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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피가 되리라
출 7: 14-19. 요 2: 1-11
"트로이의 목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메로스 시대에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이 전쟁에 이기기 위하여 한 계략을 세웠습니다. 나무로 큰 말을 만들어 그 속을 비게 하고 20여명의 군사를 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에 이 목마를 세워두었습니다. 트로이는 이것을 알지 못하고 성벽을 허물고 끌어들였습니다. 목마에 정신이 홀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가지를 얻기 위하여 다른 한가지를 잃고도 잃은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잃기 싫어서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지난번 홍수 때도 보니 떠내려가는 소를 건지려다가 같이 떠내려가 죽은 농부가 있습디다. 또 불과 몇십만 원 때문에 살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잃지 않으려고 하다 자기 백성을 잃습니다. 자기 자존심을 지키려다 물을 잃습니다. 애굽의 모든 물이 피가 되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피비린내가 나고 먹을 물이 없을 때 백성들의 원성이 어떻겠습니까?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뿌리뽑으려다가 결국 인간의 정신을 지켜주는 성벽 한쪽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맞이하고도 마치 자기 성벽을 허물고 목마를 끌어들이면서도 환호한 트로이 사람들처럼 어리석게 환호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신이 죽을 일인지도 모르고 환호하고 좋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완강한 이것이 무슨 자랑이나 되는 줄 압니까? 정말 강한 사람만이 양보할 줄 압니다.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굽힐 줄도 알아야 진짜 강한 사람입니다. 자기 것을 고집하다가 더 많은 것을 잃은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한쪽을 얻고 한쪽을 잃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사단설'은 맹자의 인성관이 담긴 중요한 원리입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며 인지단야(仁之端也)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이며 의(義)지단야입니다.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양보하는 마음이며 예(禮)지단야입니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며 지(智)지단야라고 합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이런 마음이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법입니다. 바로는 이런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측은히 여기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자기 눈앞의 이익만 고집하다 손해를 본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시작됩니다. 그 첫째가 물이 피가 되게 하는 끔찍한 재난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로 나오는 바로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바로는 매일 아침 나일 강가에 나오는 일과를 가졌습니다. 나일 강에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아침 산책 나오는 것일까요? 강변에서 조깅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침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애굽인들에게 나일강은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신입니다. 나일강 덕분에 그들이 삽니다. 그러므로 나일강은 풍요의 상징입니다. 흔히 물신론과 범신론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것에나 숭배하고 싶은 욕구를 느낍니다. 인간의 이런 욕구는 쉽게 제거되지 않습니다. 더 우스운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는 스스로 하나님 아들이라 칭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물, 강을 섬길 이유가 무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면 강을 지배해야지요. 신의 아들이라는 바로가 강에서 제사한다는 것은 스스로 신이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스스로 자기 모순을 드러냅니다. 사실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자기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캘빈 밀러는 '깊은 은혜 속으로'란 책에서 "우상은 예술가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포기하고 자신의 천재성을 신격화할 때 잉태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상은 자아라는 신과 연관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을 높일 때에 스스로 우상을 만들고 사는 것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우상 숭배의 원인이 결코 아닙니다. 우상 그 자체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숭배는 자기모순인 것입니다.
레위기 19:4에는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합니다. 역대상 16:26에는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 외의 세상에 모든 신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헛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신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신처럼 모시는 나일강이 피가 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바로의 우상을 친 것이며 우상 그 자체를 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손을 통해 우상을 치십니다. 요시아왕이 그렇게 하였고, 미가선지자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모든 우상들을 다 없이 하십니다. 모세는 우상숭배의 현장에서 바로를 만납니다. 바로의 우상 숭배의 자리에서 "백성들을 보내어 여호와를 섬기게 하라"고 합니다. "백성을 보내게 하신 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합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우상 숭배가 아니라 하나님 숭배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이른 아침부터 우상 숭배하러 오는 바로에게 가라고 하십니다. 좀 천천히 낮에 가게 하시지 왜 이른 아침에 가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일부러 모세를 아침에 보내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아침 시간을 피하고 저녁 시간을 피하고 가지만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기에 아무 때나 필요한 때에 보내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시 바로에게 출애굽의 목적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잠시 동안의 외유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영구히 가나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라고 하신 것은 광야의 중요성을 일러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궁극적 목적지는 광야가 아닌 가나안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길 곳은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가나안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광야에서 제사하는 것을 기다리십니다. 광야가 진정코 하나님을 섬길 곳입니다. 어렵고 길고 힘들 때가 하나님을 섬길 때입니다.
