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선사~고려시대의 장연
1. 고대의 장연면
구석기시대는 아주 오래 전의 시대이다. 지구에 나타난 인류가 유인원(類人猿)과의 공통조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진화를 거듭하면서 도구를 만들어 쓰던 약 400만 년 전(또는 250만 년 전)부터 약 12,000년 전까지이다. 이 기간은 인류역사의 99.5%를 차지할 만큼 오랜 시간이었다.
구석기인들은 뗀석기와 뼈 ․ 나무연모로 사냥과 식량을 채집하면서 살림을 꾸리고, 강가나 언덕에 막집을 짓거나 동굴․바위그늘을 집터로 삼고 무리 지어 이동생활을 하였다.
충북은 남한강과 금강이 흐르고 석회암 동굴이 많은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구석기유적이 확인되고 수없이 많은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동굴유적은 제원 점말용굴 청원 두루봉동굴 ․ 단양 금굴 ․ 단양 구낭굴 등이 있으며, 바위그늘유적으로는 단양 상시바위그늘이 있다.
이들 동굴유적과 바위그늘에서는 사람뼈화석과 뼈연모 ․ 짐승뼈화석 ․ 식물자료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청원 흥수굴 ․ 단양 상시 바위그늘 ․ 구낭굴에서는 고인류의 뼈화석이 출토되어 한반도에 살았던 구석기인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괴산군내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나 유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끼고 있어 향후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중원지역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장연면 인근인 충주시 조동리 집터를 들 수 있다. 청동기 시대의 집터는 대부분 긴네모꼴이며 주춧돌을 갖추었다. 괴산군내에서도 발견되는 고인돌 유적은 주로 강가의 충적대지에 만들었으며 무덤방의 긴 방향이 강물의 흐름과 일치하는 특징을 띤다. 청동기 문명은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을 따라 유입되어 한강유역을 거쳐 충북지역으로 유입된 후 남한강의 지류를 거슬러 올라 온 것으로 추정되며, 쌀 ․ 보리 ․ 수수 등의 곡물과 농경도구로 볼 때 농경이 생업에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청동기인들은 논농사를 지을 줄 알았으며, 좀 더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괴산군의 청동기 시대 유물로는 불정면 탑촌리, 칠성면 고성리, 비도리, 도정리, 태성리의 고인돌과 연풍면 적성리의 선돌과 연풍면 입석리의 고인돌이 있다. 칠성면 비도리와 칠성면 태성리는 한 때 장연면의 일부였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장연면에서는 청동기시대 유적이 아직 발굴 되지는 않았으나 우리 면의 광석리와 장암리 등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고인돌 군이 형성되어 있어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2. 마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장연
기원 전후 무렵부터 기원 후 300년까지를 삼한(三韓) 또는 원삼국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철기의 보급과 사용, 벼농사 기술의 발달, 새로운 토기의 제작, 온돌이나 부뚜막 딸린 집의 발달, 주변지역과의 활발한 교류 등이 특징이다. 제철기술과 농업기술의 발전, 주변지역과의 활발한 교류는 인구 증가와 사회와 문화의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삼한시대의 각 집단은 정치적으로 결속을 이루며 차츰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의 기록에 따르면 마한(馬韓)에는 54의 나라[國]이 있었으며, 충북지역은 대체로 마한의 영역에 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금 다르긴 하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서술되어 있는 마한의 부족국가 수는 44개국으로 연맹체 국가의 형태를 띠었다고 기술한다.
이러한 연맹체 부족국가들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이다. 한강유역에 자리 잡고 성장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의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멸망시키며 점차 세력을 확장해 옛 마한영역을 거의 모두 장악하며 성장을 거듭하였다. 이 때 백제는 점령한 요충지에 성을 쌓고 성주를 두어 군사와 행정 양면을 다스리게 하며 국가 체제를 공공히 하였다. 이중 未乙省(미을성-충주), 奈吐(내토-제천), 娘子谷城(낭자곡성-청주), 今勿奴(금물로-진천), 仍斤內(잉근내-괴산), 一牟山(일모산-문의)등 충북에 관계되는 부족국가들이 마한령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연면도 이들과 같은 시기에 마한령인 仍斤內(잉근내-괴산)이나 未乙省(미을성-충주)에 속했음을 추정할 수 있으나 어느 곳인지는 확실치 않다.
