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불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 는 것은 원자폭탄을 상징한다? 푸하하하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에 대칭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적용하겠다는 것은 당사자의 자유이나 그 영향을 받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단순히 하나의 가설로 제안하는 것과 마치 검증을 받은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워치타워 법인은 아무리 오류가 나중에 들어난다 하더라도 그 당시에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점을 볼 때, 그런 지침을 내리는 워치타워 법인의 영이 얼마나 폭군적인가를 알 수 있다. 소위 예언서라고 하는 다니엘서, 에스겔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 같은 책의 기록은 미래에 일어날 구체적인 사건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바빌론의 포로가 될 그들의 운명이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자들이 바빌론에 대한 그들의 감정 그리고 1세기 박해받던 그들의 심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어떤 기록물이, 비록 내용면에서 훌륭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정경으로 지적 받았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순수한 역사인가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워치타워 법인의 논리는 예수께서 다니엘서를 인용했기 때문에 다니엘서의 내용이 모두 역사가 된다는 오류를 드러낸다. 정경은 정경으로서 이유가 있는 것이지, 그 안의 모든 내용과 글자가 절대적으로 역사와 과학에 일치한다거나 모든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자체적으로 모순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서의 영감성을 주장하였지만 그는 율법의 행위를 지탄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율법에서 분명하게 명시된 할례나 음식에 관한 규정들이 그리스도인과 관계가 없다는 점을 밝혔다. 이것은 성서의 영감성에 관한 바울의 주장과 오늘날 워치타워 법인을 포함한 기독교계의 영감성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하느님의 '호흡'이 실려 있다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고유의 전래소설인 '심청전'에는 '효'의 정신이 들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숨결이 그 이야기 가운데 흐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심청전의 이야기가 역사이거나 과학은 아니다. 그 이야기는 칸트의 분류에 의하면 무(無)의 한 종류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맥락에는 논리와 개념이 흐르고 있으나 그 내용이 공허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결국은 각자가 지니는 이성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하느님의 기준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성에 지시에 따르지 못하는 것은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허구나 창작을 역사나 과학으로 보려는 것도 역시 그들의 감정 때문이다.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성서의 기록을 조사해보라. 과연 다니엘서가 언제 기록되었는가? 다니엘서의 주인공인 다니엘은 실존 인물인가? 다니엘서의 꿈 이야기는 역사로서의 가치가 존재하는가? 특정 기간을 알려주는 수치들은 역사의 사건을 예언한 기간인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결론은 바빌론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대해 가졌던 그들의 감정을 이야기로 창작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들에서 배워야 할 훌륭한 내용들은 많이 있다. 우리는 그 점을 분별하는 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영이란 바로 우리의 이성인 것이다. 세계가 흘러가는 역사를 무턱대고 성경의 기록과 매칭시키려는 태도를 버리고 역사적 흐름의 맥락을 우리의 냉철한 이성으로 되짚어 봐야한다. 우리는 감정의 힘에 휘둘리지 말고 냉철한 이성으로 사물을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