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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 1936년~1939년)
상황이 이랬다 보니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으로 큰 문제를 겪었다. 무기를 구하기 힘들어 여기저기서 구한 규격이 제각각인 소총과 기관총, 기관단총, 권총들을 쓰다 보니 총에 맞는 탄환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안 맞는 탄환을 장전했다가 총기가 고장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거기에 소련이 제공한 무기들은 전쟁 초반만 해도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당시 노획한 다국적의 구식 무기들이나 러시아 제국 시절에 생산/운용하던 무기들이 다수였는지라 안 그래도 복잡한 보급체계를 몇 배는 더 꼬아 놓았다. 게다가 소련은 이런 재고 무기를 전부 소진하고 나서야 DP28 경기관총이나 PPD 기관단총 등 자국산 최신 무기를 원조하지만 이마저도 전부 무상지원이 아닌 유상지원이었던 데다가 국민파를 지원하던 파시스트 국가들의 견제에 최신 무기들이 제대로 하역되지도 못하면서 무기 부족 현상은 거의 항상 공화파를 괴롭혔다. 잡다한 구식 무기를 최신 무기로 대체하고 보급을 일원화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무기뿐 아니라 식량을 비롯한 다른 물자에서도 공화군의 보급 문제는 아주 심각했다. 국민파 편에 선 이탈리아 왕국군이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공화파 항구를 해상봉쇄했고, 귀중한 소련산 군수 물자들이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항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잠수함과 군함들 사이에 껴서 지중해를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일도 잦았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타 유럽국가들이 군 보급용으로 잘 썼던 철도교통은 노조들이 초반에 장악하는데 성공하고도 분기점들이 다 박살난 상태라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해군은 내전 초기부터 거의 전부가 공화파 정부를 지지했다. 해군에서도 육군처럼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수병들이 장교를 사살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선에 사병만 있고 장교가 없다면 전투는커녕 항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당연할뿐더러 무엇보다 지휘체계가 전무하므로 이 시점에서 스페인 해군은 그냥 무늬만 해군이 되었다. 결국 독일과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국민파가 공화국 해군을 제압하여 도리어 공화정부를 봉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군력의 부족으로 완전 봉쇄까지는 하지 못해서 소련이 보낸 무기들을 실은 선박들이 간간이 지중해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다. 이 해상 수송작전을 지휘한 이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 러시아 항공모함에 붙은 그 이름이 맞다.
1936년 스페인은 에스파냐급 드레드노트급 전함 2척, 카나리아스급 중순양함 2척을 비롯하여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9척, 수상기모함 1척, 잠수함 14척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국민파 측에 합류한 함선은 전함 1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척에 불과했다. 해군 항공대도 거의 공화파로 남았다. 국민파에 합류한 함선들은 개전 직후 페롤 해군 공창이 국민진영에게 점령되면서 도크에 있던 중순양함 카나리아스와 발레아레스같이 통째로 국민진영에 속하게 된 케이스이다. 전함 알폰소 13세는 국민파, 하이메 1세는 공화파의 기함이 되어 서로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상술했다시피 장교진의 공백, 독일과 이탈리아의 빠른 개입과 제공권 장악으로 전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일부 함선은 물자를 싣고 오는 선박 호송을 위해, 일부는 바스크를 비롯한 북부지역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차출되어야 했다.
공군도 거의 공화파 측에 남았다. 주로 뉴폴 NiD 52나 브레게 19 같은 항공기가 주력이었고 전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제대로 된 공중전은 독일, 이탈리아의 He 51, Ar 68, CR.32와 소련제 I-15, I-16, 투폴레프 SB 폭격기가 맞붙는 1936년 11월 경부터 시작되었다. 여하간 공화파는 모을 수 있는 항공기는 다 모으려 했는데 소련제 항공기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그루먼 FF,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S-31, 프랑스로부터 D.371, D.500 등을 구입했다.
