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이 불편할 정도로 왼쪽 궁둥 뼈가 아팠고 더부록한 장이 탈이 났는지 컨디션 엉망입니다. 에고, 천사와 겨룬 적도 없는데 누가 내 환도뼈를 때린 것이여? 기상하자 마자 비대 관장을 하면서 에공이 요추1번 탈골로, 예공이 장탈이 나서 고생을 한다는데 아비가 이렇게라도 하는 고통분담이니 너무 엄살 피우지 말아야겠습니다. 니미럴, 유산(돈)을 줘야지 누가 고통분담해 주라 했냐고? 허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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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알 친구는 광주에 모아놓고 못 간지 15년이 되었고, 교인들은 종교분쟁으로 남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으며 야인생활 때 알던 지인들의 전번은 내가 싹 다 지워버리고서 딱 한 명 남은 친구를 만났어요. 그 나이에 첫 장가를 가겠다며 돌싱을 소개해 주더이다. 신사임당 분위기라고 접대용 멘트를 날려줬더니 커플의 입이 동시에 귀에 걸렸는데 정작 나는 1도 부럽지가 않았어요. 샤부샤부에 커피까지 그냥 돈 잘 버는 제가 싹 다 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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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쟁이에서 유명 팝 아트 작가가된 로렌퀘스트 전이 열린다고 해요. 인사동, 2만원이니 관심있는 분들은 팝아트의 진면복을 구경하고 오시라. 지젝을 붙잡고 환장을 해놓고 방대한 분량 때문에 지쳐가고 있어요. 비단 내 탓만은 아닙니다. 지젝이 사방 팔달 팔방미인이라서 안 낀데 가 없고 글쓰기가 체계적이지 않아 논리의 혼돈이 있다는 것을 필자도 확인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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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와 글쓰기가 이래서 중요한 것이야. 해서 그의 '문학 예술 비평'과 '정치' 편만 정리하고 접을 생각입니다. 에예 공! 팔로우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선언한 '이데올로기의 종언' 이후에 지젝은 정치 결정들이 정당화되는 방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지젝에 따르면 사회 보장 프로그램이 감소되는 일이 정치적 담론을 위해 유효한 근거가 아니지만, 가끔 객관적 필요로서 사회에 요구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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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은 현재 늘어난 시민 참여에 대한 토론이나 문화적 부문에 의해서 제한된 정치적 목표는 장기적으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실체적인 수단이 고안되지 않은 것만큼이나 효과 없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하지만 자본의 자유를 제한짓는 장치나 생산과정을 사회적 통제의 메커니즘에 종속시키는 수단들 또한 지젝은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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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것들 또한 경제가 급진적으로 탈정치화되는 것이라고 봐요. 지젝은 오늘날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시민들에 의한 정치 변화도, 역사 사회주의에서 했던 것과 같은 것(통제)으로 보고 해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현재 지젝은 '경제의 정치화'를 주장합니다. 실로 오늘날 자유 사회의 강령이 된 "관용에 의한" 다문화적 충동은 치명적인 질문을 억압합니다. 그 질문은 “어떻게 우리는 세계화의 현재적 조건에 정치의 순수한 장을 다시 소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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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후기 정치학(post-politics)에 대한 균형 세력으로 정치의 정치화에 찬성합니다. 민주적인 맥락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결정의 영역에서 지젝은 양당제를 비판해요. 양당제는 후기 정치학 시대에 일부 국가에서 지배적인 정치형태라고 합니다. 또한 선택의 가능성이 명시적으로 실제 하지 않는다는 형태로 존재한대요. 결국 양당제는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로막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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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치화는 지젝에게 언제나 “특별한 요구가 불가능한 보편성의 대표자로서 기능하게 시작하는 점이다.” 지젝은 계급투쟁을 자본을 통한 사회적인 위치인 국지적이고 객관적인 결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급직전인 주체의 안에 놓인 것으로 파악합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육화된 모순’이고 오직 정치 투쟁에서 개별주의를 통해서만 어떤 보편주의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일은 종종 신용을 얻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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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투쟁을 시작하지 전체를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는 말이에요. 문제는 후기 정치학의 시대에 어떻게 정치화된 정치학을 세우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은유적 응축으로 행동하는 개별적인 요구는 개별적 요구의 초월적인 것과 사회 뼈대의 순수한 재건축을 겨냥할 수 있습니다. 지젝은 자크 랑시에르를 따라 사회의 짜인 구조와 “위치 없는 위치”를 배제한 자리에 진정한 정치적 갈등이 자리한다고 보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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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쉽게 계급에 의해서 나뉘지 않고, 계급은 단순한 구조적 특질이 없다는 사실은 투쟁의 신호입니다. 반면 계급 대립은 상징화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동시에 불가능하지도 현실화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해답은 경제의 급속한 재정치화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지젝은 강고한 무신론자입니다. 지젝은 유럽 대륙에서 무신론이 더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지지를 표명했어요. “교회는 곡물 저장고나 문화의 전당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2024.8.24.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