원삼국시대 마한령에 속했던 장연면에는 아직도 마한문화의 자취가 남아있다. 장연면의 송동리 ․ 교동리 ․ 송티리 ․ 석산리의 솟대문화와 거문리의 탑신제는 마한의 대표적인 제례문화에 속한다. 장연면 중에서도 이 지역이 마한문화의 정신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급속한 세력 확장을 통해 남한강 상류 쪽으로는 오늘날의 충주․중원․제천․단양 쪽으로, 차령산맥을 넘어서는 진천․청주․청원 방면으로 세력을 확산하였다. 약 3~4세기 무렵에는 충북권역 전체가 백제권역에 속하게 되었다.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통합하여 광대한 영토를 이룬 백제는 이때부터 강력한 왕권과 관료제도를 바탕으로 고구려, 신라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패자가 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벌여 나갔다.
장연면은 마한이 멸망한 후, 서기 63년(백제 제2대 다루왕36년)부터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백제는 2세기 중엽까지 충주지역을 차지하여 소백산맥 일원까지 진출하였으나 영남 일대의 진한 12국을 평정하고 강력한 왕권을 세운 신라와 충돌하게 된다. 신라 아달아이사금 3년(156년) 계립령(現 조령)까지 진출한 신라는 아달아이사금 4년(157년) 2월에 지금의 괴산군 감물지역을 차지하고 다음 해엔 죽령을 개척하여 영남과의 소통로를 장악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2세기경부터 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백제와 신라가 경쟁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접경을 이루면서 백제의 영토로 존재하던 장연면 일대는 고구려 (장수왕63년)의 본격적인 남하정책(475년)으로 인하여 삼국이 서로 맞서는 더욱 치열한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다. 장연면, 연풍면, 상모면, 수회면 지역은 한반도 남부의 중심으로서 이곳을 차지해야만 삼국 최고의 요충지인 한강지역으로 진출이 가능해 지기 때문에 삼국의 각축은 매우 치열하였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충주와 제천 단양 등의 소백산맥 북쪽 지역을 점령하고 군과 현 같은 하급 행정구역이 갖춘 지방행정 체제를 구축한다. 당시 장연면은 고구려 상모현에 속해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고구려 문자왕 3년(494년) 7월에 당시 신라의 영토였던 지금의 청천지역인 살수원을 고구려가 공격하여으나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해 격퇴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점령 후에도 이 지역은 늘 삼국이 부딪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후 신라의 북방정책이 본격화 되고 고구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551년(신라 진흥왕 12) 장연면 일대는 신라로 편입되었다. 76년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이곳이 다시 신라의 영토로 넘어간 것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충북지역은 처음 마한에 속하였는데 기원 후 20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백제가 차지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때 충청북도 남부지역은 신라가 차지하였으며, 중북부지역인 충주, 괴산, 청언, 진천 등은 백제에 속하였다가 백제가 한성에서 공주로 도읍을 옮긴 후 고구려가 차지하였고, 6세기인 551년 신라로 영유권이 넘어갔다고 기록하였다.
이처럼 장연면 일대가 삼국의 쟁패지역이 된 이유는 이 지역이 고대 주요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연면 지역은 수로(水路)로는 복거리 쌍천과 조곡천, 석문내천이 충주 달천과 연결되어 남한강의 수로를 따라 장호원, 서울 등지와 연결되었다. 육로로는 충주를 통해 제천, 원주와 연결되고 죽령과 조령을 통해 영남지방으로 연결되며, 괴산 청안을 거쳐 청주로 연결되고 음성 장호원을 거쳐 경기이북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 같은 요충지로 인해 삼국이 서로 한 번씩 점령한 장연면에는 아직도 삼국의 문화가 혼재해 있다. 장연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서낭당은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이 모두 이곳을 영토화 했지만 특히 백제의 문화와 고구려 문화가 지금까지도 산재해 있는 것은 당시 장연지역의 시대적 상황이 지역 문화의 형성기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즉 전쟁이 오히려 지역의 발전을 부추기고 빠른 문화의 흡수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문화적 태동기를 맞이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통일신라와 후삼국시대의 장연
괴산군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서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의 발달이 시작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갑자기 늘어난 영토와 인구를 통치 관리하기 위해 보다 정비된 정치 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신문왕5년(685년)에 9주와 5소경의 지방제도를 마련하였다. 신문왕 때에 지금의 청주인 서원소경이 설치되었으며 경덕왕 16년(757년)에 국원소경을 중원소경(충주)으로 개칭하여 5소경을 완성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개편된 충북지역의 편제 중 괴산군과 관련된 것을 살펴보면 고구려 때의 잉근내군(仍斤內君)이 괴양군(槐壤郡)으로 바뀌었고 괴양군의 한자 지명을 그대로 풀이해 보면 “느티나무고을”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후삼국시대 장연면은 마진(궁예)이 차지하였다. 궁예는 900년 후에 고려의 시조가 되는 왕건으로 하여금 이 지역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광주, 충주, 청주, 괴양(괴산) 일대가 궁예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4. 삼국시대의 장연문화
한강이 흐르는 충주를 중심으로 한 중원문화권인 단양 제천 충주 괴산북부인 칠성 불정 소수 감물 연풍 장연 음성 진천은 백제와 고구려의 옛 영토이며 장연면은 초기 백제의 영토에서 고구려의 영토로 예속되었다.