국민파의 상황
공화파의 혼란한 상황만 본다면 상대적으로 일치단결된 국민군을 운 좋게 지휘한 행운아 프랑코란 이미지가 떠오를 수 있지만 국민파 역시 내부 단결이 그리 잘 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되려 국민파를 형성하는 왕당파, 카를리스타, 자본가, 팔랑헤, 공화주의 우파는 모두가 이념적으로 상반되는 위치에 있어서 공화파보다 일찍 내분이 터질 뻔했으나 프랑코의 수완에 의해 다 찍어눌린 것이다. 물론 프랑코의 경쟁자 대부분이 비행기 사고로 죽어버리는 등 운도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
구체적으로 팔랑헤당은 에른스트 룀과 아돌프 히틀러가 서로 대립했던 것처럼 이념적으로 부유층을 적대하는 파 그렇지 않은 파가 병존했고 또한 가톨릭 색채가 짙고 지방자치를 선호했던 카를리스타와 반목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당파도 부르봉 직계를 지지하는 만큼 부르봉 방계를 지지하는 카를리스타와 공존이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국민파의 지도부도 곤살로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라몬 프랑코, 미겔 카바네야스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헌정체제 자체는 공화정을 선호했던 반면 카를리스타와 알폰소 13세파 왕당파들은 왕정 복귀를 원하는 등 내부적 반목의 씨앗은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코가 국민파의 내부적 반목 요인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 체제를 굳힐 수 있었던 건 개인적 정치적 수완도 있었지만 운이 굉장히 컸다. 팔랑헤의 경우 개전과 동시에 감옥에 있었던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공화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고 기존의 자본가 정당인 CEDA의 당수이자 자본가 세력 자체를 대표했던 힐로블레스는 내전 발발 이전 정치 투쟁에서 이미 지도력이 큰 타격을 입은 후 해외로 도피한 상태였다. 퇴위한 알폰소 13세를 포함한 직계 왕족들과 카를로스파 왕위 사칭자였던 하비에르는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군부에 의해 귀국이 차단되었고 범 보수 왕당파의 정치적 당수이며 우익 내에서 굉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호세 칼보 소텔로 의원은 내전 발발 직전 좌익 테러로 인해 암살당했다. 군부 내에서는 원래 국민파의 지도자였던 호세 산후르호는 내전 발발 3일만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고 프랑코의 경쟁자들인 마누엘 고데드는 바르셀로나 쿠데타가 실패하자 공화파 민병대에게 체포된 후 총살, 장군인 주제에 엄청난 뻘짓을 벌여 전쟁 수행 능력이 엉망이라고 낙인찍힌 지 오래였던 에밀리오 몰라 또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였다. 케이포 데 야노는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일대를 장악하고 전쟁 끝날 때까지 동네 왕초 노릇하며 프랑코의 눈에 자주 거슬렸지만 카우디요의 권좌를 위협할 그릇은 못 되었고 결국 전쟁 후 실권을 몽땅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이 외에 프랑코의 소싯적 상관인 호세 미얀아스트라이나 형 니콜라스 프랑코, 동서인 라몬 세라노 수녜르 같은 이들의 도움도 컸다.
왠지 굉장히 절묘한 타이밍에 비행기들이 많이 추락한 것 같긴 한데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군사기술 발달사의 관점에선 저런 우익 진영의 수장들이 직접 몸으로 숭고한 시범을 보이며 대규모 병력의 항공 수송이란 분야에서 초기 발판을 닦은 역사적 경험이다. 예나 지금이나 너무도 당연하게 프랑코가 수작질 부린 거란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당시 항공 수송 기술 자체가 이만큼 초기적이고 불안정했던 만큼 타이밍과 대상이 굉장히 미묘하긴 해도 새로 발견되는 증거가 없는 한 딱히 근거는 없는 소리다. 때문에 당시 거의 독점적인 여객 수단은 열차였고 비행기는 이런 내전 상황만큼 정말 어지간히 시급하고 기밀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에나 활용되었다. 사실 국민파 지도자들이 대규모 군사적 공중수송이란 새로운 군사 기술 분야의 의도하지 않은 선구자(...)가 된 것도 정부 몰래 최대한 빨리, 은밀하게, 식민지에서 본토로 병력 수송을 해야 했던 쿠데타 상황이란 특수성 때문에 내린 불가피한 결정에 가까웠다.
