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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인촌은 처음에 정치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년 뒤 망국의 한을 씹어야했던 1910년 와세다대학 경영학부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하고 귀국한 해는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난 1914년 그의 나이 24세때 운영난에 빠져있던 중앙학교를 인수하였다. 10년간이나 언론이 없는 암흑 세계에서 살았던 민중이 1920년 4월 1일 창간호를 내놓았던 『동아일보』 육성과 발전에 모든 힘을 기울이던 인촌을 한걸음 더 나아가 민족단체의 조직에도 앞장섰으며 1948년 5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면서 유엔 한국위원단을 비롯한 내외 관측통은 인촌을 국무총리로 예견하였으나 이승만 박사의 정적의 자리로 물러서게 되었다.
어질고 원만한 인격, 겸허와 투철한 의지의 지성인, 근대사의 탁월한 경세가로서 민족의 가슴에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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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가을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함형수 등을 끌어모아 동인지 <시인부락>을 발간했으며, 몇달간의 만주 방랑 끝에 돌아온 그는 1941년 초에 첫 시집 <화사집>을 펴냈다. 이 시집에서 미당은 악마적 관능의 세계를 파고들어 '한국의 보들레르'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1943년 9월 최재서가 운영하고 있던 친일 성향의 출판사 인문사에 들어간 그는 잡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보는 한편 친일 시들과 종군기 등을 썼다. 그것은 물론 신념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세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후 미당이 거느리게 되는 일련의 '추문'의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대목이다.
1948년에 낸 두 번째 시집 <귀촉도>에서는 첫 시집과는 동양적 정서와 사상에 심취하게 되는데, 1960년에 낸 네번째 시집 <신라초>에서는 그것이 불교사상을 기조로 한 신라정신에의 귀의로 나아간다. 한편 해방공간에서 그는 좌익 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준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49년에 창립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시분과위원장을 맡았다.
전쟁중에는 문총구국대 조직에 참여해 종군과 선전 및 홍보 활동을 벌였으나, 전쟁의 공포와 충격으로 언어상실과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1954년 봄에 선거를 거쳐 대한민국 예술원 초대 회원에 뽑혔지만, 선거 결과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60년의 4·19 학생혁명을 전후해 동국대 국문과 부교수로 취직하지만, 그는 학생혁명에 대해 다만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66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68년에 낸 다섯 번째 시집 <동천>에서는 신라와 불교에 대한 한층 깊어진 사유를 선보인다.
75년에 낸 여섯번째 시집 <질마재신화>는 미당 시의 사실상의 마지막 절정이었다. 유년기 고향 마을 사람들과 풍속을 산문 양식에 담은 이 시집은 미당 정신세계의 구극이라 할 신라정신이 일상과 결합된 양상을 보여준다.
77년에 그는 한국문인협회 회장직에 올랐으며 79년에는 동국대에서 정년퇴직했다. 81년 전두환 대통령 후보를 위한 텔레비전 연설에 나와 또 한 번의 정치적 패착을 범했다.
1936년의 등단부터 치더라도 6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져 있는 미당의 시세계는 결코 단일하지는 않다. '생명파'라는 이름을 얻은 초기 시의 탐미적 관능의 세계와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정신을 추구한 후기 시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미당 시를 관류하는 공통점이자 그로 하여금 '시인 부락의 족장'이니 '하나의 정부'니 하는 별명을 듣게 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말을 다루는 그의 천부적인 감각이라 해야 할 터이다. 그의 고향 전라도의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미당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된다.
