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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욕망
양을 치는 목동이 눈 내리는 어느 겨울밤 한 무리의 양떼를 몰고 눈을 피해 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마침 그 동굴 속에는 야생의 살찐 양들이 한 떼 들어와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이 목동은 의외의 사태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동굴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살찐 야생의 양들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목동은 자기의 양을 버려두고 야생의 양떼들에게 열심히 건초를 먹였다. 눈이 날리던 겨울이 지나고 눈이 멎자 건초를 실컷 얻어먹고 기운이 팔팔해진 야생의 양떼들은 건초를 얻어먹은데 대한 인사말 한마디도 없이 쏜살같이 동굴을 빠져나가 들과 숲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야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았던 목동으로서는 이만 저만한 손해가 아니었고 실망도 컸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추위에 떨며 동굴 속에서 야생의 양들 때문에 건초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다른 양들이 모두 굶어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늙은 죄수의 사랑
늙은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감옥을 전전하면서 늙었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죄수는 감옥 들창 밖에 날아온 참새 한 마리와 사귀게 됩니다. 그는 마른 빵조각을 떼어두었다가 참새에게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참새도 늙은 죄수와 친하게 되자 창문을 열면 감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참새는 늙은 죄수가 손바닥으로 내미는 빵부스러기를 쪼아 먹으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늙은 죄수에게는 칠십 평생에 처음으로 생기찬 나날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상의 행복이 다 그렇듯이 그에게도 행복한 날들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늙은 죄수가 바다 깊숙한 섬으로 이감되게 된 것입니다. 며칠을 두고 생각한 노인은 결국 참새를 데려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작업하러 밖으로 나갈 때마다 나무개비와 철사부스러기를 주워와서 조그만 조롱을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이감되는 날이 되어서 배를 타려는 노인은 허술한 조롱을 가슴에 품고 참새를 소중히 보호했습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죄수들이 밀고 당기는 혼잡 속에서 노인의 허술한 조롱은 부서져버렸습니다. 놀란 참새가 푸르르 날아올랐지만 이내 수면으로 떨어져버렸습니다. 그것은 참새가 달아날까봐 노인이 참새의 꼬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아! 저 참새를 건져줘요!” 그러나 우렁차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가 늙은 죄수의 비통한 부르짖음을 삼켜 버리는 가운데 배는 항구를 빠져 미끄러졌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의 [늙은 죄수의 사랑]이란 작품입니다. 늙은 죄수에게 참새는 아름다운 새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오직 사랑의 대상이었지만, 그것을 소유하려고 했을 때 결국 그 사랑은 사라져버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도둑질
옛날 제나라 때 일이다. 대낮에 어떤 사람이 금은방에 들어와서 금을 훔쳐 달아나다가 즉각 포졸에게 잡혔다. 포졸은 그를 끌고 가며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 금을 훔쳐가는 못난 놈이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기를 금을 훔칠 때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취금지시 불견인(취금지시 불견인). 욕심에 눈이 어두워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열자에 나오는 얘기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이 어두워진다 해도 못 가릴 것이 따로 있다.
세상에 공돈은 없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의회의원이나 시의원들 눈에는 의정활동비가 공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설사 공돈이라 해도 그 지방의원들에게 조금이라도 분별이 있었다면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떼어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궁한 사람들도 아니다. 선거 운동할 때만 해도 오로지 공익을 위해 멸사봉공하겠다고 하늘을 두고 맹세한 사람들이다.
지방자치가 가장 잘 되고 있는 나라라면 영국을 꼽는다. 그 초기에는 지방의원은 모든 게 자기 부담이었다. 지방의원이란 지방유지가 사회봉사하는 명예로운 자리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회의소집 기간에 한해 일당이 지급되기는 했다. 이때부터 형성된 [노블레스 오브리제(신분상의 의무)]의 정신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도 시끄러워지니까 어느 도의원들은 삼켜먹은 돈을 뱉어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계산법에 의해선지 절반만 토해 낸다는 것이다.
토해 내려면 다 토하든지 그렇게 불법도 위법도 아니라면 끝까지 버티든지 할 일이지 반은 또 뭔가.
사자가 주는 복
힘차게 쓰러뜨린 소를 사자가 굽어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도둑이 나타나더니, 한 몫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사자가, "네 놈이 상습적인 약탈자가 아니라면 주겠지만, 못 주겠다"하고 소리쳐 쫓아 버렸다.
