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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5월26일(일요일) 화성시 [용주사&융건릉] 탐방일정
탐방지 : 화성시 [용주사&융건릉]
탐방코스: [병점역 3번 출구~(3.9km)~화성 용주사~(1.6km)~정조 효공원~(1.0km)~화성 융건릉 매표소~(1.0km)~융릉~(1.2km)~건릉~(0.8km)~화성 융건릉 매표소~(4.9km)~병점역 3번 출구] (이동거리 14.4km)
탐방일 : 2024년 05월 26일(일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화성시 안녕동 최저기온 15도C, 최고기온 25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35분 소요)
08:00~09:30 구산역에서 6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신도림역으로 간 후 1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병점역으로 이동 [1시간30분 소요]
09:30~09:35 병점역 3번 출구로 이동
09:35~10:35 경기 화성시 떡전골로 97 번지에 있는 병점역 3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화성 용주사(龍珠寺)로 이동
[인문기행 경기도의 전통사찰 24] 화성 용주사, 정조대왕 효심이 빚어낸 사찰불사, 숭유억불을 밀어내다
기자명 한동민
중부일보 기사 입력 : 2022.08.18 18:26 수정 2022.08.25 09:04
◇현륭원, 또 다른 수원을 만들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그해, 조선에서는 정조가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며 현륭원(顯隆園)으로 명명하였다. 이에 수원은 읍치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 역사적 대격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1800년 정조는 소원에 따라 아버지 곁에 묻혔다. 건릉(健陵)이다. 110년 뒤인 1899년 고종황제는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추봉하였다.
정조 이래 모든 국왕은 장헌세자의 직계 후손으로 왕위가 계승되었다. 장헌세자와 정조가 묻힌 수원 땅은 새로운 고향으로 여겼고, 이에 모든 국왕은 화성과 화령전 및 융·건릉을 참배했다. 국왕들의 지속적 능행과 화성에 대한 관심은 수원이 경기도의 여타 도시와 다르다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고, 서울과 경쟁하고자 하는 의식을 낳았다.
조선시대 따라 배워야 할 군주의 모범은 정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그전까지 따라 배워야 할 모범은 세종대왕이었지만 이후 정조대왕으로 바뀌었다.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방대한 문집을 남겼으며, 원행과 능행을 자주했던 정조대왕을 따라야 했다. 하물며 정조가 건설한 화성과 융·건릉은 체모가 엄중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직계 선조가 묻힌 융·건릉의 원찰이 바로 용주사였다. 여느 사찰과 비교할 수 없는 왕실의 관심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셈이다. 비명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현륭원 조성은 왕릉에 버금가는 시설과 석물에 정성을 담았다. 화려한 병풍석과 장명등의 우아하면서도 찬란한 조각은 정조 자신이 묻힌 건릉(健陵)의 단조로움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병풍석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조차 무시한 채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하고 싶어했던 정조의 마음씀씀이를 볼 수 있다. 현륭원의 원찰로 건립된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때 창건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던 곳이다. 고려 광종 때 전란으로 불타버려 잡초 우거진 채 버려져 있던 곳에 용주사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 통합정치를 꿈꾸다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 현륭원의 능침수호 사찰로 건설된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이다. 당대의 고승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삼고 중앙 관방과 8도 대관들이 시주한 8만 7천 냥으로 용주사를 건립한 것이다. 용주사는 다른 오랜 사찰들에 비해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여느 사찰에 비할 바 없는 위상과 사격을 부여받으며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로 대우받았다. 이는 정조의 꿈이기도 했다.
