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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카페 게시글
일제 강제동원 관련 동향 스크랩 사할린, 망각 속의 보물섬(김민정)
이국언 추천 0 조회 47 12.05.10 09:3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사할린, 망각 속의 보물섬

글 : 김민정(극작가)

 

 

    ▲ 상공에서 본 꼬스샤코프 앞바다. 1945년 8월, 저 바다를 건너기 위해 울부짖었던 한인들. 고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다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의 넋이 아직도 저 아래에 있다.1890년 육로로 사할린을 방문한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는 사할린을 ‘슬픔의 틈새’라 불렀다. 사형수나 죄수의 땅이었던 그곳에 민간인 최초의 방문이었으며 시베리아 철도가 놓이기 전이라 마차로 이동해가며 3개월여 만에 도착한 섬이었다. 러시아의 중심에서 보자면 그곳은 시베리아보다 더 먼 곳이며 유럽의 끝, 동양의 시작이었다. 1900년대 초반부터 남사할린 탄광으로 강제징용 떠났다 돌아오지 못한 한인들의 후손이 있는 곳, 여전히 일본의 쿠릴섬 반환 문제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는 곳, 긴 겨울과 눈 깜빡할 사이의 봄, 아름다운 여름이 있는 곳이 사할린이다.

  러시아 사할린에 갈 거라고 하자 다들 왜 사할린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것도 한겨울에. 사할린에 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들 첫 질문으로, 왜 사할린에 왔느냐고 물었다.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모범답안이 나왔다. 사할린에는 한인들의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고. 그들의 삶이 역사 아니겠냐고.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해 책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커서는 급기야 이야기 만들어 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단단히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이번에는 이야기를 듣겠다고 평균기온 영하 30도인 사할린까지 가다니, 사람들의 표정은 ‘할 말 없음’이었다.

  무뚝뚝한 러시아 경찰의 검문을 마치고 출구로 나오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서울에서 본 적 있는 한국관 레스토랑 사장과 함께 생활을 도와줄 코디가 마중 나왔다. 차 안에서 짧은 인사를 나누고 바로 아파트를 구하러 떠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생경했지만, 사할린의 첫 느낌은 편안함이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춥지 않다는 것과 아직은 한국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을까. 첫 번째 보러간 아파트에서 마음의 결정을 해야 했다. 이분들과 또 다른 아파트를 보러 가기에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집주인과의 계약서 작성, 숙박비 지급, 주소와 전화번호, 인터넷 설치에 대한 안내 등.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났고 나의 즐거운 사할린 생활을 기원하며 모두 돌아갔다. 정신차려보니 내 손에는 러시아어로 된 몇 장의 메모와 낯선 러시아 지폐, 혼자 남겨진 뒤에서야 내가 세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사할린에 온 것, 서울과 연락이 여의치 않고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없다는 것을 알았다. 7시, 창문 앞 가로등이 켜졌다.

  ▲ 풍설 오던 날, 눈에 갇히다.장 보는 일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풍설이 온다는 예고가 왔다. 風雪-눈바람. 그냥 눈이 내리겠거니 했다. 그러나 눈은 바람에 먼지 날리듯이 오기 시작하더니 열흘 내리 쉬지 않고 내렸다. 순식간에 길이 사라지고 밤새 집 앞에서 포크레인과 트럭으로 눈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요란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 새벽녘 커튼을 열고 한참동안 눈 치우는 것을 구경했다. 낮에는 사다리차가 건물지붕에서 내 다리길이보다 길고 굵게 맺힌 고드름을 떼어냈다. 게으른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일거리 많은 때가 눈 오는 겨울인 것 같았다.

 

  눈은 그치지 않고 연말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파트 온수통에서는 녹물이 나오고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식량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시간제로 쓰는 인터넷은 속도가 워낙 느려 몇몇 자료를 다운 받다 보니 끊겨버렸고, 요금을 충전해 쓰는 스마트폰은 돈 잡아먹는 귀신이었다. 며칠 동안 말 한 마디 안 하고 있다 보니 입센의 희곡을 소리 내어 읽는 내 목소리가 위로가 될 지경이었다. 야심차게 집어든 <백년 동안의 고독>은 제목만으로도 절절이 고독해 몇 페이지 읽다가 그 방대한 세월을 베고 잠이 들곤 했다.

  눈이 그친 어느 날, 한인 1세대 할머니들을 만나러 한인교회에 갔다. 예배 때 휘 둘러보니 할머니는 딱 한 명뿐이었다. 폭설에 집밖으로 아예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 주를 기약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방심했는지 순식간에 빙판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런. 망할.

