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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질리/어나니머스/개성공단과분노/상기하자6.25/돈이야기/동의보감
테너질리/어나니머스/개성공단과분노/상기하자6.25/돈이야기/동의보감
★개성공단-우리의 분노
최 응 표 (뉴욕에서)
개성공단은 한마디로 김정일과 김대중의 不倫(불륜)으로 태어난 私生兒(사생아)다. 평화, 화해, 협력의 상징이 아니라 노무현 식 표현으로 태어나서는 안 될 불화, 갈등, 불법, 배신을 안고 태어난 불행의 상징이다. 그래서 폐쇄하는 것이 正道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제, 특히 북한과 같은 비정상 집단과의 문제는 더더욱 단순논리로 풀어야 한다. 인도주의,평화, 화해, 협력 같은 인간적 정서와 민족끼리, 통일, 자유 같은 정치적 계산을 한데 섞어버리면 문제는 더욱 실타래처럼 엉켜 해법 찾기가 어려워진다.
종북 패거리들이 어떤 말로 치장하며 실체를 감춘다 해도 개성공단의 實像(실상)은 김정일에게 朝貢(조공)바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반국가적 거래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북한은 저들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에 따라 조폭근성 그대로 멋대로 칼자루를 휘둘러 왔고, 불륜의 약점 때문에 우리는 항상 저들에게 끌려 다니는 수모를 당해 왔다.
달라는 대로 퍼주고, 반국가적 수단까지 동원해 달러를 갖다 바치면서 왜 그런 수모와 곤욕을 당해야 하나. 이제 그 치욕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한다. 비도덕적 사회에 人間愛(인간애)가 머무를 자리는 없다.
개성공단은 발상부터가 순수성이 없었다. 김정일은 김대중 후의 젖줄 만들기 전략에 바탕을 두었고, 김대중은 은혜 갚기와 퇴임 후의 퍼주기 기구 만들기라는 사기성 策略(책략)에 바탕을 둔 불량품이다. 그런 불량품에 무슨 원칙과 순수성이 있겠는가.
저들말대로 평화와 화해를 거쳐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이라는 숭고한 목적이 기본 정신이라면 개성공단은 보편적 기준마저 내팽개친 비정상집단의 앞마당이 아니라, 국제질서 속에 성장한 대한민국 영토에, 백보를 양보해서 그것이 불가능 했다면 적어도 남북 어느 쪽도 함부로 꼼수를 부릴 수 없는 안전지대에 조성했어야 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지 1년 10개월 만인 2009년 6월에 철수한 ‘스키넷’의 김용구 사장은 “개성공단은 북한 뜻대로 움직이는곳, 사업이 아니라 정치하는 곳”이라고 하며 이번 개성공단에 대한 우리정부의 조치에 대해 “잘했다, 개성공단은 차라리 폐쇄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렇다 개성공단은 민족논리와 경제논리가 아니라 북한의 이익과 순간적 감정에 따라 북한 식 정치논리와 억지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저들의 속성을 모르겠거든 공산당에 대한 이승만, 박정희 정신을 다시 배우라. 4월 29일자 중앙일보는 10년 전 평양에서 개성공단을 논의하는 간부회의에서 발언한 노동당 과장(북한에서는 각료도 노동당 과장 앞에서는 숨을 죽인다)의 말을 소개했다.
“3년이면 기술 다 배워 우리가 공단을 접수할 수 있다. 남조선은 투자한 것도 못 가져간다.”
이것이 저들의 진짜 속셈이다. 빼먹을 것 다 빼먹고 나중에는 속옷마저 벗겨서 내쫓는 게 마적단들의 속성 아닌가. 이제 그 노동당 과장의 말이 현실화 되는 단계에 온 것이다. 세상에 敵陣(적진)의 울타리 안에 공장을 지어놓고 자기 국민을 들여보내는 미치광이가 어디 있나.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는 쪽이 甲의 위치에서 사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자본주의 원칙이고 일반 상거래의 원칙이다. 그런데 개성공단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북한이 쥐고 마음대로 끌고 다녔다. 돈은 돈대로 쏟아 붓고도 수시로 주먹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는 형국이다.
