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유고에 나타나는 경주 김(金)씨 세계 요약
부계(父系) | 생몰 | | 어머니 | 생몰 | | 외조부모 | 생몰 |
閼智(알지) | ?∼155 | ← | 月知(월지) | ? ∼ ? | ← | 日光(일광) | ? ∼ ? |
| | | | | | 月光(월광) | ? ∼ ? |
↓ | | | | | | | |
勢漢(세한) | ? ∼ ? | ← | 阿婁(아루) | ? ∼ ? | ← | 日光(일광) | ? ∼ ? |
| | | | | | 閼英(알영) | ? ∼ ? |
↓ | | | | | | | |
阿道(아도) | ? ∼ ? | ← | 毛優(모우) | ? ∼ ? | ← | 儒理(유리) | ? ∼ ? |
| | | | | | 阿惠(아혜) | 83∼136 |
↓ | | | | | | | |
首留(수류) | ? ∼ ? | ← | 加市(가시) | ? ∼ ? | ← | 宝好(보호) | ? ∼ ? |
| | | | | | 助利(조리) | ? ∼ ? |
↓ | | | | | | | |
郁甫(욱보) | ? ∼ ? | ← | 舍利(사리) | ? ∼ ? | ← | 逸聖(일성) | 135∼212 |
| | | | | | 現郞(현랑) | 139∼230 |
↓ | | | | | | | |
仇道(구도) | 218∼301 | ← | 好禮(호례) | 183∼ ? | ← | 逸聖(일성) | 135∼212 |
| | | | | | 愛禮(애례) | 140∼199 |
↓ | | | | | | | |
味鄒(미추) | 292∼362 | ← | 述禮(술례) | 256∼338 | ← | 利音(이음) | ? ∼281 |
| | | | | | 公禮(공례) | 221∼ ? |
댓글 8
정성일 14.04.24. 09:59 삼국사기를 참고하면 알지의 출생은 65년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사기의 모본(母本)이 된 史書는 경주 김씨가 직접 쓰거나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대한 편년은 고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알지과 호공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는 혁거세왕 재위기일 것이다. 탈해왕때 대보라는 벼슬을 없으며 유리왕 이후로는 재상을 이벌찬이라 이름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대보(大輔)의 벼슬을 받은 사람은 탈해, 호공, 알지가 있는데 호공은 탈해보다 선대(先代)의 인물이다. 탈해는 알지보다 나이가 많으나 같은 세대의 인물일 것이다.
답글 | 신고 정성일 14.04.24. 10:00 일광은 신라시조 혁거세왕을 말한다.
보호는 성별을 알 수 없다. 父는 (김)알지, 母는 아호(阿好)
조리는 성별을 알 수 없다. 父는 일지(日知), 母는 선효(善孝)
답글 | 신고 정성일 14.04.24. 10:02 김알지와 김구도의 세계에서
김광수 「신라 상고세계의 재구성 시도」(동양학3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73) P371에는 탈해가 거두어 기근 알지(閼智)는 탈해의 아들 구추(仇鄒)와 동대인(同代人)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추의 손 골정(骨正)과 알지의 5세손 구도의 딸이 부부가 되어 석씨와 김씨 사이에 석씨는 2代, 김씨는 6代가 경과하는 차이를 보이고, 위 논문 P372에는 알지의 출생 년(65년)과 구도의 최초기사(172년) 사이에 107년간이므로 출산의 가능성을 15∼60세로 볼 때 1,2대라면 몰라도 5,6대에 걸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을 부언하여 두었다.
답글 | 신고 크크리 14.04.24. 16:32 화랑세기 20세 예원공조를 보면 칭제하고 건원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라는 당나라사람 질문에 '멀리 상고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왕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단지 문자 사용을 말한 것이다. .... 중국에서도 천자로 칭하는 것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했고, 부도지에서도 상고시대에는 우리가 상국으로 나오고 있으니... 이를 알고 답한 것이군요.
어떤 글을 보니 중국어떤 책에서는 치우가 천자이고 황제는 우사(雨事)였다고 합니다.. 결국 신하였던 황제가 반역을 함 셈이고....
답글 | 신고 크크리 14.04.24. 16:36 어떤 신이 시조냐고 묻자 " 일광의 신이다"했다, 유향이 말하기를 "일광과 금천씨가 같은가?"했다. 대개 전에 왔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금천씨를 조상으로 삼는다고 한 때문일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금천씨가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했다.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답글 | 신고 크크리 14.04.24. 16:41 백제가 고구려에 쫒겨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우리니라가 군대와 땅을 빌려주어 보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하로서 의지했는데, 점차 안정이 되자 도리어 우리 땅을 침범했다.(20세 예원공조)
답글 | 신고 ┗ 크크리 14.04.24. 16:46 장수대제기
○ 475년 5월, <호덕>이 <백제>의 50여 성을 점령하였더니, <문주>는 <자비>에게로 도망쳤다. 이에 상이 <자비>가 하늘을 거역함에 노하여 정벌하려 하다가, <황>태자가 “멈출 줄 아는 것도 귀중한 것입니다. 두 마리의 사슴을 쫓아서는 아니 됩니다.”라 간하였더니, 그만두었다.
