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茶 그리고 香氣] 만년필 / 송찬호(1959~) 김명기 시인 승인 2022.12.28 14:45 댓글 0
만년필 / 송찬호(1959~)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릇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비로소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 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 만년필은 백지의 벽에 머리를 짓찧는다 만년필은 캄캄한 백지 속으로 들어가 오랜 불면의 밤을 밝힌다 - 이런 수사는 모두 고통스런 지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책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혼자 뒹굴어다니는 이 잊혀진 필기구를 보면서 가끔은 이런 상념에 젖기도 하는 것이다 -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
[쉼표] 송찬호의 시는 행간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명사를 시 제목으로 채택하면 시는 명사의 의미를 쫓아가기 바쁜 사례를 종종 본다. 시는 제목과 연관성도 중요하지만 단지 제목을 쫓는 것이 아니라 확장적 의미를 헤아려야 한다. 송찬호의 만년필은 삽날이었다가 재벌의 앵무새 노릇이나 군사정권의 하수인이 된 언론을 비꼬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만년필은 밥이 되고 또한 고통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시는 이미지이며 상징이란 것을 잘 보여주는 시로 송찬호의 만년필만 한 시가 없다.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사를 쥐락펴락하거나 권력의 하수인이 되기도 하지만 “거품 부글거리는 이 잉크의 늪에 한 마리 푸른 악어가 산다”는 문장에서는 끝끝내 부조리에 저항하는 날카로운 악어가 되기도 한다. 시의 저항은 상투적 구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격렬함이 없어도 격조와 결의를 잘 보여주는 시는 드물다. 어느 해인가 이 시는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시로 선정된 적이 있다. 격조와 결의를 미문으로 쓰는 일은 쉽지 않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