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잡지 시절
김광한
김광한
1955년에 창간되었던 월간 대중잡지. 삼중당(三中堂) 사장 서재수(徐載壽)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아리랑사의 이름으로 발행하였는데, 판형은 A5판, 300면 내외였다.이 잡지는 건전한 대중문화의 향상, 보급에 뜻을 두고, 주로 영화배우를 비롯한 가수 등의 연예가 주변 이야기와 아울러 야구·권투선수 등 독자들의 관심거리인 스포츠계의 흥미로운 기사들을 많이 싣는 한편, 천세욱(千世旭)·조흔파(趙欣坡) 등의 명랑소설류를 연재하였다.
얼마 있다가 A5판에서 B5판으로 바꾸어 매호 300여 면씩 펴내었던 이 잡지는 대중들로부터의 반응이 좋아 창간호가 3만부나 판매되었고, 5월호인 제3호가 5만부, 제4호가 8만부나 판매되는 등 당시 독자들의 인기가 대단하였다.시인인 김규동(金奎東)이 주간을 맡았고, 임진수(林眞樹)가 편집장이었던 이 잡지는, 1963년 통권 100호부터 전무이며 발행인의 사위인 이월준(李月俊)이 맡아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1가로 편집실을 옮기고 삼중당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체재를 혁신하여 1958년에 제정된 인기있는 우수 연예인들에게 수상하였던 ‘아리랑 독수리상’의 시상식도 매년 화려하게 베풀어졌다.그러나 발행인의 경영 미숙으로 1967년 11월에는 소년세계사가 판권을 인수하여 발행하게 되었다. 그 뒤 1970년 9월호부터는 박세준 (朴世準)에 의하여 ‘가정종합생활지’를 표방하면서 계속 발행되었다.
집사람의 약을 사러 종로 5가 보령약국을 가다가 문득 동대문쪽에 있던 아리랑 잡지를 발행했던 <세종서원> 생각이 나서 발길을 그리로 옮겼다.세종서원은 1960년대부터 잡지의 총판을 했던 곳이고 대학천 상가에서 가장 성공을 한 박세준 사장이 경영했던 장소였다.내가 그곳에서 발행되던 월간 아리랑을 들어간 것은 70년도 6월쯤일 것이다.지금부터 40여년전의 일이었다.아리랑이란 잡지는 비록 대중성을 띠웠지만 그곳의 기자나 편집자는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세종서원 자리에 관음 서적이란 간판이 붙은 책방,과거에 내가 근무했던 곳을 들어가서 일을 하는 노인에게 혹시 박세준 사장님 계시냐고 물었더니 그 노인이 내가 바로 당사자란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아래위로 쳐다보면서 친근감을 보였다.벌써 40여년전이니까 그분이 나를 기억할 것같지 않았다.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갔을 것이고 세월이 셀수 없을 정도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나는 그분의 손을 잡고 아직 계시군요 했더니 나이가 83세이고 그때 회장으로 계시던 친형은 지금 미국에서 사는데 93세라고 했다.회장 박세영이란 분은 당시 종로 경찰서서장을 하다가 4.19혁명때 옥고를 치루고 나와 별로 할일 없던 잡지사에서 회장을 했는데 사람이 무척 좋으시고 호인이었다.
70년 당시 아리랑에는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전승우(전우)란 작곡가가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전승우선생은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천재였는데 배호의 "누가울어" "안개낀 장충단 공원"같은 노래의 가사를 지은 분이다.가수 문주란의 예명을 만들어준 분이기도 한데 술을 너무 많이 잡수셔서 요절을 했고 장명문 선생이 대를 이었는데 몇년전에 타계를 하셨다. 당시 사세가 확장이 되어서 여원잡지를 인수했다. 그때 이수화선생, 오찬식 소설가 이광복 현 문협 이사 이정옥 시인 등등 많은 분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용화교(龍華敎) 사건
용화교(龍華敎)는 증산(甑山) 강일순 계통의 한 파로서 서백일(徐白一, 본명은 서한춘 徐漢春 1888~1966 호는 진공 眞空 현무 玄武)이 창시한 대한민국의 사이비종교로 교리를 빙자하여 금품을 갈취하는 등 사회적인 파장이 큰 사건이었다. 당시 탁명환 신흥종교 문제 연구소 소장이 아리랑 잡지에 논픽션으로 서백일 교주의 파렴치한 이야기를 연재했는데 요즘 같으면 별것도 아니었던 글이 음란성이 있다고 기소되어 발행인은 입건이 되었고 작가 탁명환씨와 전승우가 구속이 되는 사건이 있었다.
위의 사건은 사회에 많이 알려져있던 사건이었다. 잡지를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등과 같은 법률위반으로 입건이 되어 때로는 감옥 신세도 지고 툭하면 검찰청에서 쪽지가 날아오는 등 골치 아픈일이 많이 생긴다.또 한 사건이 있다.내가 데려온 기자 가운데 박모 기자가 있었다. 이 친구가 모처럼만에 건수를 올리려고 작정을 햇는지 충무로에서 떠도는 소문을 듣고 기사를 썼다.즉 정모 영화감독의 부인을 동료 감독이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기자는 데스크에 기사를 넘기기 전에 내가 검토를 하기로 했는데 내 부재중에 그대로 넘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이미 잡지가 나왔고 그 기사를 읽어본 정감독이 발행인과 편집장을 상대로 고소를 했다.결국 기자가 쓴 기사에 대한 책임으로 편집장 장명문 선생이 구속이 되는 일이 벌어졌다.인신이나 명예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몇가지 법칙이 있다는 것을 그는 초보라서 몰랐던 것이다.그 기자는 너무 미안해서 매일 편집장을 교도소로 면회를 가고 죄책감에 항상 풀이 죽어있었다.나역시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내가 천거를 했기 때문이다.그후 그 기자는 서울 신문사로가서 데스크까지 맡았다.그리고 거기서 정년퇴직을 했다.그나 나나 이젠 일손을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에는 요즘 처럼 컴퓨터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잡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2백자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데스크는 이를 받아 뺄건 빼고 추가할 건 추가한다음에 원고매수를 계산해서 편집을 한다. 이것을 일본말로 와리스께라고 한다.그리고 원고가 마감이 되면 이것을 조판소(租版所)에 넘기는데 조판소에는 문선(文選), 즉 활자를 글자에 맞춰 뽑는 일과 식자(植字), 즉 글자를 심는 과정,정판(精版)과정을 거쳐 교정을 본다음, 이것을 갖고 지형(紙型)을 뜬다.지형위에 납을 부어 연판을 만들어서 이것을 인쇄기에 올려놓아 인쇄를 하고 제본소로 옮긴다.사징의 경우 동판(銅版)을 뜨는데 동판이란 아연을 부식시켜서 사진의 점을 만들어 이것을 연판에 붙여 인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선과장은 한문이나 악필(惡筆)을 해득하지 못하면 할 수가 없다. 간혹 조판소 사정으로 조판이 지연이 되면 기자가 가서 직접 활자를 맞추기도 했다.활판(活版)이란 한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글이란 뜻인데 활판으로 인쇄한 것과 옵셋으로 한 것과는 금방 차이가 난다.80년대 들어서 사진식자기가 들어와서 글자를 사진처럼 인화해서 붙여 필름을 뜨는 방법이 있었고 청타, 그리고 요즘의 컴퓨터 인쇄가 시작이 되었다.우리 세대는 이 모든 것을 경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