사도행전 7:38에는 스데반의 설교 가운데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광야교회라고 부릅니다. 광야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교회란 말의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말은 불러낸다는 뜻인데 헬라에서 재판이나 강의에 사람들을 불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곳입니다. 불신과 범죄의 장소에서 불러내신 것이 교회입니다. 번연의 천로역정에 한 그리스도인이 앞으로 망할 성을 향하여 불러냄을 받고 떠나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란 또 다른 헬라어는 '수나고게'입니다. "같이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는 개인적 인도가 아니라 집단적 인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함께 평안히 갈 수 있도록 광야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아비가 아들을 안음같이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은 알게 하시려고 광야에 두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갈등합니다. 서로 고소하여 모세가 종일 애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화를 자초하고 출애굽 1세대는 다 죽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잊지 못해 마음에 잔뜩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을 함께 인도하여 종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여기에는 온갖 인간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거역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을 잊지 못해 불평도 늘어놓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교회의 모습을 보고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 수 없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하나님은 종래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십니다. 루시 쇼는 말했습니다. "독특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광야로 불러내신다. 그 곳은 위대한 배움터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한 전면적인 의탁을 배우는 곳이 바로 광야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불러내어 위대한 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목적이고 이것을 바로에게 다시 가서 일러주라고 하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물들이 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지팡이로 쳐야 피가 됩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계속 이용하십니다. 손에 있는 것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일하시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지팡이는 하나님의 회초리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맵습니다. 한번 치면 피가 흐를 만큼 매섭게 치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에 맞지 말아야 합니다. "치면"이란 말은 '나카'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도리깨로 내리치고 치명타를 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변하고"란 말은 '하파크'란 히브리어인데 뒤집어엎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체가 순식간에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치명적으로 치면 순식간에 전체가 변합니다. 물이 냄새가 날 것입니다. 피는 생명인데 물이 피가 된다는 것은 죽음을 경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일강이 범람한 후에는 물색이 변한다고 합니다. 수위가 낮을 때는 녹색을 띠지만 물이 불어 오르면 황갈색을 띠게 되고 붉게 되어 석양이 비취면 피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식물성의 부패와 붉은 색소를 가진 미생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적조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해수의 플랑크톤이 폭발적으로 발생하여 붉은빛을 띠는 현상입니다. 강력한 일사로 표층수의 수온이 상승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는 것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물이 피가 되고, 고기가 죽고, 냄새가 나고 물을 마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일강이 단순히 피가 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명이 해를 받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물에 고기가 죽으면 사람이 죽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물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물에서 냄새가 나보세요. 마실 수 없어요. 수질의 오염이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알메니안 정교회의 신학자 구로이안은 말했습니다. "물은 창조의 피이다. 우리 몸의 팔십 퍼센트가 물이다. 물은 또한 세례의 근본요소이다". 물은 정말 중요한 창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근본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이 피가 되어 냄새가 나고 고기가 죽고 먹지 못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야말로 큰 재앙입니다. 나일 강 뿐만 아니라 하수, 운하, 못, 호수, 심지어 나무 그릇과 돌그릇의 물이 다 피가 됩니다. 모든 물이라고 생긴 것은 전부 피가 됩니다. 심지어는 가정에 길러와서 저장한 물까지 다 피가 됩니다. 이런 어려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의 첫 번째 기적은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첫 기적은 재앙이 있는 심판이며 예수님의 첫 기적은 은혜가 있는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재앙을 내리고 심판하시기 위하여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는다고 요한과 야고보가 유황불을 내려 심판하자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사랑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결론
최근 먹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지역은 전 세계에서 52%뿐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제는 물 부족국가로 분류되었습니다. 물 부족 국가라기 보다 물 낭비 국가입니다. 독일은 하루에 일인당 132리터를 사용하는데 비하여 우리 나라는 386리터를 사용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닥쳐오는 세상에서 물 전쟁은 가장 심각한 갈등이 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51개국이 물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삽니다. 현재도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인 11억 명이 식수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10년 뒤 지구상의 물 부족은 연간 20억 톤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25년에는 24억명이 물 기근에 허덕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 전쟁은 핵전쟁보다 더 치열할 것이고 심각한 세계적 문제가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한 물 전쟁이 아니라 영을 위한 물 전쟁도 심각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물이십니다. 이 물을 마셔야 살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삽니다. 이 물을 마시지 않는 자는 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재앙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이 피가 되지 않게, 생명이 재앙이 되지 않게 그리스도를 잘 믿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 한 주간의 삶도 영원히 공급되는 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풍요한 물을 소유하고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열 가지 재앙의 의미
출 7: 14-19
Ⅰ. 서 론
