 보다. 나 또한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울고 싶다만 너의 형, 너의 누이동생, 너의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겠기에 참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구나.
아! 하룻밤 지나기가 일만 년 같구나.
망망대해를 한 손에 주름잡고 적군에게 호령하던 이순신이 아들의 죽음 앞에서 그토록 몸부림치며 애통해하는 부정(父情)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
그는 시문(時文)과 서예(書藝)에 능할 뿐 아니라 정치와 외교에도 밝았다. 그러면서 차(茶)를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중국 사신이 오거나 귀한 손님이 올 때는 으레 차를 대접했다.
그는 차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자녀들이나 조카의 이름을 지을 때 풀초(艸)변을 넣어 지을 정도였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개인의 일기에 불과하지만 임진왜란사(壬辰倭亂史)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切肉之孝(절육지효)
切:끊을 절, 肉:살 육, 之:어조사 지, 孝:효도 효.
어의; 살을 베는 효도라는 말로,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향득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자기 실을 베어 부모를 봉
양할 만큼의 극진한 효도를 이른다.
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5) 때 웅천주(熊川州. 지금의 충남 공주군 계룡면) 소학리의 향효포(向孝浦)란 마을에 향득(向得)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소학리는 원래 효가리(孝家里), 즉 ‘효자가 사는 고장’이라고 불러왔던 곳이다.
향득은 계(戒)를 받은 재가승(在家僧)이었다. 재가승이란 출가승(出家僧)과는 달리 절에 들어가서 도를 닦지 않고 집에서 5계를 지키는 불제자(佛弟子)로서, 일명 처사(處士)라고도 부른다. 5계의 내용은 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거짓말하지 말 것, 술을 먹지 말 것 등이다.
어느 해,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모두 양식이 떨어졌다. 사람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소나무 껍질이나 사냥을 해서 힘들게 먹고 살아야 했다.
향득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병환 중인 향득의 어머니는 간절히 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살생을 절대 금하는 불교를 신앙하는 향득은 효도를 위해 신앙을 저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신앙을 고집하여 어머님이 먹고 싶어 하는 고기를 안 드릴 수도 없게 되었다.
향득은 두 가지 중 한쪽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살생을 하지 않고 어머니께 고기를 드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끔찍하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향득은 날이 잘 선 칼을 가지고 마을 앞 냇가로 갔다. 그리고 자기 허벅지 살을 도려내 그것으로 국을 끓여 어머니의 밥상에 올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맛있게 다 먹고는 만족해했다.
그때부터 향득이 자기 살을 도려냈던 마을 앞의 내(川.천)는 혈흔천(血痕川), 즉 ‘피흘린 내’라고 불려지기 시작했다.
향득의 깊은 효심은 경덕왕에게까지 알려져 왕은 조 3백 석과 구분전(口分田)을 주어 그 효행을 포상했다. 때는 경덕왕 14년(755년)의 일이었다.
이후 향득이 살던 집터에서는 계속해서 효자, 효부가 나와 참으로 신기한 집터로 알려졌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接梨食果(접리식과)
接:접붙일 접, 梨:배나무 리, 食:먹을 식, 果열매 과.
어의: 배나무에 접을 붙여 그 과일을 먹다.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 일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뜻.
문헌: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 고금청담(古今淸談)
정호(鄭澔. 1648~1736)는 본관이 연일(延日)이요, 호는 장암(丈巖),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 때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배경으로 노론의 영수가 되어 관작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충주에서 한가하게 지내던 어느 날, 도승지 이형좌(李衡左)가 찾아왔다가 마침 배나무에 접을 붙이고 있는 그를 보고 물었다.
“지금 어린 배나무에 접을 붙이면 언제 그 열매가 열려서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정호는 그때 나이가 80이나 되었기에 그 말을 언짢게 여겨 아무 말 없이 접붙이는 일만 계속했다.
그 뒤, 형좌가 충청감사가 되어 다시 그의 집을 예방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호는 굵은 배를 몇 개 가지고 와서 형좌에게 주었다. 형좌가 그 배를 먹어 보니 맛이 참으로 좋았다.
“배 맛이 참으로 좋군요. 어디에서 구했습니까?”
“몇 년 전에 내가 접을 붙일 때 그대가 와서 보고 접은 붙여도 배는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던 그 배요. 밤나무나 감나무의 어린 묘목을 심는 것은 몇 년 후를 바라보고 심는 것이오. 미래를 위해서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는 말이외다.”
이 말은 ‘내일 이 땅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말과 상통하기도 하지만 내일의 일꾼을 위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接髮移虱(접발이슬)
接:댈 접, 髮:터럭 발, 移:옮길 이, 虱:이 슬.
어의: 머리를 맞대어 이를 옮기다. 어머니 머리에 이가 많은 것을 보고 그 이가 자기 머리에 옮겨 오게 한 고사
에서 유래한 말로, 상대를 위한 배려를 의미한다.
문헌: 해동잡록(海東雜錄), 여담천리(餘談千里)
조선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은 제11대 중종(中宗) 때 사람으로 상주에 살았다. 호는 신재(愼齋)이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며, 호조참판과 대사성을 지냈다.
