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2000만 건 검사… 내시경, 넌 어디서 온거니?
[내시경 진화 ①] 내시경 발전사
한 해 2000만 건 정도 이뤄지는 내시경 검사. 헬스조선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뢰해 입수한 ‘내시경 검진 및 진료 현황’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위장관 증상이 있어서 진단·치료 목적으로 시행된 내시경은 1375만건 6687건, 건강검진 목적으로 이뤄진 내시경은 721만 7937건이었다.
한국인에게 가장 많이 발생하는 위암과 4번째로 많은 대장암을 조기 진단하기 위해 내시경 검사는 ‘필수’가 됐다.
진단 뿐만 아니라 암을 비롯한 병변을 절제하는 치료를 위해서도 내시경은 널리 사용된다. 아직 한국에서 만든 ‘똘똘한’ 내시경은 없지만, 의사의 내시경 실력은 나날히 발전하고 있다. 일례로 내시경 관련해 발표하는 의학 논문 숫자는 미국, 일본 등에 이어 3~5위를 기록할 정도. 내시경이 어떻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지, 내시경의 진단·치료 기술은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첫번째 편, ‘내시경 넌 어디서 온거니?’.
내시경(內視鏡)은 속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라는 뜻이다. 국내에는 1940년대 전후로 내시경이 처음 도입돼 진단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이후 조기암 진단율이 크게 향상됐다. 치료에도 사용되고 있다. 현재 조기암의 경우 절반은 개복 수술을 하지 않고 내시경만으로 병변을 잘라낸다. 내시경은 첨단 광학영상기술의 집합체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 금속관으로 만든 초기 내시경, 장기 찢어지는 사고도
내시경의 시작은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주로 말을 타고 이동을 했기 때문에 치질을 앓는 사람이 많았는데, 치질 치료를 위해 항문 내부를 관찰하고 불로 지져 치료하던 것을 내시경 검사와 치료의 시발점으로 본다.
근대 내시경은 1805년 독일 의사 필립 보치니가 ‘빛으로 보는 기계’라는 뜻의 도광기(light conductor)를 ‘금속관’ 형태로 만들어 요도, 직장, 목에 넣고 램프의 빛으로 관찰한 것에서 시작됐다. 다만, 금속관이 몸속 깊이 들어가지 못했고 램프가 충분히 밝지 않아 질환을 판단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1853년 프랑스 의사 데소르모가 램프로 불을 더 밝히고 관찰할 수 있는 내시경을 제작했고, 안을 보는 거울이라는 뜻의 ‘Endoscope(내시경)’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체외에서 가까운 직장 안쪽, 목 안쪽 정도 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다 1868년 ‘쿠스마울’이라는 독일 의사가 47cm 길이의 금속관을 만들어 최초로 위를 관찰했다. 검사 대상자는 칼을 삼키는 묘기를 부리던 거리 공연가로, 금속관을 위까지 넣기 위해 입과 목젖, 식도에서 위까지 직선으로 만들어야 했다. 체내에 삽입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이 크고 장기가 찢어지는 등 사고의 우려로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 한국은 1922년 독일 제작 내시경 사용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40년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환자 진료에 사용된 내시경 기기는 1922년 독일의 루돌프 쉰들러가 제작한 위내시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위내시경은 윗 부분은 구부러지지 않았지만, 환자 몸 안에 들어가는 아랫 부분은 34도 정도 구부릴 수 있었다. 이전의 전체를 구부릴 수 없는 내시경보다는 좀 쉽게 위 안에 삽입할 수 있는 반굴곡 위내시경인 ‘Wolf-Schindler형 연성위내시경’이었다. 그러나 유연성이 충분치 않아서 환자에게 고통이 심했고 식도나 십이지장의 관찰이 불가능해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국내에서 소화기 내시경 검사가 태동힌 시점은 194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 1943년 경성의전(현 서울의대) 내과의 김해수 교수가 딱딱한 경식 위내시경(rigid gastroscope)을 사용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1940년대를 전후한 시점에서는 위내시경을 환자 진료에 사용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경식 위내시경은 단순히 병변을 관찰하는 데 그쳤으며, 조직 채취나 사진촬영이 불가능했다.