지난 29일, 이재정(노무현 때 통일부 장관)은 “우리 스스로 (개성공단 철수)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개성공단에 있는 모든 근로자나 기업체는 다 북쪽 땅에 있고, 북쪽 법에 기반 한 것인데 우리가 마음대로 철수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평양 노동당 간부의 입에서나 나옴직한 정신 나간 헛소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정동영은 지난 27일,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개성공단을 이런 식으로 날려버리고 무슨 수로 경제를 살린단 말이냐”는 글로 우리정부를 비판한데 이어 박지원은 “개성공단은 정부가 시한을 정해 강경하게 나간 결과”라며 모든 책임을 우리에게 돌렸다.
이것이 민주당의 기본정신이고 실체다. 북한의 버릇을 고약하게 만들고 한반도의 위기를 이처럼 고조시킨 책임은 기본적으로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은 민주당에 있다. 민주당 비대위원장 문희상은 29일, “개성공단이 폐쇄되면 남북한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민족적 재앙이 될 것”이라며 “6.15 정상회담의 옥동자, 남북화해 협력의 상징 개성공단을 살려 달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개성공단이 6.15 정상회담의 ‘옥동자’란 종북적 인식에서, 개성공단은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라는 인식으로 바뀌지 않는 한 개성공단 해법은 어디서에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당은 개성공단 해법을 정부에 주문하기 전에 과거부터 반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민주당이 종북 프레임을 깨버리지 않는 한 국정파트너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이재정의 말대로 개성공단에 있는 모든 근로자나 기업체는 다 북쪽 땅에 있고, 북쪽 법에 기반 한 것이어서 무엇 하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상생이 될 수 있고, 남북평화와 화해 협력의 상징이 될 수 있는가.
개성공단이 북한 법에 따라 운영되는 곳이라면, 노예공단이란 뜻이고 우리 근로자들은 노예란 말 아닌가. 자기 국민을 적진에 몰아넣고 노예로 만드는 미친 정부, 미친 X들이 세상에 어디 있나. 그래서 반성부터 하라는 것이다.
‘분노하라’의 저자 스데판 에셀은 인간의 핵심을 이루는 성품중 하나가 ‘분노’라며,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북파들의 나라 허물기로부터 우리의 존엄성(국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서있는 곳(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행복(사람답게 살 권리)을 지키기 위해 분노한다는 말이다.
저들은 평화, 화해, 협력의 상징이라는 개성공단이 계획되고 운영되면서 엄청난 달러를 벌어 갈 때도 1, 2, 3차 핵실험과 미사일을 쏘아댔고, 1,2,차 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피살사건을 일으켰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한다.
평화, 화해, 협력의 상징에는 평화, 화해는 물론 협력의 그림자도 없었다. 저들의 눈에는 오직 달러만 보였을 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공산집단의 속성이다.
이제 개성공단 조업 중단으로 인한 피해보상과 배상문제도 정식으로 거론해야 한다. 겸해서 북한이 과거 식량차관에 대한 원리금 상환을 거부하고 있는 신용불량행위도 문제 삼아야 한다. 지난 연말 기준 연체금이 583만 달러, 도둑의 버릇을 고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우리의 善意(선의)가 폭력과 배신과 증오가 돼 돌아오는 것에 우리는 분노한다. 선을 악으로 갚는 무뢰한들과의 신뢰구축은 차라리 악어의 눈물에 기대는 편이 낫다. 그런 집단을 상대로 ‘신뢰프로세스’에 올인 하는 것은 미래로 향하는 역사의 수례를 다시 과거로 되돌리는 역사 배신행위가 된다.
지금은 굴욕의 역사, 잊고 싶은 역사, 부인하고 싶은 역사를 미래의 긍정적이고 희망의 역사와 성공의 역사로 바꾸는 국민적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창조가 곧 희망이며 용기를 낳는 분노는 참여의 의지에서 나온다. 건국주역들과 선배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창조하기 위해 참여하고 분노하라. 상식의 질서를 위해 불의를 고발하라. 인간사회의 기본 질서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제 박근혜 정부가 새 역사의 핸들을 잡고 꿈이 있는 창조의 세계로 나가도록 국민이 힘을 모을 때다. 꿈이 있는 창조의 세계로 말이다. 그럴 때, 스데판 센델의 말처럼, 창조의 물결은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 |
★노무현 대통령의 NLL 인식 자체가 매우잘못되었습니다.
요즘 고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NLL 포기 발언의 진위여부를 민주당 쪽에서는 왜곡이라면서 반발하고 있지만 노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을 살펴보면, 충분히 포기 발언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NLL 인식 자체가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흔히.. NLL을 가르켜.. 유엔군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해상경계선이기 때문에 영해선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북괴의 NLL 무력화에
맞장구 치는 한심한 사람들이 보입니다.