필립 얀시라고 하는 사람이 책 한 권을 내었는데 제목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하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번역하는 사람이 그 책을 읽으면서 책 제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제목이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제목이 더 낳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없이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고, 예배도 드리지만 사실은 우리가 늘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알아가지 못하고, 또 모시고 살아가지 못하는 삶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애굽의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 달라고 하는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열 가지의 재앙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열 가지 재앙중 첫 번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출애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열가지 재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한 가지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Ⅱ. 거절하는 바로
모세가 애굽의 왕에게 찾아가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을 풀어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애굽의 왕은 모세를 비웃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비웃으면서 모세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바로는 모세가 와서 이스라엘을 풀어달라고 했을 때, 그 요청이 너무나 턱없는 부탁이고, 현실을 모르는 요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 당시 애굽은 비돔성이라고 하는 거대한 성을 짖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로 그런 일에 동원되어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이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이 당시 장정만 60만명이라고 했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니 이런 거대한 공사에서 이스라엘민족이 빠져버린다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처럼 전락되어서 무료로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지금 내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모세가 애굽의 왕을 찾아왔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 일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바로가 생각할 때에는 사실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가 생각할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보다는 애굽의 신들이 더 강한 능력을 가졌다고 여겼습니다. 애굽의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강하기 때문에 애굽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애굽의 다른 신들보다 강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수 백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볼 때 이 모세라는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와 가지고는, 자기들의 그 약한 신의 이름을 대면서 자기 민족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니까 비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비난하고 저주했습니다. 모세는 상처를 받고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Ⅲ. 하나님께서 세워 두신 계획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실망하고 힘이 빠진 모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또 다시 애굽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바로에게 다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바로가 어찌 내 말을 듣겠습니까?' 모세는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낙심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7장 1절을 보니까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그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모세로 하여금 신이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로가 볼 때 모세가 한심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역사하셔서 나중에 바로가 볼 때는 모세가 신처럼 여겨지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주셨습니다.
1) 첫째는 3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표징과 이적들을 이 애굽 땅에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2) 둘째는 4절을 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마음은 강퍅하여 져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께서 그 손을 애굽에게 더하여 여러 가지 큰 재앙들을 더 내리시고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내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애굽의 사람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게 되리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이 위대한 출애굽의 사건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한 가지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그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다는 그 사실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신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애굽의 사람들까지 이 출애굽의 전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민족만을 다스리시고, 그 민족에게만 복을 주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자라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모세를 택하셨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오히려 자신이 연약하다고 좌절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로와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애굽의 왕인 바로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일을 행할 때 그 나이가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기력이 쇠할 나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연약한 사람을 택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이런 연약한 모세를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면, 세상의 그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꺽어질 수 밖에 없는, 참 주권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우상들 역시 얼마나 헛되고 거짓된 것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Ⅳ. 첫 번째 재앙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열 가지 재앙중 첫 번째 재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가지 재앙이라는 것은 단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애굽과 바로를 누르는 그런 의미만은 아닙니다. 이 열가지 재앙의 하나 하나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애굽이 믿고 의지하던 그 모든 우상들이 얼마나 거짓된 것들인가를 드러내신 일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나일 강가에 나가 있으니까 마침 바로도 그 강가로 나와서 모세를 만나게 됐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책망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나일강에 내리 쳤습니다. 그랬더니 나일 강물은 피로 변하여 버리고, 그 속에 있던 고기들이 죽고, 물에서는 악취가 나서 그 물을 마실 수가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강물 뿐 아니라 애굽에 있는 모든 물들도 다 피로 변하여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재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도 그렇지만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애굽에 있어서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나일강은 애굽에게 있어서 생명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이 나일강은 정해진 시기가 되면 물이 불어나서 나일강 주변의 땅을 적셔 주는데, 그렇게 물이 불어나서 범람하고 나면 땅들이 비옥해지고 풍년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일강 주변의 땅들은 언제나 나일강 때문에 황금의 땅들이 되고, 풍요의 땅들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애굽의 사람들은 바로 이 나일강이 자기들에게 풍요를 가져다 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이 강을 거룩한 강이라 부르면서, 이 강에다가 종교적인 의미를 붙이고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애굽에게 있어서 나일강의 신이라고 하는 '오시리스' 인 것입니다. 