힐로블레스, 케이포 데 야노 등의 인물들은 능력이나 카리스마 면에서 애초에 프랑코의 상대가 안 되었고, 각종 왕당파의 수장인 왕족들이야 외국에 망명해 있었지만 우익 군부의 수장이었던 호세 산후르호, 스페인의 자생적 파시스트 팔랑헤의 지도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범보수파의 정치적 수뇌였던 칼보 소텔로 등은 짬이나 연륜이나 카리스마나 능력이나 프랑코에 의해 하등 밀릴 게 없는 인간들이었다. 이렇게 정적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국민파 내부 균열 또한 대패질이 되자 프랑코는 팔랑헤식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도 아니고, 왕당파나 카를리스타식의 봉건적 신정 정치도 아닌 자신만의 권위주의 독재를 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데 리베라의 후계자 마누엘 에디야 등이 팔랑헤의 혁명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려 하자 마누엘 에디야도 숙청해 버렸다. 하지만 팔랑헤는 배신당했다고 보기에 애매한 게 호세 안토니오 사후 팔랑헤당 후계자가 된 마누엘 에디야가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같은 팔랑헤당 당원들까지 공격하고 프랑코에게 위협을 가하자 프랑코가 숙청한 것이고 우익들을 통합할 때도 팔랑헤당 중심으로 통합한데다 프랑코 정권 안정화 이후에도 한동안은 완전히 국민생디칼리슴적 파시즘 성향을 버리지는 않았다. 44년부터 연합군이 이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연합군에게 잘 보이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경제도 번영하고 외국물도 먹게되면서 슬슬 파시스트 물이 빠지게 되었다.
왕당파의 경우 프랑코의 후계자는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되었기 때문에 왕당파는 배신당하지는 않았다고 보지만 반대로 왕당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배격한 채 프랑스 혁명 이전 신정적 봉건 자치사회로의 회귀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비전이 있었던 카를리스타는 배신당한 게 맞다. 공화파와 국민파의 내부적 단결에서 핵심적인 차이는 그냥 프랑코가 군부와 아프리카 군단 내에 독자적인 세력기반이 있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도 정치적 라이벌들을 상대로 간을 보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협상할 줄도 알고 경우에 따라선 통수질을 치는 센스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 부각이 덜 돼서 그렇지 내전기 동안이나 프랑코 정권 초기나, 후기에나, 프랑코 사후에나 이런 저런 우파 진영 내부 폭력 사태도 꽤 있었다.
사실 우파도 내전이란 비상 응급상태에 일시적으로 뭉쳤던 게 하나의 정권으로 변하긴 했지만 그 시작은 팔랑헤, 카를리스타, 알폰소파 왕당파, 부르주아 민간 정치인, 군부, 헌병군 전부 다 반공주의, 가톨릭을 제외하면 구심점이 딱히 없고, 독자적인 기반과 내부 풀이 있는 소집단들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건 좌파 공화진영하고 큰 구조적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코의 외국 후원 세력들도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뭐 사실상 후원 세력인 영국과 독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바티칸도 사실 독일하고는 척지는 사이였다. 그 영향을 받아 카를리스타는 당시 스페인에서 청색사단에 대해 참여를 거부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오직 '프랑코 개인'에게만 지원하겠다고 함으로써 프랑코에게 힘을 실어 주기도 했으며 가톨릭 교회 역시 도움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국민진영의 각 정파 중 반공 외에 통일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주제 중 하나가 친가톨릭이었기 때문에 이념적 통일성을 다지는 데 유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실 가톨릭 교회는 명분, 도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국민진영이 그나마 해외에 명분적인 면에서 어필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요소이기도 했다. 