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
나는 1947년 11월 18일에 결혼을 했다.
지금부터 60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내 나이 24세였고, 처는 나보다 두 살이 적은 22세였다.
결혼 연령으로는 적당하였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만혼(晩婚)이라고 친척들은 결혼을 서둘렀다.
당시 나는 강원도 인사처 고시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 당숙벌 되는 원용진 아저씨가 원주군청
학사행정계에 있었는데, 직무상 알게 된 원주국민학교의 홍기수 여선생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그리고 그 홍 선생의 오라비 되는 홍기준 씨가 같은 원주군청 산업과 농산계에 근무 중이어서
전부터 친구지간으로 사귀어오는 터라 자연 혼담이 오고가 선을 보기에 이르렀다.
선은 그해 여름, 형과 같이 원주 봉산동에 있는 홍기준 씨 댁에서 보았다. 무더운 여름이어서 한식집
대청마루에서 보았다.
희미한 남포 불 밑에서 용진 아저씨와 형 그리고 홍기준 씨 등 넷이 참외를 먹으면서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나는 옆에서 듣기만 했다.
이윽고 장차 처 될 사람이 안방에서 나와 앉았는데, 남포 불이 희미해서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선을 봤다고는 하지만 형식적인 듯. 이내 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다.
처는 시골 양가집에서 위로 두 오빠와 언니 등 4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응석받이로 자유 분망하게 자라
고집과 심술이 있을 법한데, 사실은 그와 반대로 천성이 온순하고 매사에 순종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우리는 한번도 다투는 일없이 신혼생활을 보냈다.
처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작은 오빠 밑에서 학교를 다녔다. 집이 영등포에 있었으므로 영등포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수원여고를 기차통학을 하면서 다녔다. 여고 입학년도는 우연히도 나와 같은
해였다. 일제시대의 학칙이 남학생이 다니는 갑종(甲種) 중학교는 5년제이고, 여학생이 다니는 갑종
여자중학교는 4년제이므로 졸업은 나보다 1년 먼저하고, 졸업과 동시에 고향인 원주의 소초초등학교
훈도(訓導)로 근무하다가 8·15해방 후 원주국민하교로 전보되었다.
처는 혼례를 전후해서 교사직을 잠시 그만두었다가 결혼 후 다시 복직을 해서 춘천국민학교에 다녔다.
당시 공무원의 보수는 극히 적어서 식생활도 해결하기 어려웠으나 나는 처와 맞벌이를 하게 되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지냈다. 처는 학교에 다니면서 아들 셋을 낳아 잘 키웠다.
근자에는 여성이 직장, 특히 교단에 서는 게 흉이 안 되고 결혼 후 정년이 될 때까지 재직하는 게 예사
지만, 그 당시는 왜 그런지 여자가 특히 기혼 여가 직장을 갖는 것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사회의 눈총을 받으면서 교직생활을 계속 하다가 결혼 20주년이 되는 해에 사임을 했다.
처는 교편생활을 할 때나 그만 둔 다음에도 여필종부(女必從夫)하는 한국의 여성상 그대로, 아내로서
의 도리를 다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나를 도와주었다. 나는 원래 성미가 너그럽지 못하고 남과의
친화력도 적은 편인데, 이런 남편의 신경을 건드릴세라 항상 눈치를 보며 언행을 신중히 한다.
가정에서의 기분이 직장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바가지 긁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내가 공직을 그만 둔 지금도 하루 세끼 끼니는 꼭 시간을 맞추어 마련해준다. 고기반찬은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김치와 국 그리고 김만은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다.
옷에 대해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공직에 있을 때부터 옷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
잠바를 걸치는 등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지만, 그러나 그 잠바나 남방셔츠 하나라도 아무거나 사지
않으며, 와이셔츠와 양발은 절대로 하루 이상은 입지 못하게 매일 빨아준다. 겨울에는 와이셔츠를
2~3일 입어도 괜찮으련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세탁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요새 세탁기 없는 집이 어디 있으련만 지금까지도 세탁기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이던가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하는 데, 처는 엄지손가락의 지문이 마모되어
지문 찍는데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궂은 일을 너무해서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막일을 하였던 것이다.
나의 기나긴 공직생활 중 나의 직장 동료들에게도 각별히 친절하게 대하고, 전화 하나 받는데 있어서도
공손하게 응대한다. 내가 시장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관내의 여성단체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반
주민과도 친밀하게 지내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한다. 지금도 내가 재임했던 지방에 나가보면
주민들은 나보다도 내 처를 더 반갑게 맞을 정도이다.
이처럼 내조해 준 덕택에 내가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쳤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슬하에 딸은 없이 아들만 셋을 두었다. 처는 그 셋을 학교에 다니면서 잘 키웠다.
그러나 마음이 여리고 약한 처는 아이들을 귀엽게만 길렀지 맹모심천지교(孟母三遷之敎)나 한석봉
어머니 같이 교육적으로 사람답게 키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온실의 화초처럼 연약하게 자란 아이들은
자립정신 보다는 의타심만 조장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아이들이 장성해서 각기 세대를 갖고 서울과 원주에서 살고, 우리 내외만 춘천에서 살고 있는데,
처는 지금도 김치나 밑반찬을 만들어 며느리들에게 갖다 준다. 친정 어미가 딸네집에 반찬 해다 주는
예는 있지만 시어미가 며느리에게 해다 주는 예는 드물 것이다.
자식들에게 대한 지극한 사랑과 몰아애(沒我愛)의 발로이리라.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의 하나라지만 기왕 내친김에 하나 더 늘어놓겠다.
처는 성격이 온순하고 나대는 성품이 아니면서도 사회 활동은 많이 하는 편이다. 교직 동료 모임이나
공직자 부인 모임 등 여러 모임에서는 언제나 그 책임을 맡고, 적십자사 사회봉사자문위원으로 활동
하기도 하고 집권당의 여성부위원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전에 강원도교육위원회 교육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교육위원은 교직에 몸 담았거나 교육에 뜻을 둔 인사는 한번 쯤 해보고 싶은 직책이고, 교육계에서는
모두가 우러러 보는 큰 명예직이다. 그런 교육위원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문교부나 강원도
교육청에 아는 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사직을 내놓은 지도 매우 오래되어 교육계에서는 거의 잊혀져
가는 실정이다.
그러니까 처의 인물 됨됨이가 은연 중에 알려져서 막강한 명예직에 선임이 된 게 아닌가 한다.
감사 합니다.
카페지기
첫댓글 우리가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걸 익히는 겁니다
종욱친구의 남다른 배려심과 모든 친구들을 포용하는 힘이 있나 봅니다
어멋님의 현모양처 스런 모습이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