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견훤왕릉 가는 길
충무공은 노성을 일찍 출발해 낮에 은진, 저녁에 여산에 도착했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二十一日辛巳。晴。早發到恩院。則金瀷偶然到來云。任達英以貿穀事。到思津浦云。其形跡極詭且譎。夕宿于礪山官奴家。中夜獨坐。悲慟何堪。(이십일일신사。청。조발도은원。즉김익우연도래운。임달영이무곡사。도사진포운。기형적극궤차휼。석숙우려산관노가。중야독좌。비통하감。)
4월21일(신사 6월5일) 일찍 떠나 은원(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러 은진포로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충무공이 하루에 간 노성에서 여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35킬로미터이다. 보통 사람이 걸어서 하루에 가기에는 힘든 거리이다. 충무공은 많은 거리를 말 타고 갔을 것이다. 현대의 말은 자동차다. 그렇다고 전 구간을 자동차 타고 간다면 이것을 순례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되도록 걸어서 간다. 충무공은 양반이지만 죄인이므로 좋은 방에서 잘 수 없었다. 천민의 집에서 자야했다. 반면에 현대의 순례자들은 노비의 집이 아닌 좋은 모텔에서 잔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는 알베르게라고 하는 저렴한 숙소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숙소가 있으면 좋겠다.
5일 아침 6시에 기상한 순례자들은 모텔 옆의 식당에서 찌개백반을 시켰다.
“권 대사님, 오늘은 멋진 옷을 입으셨습니다.”
“어제 논산 시내에서 구입하신 거예요.”
나 여사가 권 대사 대신 대답했다. 어제 낮, 권 대사는 면으로 된 상의가 흠뻑 젖었기에 눈에 띄는 K2매장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히 대처했다.
“그 옷 입으면 땀이 덜 찰 겁니다.”
“자꾸만 내 옷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그 의미를 잘 알겠소.”
“착복식 하라는 얘기 아닙니다. 하하하.”
권 대사는 순례자들에게 자기의 저서를 한권씩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오랑은 점심을 위해 주인에게 김밥을 말아 달라고 했다. 시골에서는 식당을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점심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순례자들은 논산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출발점인 은진면 사무소까지 갔다. 그들은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을 기록했다. 8시가 좀 지나서 연서리의 시골길을 걷기 시작했다. 곧게 뻗은 방축천 둑길을 1.5km쯤 걸으면 1번 국도와 만난다. 1시간 반쯤 지나서 주유소에 도착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여기서 견훤왕릉까지 걸어서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십리가 안 되니 한 시간 안 걸립니다.”
“저희는 여산 가는 순례자인데 그 방향으로 농협 있지요?”
“연무농협 황화지점 있습니다.”
“여기 환자가 한분 있어서 농협까지 곧장 가게 택시 좀 불러 주세요.”
금오랑은 권 대사가 어지러움을 느끼므로 견훤왕릉 가는 것을 말렸다. 견훤왕릉 가는 도중에 서재필 박사 본가터가 있다. 그리고 500미터 쯤 가면에 기차 길을 건넌다.
“이 기차 길이 연무대역에서 훈련소로 통하는 길이야. 보급물자를 영내까지 운반하기 위한 지선이지.”
검암은 무심히 지나칠 기차 길도 해설해 주었다.
“그래, 저기로 가면 추억의 논산훈련소로구나!”
더위가 항창이나 가끔 비를 뿌려주어 땡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견훤왕릉은 낮은 산 위에 있다.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오르니 목백일홍(배롱나무)이 붉게 피어 있는 사이로 왕릉이 보였다. 먼저 온 관람객이 몇 명 있었다. 순례자들은 수도가에서 몸을 식히면서 충분히 쉬었다.
7. 벌판에서 만난 소나기
“저 벌판에 마산천이 흐릅니다. 저기 보이는 길로 가면 다리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다리를 건너 황화천변을 걸을 겁니다.”
금오랑이 왕릉에서 내려다보면서 벌판을 가르켰다.
“구름이 있어 뜨겁지 않아 다행이야.”
마산천변을 걸으며 이런 이야기를 한지 1분도 안되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례자들은 뛰어서 비 피할 곳을 찾았다. 앞선 순례자들은 농공단지의 창고 건물로 들어갔고 뒤처진 순례자들은 벌판의 물건 쌓아 놓은 곳으로 갔다. 옆에서 들이치는 비라도 피하기 위함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이야기가 생각났다.
“물방아간에서의 사랑은 그래도 있는 사람들 이야기야. 없는 놈들은 상여집에서 사랑을 나눴데.”