본질적인 폭력성이나 학살의 빈도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가톨릭 교회 사제들은 애초에 구체적인 직업적 네트워크로 연계가 탄탄한 직종인 만큼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이들을 통한 전 세계 가톨릭계를 향한 언론전으로 특히 가톨릭 노동자 계층이 막 중요한 유권자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영미권 나라들의 외교적 영향력을 통해 공화파를 고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요약하자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잘 묘사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1930년대 파시즘의 세계적 연승을 두려워하던 전 세계의 좌파와 자유주의자, 공화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은 1936년 7월 쿠데타를 막음으로써 만주에서 독일, 에티오피아에서 루마니아까지 국제 파시즘 세력의 연승 행렬을 막은 것처럼 보였던 민주 스페인에 열광적인 심적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들의 지지는 전쟁에서 이기는 데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정신적, 문화적 연대 정도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개인, 잘해봐야 정당 차원에서 직접 가서 싸우다가 죽는 이상의 파급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로 이때까지만 해도 열강 정부들은 파시스트가 정권을 잡는 사태보다는 남유럽 지중해의 소련이 탄생하고 언어, 문화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남미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였다. 결국 열강 정부들은 쿠데타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국내 다른 세력들이 이들을 지지하는 걸 방조함으로써 프랑코와 파시스트들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상술한 것처럼 전쟁 초기 공화군과 국민군은 어느 한 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공화군은 수적 우위와 혁명에 대한 열기라는 점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당시 스페인군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돌아가는 전투 부대였던 아프리카 군단이 국가주의파 측에 있어 군사적으로는 박빙 상태에 있었다. 쌍방에 제공된 무기들의 경우 다른 건 제쳐두고 대충만 따지면 항공기나 조종사들 질은 국민진영이 훨씬 나았고 전차는 공화진영이 훨씬 나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1936년 가을, 국민군의 진격이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막혀 버리고 원래는 일시적 '쿠데타'였어야 할 충돌이 장기적인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후안 야구에는 지금 상황에서 공화군이 역습을 가하면 바로 털려버린다고 심각한 걱정을 표했고 공화파 대통령 아사냐는 반대로 "주요 공업 지대, 대도시는 다 우리 편에 있는데 저들(국민파)이 어찌 전쟁을 지속한단 말인가?"하며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국민파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그리고 이웃나라인 포르투갈 제2공화국의 노골적 지원을 받고 있던 데 반해 공화파는 외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분명 공화파가 합법적으로 선거를 통해 당선된 합법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주국가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은커녕 방해만 받았다. 결국, 스페인 내전의 운명은 결국 스페인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외교전 사이에서 결정되었다.
공화파에 대한 지원
공화파 정부는 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중립정책을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심지어 돈 주고 사겠다는 무기조차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판매를 거부해 버렸다. 주요 열강 중에서 소련을 제외한다면 일본 제국(?)이 주퇴복좌기도 없는 구형 야포인 31년식 속사포를 내 준 적이 있긴 하다. 중견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폴란드가 자국에서 노후화되어가고 있던 르노 FT-17 전차 중고품 등을 판매해 줬으며 폴란드의 이웃나라인 체코슬로바키아와 북유럽 국가 핀란드 역시 Vz.26 경기관총과 KP/-31 기관단총 등 자국산 총기들을 프랑코의 국민파와 내전 중이던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군에게 판매했다.
레옹 블룸 총재 아래 같은 연립 좌파 정권을 이루고 있었던 프랑스는 내전 초기까지만 해도 공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물자도 보내 줬으나 영국 보수당 내각의 적극적인 반대와 자국 내의 극심한 좌우 갈등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프랑스 내전으로 이어진다'는 불안으로 결국 지원을 끊고 중립 태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레옹 블룸 내각은 적어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국민파를 지원하는 것만이라도 막으려고 영-불-독-이-미국으로 이루어진 스페인 사태 비간섭 위원회라는 국제기구를 만들었다. 물론 독일과 이탈리아는 그딴 거 무시하고 계속 지원을 해 줬고 영국의 보수당 정권이 이를 암묵적으로 방관하여 결국 국제적 비간섭 정책은 국민파에게 유리했다.