먼저 NLL이 왜 합의 대상 조차 안되는지는 한국전쟁 이전과 한국전 휴전회담 중 서해상황을 놓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금의 NLL 이남 수역은 엄연한 대한의 바다였습니다.
한국전 정전 직전까지 북괴는 미약한 해군력으로 이미 평양의 관문인 남포 앞바다까지
대한의 해병대와 해군에게 점령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유엔군 사령관의 일방적인 정전협정으로 원통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피를 흘리면서
점령했던 38선 이북의 석도와 초도를 적에게 고스란히 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당하게 괴뢰군은 밑에 그림이 자기들 바다라고 우깁니다.
북한의 주장대로 NLL을 인정해주면.. 서해5도가 괴뢰군에게 점령당할 때 우리 해군이 대응할 방안이 없어집니다.
한마디로 북한이 주장하는 NLL은 서해5도를 집어삼키고 나아가 서울의 관문마저 위협하려는 공산집단 특유의
살라미 전술인 셈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점령한 섬과 바다를 정전 협정을 위해 기꺼이 반환했지만
자신들이 전쟁 이전에도, 전쟁 중에도 점령하지 해보지 못했던 바다를 자기들 것이라고 우깁니다.
정전협정 중에 NLL에 대해 끽소리 못하던 놈들이 40년이 지나서야.. 합의된 사항이 아니었다고 우깁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NLL은 우리나라의 서해 5도와 북한의 옹진반도의 중간 지점을 직선으로 이은 선입니다.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 제15조에 따르면 두 국가의 해안이 서로 마주보고 있거나 인접하고 있는 경우,
양국간 달리 합의하지 않는 한 양국의 각각의 영해 기선상의 가장 가까운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을 연결한
중간선 밖으로 영해를 확장할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NLL은 전쟁 이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바다였고, 정전 협정 당시 괴뢰군 측에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습니다.
아는 것 별로 없는 초딩들 데려다가 양국간 영해선을 설정하라고 시켜도 자와 색연필을 가지고 지금의 NLL처럼 그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의 NLL은 엄연히 국제협약에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노무현과 종북좌파들은 NLL의 무엇이 북한에게 그토록 가혹하고 불합리하게 설정되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괴뢰군에 의해 1000톤이 넘는 초계함이 격침된 이 마당에.. NLL을 북한 입장대로 반영해주어 괴뢰군이 서해를 맘놓고
휘젓고 다니면 우리의 안보는 더욱더 위축될 수 밖에 없는데... 대체 이들은 우리나라의 입장을 대변할 지도자들이 맞는 겁니까?
NLL은 전쟁 이전에도 우리의 바다였고 전쟁 중에도 빼앗기지 않았던 우리의 바다입니다. NLL이 해상분계선이 아니라거나...
남북이 공평하게 중간 지점을 직선으로 그어버린 선이 북한에게 부당하다는 황당한 소리는 이제 그만 나왔으면 합니다. *** |
★6.25를 상기하자.
국회의원들과 위정자들에게 강력히 촉구한다
救國300正義軍決死隊
300Righteous National Forces Of Korea
고유번호:123-82-67504
★각계각층(청와대,19대국회의원,海外戰友들韓人記者단포함)
네티즌1,300명에계 개별전송
[부조리, 부정부패척결, 정의사회구현]
국회의원들과 위정자들에게 강력히 촉구한다
★ 戰爭과 사람 ★
종종 11월이면 평안남도 양덕군에 있는 중공군 묘지를
백발의 중국여인이 찾아오고는 하는데,
이 여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북한정권에서 직접 안내하며 예를 갖추기 바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유송림(劉松林) 또는 유사제(劉思齊)라고도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첫째 며느리입니다.
비록 현재 중국정부의 요직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북한에서 이 여인에 대해 신경을 써야할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습니다.
[남편의 묘소를 참배하는 유송림] 왜냐하면 유송림의 남편인 마오안닝(毛岸榮)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여 그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정권을 획득하고 죽을 때까지 철권 통치자로 중국을 지배하였던
마오쩌둥의 첫째 아들은 사실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일부자료에는 자원해서 참전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로 그는 전쟁터로 나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
[마오안닝의 묘] 우리입장에서야 10월 25일 등장한 중공군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중공군의 참전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
이미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만약을 대비하여
18개 사단으로 구성된 25만의 동북 변방군을 만주일대에
배치해 두었던 상태였습니다 .