오시리스 신이 나일강을 다스리고, 오시리스 신이 자기들에게 풍요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 오시리스라고 하는 신이 다스린다고 하는 그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죽은 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행하신 시기가 언제입니까? 바로 나일강이 범람해서 온 땅을 적셔줄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지금 나일강이 범람해서 풍요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시기에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던 이 신이 더 이상 역사하지를 못하고 오히려 애굽 전역에 풍요 대신 피와 죽음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첫 번째 재앙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사람들에게 이런 재앙을 주시면서 그저 단순한 이적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재앙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섬기는 그 나일강의 신이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헛되고, 존재하지도 않는 우상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나일강의 풍요를 주신 이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동일한 은혜를 주셔서 비를 내리게 하시고 물을 공급하시고, 풍요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 한다. 바로에게 이런 왕의 지위를 허락하신 분은 또, 누구입니까? 애굽을 다스리도록 그 주권을 주신 이가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바로는 생각할 때, 내가 능력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고, 우리 가문이 힘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고 지금도 나의 말 한 마디로 애굽을 움직이며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애굽의 신들이 그런 나의 신분을 지켜줄 것이고, 애굽의 풍요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이스라엘의 하나님 정도야 애굽이라는 대 제국의 왕인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신이라는 것. 이것이 애굽의 왕인 바로가 버리지 못하는 신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가 멸망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바로 그 사실에 대하여 가장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세계 대 제국의 왕이 되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니까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헛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주인 되신다는 그 사실을 아시고 고백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 다니엘 시대 때 바벨론제국의 왕이 되어서 세계를 다스리던 사람이었던 느부갓네살 왕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고 나서 마음이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자기 왕궁의 지붕위를 거닐면서 말하기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그런 교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그 말이 아직 입에서 채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는데 "느부갓네살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이라고 하는 세상의 나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기 까지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치시고 7년동안 짐승처럼 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징계하신 것은 이 느부갓네살왕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지요. 나중에 느부갓네살왕, 바벨론 제국의 왕이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고백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능력과 권력을 인하여서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 그냥 두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모든 능력과 건강까지 빼앗아서라도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 느부갓네살 왕이야 말로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EX) 예수님께서 한 날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렇게 물으시니까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와서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질병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풍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마음의 안정을 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하시고, 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 주님을 알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 주님을 믿는 자만이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세상의 주권자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깊이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풍성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Ⅴ. 결 론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가끔가다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를 평가할 때, 이 현실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 그것을 보고 판단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현실에 있어서 성공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지만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의 성공이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현실속에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현실속에서 실패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가 자신이 가진 권력 때문에, 자신이 의지하는 우상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가진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또 다른 무엇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현실의 성공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의 사건을 겪기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몰랐고, 애굽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의 사건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애굽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얻어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애굽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어가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가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그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또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그 삶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속에 함께 계시는 동행하시는 이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섬기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
출 7: 14-25
세상에는 신비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섭씨 180도의 유황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있을까요? 캐나다 연구팀이 끓는 용암으로 인해 섭씨 180도가 넘는 바다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헤엄치는 가자미처럼 생긴 물고기를 발견했답니다. 어떤 사람이 96개 다리가 있는 문어를 보았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일본에는 '다리 96개 달린 문어'가 있다고 합니다. 입이 둘 달린 고기를 보았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입이 둘 달린 고기가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두꺼비 떼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핏물 소나기가 내리고 마리아 모양의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면 믿겠습니까?