그때 우연히 수더분하게 생긴 길손 하나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맹수를 보고는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사자는 매우 친절하게 나왔다. "나그네여, 그대는 욕심이 없으니 한 몫을 주리다. 두려워 말고 가져가시오."
그리고는 소를 얼마쯤 갈라놓더니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한다. 나그네에게 쇠고기를 챙길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소유와 만족
하나님의 행복관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두는 한, 우리는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일생 동안 행복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않을 것이며, 또 혹시 주신다고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딤전 6:6,7)라고 편지했다.
실제로 우리는 이미 영원토록 행복하게 되는 데 필요한 것을 모조리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으며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소유하지 못한 것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신이 옷을 주지 않은 이유
죠지 번(코메디안)의 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신이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주지 않은 이유는 옷을 주면 인간은 주머니를 달아 달라고 할 것이고, 주머니를 주면 거기에 돈을 채워달라고 할 것이니까 옷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옥수수 밭의 교훈
미국 인디언의 한 부족 이야기이다. 그들은 추장의 딸들이 성숙해지면 옥수수 밭으로 데리고 가서 인생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 교육과정에서 추장의 딸들은 지정된 밭고랑에 서서 한번 내디딘 걸음을 후퇴하거나 한번 쳐다본 옥수수를 다시 보지 않고 지나가면서 그 고랑에서 제일 좋은 옥수수 하나를 따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은 옥수수를 따지 못한 채 밭고랑 끝에 와버리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좋은 옥수수가 눈에 띌 적마다 더 좋은 옥수수가 다음 순간에 나타날 것 같아서 따지 않고 지나치다보니 어느 새 밭고랑 끝에 와버리고. 그때 눈에 띄인 옥수수는 고랑을 지나오면서 넘겨버린 것보다 좋지 못해 속상해서 따지 않아서 결국 빈 바구니로 밭고랑 끝에 이른다는 것이다. 추장의 딸로서 모든 남자를 다 자기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특권은 있지만 막상 고르려니 그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다.
제일 좋은 사람을 고르겠다는 생각으로 웬만한 사람은 다 지나쳐버리다가 나중에는 혼기까지 놓치기 쉽다는 것을 경고해주는 소박한 교훈이다. 한밭에서 자란 옥수수니 그 크기는 대동소이한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자기 눈에 크게 보인 순간에 땄다면 그래도 빈 바구니 신세는 면했을 것이다.
이상적인 최선보다 현실적인 차선이 얼마나 나은가. 행하지 못할 최선보다 행할 수 있는 차선이 더 바람직하다. 너무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욕심
어느 마을에 아주 게으른 청년이 한 명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에게 한 스승이 찾아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자네에게 천만 원을 그저 준다면 자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나."
청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만 원 가지고는 조금 부족한데요. 이천만원을 준다면 몰라도...., "
스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청년의 집에서 나와 버렸습니다.
그 청년에게 이천만원을 준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보서 1:14-15)
꿈은 클수록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욕심과 꿈을 혼돈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허황된 꿈을 꾸고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을 버리고 우리의 주어진 형편에서 최선을 다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 평안을 맛볼 수 있을 겁니다.
욕심꾸러기 주인 이야기
오늘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혜택을 받을수록 이상스럽게 사회악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혜와 힘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많아지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 한복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 밑에선 샘물이 솟았고 그 샘물은 사막에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주인에게 돈을 주고 샘물로 목을 축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샘터를 돌아보던 주인은 커다란 나무가 물을 흠뻑 머금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에 젖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주인은 나무가 머금은 물까지 탐이 나서 나무를 잘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무가 머금고 있던 물이 샘물에 고이면 그만큼 장사가 더 잘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샘물은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햇볕을 가려주고 모래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가 사라진 샘에서 물이 솟아날 까닭이 없었습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은 나무를 베어버린 그 욕심꾸러기 주인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고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 것처럼, 될 수 있으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생활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고독과 불안과 절망입니다.