그리고 1950년 9월 중순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여러 외교 채널을 통해
6·25전쟁에 개입할 것을 공공연히 천명하고는 하였습니다.
[중공군의 참전 이면에는 커다란 갈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평가절하 하였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 수십 년간 지속되어온
대일본 전쟁 및 국공내전을 간신히 끝내고
국가를 건국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는 신생국이었으며
오히려 대만문제 , 만주문제, 티베트문제 등 산적한 문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사실 이런 문제는 중국이 6·25전쟁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던 난제들이었습니다.
[중국은 신생국이어서 국내에 산적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때 스탈린이 참전을 권유하는 전문을 보내왔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소련의 적극 개입으로 해석하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마오는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하면
스탈린이 적어도 공군을 참전하여 줄 것으로 예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 12일, 소련의 지원이 불가함을 통보 받은 마오는
만주에서 출병 준비를 하고 있던 펑떠화이 (彭德懷)를 소환해
참전 여부를 재검토하였습니다 .
[결국 마오쩌둥의 결단으로 참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린바오(林彪)나 까오강(高岡) 등 권력 실세 대부분이
파병유보를 주장했을 정도였고
상황도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오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대국과 국경을 마주할 수 없다는 고래의 원칙에 따라
파병을 최종 결정하였습니다 .
다시 말해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은 마오의 전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지고자
그의 장남을 참전하도록 조치했습니다 .
[마오쩌둥과 마오안잉] 마오안잉은 그의 어머니인 양카이훼이(楊開慧)가 국공내전 동안
국민당군에게 피살당한 후 겨우 목숨을 건져 세상을 전전하다가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중국으로 돌아와 1949년 유송림과 결혼하였는데,
불과 1년도 못되어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
마오안잉은 펑더화이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참전하여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갔습니다
[마오안잉과 유송림] 하지만 마오쩌둥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상당히 껄끄러웠던지
펑떠화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그의 참전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
그래서 최전선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하였던 마오안잉의 요구와 달리
후방의 사령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사령부가 미 공군의 맹폭을 받아
11월 25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마오쩌둥은 대의를 위해 유송림의 소원을 거절하였습니다]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마오쩌둥은 잠시 눈시울을 붉혔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고 간단히 말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유송림은 눈물로 남편의 시신만이라도 중국으로 가져 올 것을 마오쩌둥에게
부탁하였지만 해외 파병 중 전사한 중국군은 현지에 묻힌다는 전통을 깰 수 없고
수많은 중공군 전사자들과 형평이 맞지않는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연 때문에 유송림이 북한에 있는 마오안잉의 묘소를 찾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많지만 아쉽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찾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몇 회에 걸쳐 유엔군 최고지휘부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자의 아들들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그 역할을 다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
그들은 피아를 떠나 자국의 국민들에게 지도층으로 모범이 되어줄 만한
행동을 보여주었습니다 .
그런데 이처럼 6·25전쟁사에는 이러한 그들의 이야기는 있는데,
막상 이와 관련한 우리의 이야기는 찾기가 몹시 힘듭니다. 물론 당시 국군 최고지도부의 대부분이
불과 30대에 불과할 정도여서 이런 경우는 구조적으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군을 포함한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빛을 발한 예보다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경악할 만한 권력층 비리를 찾기 쉽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6·25전쟁에 참전한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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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6.25전쟁, 625전쟁, 6·25전쟁, 국군, 대만, 마오쩌둥, 만주,
북한, 소련, 유송림, 중국, 중국정부, 지도부, 티베트, 팽덕회
1952년 12월, 수십 기로 이루어진 전투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였습니다 .
비행기에서 내린 인물은 제2차 대전의 전쟁영웅이자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확정된 인물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1890~1969)였습니다.
그는 선거 기간 중 6·25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 위해 만일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그 즉시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고 이를 실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국군 수도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나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 본토 밖의 최전선을 시찰한 것이
이번이 사상 최초였을 만큼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 당시 오성장군으로 연합군최고사령관이었던 인물답게
저돌적으로 전선을 누비면서 일선부대를 방문하여
의견을 듣고 현황을 파악하였습니다 .
그런 그가 미 제8군 사령관이자 후배인 밴 플리트에게
놀라운 부탁을 하였습니다 .