1794년 어느 무더운 날 프랑스에서 두꺼비 떼가 폭우를 따라 150명의 근위대원들을 덮쳤다고 합니다. 1851년 7월 20일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군사훈련장에 있던 장병들은 고기조각과 핏물의 소나기를 맞았다고 합니다. 1908년 프랑스에선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진 우박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어 무덤에 묻은 사람이 살아났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1865년에 미국 위스콘신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5세 어린이가 콜레라로 죽었답니다. 의사의 사망진단을 받고 묘지에 매장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밤 그의 어머니는 죽은 어린이가 관 속에서 몸부림치는 꿈을 꾸었답니다. 남편에게 무덤을 파보자고 제안했지만 묵살했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어머니는 똑같은 꿈에 시달렸답니다. 그래서 무덤을 팠는데 관 속에 있는 아들은 살아 있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의사에게 보여주자고 졸라 의사에게 갔는데 한 시간 후 어린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나 1주일 후 완전히 건강이 회복되었답니다. 이런 일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인들은 기적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성과 과학의 범주에서 이해되는 것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나 신화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10가지 재앙 같은 것이 나오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으니 무시하거나 신화적이라고 해석해 버립니다. 물이 피로 변하고, 개구리가 애굽 땅에 덮이고, 땅의 티끌이 이로 변하는 이런 기적을 믿으면 정신 이상자 취급을 하고 세상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광신도 취급을 합니다.
이성으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과학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하는 그것은 오만이고 이성과 과학을 절대시하는 또다른 신앙입니다. 우리는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보지 못합니다. 인간은 아주 큰 소리도 아주 작은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적으로 꽉 차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것이 기적이며, 모세와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 등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기적이며 부활 사건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성과 과학으로 이해되는 것만 믿는 하나님이라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합니다. 기적은 ‘인간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나타난 특별한 사건’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이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지 못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인본주의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계시하시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일반 계시입니다. 이성과 과학, 양심과 자연 법칙을 통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초자연적 기적 즉 특별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려 주십니다. 이적, 표적, 기사들입니다. 바로에게 내린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 방법으로 기적을 통해 하나님이 참으로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참 신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적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바로와 후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바로에게 행한 첫 번째 재앙 기적입니다. 2008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는 오늘, 저와 우리 성도님에게 하나님은 이 첫 번째 기적을 통에 어떤 교훈을 주시길 원할까요?
1. 하나님은 우리가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에 나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마음이 강퍅하여 더욱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혔고 노역을 더욱 심하게 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바로가 마음의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적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기적으로 나타난 그 첫 번째 재앙이 애굽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재앙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바로가 나일강에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나옵니까? 아침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집트 사람에게 나일강은 젓줄입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삶의 근원이고 경제를 살찌우고 삶과 문화를 지탱시키는 대들보와 같은 것입니다. 농사는 짓는데 없어서는 안 되고 나일강의 풍성한 물고기는 일상의 중요한 먹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 경제의 핵심이 되어 주는 강입니다. 애굽인들에게 나일강은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신입니다. 나일강 덕분에 그들이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일강을 신격화하며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나일의 수호신 크눔을 섬겼습니다. 나일의 악령 하피를 섬겼습니다. 나일강 신이 섬겨야 자신의 삶이 보장되고 안전할 것이라고 하여 나일강 신에게 제사하기 위해 바로가 아침에 나일강으로 나간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강이 범람할 때가 이르기 전에 나일강의 신을 송축하는 축제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손의 지팡이를 하수를 치게 하여 나일강 물을 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나일강 신보다 더 위대한 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이강 신은 하나님의 재앙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신인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겨야 할 신은 나일강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기적을 통하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수의 고기가 죽고, 물에 악취가 나 먹을 수 없게 하고 심지어는 하수들과 못과 호수의 물, 그릇에 있는 물까지 피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왜 이런 재앙을 내립니까?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입니다.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나일강이 젓줄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때로는 하나님은 이렇게 재앙이라는 큰 소리로 경고하며 오직 하나님을 섬기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올해 가장 큰 이슈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일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역사 속에 일어나는 일을 지혜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건 속에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들어야 합니다. 요즈음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찾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미국 뉴욕주에 있는 어떤 교회는 갑자기 불어난 새신자로 인하여 접는 의자 100개와 설교를 시청할 수 있는 TV 모니터를 소(小)예배실을 급히 마련했다고 합니다. 시애틀의 마스 힐 교회도 지난 9월 이후에만 1000명이 새로운 교인이 등록을 했다고 합니다.