욕심 많은 개구리
따가운 여름 해가 서쪽 산마루 위로 기울자, 산골짝이 에서 낮잠을 자던 아기바람이 살랑살랑 찾아왔습니다. 아기바람은 목가에 자라난 개풀들에게 "애들아, 안녕? 안녕?" 하고, 풀잎사귀를 가만히 흔들어 주었습니다. "아기바람 실바람아 고맙다. 이제 즐거운 여름 저녁이 시작될 거야"하고 개풀들이 아기바람에게 속삭이었습니다. 여기는 외진 산속, 어느 맑은 못입니다. 못의 물이 어찌나 맑은지, 하늘의 구름이 곱게 비치어, 마치 못 속에 또 다른 하늘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산골짝에서 흘러내려온 냇물 줄기도 이곳 못에 다다라서는 얼른 떠나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못에 한참 머물렀다가 또 딴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랍니다. "이 못은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곳이라니까..." 하고 개풀들이 자랑할 만도 합니다. 저녁 무렵이 되면 잠자리들이 놀러 나옵니다. 잠자리들은 비단옷 같은 두 쌍의 날개를 펴고 싱싱 날아다닙니다. 그리고 개풀들에게 제 고운 몸매를 자랑한답니다. 그런가 하면 땅거미가 내리면서부터 개똥벌레들도 어디서부턴지 나타납니다. 개똥벌레의 고 파란 반딧불은 더없이 신비스럽습니다. 마치 하늘의 아기별들이 땅 위로 내려와서 서로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아니 정말 밤에는 밤하늘의 초록별들이 못으로 내려와서 못 속에서도 밤새도록 반짝입니다.
"참 아름다워라.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은..."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이 못가에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몸집이 제법 큰 개구리입니다. 툭 튀어나온 두 눈은 부리부리하고, 또 이마빡도 반들반들 합니다.
"저 봐! 개구리가 나타났어!"
"응. 생김새가 욕심쟁이 같잖아?" 하고 개풀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넌 개구릴 첨보니? 이 못에도 개구린 여러 마리가 살고 있잖아?"
"하지만 말이야, 저 개구린 좀 다르다. 얘.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을까?"
개풀들은 이 개구리가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습니다.
개구리는 개풀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못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어! 시원하다 시원해!" 개풀 사이로 한 차례 헤엄쳐 다녔습니다.
"이곳에 이렇게 살기 좋은 곳이 있는 줄 미처 몰랐는걸..."
개구리는 큰 소리로 개굴개굴 한바탕 울어댔습니다. 그러자 개풀 사이에서 여기저기 다른 개구리들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죠? 그리고 어디서 오셨죠?" 하고 개구리 하나가 물었습니다.
"임마! 보면 몰라? 난 개구리야, 개구리 왕이라고!"
"개구리 왕요?" 하고 또 다른 개구리가 물었습니다."그래, 난 왕개구리이니까, 개구리 왕이다. 이거야. 이제부터 이 못의 왕은 나다. 알았어?" 이 낯선 개구리는 큰 소리를 쳤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모두 몸을 움츠리고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왜 대답들이 없어? 나를 왕으로 모시랬잖아? 내 말을 안 들으면 이 못에서 쫓아낼 테다!"
딴 곳에서 온 이 개구리가 오히려 큰소리입니다. 하지만 덩치가 워낙 큰 개구리라서 다른 개구리들은 기가 죽어 있었습니다.
"예, 우리들의 왕으로 모시고 말구요., 제발 우리를 이곳에서 쫓아내지만 말아주세요."
"그럼 좋아. 날 먹이가 많은 곳으로 안내하여라. 이때부터 너희들은 말이다. 내가 먹이를 실컷 먹고 난 다음에 먹어야 한다. 이게 왕을 모시는 법이야."
"예예, 그러겠습니다. 그런데 개구리 왕님 어디서 오셨지요?"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난 너희들처럼 산골 개구리가 아니라고. 마을 가까이서 살았는데 말야, 그 농약이란 거 때문에 그걸 피해서 이곳까지 온 거라고."
"농약이 뭔데요? 황새보다도 더 무서운 거예요?"
"이 바보들 같으니라고! 농약은 말이야, 벼농사를 해치는 벌레들을 죽이는 약이라고. 그런데 그 약 때문에 우리 개구리들도 병들지 뭐냐. 이곳엔 그런 게 없으니까 정말 좋구나."그래서 덩치 큰 개구리는 온 못을 휘저으며 다녔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개풀 사이에서 이 모양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이 덩치 큰 개구리를 당해낼 수 없으니까요.
"이 바보 개구리들아, 너희들은 왜 풀 사이에서만 숨어서 노는 거냐?
"개구리 왕님, 우린 개풀 사이에서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바보 소릴 듣지. 먹이도 맘대로 못 먹고 말이야!" 덩치 큰 개구리는 먹이를 혼자 독차지해서 먹으면서 이런 큰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점점 무서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새 한 마리가 이 못으로 날아왔습니다.