옛날에는 마을이 사용하는 상여를 묘지 근처에 조그만 집을 지어 보관했는데 이를 상여집이라 했다. 비는 10분 만에 그쳤다. 그야말로 소나기다. 농공단지 창고건물은 지붕이 높고 넓었다. 한 남자와 세 여자가 배추 씨를 묘판에 넣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방 20센티미터 쯤 되는 묘판에 한 변이 2센티미터쯤 되는 정방형 플라스틱용기가 100개쯤 들어 있는데 한 구멍에 씨 한 개씩만 넣어 김장 배추 묘판을 만드는 것이다.
“저 사람들은 4인 1조가 되어 농사일을 돕는 거야. 밭 가지고 있는 농부는 저런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고용하는 것이지.”
검암은 별 것을 다 해설한다. 잦아진 비를 맞으며 황화천 둑방의 굽은 길을 걷는데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가 순례자들을 빗겨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만 바퀴가 갓길 풀숲에 빠졌다. 할아버지가 손잡이 엑셀을 돌려 엔진 소리를 높이면서 나오려고 했으나 헛바퀴만 돌았다. 할아버지는 왼발을 땅에 딛고 오토바이를 밀어내려하다가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졌다. 할아버지는 풀이 우거진 뚝방의 비탈에서 한 바퀴 돌고 멈췄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순례자들이 다가오면서 할아버지를 일으키려 했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일어나 둑 위로 올라왔다. 더 이상 미끌어져 내려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할아버지 정말 괜찮으세요?”
“내 신발.”
금오랑이 할아버지 신발을 찾으려고 풀숲을 뒤졌다. 풀의 키가 50센티미터나 되고 비탈진 곳이라 찾기가 어려웠다. 그동안에 나 여사가 반창고를 할아버지 무릎에 붙여 주었다. 찰과상을 입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를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금오랑이 슬리퍼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약주 드신 것 같아.”
“경적을 울려 피하라 하지 않고, 옆으로 가다가 그만 그렇게 되었어.”
8. 신사도가 필요해
“임 박사, 언제 쯤 오나?”
11시 15분경에 황화농협에서 권 대사가 순례자의 위치를 물었다.
“오다가 소나기를 만나고 오토바이 탄 할아버지를 구출하느라 지연되었어요. 한 시간 쯤 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어디 좋은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셔요.”
황화천을 건너야 하는데 첫 번째 다리는 폭우로 물이 고여 있었다. 검암은 멀리 보이는 다른 다리의 상태를 알아보려고 앞장을 섰다. 백산은 등산화를 벗어들고 맨발로 다리 위의 웅덩이를 지나갔다. 그는 도착하는 순례자들을 건네 주었다. 순례자가 그의 손을 잡고 다리의 좁은 난간을 디디면 그는 물웅덩이를 가는 방법이다. 백산은 신사도를 발휘해 두 여인을 건네주었다.
권 대사는 황화농협에 미리 도착했는데 할 일이 없어 지루했다. 좋은 곳을 물색하라는 금오랑의 지시(?)를 받고 슈퍼의 주인에게 잘하는 식당을 물었다.
“요 앞의 식당이 잘 혀유.”
순례자들은 봉곡서원을 지나 12시 넘어서 도착했다. 금오랑이 농협 건너편 초등학교 폐교에서 점심을 할 것인지 둘러보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저기 노인정에 가셔유. 할아버지 한분 계실 거니께, 그 분께 말하면 될 거유.”
한옥으로 크게 지은 황화노인회관에 아무도 없어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마침 옆집에 들어가 사정을 말하니 그냥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여기서 두 시간 가까이 충분히 쉬겠습니다.”
금오랑이 안내를 하자 순례자들은 마루와 소파에 멋대로 앉아 아침에 싼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노 작가는 김밥 대신에 맨밥과 반찬을 내 놓았다. 그녀는 아침에 식당에서 김밥대신 맨밥을 시켰던 것이다.
“여름철에 김밥은 상하기 쉬워요. 그래서...”
30분 쯤 지나니 노인 한 분이 들어왔다.
“어르신, 인사드립니다. 저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했던 길을 따라 걷는 순례자입니다. 오늘 아침에 은진을 출발해 여산으로 가는 중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들이군요. 잘 오셨습니다. 편히 쉬다 가셔유.”
노인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이제 오전 근무를 끝내려는 참이다.
“한 시부터는 여자들이 옵니다.”