텍사스 주립대 데이비드 베크워스(Beckworth) 교수 연구에 따르면, 1968~2004년 사이 경기 침체기마다 복음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50%씩 증가했다고 합니다. 경제 위기를 통해 돈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크게 들은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에 의하면 이런 경제 위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다 생물이 3분의 1이 죽고 육지의 수목도 3분이 일이 타 버린다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2008년 마지막 주일인데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도 오고 이 지구의 마지막도 오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와 세계화의 확산[global flattening], 글로벌 중산층 인구의 증가[global crowding] 문제가 점점 심화되면서 전 지구적인 환경문제와 에너지 부족사태가 곧 닥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2007년 유엔 산하 기관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위원회(IPCC)'는 2100년 지구의 평균온도가 100년 전보다 1.1∼6.4도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환경 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는 『6도의 악몽』이라는 책에서 지구의 평균온도가 1도 상승하면 산과 들에서 재앙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2도가 오르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가 바다에 흡수되면서 바닷물은 산성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3도가 상승하면 아마존에도 사막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4도가 상승하면 남극 빙하가 완전히 붕괴되며, 5도 상승은 북극의 빙하까지 녹고 거주가능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를 막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고, 6도가 오르면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대멸종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광우병이나 조류인플루엔자(AI) 등 새로운 질병들, 환경오염으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가속돼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등 전세계에서 속출하는 환경 재난, 중국 쓰촨성의 지진이나 인도양을 덮친 쓰나미를 통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인간이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지구 전체의 재난이 다가 올 것을 하나님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거대한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다 할 것같은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사라져버린 문명의 흔적을 통하여 얼마든지 바로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을 들면서 2012년 거대한 재난이 닥치면서 인간의 문명이 사라진다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천문학에 능통한 마야인들 2012년 12월23일에 끝이 난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나 컴퓨터를 활용한 미래 예측 등이 모두 2012년을 종말의 해로 지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성경은 때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지만 언젠가 이 지구의 끝이 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 때처럼 장가가고 시집가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살지만 예수님이 어느날 문득 이 땅에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 인류의 살 길이라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때때로 재앙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경고하며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가끔씩 다가오는 금융위기를 통해 돈이 풍요를 주는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을 통해 ‘교만하지 말라. 강퍅하지 말라.’고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신은 나일강 수호신이 아니라 하나님이고 아침에 너가 예배할 분은 나일강의 잡신이 아니라 여호와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7장 5절, 9장 14절을 보십시오. 이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인줄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권력을 가졌습니다. 당대 최고의 부와 지식을 가졌습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자 교만하여졌습니다.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자신이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초자연적 계시와 재앙을 통해 경고하는데도 마음이 돌덩이처럼 완악해져 외면해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놀라운 것을 가지고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겼다면 얼마나 멋진 세계를 만들었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었겠습니까? 로마가 천년 동안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증거한 것과 같은 큰 영향력을 미치며 기독교 문화유산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게 하고 그 힘으로 여러 가지 장애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장애물을 거두어 주었다면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비난받지 않고 교훈을 주는 죽은 후에도 선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오늘날도 찾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을 때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찬양받기 위해 지으셨습니다. 우린 이렇게 하나님께 나와 2008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다짐하기를 “내 인생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섬기는데 초점을 맞추고 살게 하옵소서”라는 다짐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2.