황새는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덩치 큰 개구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날아 내려와 냉큼 부리로 낚아채 먹어 버렸습니다. 다른 개구리들은 개풀 사이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았습니다.
욕심에 이끌리어
굶주린 여우가 포도밭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포도가 울안에 탐스럽게 열려 있었으나 밭으로 들어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배는 고프고 먹고 싶은 욕망은 불같이 일어났으나 아무리 찾아도 안으로 들어 갈만한 구멍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던 중. 오직 한 군데 조그만 구멍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멍도 당장은 들어갈 수가 없고 2,3일 동안 굶어 배를 홀쭉하게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여유는 너무도 먹음직스러운 포도에 침을 흘린 나머지 억지로 3일간 굶다가 몸뚱이가 가늘어진 다음에 포도밭에 들어가서 맛있는 포도를 실컷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들어갔던 그 구멍으로 다시 나오려고 하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우는 배는 채웠지만 울타리 속에 갇힌 몸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를 고민하다 보니. 다시 굶어서 몸을 가늘게 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하는 수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탐스러운 포도를 옆에 두고도 먹을 수 없는 괴로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3일간을 굶고 전과 같이 허기진 몸으로 가늘게 되어 포도밭을 빠져나온 여우는 결국 고생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도 흡사 이 여우와 같은 행로를 밟아 가는 것만 같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야 된다는 생각을 잊은 채 욕심에 이끌리어 포도원으로 들어간 여우처럼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오늘도 허상을 그리며 욕망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빈손으로 이 세상을 이별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립시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됩니다.
"청년 시절에는 이성의 유혹을 조심하고 장년 시절에는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노년에는 명예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성공적인 목회자가 될 것이요"
비단 목회자뿐이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젊은 제자 디모데에게"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했는데. 주석가 핸드릭슨은 정욕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즉 쾌락(육신적인 욕구충족을 위한 무절제한 욕망), 과 권력(유명해지고 싶고 남을 다스려 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소유욕(물질을 지나치게 소유하려는 욕심)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직장생활에서 만족을 느끼는 때가 언제입니까? 요즘 노사분규로 봉급인상, 근로조건개선 등을 요구하는데 해결해 준다고 해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나은,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가난이 미덕은 아닙니다. 불편합니다. 그런데 가난이 해결되었다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고 외적 환경에서 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이니 소명감으로 보람과 의미를 찾는 사람이 만족스런 직장생활을 합니다.
요즘 많이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이런 가사가 생각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욕심 때문에 우리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교만하고 죄를 짓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면 우리가 속한 곳이 어떤 곳이든 작은 천국으로 변하지 않을까요?
욕심이 잉태한 즉
고려 때의 이야기이다. 우정이 두터운 친구 셋이서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묵직한 금덩어리 하나를 주웠다. 셋은 이로 인하여 깊은 우정에 금이 갈까봐 금을 팔아서 셋이 똑같이 나누어 갖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는 뜻밖의 횡재를 축하하는 뜻으로 술을 사다 마시며 실컷 즐기자고 하였다. 해서 셋 중 하나가 술을 받으러 인근 주막으로 갔다.
그런데 술 받아 오던 자에게 갑자기 엉뚱한 욕심이 생겼다. "옳지, 술에다 독약을 타서 둘을 죽이면 금덩어리는 몽땅 내 것이 되겠지." 그래서 그 자는 술에다 독약을 타가지고 태연하게 두 친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한편, 남아있던 두 친구들도 금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으로, 술 받으러 간 친구를 죽이자고 모의하였다. 이윽고 술 가진 자가 오자마자 둘이서 달려들어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얼씨구 좋아라 하고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받아 온 술을 실컷 퍼 마셨다. 얼마 안 되어 둘이도 피를 토하고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죽고 말았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원숭이를 잡는 방법
원숭이가 많은 지역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단단히 매여 있는 둥근 통에 원숭이의 손이 들어가 먹이를 하나 간신히 꺼낼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통 안에는 원숭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를 많이 넣어둔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둥근 통 가까이 와서 먹이 냄새를 맡고 구멍 안에 가득 들어있는 맛있는 먹이를 보고는 그 통 주변을 한없이 뱅뱅 돈다고 합니다.