이에 앞서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阿達羅尼師今 154~184 재위기간 30년) 3년(156년) 4월에는 鷄立領(계립령-조령)路를 개통하고 158년에는 죽령로를 개통시켰다. 또한 괴산 군지에서는 계립령을 뚫고 조령을 넘어 소백산지대를 개척하여 甘勿현과 馬山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괴산군 일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밝히고 있으니 지리적으로 볼 때 장연면과 감물면 상모면 일대가 한 때 신라의 영토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朝鮮歷史地理上(조선역사지리상) P.344에서 감물(甘勿)을 충주의 甘勿內彌面(감물내미면)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늘의 감물면은 군면 폐합에 따라 괴산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러나 金鍾權의 완역삼국사기에서는 감물을 밀양으로 마산을 청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986년 편찬된 감물면지에서는 신라가 개척한 감물현을 현재의 감물지방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당시 신라의 세력이 이곳까지 미치었느냐에 대하여는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156년에 계립령(現 조령)을 개척했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본다면 시기적 차이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서원문화권인 금강이 흐르는 청주, 청안, 문의, 회인, 증평은 백제의 주된 영역이며 보은, 옥천, 영동, 괴산군 청천면 일부는 신라의 주된 영역이었다.
충주, 상모, 연풍, 장연지역은 중원 문화권으로서 고구려의 북방문화 요소가 강하고 언어와 풍속 민간신앙, 마을이름 등에서 청주권을 중심으로 한 서원문화권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장연면의 마을 공동체 신앙을 살펴보면 서낭제가 특히 많은데 이는 고구려 문화의 영향이다. 서낭당은 말(馬)서낭이라고도 하며 기마민족인 고구려 문화의 특징이다. 말서낭은 서낭당의 돌무더기에 침을 뱉으면서 소원을 비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말서낭의 유래(강태공과 마씨부인의 유래)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마을이름에서도 장연지역의 모든 마을 이름에 고구려의 “홀”이 변한 “골”이 마을이름 뒤에 붙는데 이는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다만 장연면 추점리를 “가래울”또는 “가래월”로 부르는데 이는 신라계통의 마을 이름으로 아주 적게나마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송동, 교동, 솔티, 석산의 솟대문화와 거문리의 탑제는 백제 문화의 영향이다. 위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장연면은 옛 삼국의 영향을 모두 받았으며 다시 말해 이곳이 삼국의 격전지였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지명에 북방문화의 요소가 강한 것은 고구려의 영토시 처음으로 행정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된 후에도 고구려 때 지명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시대의 장연
왕건이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고려를 세운 후에도 후백제와 신라 고려의 후삼국 체제는 지속되었다. 이때 장연면 일대는 후백제와 고려의 접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고려 태조 11년(928년) 왕건은 충북지역에 위치한 후백제군의 주요 거점인 보은의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청주까지 패퇴하였다. 보은, 상주, 충주로 이어지는 후백제의 저항으로 고전하던 왕건은 태조 19년(936년)에 이르러서야 후삼국을 통일하고 충주를 포함한 장연지역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고려 태조는 통일 4년 후인 태조 23년(940년) 상모현을 장연현과 장풍현으로 분현 하였지만 오랫동안 궁예의 후백제에 복속되었던 이 지역이 안정화 된 것은 아니었다. 이때 괴양군(괴산)도 괴주군이라 개칭되었다.