[(좌에서 우) 밴 플리트 제8군사령관,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제8군 사령부를 찾아 밴 플리트 사령관으로부터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젠하워는 의례적인 질의와 응답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
“장군, 내 아들 존(John S. D. Eisenhower 1922~)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당시 아이젠하워의 외아들도 6·25전쟁에 참전 중이었습니다.
존 아이젠하워는 둘째 아들이었지만 첫째 아들인 다우드가 어려서 병사하여
외아들과 다름없었습니다 .
[제2차 대전 당시 아들 존과 함께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따라서 어쩌면 이 질문은 아버지가 아들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지극히 사적인 질문이었습니다 .
밴 플리트는
“존 소령은 미 제3사단 대대장으로 현재 중부전선의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라고 의례적인 대답을 하였는데 ,
다음에 이어진 아이젠하워의 부탁에 순간 경악하였습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빼주시겠습니까?”
이번 전쟁에서 외아들을 잃은 밴 플리트가 듣기에는
몹시 거북한 말이었습니다 .
[(좌에서 우로 ) 미 제3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클라크, 밴 플리트] 아이젠하워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장군,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나는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포로가 된다면 적들은 대통령의 아들을 놓고
미국과 흥정하려들 것입니다 .
이 때문에 만일 국민들이 국가의 자존심문제라 생각하여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고 나온다면 차후 작전에 애를 먹을 것입니다 .
그래서 나는 단지 대통령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후 작전에 심대한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최소한의 예방조치만 요청하는 것입니다 . ”
[제3사단을 방문하여 아들 존 소령과 면담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의 말을 들은 밴 플리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답하였습니다.
“각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존 아이젠하워는 후방의 정보처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고
이후 육군 준장을 거쳐 주벨기에 미 대사까지 부임하였습니다 . 아이젠하워의 부탁은 차기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 당선자라는
지위를 남용한 명령이 아니었으며
군 선배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청탁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아이젠하워는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야전사령관에게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버지가 아닌 차후 작전 차질을 우려한
대통령의 입장으로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당하게 합리적인 부탁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
또한 밴 플리트의 화답도 단지 차기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보신책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
[밴 플리트,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6·25전쟁 당시 유엔군 최고 지휘관과 그 아들이 동시에 참전하여
피를 흘린 경우는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휴전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Mark W. Clark 1896~1984) 대장과
그 아들 마크 빌 클라크 (Mark Bill Clark) 육군대위의 경우인데,
아들 빌은 금화지구전투에서 중대장으로 복무도중 부상을 당하여
전역하게 되었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
[휴전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 장군의 아들은
참전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6·25전쟁과 미군의 참전을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들지만
이처럼 고위 미군 장성이나 정치인의 자제들이
앞 다투어 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임에 틀림없습니다 .
총 142명의 장성의 아들들이 참전하여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들이 참전의사를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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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9 |
1950년 12월 25일, 미 제24사단의 일선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샘 워커 ( Sam S. Walker 1925~ ) 대위는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에게 호출 당하여 도쿄의 극동군사령부를 방문하였습니다.
야전의 말단 지휘관인 젊은 워커대위는 맥아더의 집무실에서
거물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샘이 경례를 하자 담담하면서도 서운한 표정의 맥아더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워커 대위 ! 부친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훌륭한 군인이었던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1889~1950) 대장(사후 추서)
의 죽음은 우리 미국에게 커다란 손실이다.
나는 귀관에게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까지 운구하도록 지시한다.”
[전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대장의 묘] 샘 워커는 6·25전쟁 초기에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방어전과 북진을 이끌던 월튼 워커 중장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이들 부자는 함께 6·25전쟁에 참전 중이었는데,
이틀 전 아버지가 전선을 시찰하던 도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을 하였습니다 .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맥아더는 아들 샘으로 하여금
아버지 월튼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구하도록 조치한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원수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샘 워커대위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대며 반대했습니다 .
[방한한 콜린스 미 합참의장에게 아들 샘 워커를 소개하는 월튼 워커 그는 자신처럼 군인이 된 아들을 상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각하! 저는 일선의 보병 중대장이고 지금 저희 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려운지 각하가 오히려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시점에 중대장 교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버님 시신의 운구는 영현담당자들이 잘 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당장 전선으로 돌아가서 부대를 지휘하겠습니다.”
[당시는 1.4후퇴 직전이라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1.4후퇴 직전으로 전황이 몹시 어려웠던 상황이었고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 받았을 만큼 저돌적이었던 샘에게
후방 전보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맥아더는 “이것은 명령이다.”라고 간단히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
맥아더는 그의 충실한 수하였던 월튼 워커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하였습니다.