영국은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탠리 볼드윈 총리의 집권 보수당이 파시즘보다 공산주의를 더 경계했으므로 공화국을 돕기는커녕 프랑코를 유배지인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태워간 비행기를 제공해 주는 등 되려 은근히 국민파를 도왔다. 지브롤터 주둔군 사령관은 국민군이 이탈리아나 독일과 교신할 수 있도록 통신기까지 빌려주었다.
미국도 이때만 해도 고립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고 여론 자체는 공화정부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미국 가톨릭계가 국민파를 지지함에 따라 가톨릭 표를 잃을까 봐 우려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금수조치를 유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결론적으로 중립을 유지했으며 결국 1937년에는 교전 중인 어떤 국가에게도 무기를 판매하지 못한다는 중립법을 통과시켰다. 이 와중에도 헨리 포드 등의 기업가들은 프랑코에게 거리낌 없이 헌금을 보냈고 텍스코 같은 석유 재벌들은 돈을 받지 않고 석유를 외상으로 보내 줬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여단에 투신한 사람들도 꽤 있었고, 이들은 전후 매카시즘 시절이 되자 반미국적행위 위원회에 한 번씩 붙들려 갔다. 단 루스벨트와 일부 집권 민주당 인사들은 공화국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불법적으로 일부 지원을 해주기는 했다. 특히 나치 독일을 경계한 루스벨트는 프랑코의 승리가 라틴아메리카에 친독 파시즘이 퍼지는 것을 초래할까봐 두려워했다.
대부분의 군사원조는 소련이 제공했다. 대량의 소련산 군장비, 석유를 포함한 물자 및 전투요원, 군사 고문단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는 무상지원이 아니어서 이들을 보내주는 대신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세계 4위의 금 보유국이었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막대한 양의 금괴(700톤, 당시 가치로 약 3억 5,000만 달러)를 그 대가로 받았다. 그리고 전세가 기울어지고 공화파가 가진 금괴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지원을 끊었다. 그나마 한 지원이 있다면 스페인 공화파들의 부모 잃은 자식들을 소련에 데려가서 먹여주고 재워준 정도. 게다가 위에 서술한 지원을 대가로 한 공화국 내부의 정치적 농간질도 심각하게 부려서 도와준 만큼 해악도 심각하게 끼쳤다.
당시 소련은 스페인 내전을 국제 파시즘 세력의 소련을 겨냥한 세계대전의 전조로 해석했고, 소련 내부에서 스페인 내전을 재현하기 위한 반혁명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다는 편집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소련의 국가안정성을 제고하는데 급급했지 후하게 스페인에게 퍼 줄 처지가 아니었다. 니콜라이 예조프가 내무인민위원장으로 대숙청을 지휘하여 모스크바 재판이라는 처형쑈를 연출하던 것이 이 시점이었고 적어도 1938년 겨울에 라브렌티 베리야로 내무인민위원장이 교체되기 전까지 스탈린은 내부청소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이 되면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먹고 폴란드를 회치기 직전이었으므로 역시나 스페인 따위를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으며 이미 1937년에 발생한 중일전쟁으로 독일뿐만 아니라 일본의 소련 침공까지 걱정해야 할 판이었고 소련 침공할 일이 없는 프랑코 따위보다야 일본 견제를 위해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지원을 더 해 줘야 했다. 낙후되었던 소련이 전간기 시점에는 이미 스탈린의 급진적인 공업화 노력으로 군수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수출할 수 있는 국가로 거듭난 건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전쟁에 둘 다 관여한다면 자연스럽게 역량이 분산될 수밖엔 없었다. 중일전쟁의 폭발은 공화파 측에는 추가로 더 나쁜 영향력을 끼쳤는데 구미 사회 언론의 관심이 스페인 내전보다는 새로 터진 중일전쟁 취재에 더 쏠리면서 이전까지 받던 온정적 관심조차 점차 희미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