백파 이긍선(白坡李亘璇) : 전주이씨 덕흥대원군 10대손으로 풍래군 번의 7대손이다. 1767년 공음면 예전리 시묘동에서 출생하니 아버지 송계 종환은 효자로 유명하다. 18세에 선운사에 들어가 맹자를 읽으면서 불전을 탐독하다가 생각하기를 한 사람이 출가하여 한 가족이 왕생한다면 이보다 큰 효가 없으리라 하고는 부모를 설득하여 선운사 시헌을 스승으로 받들고 연곡에게서 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고, 1790년 지리산 영원암의 설파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순창 영귀산 귀암사의 설봉에게서 법통을 계승하니 서산대사의 8대 법손이 된다. 26세에 벌써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고, 45세에 문득 법의 진체는 문자 밖에 있음을 깨달아 지난 날을 뉘우치고는 강을 철회하고 초산에 초막을 얽어 정혜를 닦기 5년, 다시 청도의 운문사에 법당을 세우고 선지를 강론하니 청중이 언제나 백여명에 이르렀고, 1830년 귀암사로 옮아 법우를 중창하고 법회를 여니 전국에서 승도가 모여 청강함으로써 선문 중흥의 종주가 되었다. 출가한 뒤에도 부모 사모하는 정성은 쇠하지 아니하여 생전에는 공궤를 게을리 아니하고 사후에는 정성드려 공양했으며 명당을 찾아 여러번 이장하고 당대의 명사인 정조 부마 홍현주, 좌의정 홍석주, 판서 김이양, 그리고 노사 기정진 등에게 부탁하여 송계효행록을 꾸며 아버지의 효를 들추었는데, 공음면 황산 아래 시묘동은 백파의 아버지 송계가 시묘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장에도 뛰어나 유학자와 서신 왕래가 많았는데 특히 추사 김정희와 논란한 서한은 유명하다. 추사는 백파가 달마를 닮았다 하여 자신이 숭봉해 오던 달마상을 백파에게 보내면서 찬을 지어 [기연도 기이하다. 달마는 서쪽으로 갔는데 그 보신이 동방에 나타났는가] 하였고, 또 백파 비문을 지으면서 [전면 글씨를 대기 대용으로 대서 특서 않으면 백파비가 될 수 없다] 하고 찬을 하여 [가난해서 송곳 꽂을 곳도 없으나 기는 수미산을 제압했고,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이 하여 가풍이 아주 진실했으니 그 이름 긍선이여, 더할 말이 없구나] 하였다. 저서로 선문수경, 귀감을 비롯하여 정혜결사문, 법보단경요해, 오종강요기, 금강팔해경, 선요기, 선문염송기 등이 전하고, 탑을 문인들이 선운사 부도전에 세우고, 영정을장단의 화장사에 봉안했으며, 추사가 짓고 쓴 비(선운사 부도전)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곡 유영선(柳永善) : 자는 희경, 호는 현곡 또는 화산, 백운산인이라 했으며 관향은 고흥, 석탄 운의 후손이고, 기춘의 아들이며 고창읍 주곡에서 출생하여 69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는 조부 수당 밑에서 글을 배웠고, 12세 때 간재 전우에게 집지했다. 국운이 기울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간재를 따라 왕등도, 고군산도, 계화도 등지를 옮겨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현곡은 일제의 학정과 갖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도를 만회하는 길은 오직 후진의 육성에 있다고 보고 고향 백운산 밑에 서재를 짓고 육영에 힘쓰는 한편 저술에 전념하니 수구당괴라 지목받기도 했다.
현곡은 대대로 몰려온 만권장서 속에 파묻혀 일생을 보냈기에 저술도 많아 50여 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
감천 오준(吳俊) : 본관은 동복이니 한림 자귀의 증손이다. 1444년에 신림면 외화리에서 출생하였고, 1494년에 운명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모친이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베어 입에 주혈하여 연명하였고, 부친이 종기로 신음하자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으며 다시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변을 맛보고 다리살을 베어 삶아드렸다.
상을 당하자 취령산 아래에 장사지내고 여막을 지어 시묘하였는데 삭망 때면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와 제전을 도왔고 근처에 샘이 없어 들을 건너 수산에서 물을 길러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치더니 여막 아래에 샘을 이루어 물이 솟아났다. 그 물이 맑고 깨끗하여 길렀으니 고을 원이 와보고 샘가에 돌을 쌓고 비를 세워 효감천이라 명하니 그 뒤 세상 사람들이 공을 감천선생이라 불렀다. 그리고 감사와 어사가 와서 확인하고 장계를 올려 군자감직장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494년에 복호와 명정되고 창효사를 세워 향사한다.
이재 황윤석(黃胤錫) : 자는 영수, 호는 이재, 관향은 평해이니 만은 전의 아들이다. 1729년 성내면 조동리에서 출생하여 1791년에 운명하였다.
그는 대대로 학문과 행의가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가풍을 이어받아 당대의 석학인 백시명, 백시덕, 박필주, 김원행 등에게 배웠고 정후 윤봉구, 양응수, 김시찬, 김수, 안형옥, 서명응, 정경순, 조정, 윤창정, 이간, 김용겸, 김성범, 김이신, 심유진, 김광한 등과 교유하면서 경서를 비롯하여 시무책에 이르기까지 백방으로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역, 수, 성, 리를 비롯하여 율려, 성음, 방언, 가요, 여지, 복식, 형척, 보계, 제도, 병 진, 필화, 의약, 풍수, 농형, 선불, 초목, 금석 등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다.