때문에 혹시나 최전선에서 사상을 당할 수도 있던 그의 외아들을
안전한 본국으로 전보시킴과 동시에 유해를 직접 운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었습니다 . 어쩌면 이것은 유엔군사령관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자가
이들 부자에게 베풀 수 있었던 최고의 배려였습니다.
[맥아더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사실 그것은 배려였습니다]
(평양에서 맥아더를 영접하는 월튼 워커) 하지만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던 샘은
전선에 계속 남기를 자원하였습니다 .
아마도 이런 성격은 강골이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처럼 샘 워커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워싱턴의 육군성에 근무하게 되었지만
이후 베트남전쟁 등을 거치며 1977년에 미 육군 최연소 대장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미군 역사상 부자가
대장에 오른 두 차례 밖에 없는 희귀한 예입니다 .
[미 육군대장 당시의 샘 워커] 이처럼 6.25전쟁에서 워커부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전형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거대했던 6.25전쟁에서 워커부자처럼 공과 사를 구별하며
맡은바 책임을 다하였던 다른 예는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월튼 워커와 리지웨이에 이어 미 제8군 사령관이 되었던 인물은
밴 플리트 (James A. Van Fleet 1892~1992) 였는데,
당시에 그의 외아들인 밴 플리트 2 세(James Van Fleet Jr.) 는
미 공군의 중위로 역시 6.25 전쟁에 참전 중이었습니다.
[밴 플리트 미 제8군 사령관] 1952년 4월 2일, 밴 플리트 2세는 B-26 중형 폭격기를 조종하여
평양인근의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했다가 실종되었습니다 .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되었는데 사안이 사안인지라
미 제5공군 사령관이었던 에베레스트 장군이 직접 밴 플리트에게
사고와 수색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
그런데 밴 플리트는 묵묵히 보고를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습니다 .
“밴 플프리트 2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너무 위험하고 무모하다.”
[실종된 벤 플리트 2세] 아버지가 외아들의 구출작전을 너무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었습니다 .
혼자 남아 눈물을 흘렸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써
단호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
보기 힘든 그리고 상당히 어렵지만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밴 플리트 장군은 이처럼 보여주었습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과 고급공무원 위정자들에게 질문한다.
귀하들 자신들도1/3은 병력 미필자들이며 귀하의 아들 들도
거의 병력 미필자들인가 하면 나라 통수권 자가 군대는
썩으러 간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통수권자와.
국회의원들,고급공무원 위정자들 모두는 6.25참전 노병들
철저하게 무시와 멸시와 천대 하고있으며 골치거리존재
로 치부하고있다.
귀하들 높은 지위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으로 수백평,수천평
대지 위에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며 호의 호식에다 식구대로
고급 승용차를 굴리면서 억깨에 힘주고 그들먹거리며 지내
는 그대들 6.25참전 노병들이 모두 전사또는 부상당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 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밤.낫 수많은 전면戰 국지戰에 참전 할때마다 우리노병들은
후방에 계시는 부모형제와 조국대한민국을위해 먼저간 전우들
뒤를 따라 이한몸 조국전선에 바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戰爭
에 임하 다보니 천우신조로 살아남아 오늘날 그대들의 귀찬
은 존재로 전락 해있다.
다시말하거니와 대한민국 이라는 나라가 지국상에 존재한것은
죽지 않고 부상당하지않은 6.25참전 老兵들이 있었기에 가능
하다는 사실 깊이 인식하고 노병들 살날 길어야 5년밖에 남지
않은 生을 다소나마 편안히 살다 갈수있게
배려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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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이야기
01. 부자 옆에 줄을 서라. 산삼 밭에 가야 산삼을 캘 수 있다. 02. 부자처럼 생각하고 부자처럼 행동하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되어있다. 03. 항상 기뻐하라. 그래야 기뻐할 일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04. 남의 잘됨을 축복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05. 써야할 곳, 안 써도 좋을 곳을 분간하라.
판단이 흐리면 낭패가 따른다.
06. 자꾸 막히는 것은 우선멈춤 신호다. 멈춘 다음 정비하고 출발하라. 07. 힘들어도 웃어라. 절대자도 웃는 사람을 좋아 한다. 08. 들어온 떡만 먹으려 말라. 떡이 없으면 나가서 떡을 만들라. 09. 기도하고 행동하라. 기도와 행동은 앞바퀴와 뒷바퀴다. 10. 자신의 영혼을 위해 투자하라. 투명한 영혼은 천년 앞을 내다본다.