정조는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를 건립하면서 단순히 두부를 만들고 제향만 하는 조포사가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중심사찰로 만들어 불교계를 재편하면서 사상계를 통합하고자 했다. 이에 용주사 건립 비용을 국가 재정이 아닌 전국적으로 시주금을 통해 마련함으로써 재정 낭비라는 지탄을 피하고, 자신의 효심을 세상에 널리 드러냄과 동시에 장헌세자의 명예 회복을 대중적으로 공인받는 공론화 작업을 펼친 셈이다. 이에 임금 스스로 용주사 봉불기복게(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짓고, 재상 채제공(蔡濟恭)에게는 용주사 대웅보전 상량문을 쓰게 하였고,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에게는 용주사 주련을 쓰게 함으로써 숭유억불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를 깨는 상징성을 부여했다. 또한 대웅보전 후불탱화를 어진화사 김홍도 등과 승려들을 통해 그리게 하거나 대웅보전 삼세불을 봉안하는 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게 한 것도 용주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용주사 주지를 조선팔도를 총괄하는 승통(僧統)으로 임명하고, 남·북한산성의 승군들을 중심으로 하는 승군체제에 변화를 모색하고, 수원에 주둔한 장용영 외영을 강화하는 지역 방어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더욱이 용주사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하사하여 불교의 효가 유교의 효와 다르지 않다는 점과 당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인식하던 서학(西學)을 견제하려는 뜻도 있었다. 국왕의 효행을 통해 백성들에게 효성과 충성을 이끌어내고, 오래된 이단을 끌어안아 새로운 이단을 제어하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 활동은 불교계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조선후기 르네상스기였던 숙종, 영조, 정조시대에 중창 불사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화룡점정이 1790년 정조에 의해 용주사가 원찰로 건립되면서 그 경향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용주사가 특별한 이유
용주사는 평지에 자리 잡아 일주문인 산문(山門)이 없다. 최근에 조성된 사천왕문을 들어와 매표소를 지나면 눈에 들어 오는 것은 길을 따라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세워 놓은 선돌들이다. 가장 앞자리에 ‘도차문래 막존지해(到此門來 莫存知解)’라고 음각된 화강암이 양쪽에 서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마음을 비우라는 뜻이니, 어쭙잖은 사바세계의 알음알이로 덤벼들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한 선돌의 주장과 영접을 속에 홍살문과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과 삼문 또한 용주사가 왕실의 원찰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절집에 홍살문의 존재는 사도세자 위패를 모신 신성공간이라는 표식이다. 양반사대부의 솟을대문 형식의 삼문을 지나면 고려시대 5층 석탑 뒤로 웅장하게 서 있는 천보루(天保樓)가 시야에 들어온다. 천보루! 국왕의 만수무강과 왕실의 번창을 기리는 의미를 지닌다. 원찰이라 그러한 거창한 이름의 누각을 세울 수 있었으리라. 대웅보전과 함께 창건 당시에 건립되어 주불전으로 가는 출입구의 구실을 하고 있다. 아래 돌기둥의 웅장함은 경복궁 경회루 돌기둥을 닮아 있다. 천보루를 지나면 앞에 대웅전이 서고 양옆으로 거대한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각기 뜰이 있는 口자 모양의 건물이다. 더욱이 툇마루가 달린 건물양식은 일반 절집의 모양이 아니다. 원행에 따라 나선 사람들의 숙박을 배려한 건축양식인 셈이다. 대웅보전 후불탱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음양법을 수용한 서양화풍으로 유명하다. 또한 용주사가 효의 도량임을 알리는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이 대웅전과 지장전 사이에 서 있다. 정조 때 부모은중경을 새긴 목판과 순조가 하사한 동판, 석판이 오늘도 단정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도 있다. 이들은 모두 용주사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대웅전의 왼쪽 범종각에는 국보 120호인 신라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범종이 있다. 비천상이 양편으로 두 곳에 돋을새김되어 있고 삼존불이 한 곳에 조각되어 있는 유려한 범종이다. 범종의 가운데는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주조 당시에 새긴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3년 당시 주지 강대련 스님이 새겨 넣은 것이다. 한국의 동종은 국제적 학명으로 '코리안 벨(Korean Bell)'로 불리는 독창성을 자랑한다. 국보로 지정된 한국의 동종은 4개에 불과한데,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천흥사 동종과 용주사 동종이다.
◇호성전과 다양한 문화행사
용주사의 존재 이유는 본래 호성전(護聖殿)에 있었다. 호성전은 장조의황제(사도세자), 헌경의황후(혜경궁)와 정조선황제, 효의선황후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매년 적어도 6번 이상의 제향을 지냈다.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전국적 명물 ‘수원 약과(藥果)’를 언급하고 있다. "수원군 용주사에서 아주 잘 만드는데, 이 약과는 융릉에 제향하는 제수로 그 품격이 최고다.(水原郡龍珠寺 精造此果 供隆陵祭享之需 品爲極嘉)"라 적고 있다.
수원 약과는 이미 조선 전기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물로 대접받아 양녕대군이 대접받았고, 병중의 인조 임금에게 입맛을 돋우기 위해 수원약과를 원했을 정도였다. 제향에 쓰였던 용주사 약과를 다시금 맛보고 싶은 것은 헛된 꿈일까?
