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다. (시1:1~6)찬송
오늘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다. (시1:1~6)찬송
오늘 본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로 정의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남이 볼 때는 행복해 보이는데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불행해 보이는데도 자신은 행복에 넘쳐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복한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불행에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더미 같은 불행의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강철회사로 유명한 카네기는 말하기를 “행복이란 외계의 정황에 따라 결정되기보다는 마음의 상태여하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은 지혜로운 삶을 선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잠1: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인생을 나쁜 꾀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진실과 성실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꾀에는 악한 꾀가 있고 선한 꾀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꾀는 악하게 사용되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편10:2절 말씀을 보면 악한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 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라고 했고,
잠15:26절에서도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도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꾀는 인생을 사는 악한 방법과 수단을 의미합니다. 머지않아 우리는 줄을 서게 될 것입니다. 악한 꾀를 좇아 산 사람들이 서는 줄이 있고, 선을 좇아 산 의인의 줄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줄에 서야 할까요? 선을 좇아 산 의인의 길에서는 모두가 만나게 되십시다.
둘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죄인의 길은 멸망의 길입니다. 심판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서 있는 사람을 절대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죄인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를 통한 새 사람으로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롬6: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함이라.
회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은 과거에 일어난 결정적 행위,
곧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못 박힌 것을 가리킨다.
때문에 믿는 자는 죄의 영역에서 새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고,
죄가 우리위에서 왕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리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셋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에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성경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것은 교만한 사람이나 성읍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교만하다 쫓겨나고 그의 왕조가 끝났습니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 하노니 그가 돌리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명 령을 이루지 아니 하였음이니라
교만한자는
첫째: 교만한자는 회개하지 않았다.
둘째. 교만한 자는 자기생각과 자기 뜻만 옳다고 주장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넷째.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섯째. 강하고 폭력적이다.
여섯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안았다.
일곱째. 자기를 높이려한다.
여덟째.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아홉째. 기도하지 않는다.
삼상15:22 순종이 제사 보다났다.
단3:1-7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벨사살 왕도 교만하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교만가운데 가장 무서운 교만은 [무신론입니다.]하나님이 없다고 한사람이다.
시편10:4절에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16: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며,
약4:6절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넷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아침 저녁으로 묵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1:8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중요한 것은 주야입니다. 주야는 낮과 밤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낮은 무엇을 말합니까? 밝고 형통하고 즐거울 때를 가리킵니다. 밤은 어둡고 슬프고 실패할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여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한 지식 아닌 인격적 요소(지 .정 .의. )가 구비된 진리로서 받아들이고 우리 온 마음을 말씀이 다스리도록 맡겨 드려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본문에서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문에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누리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본문 3절에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통이란 막힘이 없는 삶을 말한다. 본문은 형통한 삶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
이것이 형통한 자의 모습입니다.
본문 시1:6절 말씀을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가장 행복한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입니다.
가장 행복한 일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시는 일과 살아가시는 삶은 하나님이 인정하실만 합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사역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2024.1.21.
시온성 주일 1부 강단
복 있는 사람 (만사 형통한 삶 을 살아가자)
시편 1장1절....6절
아멘!!!
주님! 감사 합니다.
목사님! 수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