11.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하라. 마음이 무거우면 세상이 무겁다. 12.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돈 앞에서 진실 하라. 13. 씨 돈은 쓰지 말고 아껴둬라. 씨 돈은 새끼를 치는 종자돈이다. 14. 샘물은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아난다. 아낌없이 베풀어라. 15. 헌 돈은 새 돈으로 바꿔 사용하라. 새 돈은 충성심을 보여준다.
16. 적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라. 부정적인 언어는 복 나가는 언어다. 17. 깨진 독에 물 붓지 말라. 새는 구멍을 막은 다음 물을 부어라. 18. 요행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요행은 불행의 안내자다. 19. 검약에 앞장서라. 약 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검약이다. 20. 자신감을 높여라. 기가 살아야 운이 산다.
21. 장사꾼이 되지 말라. 경영자가 되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22. 서두르지 말라. 급히 먹은 밥에 체하게 마련이다. 23.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24.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 말라. 그가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25. 본전 생각을 하지 말라. 손해가 이익을 끌고 온다.
26. 돈을 내 맘대로 쓰지 말라. 돈에게 물어보고 사용하라. 27. 느낌을 소중히 하라. 느낌은 신의 목소리다. 28. 돈을 애인처럼 사랑하라. 사랑은 기적을 보여준다. 29. 기회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간다. 순발력을 키워라. 30. 말이 씨앗이다. 좋은 종자를 골라서 심어라.
31. 작은 것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 무엇이 큰 것인가를 판단하라. 32. 돌다리만 두드리지 말라. 그 사이에 남들은 결승점에 가 있다. 33. 돈의 노예로 살지 말라. 돈의 주인으로 기쁘게 살아가라. 34.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 희망만이 희망을 싹틔운다. 35. 기쁨 넘치는 노래를 불러라.
그 소리를 듣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든다.
36. 지갑은 돈이 사는 아파트다. 나의 돈을 좋은 아파트에 입주시켜라. 37. 불경기에도 돈은 살아서 숨쉰다. 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38. 값진 곳에 돈을 써라. 돈도 신이 나면 떼지어 몰려온다. 39. 돈 벌려고 애쓰지 말라. 돈을 사랑하기 위해 애를 써라. 40. 인색하지 말라. 인색한 사람에게는 돈도 야박하게 대한다.
41. 더운 밥 찬밥 가리지 말라. 뱃속에 들어가면 찬밥도 더운 밥 된다. 42. 좋은 만남이 좋은 운을 만든다. 좋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43. 효도하고 또 효도하라. 그래야 하늘과 조상이 협조한다. 44. 돈을 편하게 하라. 아무데나 구겨 넣으면 돈도 비명을 지른다. 45. 느낌을 소중히 하라. 느낌은 하늘의 목소리다.
46. 한발만 앞서라. 모든 승부는 한 발자욱 차이다. 47. 돈은 보물이다. 조심조심 다루어라. 48. 있을 때는 겸손하라. 그러나 없을 때는 당당하라. 49. 부지런 하라. 부지런은 절반의 복을 보장한다. 50. 돈은 돈을 좋아한다. 생기는 즉시 은행에 입금시켜라.
51. 돈은 잠자는 사이에도 쉬지 않고 새끼 친다. 기뻐하라. 52.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작은 돈에도 감사하라. 53. 돈을 값진 곳에 써라. 돈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안다. 54. 돈에 낙서하지 말라.
당신의 얼굴에 문신하면 어떻겠는가를 생각하라. 55. 찢어진 돈은 때워서 사용하라.
돈도 치료해 준 사람에게 감사한다.
56. 여자와 개와 돈은 같다. 쫓아가면 도망가고 기다리면 쫓아온다. 57. 돈과 대화를 나눠라. 돈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58. 안달하지 말라. 돈은 안달하는 사람을 증오한다. 59.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을 못 벗는다. 마음에 풍요를 심어라. 60. 돈이 가는 길이 따로 있다. 그 길목을 지키며 미소를 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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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보관용)
1. 스트레스 해소 에는 토란줄기가 그만입니다
2. 신장 이 약한 분은 달팽이를 달여서 마시세요
3. 소변 보기 가 어려 울 땐 가오리가 정말 좋아요
4. 피로 할 때 인삼대신 잔대(일명백삼)를 드셔 보세요
5. 고혈압 이 걱정일 때 뽕나무차를 마시세요
6. 기억력 증진 에 오미자가 좋습니다
7. 눈이 침침 하면 결명자차를 드세요 >
8. 골다공증 예방약 포도는 껍질까지 잡수세요.