노인은 이 말을 하고 나가버렸다.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왔다. 노인회관은 남녀 이용시간이 오전 오후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할머니 이것 드셔요.”
백산이 삶은 계란을 드렸다. 1시가 지나자 순례자들은 충분히 쉬었기에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마지막 한 시간을 남겨둔 것이다. 여산고등학교를 지나니 여산동헌과 숲정이 성지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1번 국도의 육교에 이르자 또 소나기가 내렸다. 다리 아래 그늘에서 비를 피하고 여산면사무소에 도착하니 날씨가 너무 더워 버스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논산이나 연무대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네.”
“그러네. 여기는 전라북도인데 충청남도의 논산의 시내버스가 도경계를 넘어 오네.”
검암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산에는 논산 가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의 민원을 논산시가 해결했을 것이다.
순례자들은 학교 앞 그늘로 갔다. 근처에는 여산 동헌이 있는데 문을 걸어 잠가 들어가지 못했다. 여산은 현감보다 한 계급 위의 부사가 관할했던 큰 고을이다. 동헌 옆에 백지사(白紙死)터가 있다. 박해당시에 천주학쟁이의 얼굴에 백지를 대고 물을 뿜어 착 달라붙게 한다. 잠시 후면 죄인은 숨이 막혀 질식사하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여산에서 연무대를 거쳐 논산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들은 연무대에서 시외버스를 탈 것인지, 논산에서 기차를 탈 것인지 망설였다. 금오랑이 연무대에서 시외버스를 타자고 제안했다. 그는 모처럼 힘들게 멀리 왔는데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연무대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출발 시간을 알아보았다. 15분 후, 30분 후, 한 시간 30분 후 등, 여러 편이 있었다. 순례자는 터미널 매점에서 즉석 생맥주를 마시고 빨리 상경하는 팀과 좀 더 오래 앉아서 즐기는 팀으로 나뉘었다. 금오랑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남기를 원했으나 남은 사람은 노작가와 백산이다. 셋은 치킨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한가했으나 매우 시원했다. 생맥주는 순례의 피로를 푸는 특효약이다.
적색은 금오랑이 가려던 길, 황색은 실제로 간 길.
첫댓글 은진- 여산 구간에서는 권대사가 택시를 탄 것으로 되어 있다. 천만다행이다. 그리고 곳 곳 검암(이우용)은 자신의 풍부한 지리지식을 쏟아놓아 일행에게 도움을 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상적으로도 그가 가끔 쏟아놓는 지리지식은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수가 있다. 이런 순례의 경우는 더욱 그의 가치가 돋보인다. 무엇보다도 침착하면서도 은근한 정을 풍기는 금오랑(임용철)의 인간미가 돋보인다.
글 중에 나오는 견훤왕릉은 조금 이상하다. 적어도 왕릉인데, 다른 왕릉에서 흔히들 볼 수 있는 석물이나, 제사용 석판같은 것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물론 이런 제물이나 석물은 조선시대의 왕릉에서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지만, 후손의 대가 끝어진 삼국등 고대의 왕릉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기는 하다. 이 릉이 견훤릉으로 고증되었는지도 의문이다. 견훤릉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백제 후백제를 통털어 지석이 발견된 무령왕릉을 제외하면 주인이 밝혀진 왕릉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회장님, 보여주신 관심에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건암 이우용 형께서 하신 것 처럼 저도 큰 기여를 하고 싶었어요. 그 이가 명제 집앞 처마에서 설명할 때는 그 카리스마와 그 지식과 모든 것이 어우러져,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는 곳 마다 그이의 과거 독서열은 빗낯으며, 그 만큼 그는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정 회장이 지적한 왕릉의 형식은 옳습니다. 견훤왕릉은 1970년 견씨문중이 세운 비라네요. 안내문 중 한글부분을 올렸으니 참고바랍니다.
권대사는 은진면사무소에서 연서리, 방축천변, 동산교차로, 연무읍사무소 근처 주유소까지. 그리고 황화능협에서 목적지 여산면소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환자에게 너무나 벅찬 여정이라고 생각됩니다.
노인은 열사병으로 사고를 많이 당한다는 이야기를 오늘 의사에게 들었습니다.노인은 더위를 잘 느끼지 못하고 몸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는 기능도 약하답니다. 시골의 노인이 밭에서 갑자기 당하는 것도 이 때문이란 얘기를 들으니 정말로 위험한 순례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권영민, 문리대 독문학과 졸업, 전 주 덴미크, 주 노르웨이, 주 독일 대사 , 전 주 아틀란트 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