친일승려의 대표였던 강대련 스님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용주사는 해방 이후 1955년 비구·대처 분규를 빚으며 거듭났다. 1962년 관응 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용주사는 안정을 찾게 되었고, 1969년 전강스님이 중앙선원을 개설하면서 용주사는 제2교구 본사로서 위상과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그렇게 지엄하던 호성전이 6.25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가 38년만인 1988년에 복원될 수 있었다. 이는 한국불교계가 중흥기를 맞이했음과 동시에 용주사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 사례라 하겠다. 2020년 8월 20일 새벽 화재로 호성전이 다시 전소되었다. 전쟁 때가 아닌 평시에 호성전이 불탄 것에 대한 용주사 내부의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과 달리 호성전 복원이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1938년 가을 용주사 대재(大齋)가 열려 승무 등 다양한 행사가 베풀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19살의 조지훈(1920~1968)이 용주사를 찾았다. 그날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 난 감동으로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을 잃고 서 있었던 그는 최승희의 승무와 이왕직의 아악 그리고 김은호 화백의 승무 그림까지 섭렵한 뒤 1939년 잡지 ‘문장(文章)’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절창을 담은 시 ‘승무’를 발표하였다. 이에 2004년 10월 ‘승무’ 시비가 용주사에 건립되어 창작의 산실임을 알렸다. 용주사는 그렇게 다양한 문화예술의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에도 부처님 오신날은 인근 주민들이 찾는 명소였다. 그렇게 용주사는 지역과 함께 할 때 빛이 났던 곳이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10:35~11:00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된 사찰인 화성 용주사(龍珠寺)를 탐방
[화성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는 조선후기 현륭원의 능사로 창건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광종 3)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1790년(정조 14)에 사일(獅馹)이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이 절은 전국 5규정소(五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하였다. 그 뒤 1900년에 용해(龍海)가 중수하였고, 1911년에는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안성·남양·죽산·진위·음죽·용인·고양·시흥 등에 있는 49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31년에 강대련(姜大蓮)이 중수하였고, 1955년 사찰 정화 뒤에 조계종 제2교구 본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관응(觀應)이 불교 전문강원을 개설하였으며, 1965년 대웅보전을 중수하였다. 1966년 주지 희섭(喜燮)이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의 역장(譯場)을 두었고, 1969년 전강(田岡)이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설립하여 1975년 지장전을 중수하고, 1977년 일주문을 세웠으며, 1981년 3층의 부모은중경탑을 세웠다. 1985년 불음각(佛音閣), 1986년 중앙선원 건물을 지었다. 1987년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1988년 호성각을 지었다. 1993년 천불전을 짓고 만수리실을 개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용주사 대웅보전이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지장전(地藏殿),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범종각, 법고각(法鼓閣), 봉향각(奉香閣)과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천보루,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曼殊利室), 삼문각(三門閣), 일주문, 수각(水閣), 동별당(東別堂) 등이 있다. 또 문화재로는 1964년 국보로 지정된 용주사 동종과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금동향로, 청동향로, 용주사 상량문, 전적수사본, 용주사 병풍, 용주사 대웅전후불탱화 등이 있다.]
[화성 용주사 종
불교신문3335호/2017년10월4일자
글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고려 범종 대표 수작으로 국보 가치 충분
통일신라 종 전형 양식 구비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걸작’
제 나이 잃어버린 종 아쉬움
어느 절서 옮겨온 지 불분명
국보 122호이며 높이는 144cm
지금까지 살펴본 통일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전기까지의 범종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양식의 정착이라는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적 경향을 토대로 본 호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고려 전기 범종이 바로 화성 용주사(龍珠寺)에 소장된 국보 범종이다.