고려의 지방제도가 그 면모를 갖춘 것은 성종 때였다. 성종에 이르러서야 전국을 12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장연현과 장풍현은 성종 3년(984년) 충주목사 감독 하에 두었다. (한편 이와는 다른 기록이 신동국여지승람에 있어 발췌한다. 위의 기록은 1966년 괴산군지에서 의거한 기록인데,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장연과 연풍은 본래 고구려 때 상모현인데 고려 현종 9년에 장연현과 장풍현으로 나누어져 같이 충주 목에 속하였다 라고 ‘권14 연풍조‘에 기록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상모현이 폐지되어 장연현과 장풍현으로 둔현한 연조가 괴산군지는 태조 23년이고 신동국여지승람은 현종 9년으로 되어 있어 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태조 23년에는 충청북도 내의 많은 군현의 명호가 개칭되었지만 현종 9년에는 극히 소수의 군현만이 개칭되었다.)
성종 14년(995년) 지방제도를 다시 개편하여 전국을 10도나 나누었는데 이 때에 두 현은 충주와 청주를 주현으로 하여 중원도에 속하여 “창화군”이라 부리는 중원도 절도사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고려의 지방제도가 완성된 것은 현종 때에 이르러서다. 현종은 전국을 5도 양강체제로 개편하였는데 이때에 충청도는 경기도와 함께 양광도에 속하였으며 장연현과 장풍현은 양광도 내 충주목에 속하였다.
고려의 지방제도는 일반 행정구역과 특수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군, 현 등의 일반 행정구역과 향, 소, 부곡(鄕, 所, 部曲)이라는 특수 행정구역이 그것이다. 향, 소, 부곡에 소속된 사람들은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 천민과 유사한 계급이다. 이들은 국가의 성립과정에서 정복전쟁에 패했거나 투항 또는 귀순한 집단지 또는 귀화인의 집단부락, 기타 특수한 생산노비의 집단 거주지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도는 신라에서 만들어져 고려 시대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으나 조선 초기에 폐지되었다. 우리 장연면 지역에 이들 특수 행정구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청천에는 한신부곡이라는 곳이 있어다는 기록이 전해 내려온다.)
한편 충청이라는 이름이 처음 사용 된 것은 예종 원년(1106년)이었다. 공주와 운주 등을 주현으로 하남도를 삼았다가 ‘양광충청주도’라고 호칭하였는데 이때 최초로 ‘충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대체로 충청좌도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청우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된다. 좌․우도는 모두 개성의 궁궐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의 방향이다.
고려 명종 원년(1171년)에 다시 양광도를 2도로 하였다가 1314년 충숙왕 원년에 양광도로 합하고 공민왕 5년(1356년)에 충청도로 개칭하였다. 충청도는 1경 3목 27군 78현을 관할하였다가 우왕 14년(1388년)에 평창군을 떼어 교주도에 이속시켰다.
충주목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으로 미을성 또는 난장성이라고도 하였다. 신라가 취한 뒤에 진흥왕18년(557년)에 소경을 두었으며 신문왕 5년(685년)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었는데, 장연면이 속한 충주에는 국원소경이 설치되었다. 경덕왕16년(757년)에 다시 중원경으로 고쳤으며 고려 태조 23년 (940년)에 충주라 하였다.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으로 12목을 두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충주목이다. 성종14년(995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었으며 중원도라 칭하였다. 현종 3년(1012)에 절도사를 폐하고 안무사라 하였고 그의 9년(1018)에 목으로 삼았으니 충주는 8목 중에 하나였다.
고종 41년(1254)에 국원경으로 승격 되었다. 성종 때에는 대원이라고도 불렀다.
괴주군은 본래 고구려의 잉근내근으로 신라 경덕왕 때 괴양군으로 하였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괴주라 하였다.
현종9년(1018)에 충주목에 예속 되었으며 뒤에 감무를 두었다. 성종 8년에서 12년까지 사이에 “시안”이라 별칭 하였다.
현재의 장연면이 장연현과 장풍현 중 어디어 속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료와 지리지 등을 살펴보면 당시 상모현은 현 장연면과 연풍면의 대부분이 속해 있었고 감물면의 일부와 상모면의 대부분이 합쳐져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구역은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세종대왕 실록 권43, 세종실록 지리지, 전국지리지,조선각도읍지, 호서읍지연풍편, 호서읍지장연편, 동국여지지연풍편, 고려사지리지, 증보괴산군지>
일례로 이 기록을 살펴보면 현 연풍면의 경우 장연현이라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장풍현이라 되어 있는 것도 있으며 장연현과 장풍현 양현으로 갈라져 있는 것도 있다. 이처럼 두 현의 경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현재의 장연면이 당시 어느 현 소속인지는 또한 정확히 알 수 없다.