6월, <풍옥>태자를 <자비>에게 보내서, <백제> 땅을 나누는 문제를 의논케 하였다
답글 | 신고 ┗ 크크리 14.04.24. 16:44 크크리 <자비>는 자신의 딸 둘을 태자에게 바쳐서 시침 들게 하였다. 태자는 <자비>가 조서를 봉행하지 않기에 책망하였고, <자비>는 오락가락하면서 단안을 내리지 못하였다.
10월, <자비>가 <웅진>땅을 <문주>에게 빌려주어 남은 무리를 수습하게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길; “<유비>가 <형주>를 빌리더니 <오>와 서로 다투었소. <자비>는 필시 <문주>에게 잠식당할 것이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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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댓글 7
팔공산 14.04.25. 02:54 역사 교수라는 사람이 조분기에 나오는 ~之孫, ~之女를 현대식 한문으로 해석하여 헛소리 한 모양이네. ~之孫 ~之女은 현대식 한문으로 보통 누구의 딸, 손녀라는 뜻으로 해석하지만, 고대 한문은 조금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알려진 집안 애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때, 그 여자 애가 [알려진사람之女]로 적혀 있으면 알려진 사람이 그 여자 애의 아버지일 경우도 있고,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일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之孫 ~之女를 무조건 누구의 딸, 누구의 손녀라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김광수 이분 주장은 고대 한문에 능한 중,일 사학자가 보았다면 기겁할 소리입니다.
답글 | 신고 팔공산 14.04.24. 23:51 ~之子, ~之女는 누구의 아들, 딸이라는 뜻이 아닌 그냥 ~집 애, ~집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됩니다. 간혹 보면 현대 한문만 많이 아는 사람들이 삼국사기 등을 번역하면서 ~之를 속격으로만 해석하는 경우가 보이나 이는 무식의 소치입니다. 더 한심한 것은 ~子를 ~의 아들로만 해석하고는 년대가 맞지 않다고 헛소리 하는 사람을 볼 때입니다.
답글 | 신고 팔공산 14.04.25. 09:59 /크크리님
[칭제하고 건원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라는 당나라사람 질문에 '멀리 상고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왕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답한..]
중국은 진(秦) 나라 이후 최고통치자가 황제이고 그 아래 왕이 있었지만 후왕(보조왕) 성격이었고, 우리는 최고통치자가 칸(干,汗) 또는 왕, 대왕이라 불렀는데, 이때의 왕 칭호는 중국과 달리 최고통치자를 부른 칭호입니다. 멀리 상고시대부터 帝를 사용하였다니.., 법흥왕 때부터 帝를 사용하였다니 한 것은 고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창작입니다. 신라가 대내적으로 황제라는 개념을 대내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한꺼번에 사용된 것이 아니고 삼국통일 이후 대내적으로
답글 | 신고 팔공산 14.04.25. 10:05 점진적으로 특정한 경우에 사용되다가 점점 늘어나 신라 하대에 가서 점차 확산되나, 대부분 대내적으로 사용되었고, 중국왕조나 왜국 관련에 공식적, 대외적으로는 왕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공식적이 아닌 사찰이나 사적으로 만든 문서에는 帝 개념이 나옵니다. 신라는 혁거세 때 거서간부터 법흥왕 때 왕까지 왕의 칭호는 삼국사기에 나온 그대로이고, 해동고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답글 | 신고 팔공산 14.04.25. 10:30 크크리님은 화랑세기를 믿고 계시는듯 보이는데, 제가 보기로는 100% 창작입니다. 저가 98년 하반기부터 2002년 상반기까지 여가 시간이 많아 공휴일이 있는 달은 거의 토,일요일과 합쳐 3-4일 정도 오사카,나라 등지 일본 고어와 응신과 인덕천황릉 자료수집를, 이즈모에서 니가타까지 동해와 인접한 옛 신라지역의 고어를 수집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보니 일본의 옛 신라(길비국) 지역에 경주신라 고어와 유사한 언어가 많았고, 화랑에 관한 자료가 단편적으로 많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화랑자료는 거의 음란소설 수준이었고, 많은 화랑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당시 울산 어느 대학과 부산대학 교수라는 분이 일본고어와
답글 | 신고 팔공산 14.04.25. 11:12 이것을 수집하고 있던데, 그 당시 이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화랑과 신라 고어에 관한 자료는 이분들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일본 뒷골목 고서점에 가면 각종 화랑에 관한 옛 자료들이 진본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널려 있습니다. 대부분 에도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일본인들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본 화랑자료는 거의 음란소설 수준이었는데, 등장하는 화랑 이름은 다르지만 내용은 남당유고 화랑세기와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분 성함은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지만 울산대학과 부산대학에 문의하면 그 당시 재직한 분 중 일본에서 고대 신라어 연구한 분이 누군지 찾으면
답글 | 신고 팔공산 14.04.25. 11:17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 앞에서 남당이 지은 화랑세기가 진본이라고 한번 이야기 해 보십시요. 남당유고 화랑세기는 앞에서 말한 화랑에 관한 옛 음란소설(?)과 남당이 어디서 수집한 향가 1수 등등 자료를 넣어 창작한 것으로 단정합니다. 이종욱씨는 향가 1수에 낚이어 화랑세기가 진본일 거라고 하던데,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남당유고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내용은 신라 고어나 당시 풍습 등 자료에 비추어 볼 때 고대 제도나 언어 등과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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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2014.04.2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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