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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제3주일
✠ 루카복음 13,1-9
오늘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5)는 말씀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듣게 됩니다.
주제는 '회개'입니다.
사순절의 주제, 회개는
우리에게 늘 버겁게 다가오지요.
그래서 교회는 혼자만의 결심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회개, 새출발을 '함께' 이뤄내라고 초대합니다. 오늘, 지금이 감사와 희망의 때, 은총의 때인거지요.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민족, 열성적인 사람들은 가끔 반기를 들어 저항을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민족성을 드러내는 행위, 제사를 지내는 그들을 총독은 지레 겁(?)을 먹고 모조리 없애버립니다.
이 겁많은 총독은 나중에 예수님도 군중이 두려워서 죄없는 줄 알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린 인물입니다.
이 끔찍한 사건을 어떤 이가 예수님께 알립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건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다른 일, 실로암탑이 무너진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이런 불행은 죄값으로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천벌이라 여겼습니다.
이 사고방식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판단해서도, 단죄해서도 안된다고.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3)
일어나는 불행은 죄의 결과이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회개를 위해 주어지는 상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5절)
오늘 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 예화는 다가올 심핀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잘못된 두 가지 태도를 지적합니다.
1) 때는 이미 늦었다.
2) 하느님은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시는 분이시다.
"삼 년째 와서....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잘라버리게.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7-9)
삼 년이나 되었으니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생각도, 삼년을 기다리셨으니 언제까지나 기다리실꺼라는 생각도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사순절 첫날 우리는 들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날입니다."(2고린6,2)
회개는 지금해야 하고, 내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은총의 때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3월23일 [사순 제3주일]
루카 13,1-9
회개로 가지게 되는 열매: 사람들과 섞이는 게 힘들다면?
‘회개’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종종 단순하게 죄에서 돌아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순히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상과의 관계를 깊게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며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 열매가 있어야 다른 포도나무들과 섞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거름’을 한 해 더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거름으로 우리 안에 사람들과 섞이게 만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체코 단편영화 ‘다리’(Most)의 줄거리입니다. 영화의 무대는 체코의 한적한 강가 주변입니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강 위로 지나는 기차가 안전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교량 관리원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아내와 헤어져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고,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어 장치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언제 다리를 들어올려야 하고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상세히 알려줍니다.
둘은 함께 점심도 먹고, 때로는 관리실 밖으로 나가 강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시각, 기차 안에는 여러 승객이 타고 있는데, 그중에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아직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지만, 삶에 지쳐 보이고 눈빛이 불안정합니다.
인생에 낙이 없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뿐,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없습니다.
그녀가 탄 기차는 빨간 불 신호를 무시하고 배가 통과하게 하려고 들어 올린 다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런 상태라면 기차에 탄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고 있고, 이에 아들은 수동으로 다리를 내리려 다리로 올라갑니다.
그 순간, 관리실 창밖을 내다보던 아버지는 아들이 다리 하부 기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더 큰 문제는 아들이 실수로 발을 헛디뎌 기어 장치 틈새에 끼인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만약 지금 레버를 내려 다리를 닫는다면 기차는 구출될 것이지만, 아들은 기어에 깔려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다리를 올린 채 둔다면, 기차는 강으로 추락해 승객 전원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치열한 번뇌 속에서 아버지는 레버를 잡고 손을 떨며
주저합니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힘껏 내리며, 다리를 닫습니다.
굉음과 함께 기어 장치가 돌아가며 다리가 내려오는 순간, 아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창을 통해 아들이 끼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무너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떨구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의 희생 속에 다리가 정상적으로 내려지고, 기차는 안전하게 지나가 버립니다.
아버지는 관리실 창문을 붙잡고 창백한 얼굴로 기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바라봅니다.
승객들은 자신들이 구조된 사실도, 열차가 위험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웃고 떠들며 일상으로 향해 갑니다.
누군가는 신문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이어폰을 꽂은 채 잠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은 잠시 창밖을 보다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칩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비통한 얼굴과 절규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일어났다는 예감에, 그녀는 순간 두려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기차는 이미 속도를 내어 곧 시야에서 사라지고, 아버지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화면에는 활기찬 도심의 거리나 기차역 풍경이 지나가고, 그동안 세월이 어느 정도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상실감에 잠겨 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려 애씁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죄책감과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타인을 살리기 위해 치른 희생이라는 사실이 그를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한편, 어느 날 거리에서 한 젊은 여인이 아버지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그날 기차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마약 중독 여성이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그녀는 말끔한 옷차림에 밝은 얼굴로 서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의 손에는 아기가 안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 그녀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녀도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순간 놀란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 이내 따뜻하고 감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미소를 보냅니다.
그녀가 더는 마약을 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평온한 모습과 부모의 책임을 다하려는 듯한 태도가
아버지 눈에 들어옵니다.
화면 너머로 알게 되듯이, 이 여성은 그날 기차가 강 위를 지날 때, 누군가 자신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음을 어렴풋이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불만에 찬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그 누군가의 희생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아들을 잃었으나, 그 희생으로 인해 어떤 이는 삶을 되찾고 관계의 확장으로
나아갔음을 직접 확인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긴 시간 그를 짓눌렀던 슬픔이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자신이 베푼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사람과 섞이지 못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요?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교만은 무엇에 의해 사라집니까? 바로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였습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입니다.
탑은 교만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파견된 그리스도의 교만이 무너진 순종으로 우리 안의 교만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름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거름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 교만이 죽습니다.
저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교만이 죽어 눈물로 빠져나옴을 경험했습니다.
이때 세상에서 내가 가장 큰 죄인으로 느껴졌고
비로소 신학생들과 섞이기 시작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럼 주님, 제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릴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저에게는 당신께 붙어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마약을 하던 여자 청년은 자기가 하던 잘못에서 돌아섰습니다.
주님의 희생에 자기 피를 섞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내 피를 섞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얼굴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모반이 지워지도록 손으로 문지르고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더 슬프게 울고 계신 것을 봅니다.
그녀는 이렇게 결심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다시는 얼굴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하느님께서 제 모습 때문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림, 곧 그분의 제물에 나의 피를 쏟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일조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선악과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내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사제가 바치는 빵과 포도주에 우리 피가 섞여야 하는데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느님께 먼저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이 무언가를 나에게 해 주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감사, 희생의 열매가 없다면 하느님 나라 포도밭에 머무는 사람들과 섞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잘려져 불 속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월23일 [사순 제 3주일]
복음: 루카 13,1-9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코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3주일 강론>
(2025. 3. 23.)(루카 13,1-9)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1-9)”
1) 불의의 사건과 사고로 사람들이 죽은 일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세 가지 가르침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그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의 벌’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입니다.
어떤 사고나 재난을 ‘천벌’이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가끔 예외적으로 인간 세상에 직접 개입하실 때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무차별하게 천벌을 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2)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회개해야 할 죄인’이다.
(3)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갑자기 닥치는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심판의 날과 시간에 관한 말씀에 연결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2-33).”
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마르 11,12-14).”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향해서 하신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위선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3) 그런데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있어서, 열매를 맺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는 것은, 나무 입장에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상황 자체를 하나의 가르침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부르심이 내리는 ‘때’는 인간이 정하는 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곧바로 이승을 떠나야 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또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조금만 연기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4) 8절의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라는 말은,
베드로 사도의 다음 설명에 연결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2베드 3,13-15ㄱ).”
‘모든 사람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과 시간이 곧 닥칠 듯, 닥칠 듯,
하면서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미리 알려 주시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어떻든 회개를 미루다가는, 그날 후회만 하게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회개는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