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키4 - 화이트하우스를 지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기마상을 구경하다!
2024년 5월 4일 칼람바카에서 데살로니키 Thessaloniki 에 도착해 로만 포룸 Roman Forum 거쳐
로톤다(Rotonda) 를 보고는 갈레리우스 개선문 The Arch of Galerius 을 구경한후
그리스어로 레스고스 피르고스 (Λευκός Πύργος) 영어로 화이트 타워(White Tower)를 구경합니다.
내부 6층, 직경 23m 의 원통형 모양으로 높이 약 34m 인 이 탑은 1912년 테살로니키가 오스만 투르크에서
해방되어 그리스 령이 되면서 보수되어서 하얗게 색을 칠해 '화이트 타워' 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 비잔틴시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 (Museum of Byzantine Culture) 으로 개조되엇습니다.
바닷가에는 특이하게도 근세 시대에 해적선 배가 한척 정박해 있으니 배 위에는 보니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는게 보이는데...... 이 배에 타는 것은 공짜이며 다만 배에 타서는 음료 한잔씩만 사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해적선을 뒤로 하고 오른쪽에 해변을 따라 동쪽으로 걸어서 Thessalonike City
hall 을 지나 Ote Tower를 보는데...... OTE 타워(Πύργος ΟΤΕ, OTE Tower)
는 그리스 건축가 Alexandros Anastasiadis 가 설계해서 1965년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1966년 OTE 타워에서 처음 그리스 흑백 텔레비전 의 방송 신호를 송출했고, 1970년대 이후에는
휴대 전화 네트워크의 안테나를 지원 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데.... 탑의 꼭대기 층에
오르게 되면 햄버거나 샌드위치, 음료수 등을 파는 회전 레스토랑인 Skyline Café-Bar 가 있습니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돌려 이번에는 왼쪽에 해변을 끼고 걸어서 돌아오는데.... 조금 전에
본 레스고스 피르고스 곧 화이트 타워 (White Tower) 앞에
해적선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탄 것 같은데.... 승선료 없고 음료 한잔 먹으면 된답니다.
여기 해변가 광장에 조형물이 보이니 알렉산드로스 3세 대왕 (Ἀλέξανδρος Γ'
ο Μέγας, Alexander the Great) 동상인가 본데 테르마이코스만
(灣)(Θερμαϊκός Κόλπος, Thermaic Gulf) 에 선 동상은 6 미터 높이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 왕국 아르게아스 왕조 26대 왕으로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정복자니 그리스 외에 정복전쟁에 나서 소아시아, 이집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다가, 파키스탄 일부 까지를 점령해서 건설한 제국으로 '알렉산드로스 제국' 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방대한 영토를 남기고는 불과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타향인 바빌론에서 죽고 마니....
이후 그의 제국은 네 개의 왕국으로 분리되어 부하들에 의해 통치되며 서로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의 누이와 결혼하고는 본국을 지켜 테살로니키를 건설한 마케도니아 (B.C.350? ~ B.C.297) 의 왕
카산드로스가 그들 중 한 명이라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이 분열된 뒤에
그리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기원전 301년에 입소스 전투에서 소아시아의 왕
안티고노스 1세에게 승리한 뒤 테베를 재건하였으니 재위 기간은 기원전 305 ~기원전 297년 입니다.
마케도니아 왕조를 보자면 먼저 필리포스 2세가 작은 왕국을 대국으로 성장시켰으며 , 필리포스와
올림피아스의 아들이 저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제 ( Alexander magnus) 이고, 사후에
군 총사령관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동생 필리포스 아르히다이우스와 알렉산더와
페르시아 공주 록산느 사이에 태어난 유복자인 알렉산드로스 아이구스를 공동왕으로 추대합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인 페르디카스에 반대하는 장군들에 의해 내전이 발발하니 바빌론의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와 소아시아의 안티고노스 모노프탈모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라구스,
트라키아의 뤼시마코스, 아테네 및 그리이스 본토의 안티파테르 (및 아들 카산드로스) 등 입니다.
총사령관 페르디카스는 곧 제거되고 안티파테르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이스 본토를 장악하고 섭정이 된후
bc 319년에 죽자 올림피아스 및 카산드로스가 정권 쟁탈전을 시작해 bc 317년 카산드로스가 최종
승리한후, bc 305년 록산느와 알렉산드로스 아이구스를 제거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등극한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알렉산더의 제국은 완전히 분리되어 바빌론의 셀레우코스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왕국은 안정기에 들어가는데....시리아의 안티고노스는 전사
하지만 그 아들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는 그리스 본토에 상당한 세력을 뻗칩니다.
카산드로스왕 사후 아들들간의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니 데메트리오스의
처남이 되는 에피로스 왕 피로스 ( 로마와 싸웠던 유명한 전술가로
한니발이 극찬했음) 가 마케도니아의 왕권을 노리고 내전에 뛰어 듭니다.
결국 마케도니아의 왕위는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 의 아들 안티고노스
에게 돌아가고 (bc 270년경) 이 왕조는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그리스 본토에 수시로 간섭하니 훗날 로마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가 패배합니다.