다른 데는 볼 겨를도 없이 뱅뱅 돕니다. 그러다가 손을 그 구멍으로 넣어 적은 부스러기 먹이 하나를 꺼내서 입에 넣어 보고는 그만 환장을 합니다. 눈을 깜박거리면서 손을 깊숙이 넣어 손을 가지고 잡을 수 있는 만큼 먹이를 잡습니다. 그리고 손을 빼려니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왜 손이 통에서 빠지지 않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손을 먹이통에 넣은 채 뱅글뱅글 돕니다. 덫을 놓았던 사람이 이것을 보고 걸렸다 생각하고 좇아오면 원숭이는 도망을 쳐야겠는데 손이 걸려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안타까워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 원숭이가 도망칠 수 있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쉽지만 손에 잡고 있는 먹이를 포기하면 쉽게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는 그것을 하지 못해서 뱅뱅 돌다가 눈이 말똥말똥한 채로 잡히고 만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가 잡은 것을 놓지 못해서 그 자리에서 뱅뱅 돌다가 마귀에게 붙잡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손에 쥔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먹이통 속에 있는 먹이만 보지 말고 밖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숭이 손
제이콤이라는 작가가 쓴 [원숭이 손]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영국인 노동자가 여러 해 동안 인도에서 일을 하고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동안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이상한 물건을 하나 사왔습니다. 그것은 마술사의 주술이 걸려 있는 [원숭이의 손] 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이 [원숭이의 손]을 잡고 자기의 소원 세 가지를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국인 노동자는 이것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한 후 [원숭이 손]을 붙잡고 첫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200파운드의 돈을 다오.” 얼마 안 돼서 낮선 사람이 찾아와서 200파운드의 돈을 주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이 돈이 무슨 돈입니까?” “당신 아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기계에 끼어 죽었기에 부의금을 가져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는 너무나 안타까워서 [원숭이 손]을 붙잡고 “제발. 내 아들을 돌려주시오”라고 애걸했습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처참한 유령이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고통 하는 아들의 유령을 본 그는 마침내 세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내 아들을 편히 쉬게 해주시오.”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영국인 노동자, 그는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술사의 주술이 걸린 [원숭이 손]같은 허영과 과욕에 사로잡혀 헤어 나올 수 없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숭이 손]을 통하여 물질과 명예와 향락, 인기와 장수하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주술 걸린 원숭이의 손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술 걸린 원숭이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입니다.
유혹에 빠진 파리와 좀 나비
이솝의 우화 중 '파리와 좀 나비'라는 이야기 속에 향긋한 냄새를 찾아온 배고픈 파리가 꿀단지에 앉아 꿀을 핥아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인 터라 꿀맛에 끌린 파리는, 처음에는 언저리를 돌면서 꿀을 먹다가 드디어 꿀단지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마침내, 꿀단지 속에 빠진 파리는 날개가 꿀투성이가 되어 날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때 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꿀 속에 파묻혀 꼼짝을 못하는 파리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파리야! 너는 꿀 속에 빠질 만큼 욕심이 많았더냐? 욕심이 지나쳤군!” 빈정대는 좀 나비 앞에서 파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등불이 하나하나 켜지기 시작했습니다. 좀 나비는 환히 비치는 등불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등불 가까이 다가가다가 그만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꿀 속에 파묻혀 이 장면을 본 파리가 말했습니다. “너도 어리석은 놈이로구나. 타 죽을 만큼 네 놈도 불장난을 좋아하다니!” 결국 '먹이'에 욕심내던 파리도, '불빛'을 찾아 헤매던 좀 나비도 죽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유혹하여 악의 소굴로 밀어 넣으려는 사탄의 손길들이 많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환락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면 파리와 좀 나비 같은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말씀에 충만해있고 굳은 신념과 성실한 마음가짐이 되어 있을 때 육체적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쾌락과 악의 소굴로 빠뜨리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좀더 좀더
사람들의 생각은 참 간사합니다. 시내버스만 타고 다닐 때는 사람들을 보면 다 나하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으로 보이다가. 어쩌다 택시라도 타게 되면 자신이 좀더 나은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이 들고. 자가용이라도 갖게 되고 거기에서도 소위 중형차나 대형차 정도를 굴리게 되면 버스나 타는 사람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배가 아주 고플 때 인간은 귀하고 좋은 음식이 아니라 아주 싸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허기가 채워지고 여유가 생기면 이젠 좀 더 좋은 것. 좀 더 비싼 것. 좀 더 귀하고 새로운 것만을 찾게 됩니다.