저서에는 이재유고 14권과 이수신편 23권, 자지록, 수필일기 등이 있고 관직으로는 참봉, 직장, 별제, 익위사 익찬, 동부도사, 목천현감, 전의현감 등을 지냈다. 그는 실학의 대가로 이 고장을 빛낸 학자이다.
동리 신재효 : 광대소리를 위해 만장의 기염과 소담한 자료와 이론적 유산을 남겨놓은 이가 바로 신재효이며 이제 그의 생전의 업적으로 인하여 판소리의 성자가 되었고 국문학사는 그를 위하여 한페이지를 양보하고 판소리를 하나의 문학 형식으로 정립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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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광대들 뒤에서 그 사설을 정리하여 준 숨은 공로자로 해박한 지식과 절묘한 기법으로 판소리 사설(타령)의 창작과 집대성으로 필생의 대업을 이루었다.
그는 1812년(순조12년) 11월6일 고창현 천남면 서문리(현 고창읍 읍내리)에서 신광흡의 1남3녀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민족문학사의 찬연한 업적의 가치성은 당시 숭상하던 충효열이나 한시문 외에는 몹시 천대하고 멸시하던 광대와 우리말과 글을 홀로 사랑하고 키우고자 일생의 정력을 오로지 여기에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람 이병기 같은 학자는 신재효가 이룩한 판소리의 업적을 국문학 사상의 「기적인 사업」으로 지적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성을 발휘하여 극가문학을 크게 이루어준 우리의 큰 은인이였다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는다고 비유하여 더욱 소중히 아끼고 있거니와 신재효가 국문학사에 끼친 업적도 영국국문학사에서의 사옹과 버금가며 사옹의 생사일이 같은 것처럼 동리도 생일과 사일이 11월 6일로 귀한 사례를 낳고 있다.
근촌 백관수 : 1889년 (고종26년) 1월 28일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여섯살 때부터 호남의 거유인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고 열여섯이 되던 해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이듬해에는 망국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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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3월 출옥한 그는 귀국해서 기독교 청년회와 관련하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하여 이상재와 더불어 조선일보의 이사와 영업책임자, 편집등을 맡아 약 4년간 계속하였다.그가 주동한 2·8선언의 전모를 이미 상세히 알고 있는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고 간절히 제의했지만 거절하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1929년 10월에는 일본 『교오토』에서 열린 제3회 태평양회의에 다녀왔고 1937년 5월에는 동아일보사 제7대 사장에 취임 했었다.
1947년 민주대표자 대회를 거쳐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을 거쳐 향리인 고창에서 당선되어 초대 법사위원장 및 헌법 기초위원으로서 한국정치의 중심부에서 크게 활약했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안겨주었으니 원남동 자택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62세(1950), 그러나 그의 생사여부는 끝내 알 길이 없다.
만정 김소희 :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판소리중 춘향가,서편제 예능보유자인 김소희는 1917년 흥덕면 사포리에서 출생하였다. 맑고 고운 애원성의 독특한 음색을 지녀 천부적 예술가로 태어난 그는 13세때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흥덕초교를 마친 15세때부터 송만갑, 정정열, 박동실등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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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여성국악중흥에 기여하면서 박초월, 박귀희 등과 한국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여 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대 이후에는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민속예술의 국제공연을 통해 우리예술의 우수성과 국위 선양에 기여하였다.
특히 미국의 카네기홀에서의 판소리 공연과 28개주 각 대학의 초청공연, 뮌헨 올림픽의 민속예술 공연은 판소리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세계무대에 올려놓은 큰 공로이며 심청가와 춘향가의 완창음반과 그의 국악 50년 기념공연은 국악계의 신기원이요, 국악사상 최대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 하겠다. 그의 장기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이다. 그는 1995년 4월17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는 화산계곡에 안치되어 있다.
전봉준 장군 :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주도자였던 전봉준 장군은 1855년 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 63번지에서 아버지 전창혁,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子)는 명숙(明淑), 호(號)는 해몽(海夢)이고, 관(貫)은 천안(天安)이다.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은 오척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회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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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농민군의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했고 집강소를 세우는 등 농민자치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군을 규합하여 최후 전투였던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 장군은 재기를 계획했으나 갑오년 12월 2일 밤에 체포되어 그의 나이 41살이었던 1895년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봉건체제의 모순이 심화된 가운데 농민층이 가혹한 수탈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항거한 농민전쟁이었고 당시 위정자의 각성은 물론 갑오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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