그러니 테살로니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기마상(Άγαλμα Μεγάλου Αλεξάνδρου,
Alexander the Great Statue) 을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정복왕 ’알렉산드로스 위에 ‘통치왕’ 키루스”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클레이스테네스가 그리스 민주정의 기초를 놓았다면, 키루스 (기원전 600년 경∼530년) 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했으니 키루스는 ‘제국의 건설자’ 일 뿐만 아니라 ‘이상적 통치자’ 로서도 후대에 이름을 남겼다.
심지어 페르시아와 적대 관계에 있던 그리스인들에게도 그랬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삶을
제국의 역사와 함께 기록했고 크세노폰은 그의 일대기를
엮은 ‘키루스의 교육’ 을 썼으며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이 책을 읽고 정복의 꿈을 키웠다.
키루스는 기원전 600년, 페르시아인의 나라 ‘안샨’ 에서 태어났다. 이 작은 왕국은 그 무렵 강대국
메디아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캄비세스는 메디아의 공주와 혼인
함으로써 부마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의 유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외손자에게 메디아 왕국이 정복되는 것을 꿈에 본 외할아버지는 갓난아이를 데려와 살해를 명했다. 신하가
아이를 소치기에게 넘겨주어 살려두지 않았다면 페르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10년이 지나
진실이 밝혀진 뒤에야 외조부는 소치기 부부의 아들로 자란 손자를 받아들여서 친부모에게 돌려보냈다.
왕위에 오른 키루스에게 메디아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유를 얻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키루스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외조부를 살려준다.
키루스의 승리는 정말 꿈같은 일이었지만, 나중에 그가 이룬 공적에 비하면 그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메디아에 이어 주변의 강대국들이 하나둘 키루스에게 무릎을 꿇었다.
당대 최고의 강국인 바빌론 정복과 관련된 일화는 ‘구약성서’ 에도 기록되었다. 키루스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했고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게 했다. 그가 ‘구약성서’ 에서 야훼의 ‘목자’, ‘기름 부음 받은 자’ 라고 불린 것은 그 때문이다.
키루스가 세운 페르시아 제국 (아카이메니다이 제국) 은 200년이 지난 뒤, 그의 성공을 부러워했던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멸망했다. 정복이 되풀이되었지만, 방향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뀐
셈이다. 하지만 더 넓은 땅을 정복한 알렉산드로스도 한 가지 점에서는 키루스를 넘어설 수 없었다.
키루스는 제국의 건설자일 뿐만 아니라 통치자이기도 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말 위의 정복자’
였을 뿐이다. 너무 일찍 죽은 탓에 그는 ‘말에서 내린 정치가’ 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키루스는 정복지에 총독을 파견한 것, 피정복민의 문화를 존중하는 포용 정책 등이 공로로 알려져 있으니
그가 세운 제국이 200년 이상 존속할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아테네 출신의 장군
이자 역사가 크세노폰에 따르면 키루스의 통치력은 그 수준을 훨씬 넘어 ‘성군 중의 성군’ 으로 묘사된다.
“여러 달이 걸리는 먼 곳까지 가서 적을 응징할 수 있는 사람이 페르시아 왕 말고 누가 있는가? 제국을
무너뜨리고 복속시킨 백성들로부터 죽을 때까지 ‘아버지’로 불린 사람이 키루스 말고 누가 있는가?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은 키루스라는 이름이 약탈자가 아니라 은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민을 자식 처럼 귀하게 여기며 보살폈고, 신민들은 키루스를 아버지 처럼 여기며 공경했다.”
믿기 어렵다. 적대국의 장군에게서 나올 수 있는 찬사일까? 하지만 근거 없는 허구는 아닐 것이다.
구약성서의 기록도 키루스의 행적을 찬양하고 그에게 정복당한 바빌론인들조차 그를 폭군의
압제를 끝낸 ‘구원자 ’라고 불렀다고 하니까.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해질 따름이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은 그 대답을 찾는 책이다. 이 책의 첫 권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로
시작되는데, 인상적인 대목이 많다. 전장으로 함께 나가는 길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적을 능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요?” 사기꾼과 도둑과 강도 처럼 교활하고
영악하게 기만하고 속내를 숨기며 종잡을 수 없게 행동하는 데서 적을 능가해야 한다.”
“맙소사, 아버지께서는 지금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들아, 너는 싸울
때는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만, 평소에는 세상에서 가장 정의롭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장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들과 중첩되어 흥미를 끈다.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도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당대의 최고 석학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정교사로 초빙했을
정도 이니까.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교육에는 고급 사교육이 메울 수 없는 빈자리가 있었다.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는 한 집안에 머물수 없는 두 마리 호랑이였다. ‘정복할 땅을 아버지가 남겨두지
않으면 어쩌지?’ 명예심이 강한 아들에게는 이것이 걱정거리였다. 군사적 역량이 뛰어난
아버지는 아들에게 ‘전쟁의 신’ 같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술을 너무 마셨다.
젊은 후실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거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이 폭발했다.
술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욕한 아들은 추방을 당했고, 그가 귀환하고 얼마 뒤
아버지는 바로 암살당했다. 키루스와 캄비세스의 대화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관계였다.
그러고는 왼쪽에 테르마이코스만 (灣) (Θερμαϊκός Κόλπος, Thermaic Gulf) 에 긴
해안길을 끼고 돌아오다가 소낙비를 맞아 잠시 쉬었다가 한 블록을 도니
구글맵에서 본 그 빌딩을 발견하는데, 건물 벽에 용인지 시조새인지가 그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