 

  침대에 떼굴떼굴 구르며 겨우 겉옷을 벗고 보니 부러진 데는 없는데 왼팔의 통증이 심했다. 숟가락만 들어도 통증이 왔다. 따냐 이모가 민간요법이라며 풀떼기를 팔에 칭칭 동여매 주었는데 풀독이 올라 가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러시아는 긴 연휴 중이었다. 연말연시, 1월 7일인 러시아 정교회 크리스마스까지. 밤새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새해를 그렇게 맞이한다고 한다.

  ▲ 좌로부터 시인 안드레이 양, 필자, 로만 허, 새고려신문사 배순신 사장연휴 동안 한국에 다녀온 한국관 사장이 내 몰골을 보더니 한국관 직원 숙소로 이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사할린에서 경험한 것은 눈(雪)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고민은 사할린에 ‘올지도 모를’ 지인들이었다. 며칠 고민을 하다 문자를 보냈다. 나 원룸으로 숙소를 옮기니 사할린에 오면 불편할 거야. 여긴 눈밖에 볼 것도 없다.

 

  한인문화센터 건물 숙소로 이사를 하고 나니 쁠까예봐 거리에 있을 때와는 정반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같은 건물에 있는 한국교육원 원장과 인사한 다음 날은 새고려신문사 사장을 소개 받고 인터뷰를 했다. 신문사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50년간 근무해 온 할머니 기자의 휴가를 위해 대신 교정교열을 보기로 했다. 다들 왜 이제야 나타났냐며 지나버린 한 달 반의 시간을 너무 안타까워했다. 배순신 사장은 안드레이 양, 로만 허 시인들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안드레이 양 선생은, 길 가는 누구든 붙잡고 애송시를 물었을 때 그분의 시가 항상 손꼽힐 정도로 사랑받는 시인이다. 기타를 들고 오신 로만 허 선생은 사할린에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될 때 자막번역을 하기도 했단다. 자작시를 불러주더니 내친김에 소월의 시도 연이어 노래로 불러주었다.
▲ “형님, 잠깐 사할린 가서 일보고 바로 고국으로 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이것이 형님과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는 주명수 화백

 

며칠 후엔 이들과 함께 사할린 한인 작가 주명수 화백의 작업실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주명수 화백은 러시아는 물론, 일본과 미국에 작품이 소개되어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제 막 시작한 작업 이야기, 뉴욕 초청 전시 중에 찍었던 거리 사진과 망향의 사연이 담긴 그림 등에 대한 설명은 끝도 없었다. 디아스포라로 예술의 길을 걸어온 세월, 돌아가신 부모님, 달라진 세상, 고향이지만 고향이 아닌 그곳. 간간이 그분들의 눈동자가 젖어들었고 나는 고국에서 온 작가라는 것만으로도 이분들에게 환영받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할린 생활에 익숙해져 도서관이며 카페, 거리를 나다니는 일도 즐기게 되었다. 러시아 버스는 한국산 폐차 직전의 봉고차가 많다. 요금을 내는 것도 기사 바로 뒤에 앉은 사람이 올라탄 사람들이 건네건네 준 차비를 받아 기사에게 전달한다. 아진, 드바, 뜨리...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운전사는 거스름돈을 계산해 주고 그것은 또 사람들의 손으로 전달전달된다. 나는 버스만 타면 기사 뒷자리에 앉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다. 러시아에 와서 러시아어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도 하고 마치 차장이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은 털부츠 바닥에 등산용 아이젠을 끼고 있는 낯선 발음의 쪼만한 여자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카레이츠, 이 버스 한국에서 온 고물차예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소심한 충동이 생겼다.

  한국으로 오기 마지막 주에는 한국어교실 수업참관을 했다. 이들에게는 한국 드라마가 한국을 알 수 있는 최신교과서라, 드라마를 보며 이해 안 갔던 점들을 궁금해 했다. 주부반에서는 여성의 날을 맞아 한바탕 음식잔치가 벌어지고 고급반에서 들은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문제와 한국정부의 대책 없는 대책은 서글픈 현실과 거리감을 갖게 했다. 우리에게는 잊혀져버린 사람들, 그들에게는 뼛속 깊이 묻은 고국. 한국에 돌아와 녹음해온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더 많은 눈물을 흘린다.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그곳을 생각한다. 그곳에 두고 온 환한 얼굴들과 목소리, 나는 아직도 사할린 눈 속에 서 있다.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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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5.24 14:10

    첫댓글 벌써 45 년전의 일이군요. 증학교가 가고 싶어서 시험을 보려고 수험번호 114 번을 받아놓고 결국 가정형편상 (부친께서 강제징용 후유증으로 병환중에 계셨고 할머니는 중풍으로 3 년째 대소변을 받아내시는 어머니의 그 고통스러운 삶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도저히) 시험을 보러 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본인의 최종학력은 초졸입니다.,.. 꼭 퍼가주세요. 이 동영상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꼭 봐야할 동영상입니다.
    정말 10분이라는 시간이 아깝지 않으실 겁니다. http://blog.daum.net/hblee9362/11318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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