그가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병으로 오래 누워 지내다 보니 머리에 빗질도 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머리에 이가 많이 생겨 고통스러운데도 워낙 많아서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자신의 머리에 이가 좋아하는 기름을 바르고 어머니의 머리에 가까이 갖다 댔다. 그러자 이가 모두 자신의 머리로 옮겨 왔다. 그의 이 같은 지극한 효성으로 간병하니 어머니의 병이 곧 나았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도 무덤 옆 움막에서 3년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때도 사흘에 한 번씩은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 문안을 드렸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자기가 거처하던 안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벼슬한 지 30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한사코 외직을 자청했는데 이는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서였다. 그런 그는 나중에 청백리(淸白吏)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 경기체가인 <도동곡>, <육현가>, <엄연곡>, <태평곡> 등과 14수의 시조가 있다.
다음은 그의 시조 <지아비 밭 갈러 간 데>이다.
지아비 밭 갈러 간 데 밥고리 이고 가
밥상을 받들되 눈썹에 맞추나이다.
친코도 고마우시니 손이시나 다르실까.
남편이 밭갈이하러 들에 나갔을 때, 지어미는 밥고리를 이고 가서 그 남편에게 밥상을 올리는데, 마치 높은 손님에게라도 올리듯이 눈썹 높이까지 정중하게 올리는구나, 남편이란 진정으로 친하고도 고마우니, 손님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주세붕의 아내야말로 섬김을 으뜸으로 했던 정숙한 아내였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鼎卦七又(정괘칠우)
鼎:솥 정, 卦:걸 괘, 七:일곱 칠, 又:또 우.
어의: 솥을 일곱 번이나 걸었다는 말로,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시키는 것을 말한다. 동
학의 교주 최시형이 손병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해서 솥을 반복적으로 걸게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문헌: 동학사(東學史),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
손병희(孫秉熙. 1861~1921)의 초명은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이다. 의조(懿祖)의 서자(庶子)로 청주(淸州) 출신이다.
1882년, 그가 동학(東學)에 입교하자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크게 쓰고자 그를 주시했다.
공주 가섭사(迦葉寺)의 연성수도원(鍊性修道院)에서 있은 사십구제 기도회 때였다.
최시형이 손병희를 불러 제사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이미 걸어 놓은 가마솥을 떼어 다시 걸라고 했다. 추운 겨울이라 언 흙을 파고 솥을 거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으나 손병희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일을 끝내고 다 걸었다는 보고를 하자 최시형은 쓱 훑어보고 나서 내뱉듯이 말했다.
“솥을 이렇게 걸어서야 쓰나, 떼어 다시 걸어라.”
손병희는 아무 소리도 않고 솥을 떼어 이번에는 조금 낮게 걸었다. 그러자 최시형이 다시 말했다.
“솥 하나 변변히 못 걸다니! 이렇게 비뚤어지게 걸면 어떻게 쓸 수가 있겠나?”
공연한 트집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손병희는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다시 고쳐 걸었다.
이렇게 하기를 무려 일곱 번, 그제야 최시형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손병희의 인내심을 시험했던 것이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
鼎中遊魚(정중유어)
鼎:솥 정, 中:가운데 중, 遊:놀 유, 魚:고기 어.
어의: 솥 안에서 노는 물고기라는 말로, 아무리 잘난 척해도 솥 안의 물고기는 죽을 수밖에 없듯이 머지않아 죽
을 목숨이라는 뜻이다. ‘독 안에 든 쥐’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문헌: 삼국사기 열전 제7권
신라시대 사량부(沙梁部) 김영윤(金令胤. ?~684)은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때 사람으로, 인정이 많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의 아버지 반굴(盤屈. ?~660)은 벼슬이 급찬이었고, 할아버지 흠춘(欽春)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싸우다 황산벌에서 전사했으며, 벼슬은 각간에 이르렀다. 문무왕(文武王)이 그를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으니,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너그럽게 백성을 대하여 모두들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7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게 했다. 그때 흠춘도 왕명을 받들어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병사 5만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를 도왔다.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階伯)과 싸우다 불리하자 흠춘은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
“신하는 충성(忠誠)을 다해야 하고, 아들은 효도(孝道)를 다해야 하는 법이다. 이처럼 위급한 때에는 목숨을 바쳐야 충성과 효도를 완성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굴은 이내 적진에 들어가 힘껏 싸우다 죽었다. 흠춘의 가풍이 이러하니 영윤 또한 명예와 지조를 목숨보다 중요시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때 고구려의 실복(悉伏)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영윤을 황금서당보기감(黃衿誓幢步騎監)으로 삼고, 토벌하라 명했다. 영윤이 전장에 이르러 보니 설복이 가잠성 남쪽 7리 지점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영윤은 서두르지 않고 토벌군이 오기를 기다리도록 했다. 그때 휘하의 장수가 영윤에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비유하면 제비가 장막 위에 집을 짓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니는 격입니다. 옛말에도 막다른 골목에 든 도둑은 쫓지 말라 했으니, 적병들이 극히 피곤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이 옳다고 받아들이려 했으나 유독 영윤만은 듣지 않고 싸우려 했다. 그러자 그 장수가 다시 말했다.
“지금 잠시 기다리자고 하는 것이 어찌 구차히 죽음을 두려워해서이겠습니까? 잠시 기다리자고 한 것은 토벌하기 쉬운 실익을 얻고자 함인데 홀로 싸우려 하는 것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이에 영윤이 말했다.
“싸움에서 용기 없음은 <예경>에서도 경계했느니라. 나아가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무인의 본분이니, 장수가 싸움에 임해 스스로 결정할 일인데 어찌 계책도 없이 중의만 따르라 하는가?”
그는 굽히지 않고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그 의열(義烈)이 가상하구나!”
왕은 그에게 작위를 추증하고 후한 상을 주었다.
(임종대 편저 한국 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