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테르미도르의 반동
혁명을 통해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 깃발의 공화국을 성립시켰던 주역들은 당통,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에베르, 데물랭 등 20~30대 청년세력이었다. 프랑스공화국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형성하는 대대적인 혁신의 작업에 착수하며,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모태가 된다. 당시 프랑스공화국 내에는 자코뱅(급진파)와 지롱드(온건파)가 갈등하고 있었는데, 로베스피에르를 주축으로 한 자코벵세력은 독재와 공포정치를 통해서 왕정세력을 단두대로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공포정치의 적색 테러리즘에 등을 돌린 민중들은 로베스피에르마저도 단두대로 보내고, 왕당파의 독재로 이행한다. 이것이 '테르미도르반동'3)이라고 불린다. 이로써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많은 급진파가 단두대에서 사라지고 마는 백색 테러리즘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적인 열망에 대해서 프랑스 시민들이 동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혁명과 반혁명의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역사적으로 대중은 급진적이게 됨과 동시에 그 다음으로 반동적으로 태도를 취하는 기묘한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 정치적 급변의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체제에 대해서 자율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던 노동자계급이 급기야 1세기 이후에 혁명의 주축세력이 된다. 초기 자본주의는 부르주아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계급으로 구성되며, 농민들은 자신의 고향인 농촌을 떠나 도시 노동자계급으로 변신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은 억압과 착취 속에서 자신의 조직적, 정치적 자율성을 성장시켜 나갔다. 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정부를 구성하게 된 일대 사건이 1871년 3월 18일 새벽, 빠리의 노동자지구에서 구성된 꼬뮌이었다. 빠리꼬뮌4)은 노동자의 정부를 선포하였는데, 이들은 부르주아지들을 통하지 않고 생산을 자주관리하고, 노동자대중의 직접민주주의를 수행하는 정부를 구성하였다. 블랑키 급진주의 세력과 프루동 온건주의 세력이 주축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민주정부로 구성된 이 정부는 '공산주의'라는 이상을 지금 당상 실현 가능한 현실로 보여주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제 1인터내셔널이라는 노동자국제협회의 공산주의 이론가 였던 칼 맑스Karl Marx5)를 고무시켰으며, 그의 공산주의 이념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삼부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돈이 덜 드는 정부도 ‘진정한 공화국’도 꼬뮌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꼬뮌에게 단지 부수적인 것일 뿐이었습니다. 꼬뮌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꼬뮌을 호의로 해석하는 다양한 관심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억압적이었던 반면에 꼬뮌의 철저하게 개방적인 정치형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꼬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으며, 생산계급의 착취 계급에 대한 투쟁의 성과였으며, 노동에 대한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궁극적으로 발견된 정부 형태였던 것입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프랑스혁명 때 산악파(山岳派)의 혁명정부를 무너뜨린 테르미도르(熱月:革命曆의 11월) 9일의
쿠데타(1794.7.27).
산악파 독재의 혁명정부는 공안위원회를 중심기관으로 삼아 공포정치를 강행하고, 총력전체제(總力戰體制)를 펴면서 로베스피에르 등이 주장하는 소농민 ·소생산층(小生産層)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志向)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산악파 내부의 반(反)로베스피에르파는 당통파의 잔당(殘黨)과 지롱드 평원파(平原派)와 제휴하여 로베스피에르 ·생 쥐스트 등을 국민공회에서 규탄, 단죄(斷罪)하였다.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는 발라스 ·탈리앙 ·프레롱 등으로 쿠데타가 성공하자 공안 ·보안 양 위원회를 해산하고, 통제경제를 해제하여(1794.12), 자코뱅주의와 구제도적 왕정(舊制度的王政:앙시앵 레짐)의 양 세력에 대하여 강력한 억압정책을 썼다. 그래서 테르미도르파의 정치는 생활의 불안을 호소하는 소시민 이하의 하층민과 우익왕당파(右翼王黨派)로부터 협공(挾攻)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