◇ 비닐 호스에 필름 카메라 달아 만든 ‘위 카메라’
내시경이 지금과 같이 의료현장에서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50년 작은 필름 카메라를 비닐 호스 끝에 달고 인체에 넣어 위장 사진을 찍는 것에 성공하고 나서부터다. 이를 ‘위 카메라’라고 하는데, 위암의 조기 발견을 위해 방법을 고민하던 도쿄의 한 젊은 의사 우지 다쓰로와 올림푸스의 카메라 기술자 스기우라 무쓰오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검사 중 환자가 다치지 않는 안전한 위 카메라를 만들기 위해 먼저 날카롭고 딱딱한 금속관 대신 염화비닐 호스를 사용했다. 아울러 크기 자체를 줄였다. 식도의 지름이 15~20mm이기 때문에, 카메라의 최대 크기는 12mm를 넘지 않아야 했고, 필름과 전구도 여기에 맞게 일반 제품보다 더 작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2.5mm 초소형 카메라 렌즈와 5mm보다 작은 전구를 개발하였고, 몸속을 관찰하기 위한 여러 부품들이 가는 관 안에 모두 들어가게 되었다. 1949년 말 개에게 첫 시제품 실험을 한 후 1950년 9월 인간의 위를 카메라로 촬영하는 실험이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4년 고광도 교수(고려의대)가 위 카메라로 위장 질환 성적을 발표한 바 있으며, 1967년에 정극수 교수(경북의대)가 위 검사에 이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1968년에는 국내 최초로 내시경을 통해 조기 위암을 발견했다. 이후 위 카메라는 국내 여러 병원에서 위장질환의 진단에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 동시에 진단이 가능한 비디오 내시경 개발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끈 위 카메라도 아쉬운 점이 있었다. 몸속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꺼내 필름을 현상해서 관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뱃속을 실시간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의사들은 검사하면서 실시간으로 위장을 살피고 싶어 했다. 기존의 파이버 스코프(관)는 렌즈가 달린 한쪽 끝을 환자 몸속에 넣고, 바깥에 나와 있는 다른 한쪽 끝에 의사가 눈을 대고 관찰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직접 검사를 하는 한 명의 의사밖에는 볼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전하결합소자인 CCD(Charge Coupled Device)를 사용한 ‘비디오 스코프 내시경’이 만들어지면서 렌즈가 비추는 환자 몸속의 모습을 TV 화면에 띄워 여러 명의 의료진이 함께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진단의 정확도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지금은 영상기술의 발전 덕분에 4K 화질의 내시경까지 나왔다.
◇ 내시경 치료 위한 처치구 진화… 수술 대체 중
1960년대 ‘처치구’의 등장하면서 내시경은 진단 뿐 아니라 치료의 역할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시초는 체내에 들어가는 관 속으로 작은 겸자를 넣어 조직을 채취해 꺼낸 뒤 현미경으로 관찰한 생검 시술을 했다. 이어서 용종을 떼어내는 올가미, 정맥류를 묶는 링, 출혈부를 지혈시키는 클립 등 다양한 형태와 용도의 처치구가 개발되었다.
이후 처치구를 이용한 새로운 수술법이 나오면서 내시경은 진단과 동시에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대표적인 예가 내시경점막하박리술(ESD)이다. ESD는 위나 대장에 내시경과 처치구를 넣고, 병변 주위 점막 아래에 식염수를 주입해 부풀린 다음 잘라내는 수술법이다. 과거에는 암이 발견돼 절제하려면 개복수술을 하는 게 당연했지만, 이제 조기암은 ESD만으로 치료가 가능해 통증이 적고 회복 기간이 짧아 환자의 삶의 질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 조주영 이사장은 “조기 위암이 경우 병원마다 다르지만 환자의 절반 이상이 내시경으로 시술하고 있다”며 “치료 내시경이 발전하면서 웬만한 질환은 내시경으로 치료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말했다.
(2021년 7월 7일 헬스조선) / 이금숙 헬스조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