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4/선연善緣]하일연자갈마당서夏日宴JAGALMADANG序
어느 고가古家를 철거하면서 나온 귀하고 멋드러진 식탁 하나를 지인이 선물했다. 고마운 일. 자갈마당에 놓고 보니, 자꾸 친구들을 불러 ‘한데(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 달포 전에는 고교때 같은 반 친구 두 쌍과 오래 추억에 남을 점심을 했다. 또 한번은 ‘사공시인’을 자처하는 ‘아주 특별한 전우’와 같이 했다. 지난 토요일 점심에는 전주에서 교수 두 명이 근현대사 문건들을 수집하는 여성기록원과 함께 방문을 했다. 블루스타에 목살과 쇠고기를 굽기를 자청한 A교수도 연신 즐거운 모양. B교수는 초면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다. 오랜만에 또 매운탕에 곁들여 ‘한갓진 오찬’을 즐겼다.
먼저 구경이랄 것도 없는 우거寓居이지만, 3년 전 한옥을 리모델링한 만큼 본채와 사랑채 구경을 시켜드렸다. 그런데 재밌난 일이 생겼다. 두 교수 모두 창호지문자(한자)에 이골이 난 사람들인지라 서재 벽면에 걸어놓은 판넬에 눈이 꽂혔다. 정년퇴직을 하고 귀향을 한다니까 원로선생님과 10년쯤 아래인 후배가 써준 송서送序와 한시가 그것이다. 게다가 한시의 지은이와 아주 막역한 관계라고 B교수가 사뭇 반색을 하는 것이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얘기를 하도 보면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신기하기까지 한 적이 먾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좁다’는 것이고 ‘죄 짓고 살면 안된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 말이다.
한시의 지은이는 나이는 우리보다 조금 적지만, 한시에 조예가 상당하고, 조선조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지은 초간草澗 권문해(1534-1591)의 후손이다. 벽에 걸어놓았으나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친구의 작품을 감상해 보는 시간이 됐다.
奉送愚泉仁兄退老還鄕 봉송우천인형퇴로환향
神交幸許日追隨 신교행허일추수
早賦陶辭緣孝思 조부도사연효사
履露慈堂悲寂寞 이로자당비적막
望雲嚴府懼期頤 망운엄부구기이
津津盛論頻傾耳 진진성론빈경이
慨慨時事共把卮 개개시시공파치
岸帽閑情知可樂 안모한정지가락
瓊音惠寄莫遲遲 경음혜기막지지
해석이 없으면 글자를 모두 안다해도 너무 어렵다. 그 친구가 풀이를 해주며 어려운 문구들을 보내온 것도 참조해 본다.
망년신교 황감하여 날마다 따랐더니
효심이 지극하여 이내 훌쩍 떠나네
자당 여윈 슬픔은 철따라 사무쳤고
백수 부친 걱정에 날마다 망향가네
흥미진진 담론에 자주 귀 기울였고
시사에 강개하여 함께 술도 마셨던 터
굴레 벗은 한가한 마음 쾌하지 않을까만
좋은 소식 고운 글귀 아끼지는 마옵소서
*神交신교: 정신적인 망년지교
*陶辭도사: 도연명의 귀거래사
*履露이로: 군자가 서리나 이슬을 밟으면서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고사로 예기禮記에 나옴
*望雲망운: 고향쪽 구름을 바라보며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적인걸狄仁傑의 고사를 말함
*嚴府엄부: 부친의 다른 이름
*期頤기이: 100세 어르신을 가리킴
*把卮파치: 술자리를 흥겹게 가짐
*岸帽: 모자를 젖혀 쓰고 초야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고사. 원래는 岸巾안건인데 평측 때문에 안모라고 쓴 것임
*瓊音경음: 상대의 좋은 문장이나 소식
*遲遲: 느릿느릿 늦추다
참 어렵다. 우리같은 한자맹漢字盲-한문맹漢文盲로서는 옛 선비들의 풍류의 세계를 짐작도 못할 뿐아니라 놀랍기까지 하다. 이렇게 어려운 한시를 써준 친구도 고맙고, 일부러 이 누추한 시골까지 찾아와준 교수 일행도 고맙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온통 고마운 일들뿐이다. 그래서 '범사凡事에 감사感謝하라'고 했을 것이다. 흐흐
아무튼, 12시부터 시작된 잔치는 오후내내 이어졌다. 얘기가 무르익으며 수담手談 얘기가 나왔는데, B교수가 아마추어의 고수라 하여 한 수 배우기를 청하기도 했다. 모처럼 나의 상수를 만난 즐거움은 배로 더했다. 또한 일면식이 있는 나의 고교 1년 후배를 대학(K대 사학과) 때부터 멘토로 여긴다는 말에 더욱 반가워 즉석에서 수십 년만에 통화까지 했으니, 초여름날 오찬은 흥을 더할 밖에. 그 후배는 부천에서 시민운동가로 명망이 높다고 한다. 좋은 인연들의 만남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인가. 농번기 망중한忙中閑이다. 이런 모임은 아무리 자주 가진다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흐흐. 내가 3점을 놓고 두어야 하는 재야 고수와의 대국이 기다려진다. 툇마루의 바둑판이 더욱 외롭게 느껴진다.
*후기: 글 제목인 하일연자갈마당서夏日宴JAGALMADANG序은 감히 이태백의 ‘춘야연도리원서’를 빗댄 것이다.https://cafe.daum.net/jrsix/h8dk/1169
첫댓글 바둑판이 좋네 언제 한수 두어야 겠구만
자갈마당에 멋드러진 식탁, 신선들 와서 바둑놀이 해도 원더풀!
사장지사 등 친구들과 덕담 나누는 재미도 일낙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