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상북도 성류굴이 있는 선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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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03:58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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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이 있는 선유산
1963년 5월 7일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된 성류굴은 탱천굴(撑天窟), 선유굴(仙遊窟)이라고도 한다. 주굴은 길이가 약 470미터, 전체 길이 약 800미터다. 입구는 선유산(仙遊山) 절벽 밑 왕피천(王避川)가에 있는 좁은 바위구멍이다. 사방의 경치가 아름다워서 선유굴 또는 선유산 밑에 성류사(聖留寺)가 있어서 성류굴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해일로 인하여 근처가 모두 물에 잠기고 이 산봉우리만 석류만큼 남았다고 하여 석류산이라고, 그 밑에 있는 굴이라 하여 석류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류굴
성류굴은 사방의 경치가 아름다워 선유굴, 또는 선유산 밑에 성류사(聖留寺)가 있어서 성류굴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울산을 지나 진격해온다는 말을 들은 근남, 원남 일대의 백성들 5백 명이 이 굴로 피난했는데, 왜군이 동굴 입구를 막아버려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한다. 입구 경사지에 깔린 바위들은 그때 왜적이 입구를 막은 돌이라 하며, 제5광장 동쪽에서 발견된 사람 뼈는 그때에 죽은 사람들의 뼈라고 한다. 이 굴에는 이무기가 숨어 있어서 가뭄이 심하면 굴 어귀에 제물을 차려놓고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동굴의 하나로, 고려 말의 학자 이곡이 성류굴에 대하여 언급한 『관동유기』는 국내 최초의 동굴 탐사기가 되는 셈이다.
절은 돌벼랑 아래 긴 시내 위에 있는데, 벼랑 돌이 벽처럼 일천 자는 섰으며, 벽에 작은 굴이 있는데 성류굴이라고 한다. 굴의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절의 중으로 하여금 홰를 들리고 인도하게 하였다. 또 뱃사람 중 출입하기에 익숙한 이로 앞서고 뒤서게 하고 들어갔다. 구멍 아가리가 좁아서 무릎으로 4~5보를 가야 좀 넓고, 일어서서 또 보를 가면 끊어진 벼랑이 세 길은 된다. 사다리를 놓고 내려가면 점점 평탄하고 높고 넓어지는데, 수십 보를 가면 평지가 있어 두어 묘는 되고, 좌우로 돌 형상이 기이하다.
또 10보쯤 가면 구멍이 나온다. 북쪽 구멍 아가리가 더욱 좁아서 엎드려 나가야 하는데, 아래는 진흙물이므로 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한다. 7~8보를 가면 좀 트이고 넓어지는데 좌우가 더욱 기이하여 깃발 같기도, 부처 같기도 하다. 또 십수 보를 가면 돌들이 더욱 기괴하고 그 형상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 더욱 많으며, 그 깃발 같고 부처 같은 것이 더욱 길고 넓고 높고 크다. 또 4~5보를 가면 불상 같은 것도 있고 고승 같은 것도 있으며, 또 못물이 있는데 매우 맑고 넓이가 두어 묘는 될 만하다.
그 못 가운데 돌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 같고 하나는 물병 같은데, 그 위와 곁에 드리운 깃발이나 일산 같은 것이 모두 오색이 영롱하다. 처음에는 종유(種乳)가 엉긴 것으로 그렇게 굳지 않았는가 생각되어 지팡이로 두드리니 모두 소리가 나며, 그 모양이 길고 짧은 데 따라서 맑고 흐린 것이 편경(編磬) 같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하다 하는데, 나는 ‘이것이 세속 사람으로서 함부로 구경할 것이 아니라’ 하며 재촉하여 나왔다. 그 양쪽에는 또 구멍이 많은데 사람들이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무도 그 끝에까지 가본 사람이 없다” 하며 또는 “평해군 바닷가에 닿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곳은 20여 리다. 처음에는 연기가 묻고 더러워질까 봐서 하인들의 의복과 수건을 빌려 가지고 들어갔는데, 나와서 옷을 갈아입고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보니 꿈에 화서국(華胥國, 중국 고대의 이상향)에 가서 놀다가 문득 깨달은 것 같았다. 일찍이 생각해보니, 조물(造物)의 묘함을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 많은데 내가 국도(國島) 및 이 섬에서 많이 보았다. 그것이 정말 자연히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짐짓 만든 것인가. 그것을 자연히 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도 그 형체 변화의 교묘함이 이렇게까지 되는 것인가. 그것이 또 짐짓 만든 것이라면 귀신의 공력으로 천만세를 두고두고 할지라도 또한 어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 것인가.
당시에 성류굴의 끝을 추정하기로 평해 바닷가라고 했으니 산포리나 덕신리 부근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리라.
1광장은 연무동, 2광장은 석실, 3광장은 은하천, 4광장은 탑실, 5광장은 지옥동, 만불상이라고도 하고 선녀의 밀실 같다고 해서 선녀동이라고도 하는 5광장을 지나면 ‘로마의 궁전’이라는 명칭이 붙은 6광장이 나온다. 옛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면 극락에 간다고 여겼던 7광장을 지나면 8광장에 이르고, 수례동이라고 부르는 9광장을 지나면 10광장인 법당 석실이다. 11광장은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수도하던 곳이고, 12광장은 1976년에 개발된 보물섬이다. 수만 개의 종유석이 있어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이곳을 미륵동이라고도 부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성류굴을 찾았던 김시습은 「울진 성류굴에서 자며」라는 시를 남겼다.
성류굴 앞 봄물이 이끼 낀 낚시터에 출렁이고
바위 뒤의 산꽃은 지는 해에 비치네.
또 한 가지 청절한 맛이 있는 사람은
밤 깊어 깃들었던 학이 사람 놀라 날음이라.
학소대
포항시 송라면에 자리한 내연산에는 경북 지방에서 그 명성을 자랑하는 12폭포가 있고, 학소대와 신선대 등 거대한 암벽이 장관을 이룬다.
[네이버 지식백과] 성류굴이 있는 선유산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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