잠잘 곳이 없을 땐 어디든 몸을 눕힐 만한 곳만 있으면 상관없다가도 좀 더 나은 곳. 전셋집. 우리 집. 좀 더 좋은 우리 집을 원하게 됩니다. 이런 좀 더 나은 것을 찾는데 우리 인간이 쏟는 시간은 이삼십 년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처한 생활이 어떻든 간에 그 처한 곳에서 감사하지 못한다면 더 높고 더 좋은 처지가 된다고 해도 오늘과 같은 불평불만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생활에 만족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훈련을 지금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감사하다가 더 주어지면 그것은 더 감사할 뿐입니다. 생활에 대한 만족과 감사는 어떤 크기와 부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제 원하던 것을 오늘 얻었으면 그것을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지 더큰 자극을 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만족이나 행복은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베푸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쿠크의 욕심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 가면 워싱톤포스트라는 유명한 신문이 있습니다. 그 신문에 '자네트 쿠크'라는 여기자가 있습니다. '지미의 세계'라는 특종을 보도함으로 유명한 여기자가 되었습니다. 흑인 어린이 하나가 부모에 의해서 마약 주사를 매일 맞고 있는 그 처참한 광경을 생생하게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로 인해서 전 미국을 탄식과 슬픔에 몰아넣었습니다. 쿠크는 이 기사를 특종 함으로 인해서, 기자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게 하는 '퓰리처 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입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지미의 세계'에 등장하는 그 흑인 어린이의 이야기가 쿠크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실을 보도한 것이 아니고 쿠크에 의해서 꾸며진 이야기였습니다. 쿠크에 대해서 지탄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쿠크는 신문사에서 쫓겨났습니다. 주어진 '퓰리처 상'까지 다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한 기자가 찾아가서 왜 이런 엉터리 기사를 쓰게 되었느냐고 묻자, “나의 직속상관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함으로 해서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고 일약 유명한 기자가 되고 퓰리처상까지 받게 되니까, 나도 기자로서 성공하고 싶은 충동과 출세욕이 그런 엉터리 기사를 쓰게 했다”고 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받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속에 생기는 이 욕심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아니한 사람이나 욕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믿음을 통해서 자기 마음에 생성되는 욕심을 자제해 갈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욕심을 절제할 수 있겠습니까?
탐욕
자신의 경제적인 이윤을 충족시키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이웃을 괴롭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최근 브라질의 한가운데서 시작된 한 개발 계획안에서 발생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마존의 정글은 전 세계 산소의 약 20퍼센트를 광합성을 통해 생산해 내고 있다고 한다.
한 억만장자가 이 아마존 유역의 50만 에이커를 사들여 그곳의 나무들로 펄프를 만들려고 하였다. 밧줄로 나무를 끌어서 만 오천마일 떨어진 아마존 강의 지류로 옮기고, 그것을 일본으로 가져가 펄프를 만듦으로써, 그는 매일 750톤의 펄프를 생산해낼 생각이었다. 이것은 세계를 16번이나 감쌀 수 있는 화장지를 만들기에 충분한 분량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개인의 기업이 전 인류의 복지를 위협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질문해 봐야 한다.
최근 아프리카 가뭄의 원인이 아마존 강에서 생긴 생태학적 불균형 때문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가 명백해졌다. 정글이 파괴되어 비가 생성되지 않았으며, 바람이 더 이상 비구름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몰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탐욕. 청빈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스토아학파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몸에는 짧은 바지 하나만 걸치고 살았고, 자기의 집도 없이 밤에는 산기슭에 가서 나무통속에서 잤다고 합니다.
하루는 알렉산더 왕이 유명하게 소문난 이 철학자를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이 철인의 가난한 처지를 보고 "선생께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원한다면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선생께 다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이 철인 디오게네스는 "예, 한 가지 원이 있습니다. 대왕께서 제 앞에 서 계셔서 햇빛이 가리니 좀 비켜나 주실 수 없겠습니까?"라고 했더랍니다.
필요충분조건
아주 무더운 여름날, 어떤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할머니가 무척 사랑하는 이 소년은 모자에서 구두에 이르기까지 나들이옷을 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할머니는 자기 손자에게 아무 사고가 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면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다. 다행히도 이 소년은 무사히 돌아왔다. 다만 물에 빠져서 생쥐 꼴을 하고 머리가 헝클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 할머니는 천국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님 아시지요, 이 아이에겐 모자도 있었는데...."
[출처] 욕심에 대하여 (은혜성서교회) | 작성자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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