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인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일강은 그들이 의지하는 신이고 그들의 삶의 풍요를 제공해주는 근원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엇 때문입까? 물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물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 매일 이른 아침에 그들의 우상에게 물로 정결케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물을 피로 다 변하게 하여 마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의지할 것은 나일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사 화복을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첫 번 기적을 통하여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님이 한 번 불어 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현상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재앙이라는 초자연적 확성기를 통하여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눈에 보이도록 확실하게 귀로 들을 수 있고 뼈져리게 피부를 느낄 수 있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일강이 핏빛으로 물들었을 때 바로가 조금 양심적이고 정상적이었다면 무엇을 깨달아야 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들을 이 강에 던져 죽인 것을 기억해 내야 했을 것입니다(1:22). 그 풍성한 물이, 그들에게는 생명을 주는 강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는 통곡을 주는 강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무참하게 아이들을 죽인 죄를 회개하고 돌아와야 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나일강이 생명이었지만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죽음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늘 날도 내가 가지고 있는 넘치는 돈이 나에게는 행복이지만 하루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점점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단계로 재앙을 죄어 오는데도 마음은 돌밭같아 더욱 강퍅해 집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기적입니다. 살리게도 하고 죽이게도 한다는 기적입니다. 그러니 애굽의 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기적을 통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의 힘 별거 아니니 너희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경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애굽의 박사와 박수들을 부릅니다. 박사는 점성술, 해몽, 지리학 등 폭넓은 식견을 구비한 자들로 왕의 자문역할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박수들은 애굽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던 남자 제사장입니다. 이들은 실제로 주문을 외워 마법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8에는 이와같은 사람을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그들은 최면술같은 것으로 뱀을 지팡이처럼 만들어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것을 놓아 아론이 베푼 유사 기적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지팡이가 다 잡아 먹어 버립니다. 계속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거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재앙같은 위기로 경제가 핏빛으로 변하고, 육신적 질병으로 마음이 핏빛으로 변했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지했던 것들이 다 사라졌습니까?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일강같은 경제 위기를 보며 돈을 의지하는 탐욕의 종말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습니다. 80대 20의 사회, 90대 10의 사회의 파국이 어떻게 올 것인가를 교훈받고 있습니다. 세계는 탐욕이라는 전염병이 무섭게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공공연하게 탐욕(greed)은 선이고, 효과가 있으며 옳다라고 냉동되지 않은 욕심의 바이러스가 현란하게 신문 지상에서 춤추었습니다.
158년 역사를 가진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탐욕이 얼마나 허무한 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전 나스닥 회장이었던 버나드 매이도프의 5백억 달러(약 65조 원) 금융 피라미드 사기극은 탐욕의 정수를 보여 주었습니다. 탐욕을 기반으로 하는 월스트리트가 운영한 대형 도박장이 흔들리자 전 세계가 그것을 수습하느냐고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 탐욕의 도박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실직을 당하고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리먼이나 매이도프는 유대인입니다. 문제가 되는 베어스턴즈, 리먼브러더스, AIG 등의 망한 투자사나 보험사, 그 회사들을 인수하는 대형 금융기업, 그리고 이번 사태 수습을 맡은 FRB 모두 유대인이 설립했거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국제금융은 유대인의 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 대공황이나 2차 대전, IMF 위기 등을 유대인의 음모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의 금융 위기고 유대인의 음모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국 전체 인구 2.2% 쯤 되는 유대인들이 미국의 금융, 언론, 영화산업을 장악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초로 돈을 상품화한 사람들입니다. 돈으로 돈을 버는 금융업을 가장 잘 꿰뚫어보고 이를 장악한 사람들입니다.
네덜란드의 오렌지공이 윌리암 3세로 영국 왕위에 오를 때 그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 주어 화폐발행권을 얻어냈습니다. 탐욕의 빌딜입니다. 유대인들은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하고 영국 내의 금융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금융왕조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 유럽을 잇는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워털루 전투가 벌어졌을 때 영국군과 연합군은 승리했지만 그는 통신원을 매수하여 런던에 패전소식이 알리게 하여 90%나 폭락한 주식을 휴지조각 가격으로 런던 증권시장에 거래되는 모든 주식의 62%를 손에 쥐었답니다. 탐욕의 극치입니다.