“증보 괴산군지”에서는 연풍과 상모면 대부분이 장풍현 관할로 되어 있고 현청은 장연면 송덕리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한편 고려 말엽에는 집중된 왜구의 침략에 의해 장연면도 큰 피해를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 따르면 왜구는 우왕 4년(1378년)에 청주 미호천까지 침입해 왔고 동왕 11년(1385년)에는 괴산과 장연현까지 쳐들어 왔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충주까지 쳐들어 왔다는 기록(高麗史이 권135, 禑王 11년 10월)이 있다.
제2장 조선시대와 구한말의 장연
1. 장연 지역의 지방관제 변천과 생활상
193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지방제도를 계승하였다. 조선 건국당시 충청도는 양광도로써 양주, 충주, 청주, 원공주, 원주목을 관할하였는데 조선 태조 4년(1396년) 충주, 청주, 공주, 흉주 소속 군현만을 충청도로 하고 안렴사 대신 관찰사를 두었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장연현과 장풍현을 병합해서 장풍부로 승격하고 송덕리에 부윤을 설치하였다.
조선 태종 13년에 다시 각도의 군현의 명칭을 고쳐 장풍부를 연풍현으로 개칭하고 연풍현이 신설됨에 따라 장풍현 송덕리에 있던 장풍부가 폐쇄되고 연풍현 현내면 허문동(현 삼풍리 162번지)에 치소가 설정되었으며 청사가 건축 되었다. 이때 전국 모든 현의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세종 11년(1429년)에 충주의 동촌을 떼어 연풍현에 편입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 11권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우리 지역의 행정편제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1월 條(조)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戶曹(호조)에서 고하기를 “충주도의 연풍현 사람들이 上言(상언:임금에게 드리는 말)하기를 본현은 원래 충주 경내로서 장연 • 장풍의 두 구역에 속하였던 곳인데 지난 계유년에 비로소 감무를 두었으나 사방이 큰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토질이 척박하여 민호가 겨우 180호에, 밭이 450결이요, 또 남북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위치해 있어 本朝(본조 : 시도 때도 없이)의 이객의 내왕이 빈번한데다가, 더욱이 쇠를 제련하여 배를 만들기 때문에 역을(부역)지탱할 수 없어 흩어져 도망 하오니 청하 건데 게 어금니(게 집게발)처럼 서로 들쑥날쑥한 괴산군 동면의 毛杏里(모행리) 甲呑長嶺(갑탄장령) 及火石院 代城山 內栗谷 沙斤平 吾田 角乎 覺淵洞과 忠州東面의 官洞 溫井 吾山 楸洞 元通 彌內 및忠州縣內의 甘勿彌內 安富驛等의 땅을 떼어 달라합니다”하니 본도(충주도)에 명을 내려 이를 분변하여 아뢰라고 했다.
본도(충주도)에서 고하기를“<槐山東面의 角乎覺淵> 淵洞과 吾田 安富驛等의 땅은 괴산과 거리가 심히 머오니 마땅히 떼 내어 연풍에 붙이는 것이 옳겠사오며, 화석원, 대성산, 내율곡, 사근평, 갑태장령, 모태리 등의 땅은 연풍과 거리가 심히 머오니 전대로 본군(괴산군)에 붙여두는 것이 편리할 것이며, 甘勿彌內等의 땅은 兩邑과 거리가 엇비슷하나 연풍현과는 큰산(박달산)이 가로막혀 있으니 그대로 본주(충주)에 붙여두는 것이 편하겠고, 관동 ,온정(수안보), 오산 등의 땅은 본주(충주)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떼어서 연풍에 붙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추동(추점), 원통, 미내등의 땅은 비록 연풍과 멀고 또한 막혀 있으나, 연풍의 동면은 땅이 좁고 민호가 적으니 마땅히 떼어서 연풍에 붙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당시 추동(추점)은 충주동면 즉, 元通은 현 수회리, 彌內는 상모면지역이었다
위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연풍현은 작은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 외지인들의 통행량이 많았음도 알 수 있다. 외부인의 통행량이 많아지면 자연히 주막이 발달하게 되는데 당시의 통계자료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정조13년(1789)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따르면 연풍현에 속했던 면의면 지역에 주막이 5군데나 있었다. 유추해 볼 때 현재의 장연면은 예나 지금이나 외지인의 통행량이 활발한 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다.
감물면은 세종 당시에 충주현의 관할이었으며 추점리도 수안보와 통하는 교통의 요로로 충주 동면에 속해 충주현의 관할지역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추점리와 수회면 지역인 작담과 광석을 제외 한 현재의 장연면지역은 전체적으로 연풍현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성종 7년(1476년)에는 수회촌을 떼어 연풍현에 편입시켰으며 성종 35년(1602년)에는 충청도를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는데 현재의 장연면이 속한 연풍현은 충청좌도에 속했다.
