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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령은 연포회(軟泡會)에 대한 기록도 일기를 통해 상세히 소개했다. 1603년 9월 28일 김령은 왕릉에서 쓰는 제사용 두부를 만드는 사찰인 조포사(造泡寺)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암사'에 가서 연포회(軟泡會)를 연다.
김령이 벗들과 함께한 연포회는 산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절에서 스님들이 요리한 따끈한 연두부탕을 함께 먹는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리는 즐거운 모임이었다.
큰 인기를 끌었던 연포회는 점차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16세기만 해도 연포회는 담백한 음식인 소식(素食)을 먹는 선비들이 산사에서 학문을 논하는 일종의 워크숍이었다.
새우젓으로만 간을 했다. 이후 연포회가 크게 유행하면서 닭을 재료로 쓴다. 사찰의 승려들이 살생을 할 수 없어 연포회에 참석한 젊은 선비들이 닭을 잡는 상황도 벌어졌다.
【안동=뉴시스】김진호 기자 = 산 속의 '연포회'와 승려들의 불만(그림=정용연). 2019.02.11 photo@newsis.com
연포회를 빙자해 업무를 방기한 채 산사나 능원에서 며칠씩 노는 관리들이 있어 조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찰의 승려들 입장에서는 놀고먹는 선비들을 위해 연포탕 끓이는 일이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인재일록(忍齋日錄)'에는 사찰의 승려들이 두부 만들기를 거부해 연포회가 열리지 못할 뻔한 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7세기 후반들어 사적 결사 모임인 계를 조직하고 세력을 모으려는 파벌의 우두머리들이 생겨나게 됐다. 그 결과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쇠고기가 연포회 국물에 들어갔다. 사찰의 승려들을 겁박해 연포탕을 끓이게 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마침내 1754년 음력 윤4월 7일 영조는 신하들과 사찰의 연포회 문제를 거론하면서 '폐단을 없애야 한다'는 지시를 내린다.
'연포회' 외에도 함께 모여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임 '난로회'가 있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난로회' 풍속은 조선 후기 급속도로 퍼졌다. 심지어 궐 안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다.
자료 출처: <뉴시스>에서 기사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