유대인들은 연방준비제도를 만들어 미국의 통화 발행권을 장악했습니다. 한 때 로스차일드가 배경인 J.P. 모건은행은 강철, 전기, 전신, 전화, 화학 산업을 장악하여 미국 전 재산의 1/4에 육박하는 거대한 부의 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부 유대인들의 돈을 의지한 탐욕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어 고통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한평생 돈을 의지하고 산 사람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부자였다는 록펠러는 한 때 돈을 의지하는 탐욕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현재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 재산의 3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돈으로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탐욕스런 악덕 자본가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돈을 '더러운 돈'이란 꼬리표가 붙여 주었습니다.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질렀고 뇌물과 리베이트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검은 돈'을 싹쓸이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신문기자가 인터뷰하면서 "당신은 참 부자인데 당신이 축적한 이 모든 재물로 당신은 만족하십니까?"라고 질문했답니다. 그 때 록펠러는 "천만의 말씀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기자가 "그러면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록펠러는 "조금만 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탐욕으로 그는 부자가 되었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고 눈물 흘리며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원한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는 항상 침대 곁에 총을 두고 자야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악명이 높았던지 그의 진의를 의심하여 록펠러 재단을 설립하는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지 간에 재산을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는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재앙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그에게 경고했습니다. 그가 53세 때 백약이 무효인 불치의 병이 들어 하루에 기껏해야 우유 한 잔에 비스켓 하나 정도 밖에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탈모증이 와서 머리카락이 완전히 빠져나가 문어머리가 되었답니다. 불면증에 소화불량에 시달려 그의 몰골이 마치 해골을 방불케 하는 모습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당시에 뉴욕 지방신문들은 "록펠러 사망하다"는 기사를 써둔 체로 그의 사망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의지할 것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성경을 보는 동안 누가복음 6장 38절의 "주라. 그러면 넘치도록 받을 것이다"는 말씀에 눈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자신의 헐벗은 영혼의 모습이 보여졌답니다. 크게 회심을 하고 변화되었답니다. 그는 회심한 다음 날 날이 새기가 무섭게 비서를 불러 '주는 방법'을 연구하게 하고 록펠러 재단을 만들었답니다.
그의 삶이 변화되자 건강이 회복되어지고 소화가 되기 시작하고 잠이 오기 시작하였답니다. 빠졌던 머리카락이 다시나기 시작하였고 살아 있다는 것의 보람을 느껴 나가기 시작하였답니다.
한 때 탐심의 사람이었던 록펠러는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사는 것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인생을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땅에 쌓는 인생인 아니라 하늘에 쌓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탐욕의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역할을 하게 하였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무려 98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히브리어로 탐심은 '타바(tabah)'라는 말로 "악한 소유, 또는 불법적인 욕심"을 의미합니다. 이 탐심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딤전6:10)'가 된다고 했습니다.
십계명에서는 탐심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10가지 재앙은 십계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범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죄가 탐욕입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는 탐욕이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우상을 섬기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탐욕이 부모를 바로 공경하지 못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고, 간음하게 하고, 도적질하게 하고, 거짓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에 포로가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타락하고, 어떤 권력이라도 부패하며, 어떤 나라라도 멸망으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탐욕의 종이 되면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아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롯의 아내, 가룟 유다처럼 인생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의지하는 나일강에 재앙을 내렸는데도 바로는 어떻게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애굽의 술객들도 하나님의 재앙을 흉내를 냅니다. 나일강이 범람한 후에는 물색이 변한다고 합니다. 수위가 낮을 때는 녹색을 띠지만 물이 불면 황갈색을 띠게 되고, 붉게 되어 석양이 비취면 피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바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아무일이 없다는 듯이 관심을 두지 않고 바로가 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금방 잊어 버립니다. 자신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먹고 살만하니까 남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습니다.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어 하숫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고 있는데 그는 백성의 고통을 관심도 두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린 강퍅한 사람, 교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정도가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더 큰 재앙을 불러 오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징계를 불러 오고 있는 것입니다. C. S. Lewis는 “고통은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적이고 점진적으로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첫 번째 재앙은 이집트인들이 농경과 식수 등 식생활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나일강, 나일강 신에게 재앙을 내리고 아홉 번째 어둠의 재앙을 통해 애굽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라(태양신)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부터 여덟 번째는 그들이 믿고 있는 수호신들 징벌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장자에게 재앙을 내려 진정 의지해야 할 분은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끼도록 하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바로와 애굽 백성들이 온천하에 이스라엘 신과 같은 분 없다는 것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7:5, 9:14) 애굽의 신, 나일강의 신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2008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년에도 저와 우리 성도님은 우리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인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예수님만 예수님만 언제나 의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