영조 41년(1765년) 충청좌도 연풍현의 행정 구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 현내면(현재 연풍면지역) : 노문, 괴정, 은행정, 인지동, 신풍, 유산상, 유산하, 입석
• 장풍면(현재 장연면지역) : 송동, 장암동, 양과동, 아차곡
• 면의면(현재 장연면지역) : 오동, 추동, 병방동, 진대, 조곡
• 수회면(현재 수안보면지역) : 고운, 주막, 문산, 광석, 토계
• 고사리면(현재 수안보면지역) : 신혜원, 고사, 안보, 온정, 대사
2. 조선시대 장연의 생활상
한편 조선시대 장연면의 인구와 마을 사창제 등의 생활상을 기록한 주목되는 자료가 있다.
조선시대의 각 군읍이 관할하는 면리의 제도에 관한 사료는 많지 않다.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영조(1725~1776)때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가 있으며 정조13년(1789)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가 있다. 이 자료들과 구한말의 연풍면지(숙종 때인 1720년대의 기록으로 추정)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장연면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자.
호구총서(1789)의 기록에 의하면 연풍현(延豊縣)에는 5개면이 있었는데 총 6개의 사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 장연면 지역에는 2개의 사창이 있었는데 장연면 송덕리 양지마을(송동)의 西社倉과 방곡리 병방골에 北社倉이 있었다. (한편 숙종 때인 1720년대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구한말판 연풍읍지에 따르면 연풍현 내에는 2개의 사창이 있어다고 되어있다. 현내에 있는 읍창과 수회면의 북창이 그것이다.)
이들 기록을 비교하면 약 70여년 사이에 4개의 사창이 더 생긴 것으로 보아 이때 사창제가 활발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조선에서는 원래 의창과 환곡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의창곡은 이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의창과 환곡은 흉년 등으로 갚을 수 없을 경우 회수의 어려움이 많아 점점 재고량이 부족해지자 이에 정부는 의창의 원곡을 보충하기 위하여 토지와 호구 수에 따라 일정량의 쌀을 거두거나 군자곡으로 부족분을 보충하기도 했으나 의창의 원곡이 계속 부족해지자 새로운 재정 확보를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던 것이었다.
사창이란 춘궁기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원금과 이자를 함께 받아들이는 민간 자치적 성격을 띤 빈민구호제도였다. 세종 18년(145년) 충청감사 정인지가 원곡(元 穀)감축과 그 보충으로 인한 군자곡(軍資穀)의 감소를 방지하기 위해 민간 자치적인 사창의 설치를 제기하였고 문종 1년(1451년) 시행되었다. 사창은 원곡과 이자를 함께 받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원곡의 보충이 가능했으나 회수의 어려움과 관리의 농간으로 오히려 그 폐해가 심해지자 성종 1년(1470년)에 폐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토지 겸병에 따른 농민들의 토지이탈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기아, 의창의 환곡기능 상실 등에 따라 농민에 대한 규휼정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다시 부활 되었다. 연풍현의 사창이 언제 생겼고 부활 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구한말판 연풍면지의 기록에 의하면 사창은 본래 관청에서 양곡을 상비하였다가 흉년이 되어 곡가가 치오르면 고가로 포(당시 화폐구실을 함)를 수매하여 곡가를 내리고 풍년이 들어 곡가가 내리면 포를 싸게 팔아 곡가를 오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조선 초에는 상평창을 두고 이를 실행하였으나 없어지고 후에는 환곡이 상례가 되었다. 환곡은 속칭 환자라고도 하는 것으로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곡을 풀어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추수기에서 새해 전까지 회수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호구총서에 기록 된 연풍현에는 5개의 면과 27개의 동리가 기록되어 있다. 동리의 지명이 오늘날의 지명과 많이 다르지 않음이 먼저 주목된다. 행정 구역도 그케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의 장연면인 장풍면의 경우 가구수가 349가구에 1,098명의 주민이 살았으며 면의면의 경우 298가구에 845명의 주민이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참으로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따르면 호구총서가 쓰여진 연대와 비슷한 시기인 영조8년(1732년) 우리나라의 총가구수가1,713,849호이며 총인구수는 7,273,446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에 비해 7배나 인구가 적었던 당시와 비교할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연면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호구총서에 기록된 장연면의 현황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