9. 성인병 예방 에 해바라기씨가 그만입니다
10. 위장,비장 기능 이 약할 때 밤을 드세요
11. 콜레스테롤 이 걱정되는 분 녹차 요구르트 를 드세요
12. 마음이 불안하고 장이 나쁠 때 사과파이를 만들어 드세요
13. 감기에는 무,꿀즙은 특효약 이랍니다
14. 우리 몸의 각종 신진대사를 돕는 다시마를 많이 드세요
15. 천식 에 비파차 만 한게 없습니다
16. 숙취엔 감식초를 드세요
17. 동맥경화 예방엔 귤이 좋습니다
18. 잇몸 이 약할 땐 숙지황을 드세요
19. 목이 뻣뻣 할 땐 모과 를 이용해 보세요
20. 뱃속이 좋지 않은 분은 도토리묵을 드세요
21. 흥분성 신경쇠약에 연꽃씨가 잘 듣습니다
22. 간이 약할 때 모시조개도 좋습니다
23. 당뇨병에 식초를 권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24. 당뇨병엔 두릅나물이 좋습니다
25. 당뇨엔 가시오 갈피 를 드세요
26. 꿈이 많고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차좁쌀을 달여 드세요
27. 요로결석을 풀어주는 데는 조기가 좋답니다
28. 위,십이지장궤양 에는 율무차도 좋아요
29. 술 마신 다음날은 부추 를 드세요
30. 기관지에는 영지가 좋습니다
31. 가래가 끓으면 살구씨 기름 을 드세요
32. 여름철 감기,인삼 ,오미자차 를 드세요
33. 식초를 먹으면 무조건 좋습니다
34. 여드름이 많이나면 삼백초차를 드셔보세요
35. 소갈증엔 다래가 좋습니다
36. 옻닭이 암에 좋다는 거 아세요?
37. 관절염엔 솔잎을 이용해 보세요
38. 치질엔 모란꽃 끓인 물로 좌욕하세요
39. 간경화엔 매실조청 이 그만 입니다
40. 위궤양엔 감초를 달여 드세요
41. 양파는 동맥경화나 고혈압에도 좋습니다
42. 두통 에는 들국화차를 마시세요
43. 초기 위궤양엔 연뿌리 경단이 좋습니다
44. 오십견일때는 엄나무껍질을 끓여서 차처럼 마시세요
45. 요통 에는 부추술과 술 목욕이 효과 있어요
46. 신경불안증 에는 멸치와 백합 달인 물이 좋아요
47. 어지럼증이 심할 땐 오리고기가 좋습니다
48. 추울 땐 쑥이 좋으니 자주 드세요
49. 신경피로,전신권태에 얼룩조릿대를 써 보세요
50. 고혈압에는 무즙,감즙이 좋습니다
51. 장마철 피부병 에는 녹두가 최고죠
52. 기침이 심하면 머위꽃대를 달여 드세요
53. 간기능이상 에는 동물의 간이 좋습니다
54. 계속되는 요통에는 돼지 콩팥 을 이용하세요
55. 잔기침이 심할 땐 생강차에 엿을 녹여 드세요
56. 편도선염 엔 새우젓 태운 것을 이용해 보세요
57. 수험생들에게는 생선류와 연근즙이 좋아요
58. 속눈썹이 눈동자를 찌르면 들국화 다린 물을 드세요
59. 산성체질을 개선하려면 얼룩 조릿대를 끓여 드세요
60. 잠 많은 수험생에게 대추씨를 날로 먹이세요
61. 목이 아플 때 는 돼지기름을 조려 꿀을 섞어 드세요
62. 잇몸에 염증이 생기면 소금이나 산초를 식초에 달여
마시세요
63. 식욕이 없을 땐 포도주 한잔 어떠세요?
64. 부기를 가라앉히는 데는 팥즙에 꿀을 섞어 드세요
65. 노인성 변비 에는 꿀1숱가락에 파3뿌리를 넣고 달여
마시세요
66. 중풍예방에는 채소즙이 좋습니다
67. 웃음은 만병 통치 약입니다
- 펌-
(옮겨온 글)
무심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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