용주사 종이 원래 어느 절에서 옮겨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종이 광복 이후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은 144cm를 지닌 비교적 큰 외형과 완전한 보존 상태뿐 아니라 몸체에 큰 글자로 새겨진 통일신라에 해당되는 명문의 중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기록된 명문을 살펴보면 ‘성황산갈양사 범종일구석반 야주성이만오 천근 금상십육년구 월일사문 염거(成皇山葛陽寺 梵鍾一口釋般 若鑄成二萬五 千斤 今上十六年九 月日沙門 廉居)’로, ‘성황산 갈양사 범종으로서 이만오천근을 들여 금상 16년 모월 모일에 사문 염거가 발원하였다’는 어쩌면 범종의 명문으로는 매우 간결한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상 16년은 범종의 다른 쪽 몸체에 기록된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16년으로서 854년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일단 명문을 통해보면 이 종은 통일신라 854년에 염거 스님이 갈양사(葛陽寺)를 창건하고 그 때 이 종도 함께 주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 명문은 종의 제작과 관계없는, 그것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닌 20세기 초에 추각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 종의 발원자로 기록된 염거화상의 입적 년대가 20세기 초에 들어와 밝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강원도 원주에 있었던 염거화상의 승탑(국보 140호)은 우리나라 승탑 가운데 가장 오랜 예로 평가받는데, 이를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안에서 발견된 금동 탑지(金銅塔誌)였다. 이 탑지는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해 승탑을 해체하면서 사라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발견되어 1919년 총독부 박물관에서 다시 구입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가로 17.2cm×세로 28.8cm의 방형 탑지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 중에 ‘회창사연세차갑자계---염거화상탑거석가모니불, 입열반일천팔백사연의(會昌四秊歲次甲子季---廉巨和尙塔去釋迦牟尼佛, 入涅槃一千八百四秊矣)’라는 구절이 있어 염거화상이 844년에 입적한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뒤늦게나마 인정받아 2015년 보물 1871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승탑 내에서 발견된 염거화상 탑지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용주사종의 명문은 염거화상이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 종을 발원하여 만들었다는 웃지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가장 확실한 통일신라의 승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탑지의 내용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분명 용주사 종의 명문이 왜곡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어째서 이런 명문을 종 표면에 새기게 된 것일까?
그 의문은 용주사가 있던 자리가 원래 통일신라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갈양사(葛陽寺)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조선시대 1790년 정조(正祖)가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圓)의 능사(陵寺)로 건립하였다는 후대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용주사는 정조의 능행, 김홍도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의 자료를 통해 나름대로 꽤 큰 사세를 떨치기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갈양사에 관련된 초창의 역사를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용주사는 그 사격을 높이고자 의도적으로 무명의 범종에 ‘갈양사(葛陽寺)’란 사명을 새겨 넣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럼 이 종이 원래부터 명문이 없었다 치더라도 과연 용주사 종이 통일신라 종 양식을 구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종은 오히려 통일신라 종의 전형 양식을 구비한 가장 전형적인 고려 전기 종으로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될 수 있다.
용주사 종의 특징을 살펴보면 종신은 상원사종과 같은 통일신라 종에 비해 홀쭉해져 세장한 느낌이다. 용뉴는 목을 구부려 천판을 물고 있으나 입 안으로는 보주가 표현되었고 앞, 뒷발로 천판을 누른 통일신라 종과 달리 왼발을 위로 들었다. 용뉴 뒤에 붙은 굵은 음통 부분은 마디를 이루며 서로 맞닿은 앙, 복련문이 아니라 위로부터 원형문과 반원권문, 당초문을 차례로 시문한 점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특히 천판 위로는 용뉴 주위를 돌아가며 용뉴와 음통을 별도로 주조할 때 생긴 주물 접합선이 한단 높게 돌출되어 있음도 독특하다. 상대와 하대는 서로 다른 문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반원권을 번갈아가며 배치한 상대와 달리 하대에는 유려한 줄기로 굴곡진 연당초문이 시문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종이 통일신라 종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종신 상부 면에 불, 보살의 삼존상(三尊像)과 비천상을 번갈아 가면서 새긴 점과 4개로 늘어난 당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통일신라 종의 비천상은 833년의 연지사(蓮池寺) 종까지 2구 1조의 주악상을, 다시 통일신라 말까지는 1구의 주악상을 앞, 뒤로 배치한 것이 특징적이다. 여기에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963년에 만들어진 조우렌지(照蓮寺) 종을 시작으로 주악상에서 몸을 옆으로 뉘어 나는 비행비천상(飛行飛天像)으로 바뀌게 되다가 청녕4년명(1058) 종에서부터 다시 불, 보살상으로 변화되는 양식적 변천을 보인다.
따라서 용주사종에 보이는 불, 보살의 삼존상과 비천상이 함께 나오는 것은 고려 전기의 과도기적 양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당좌는 원형의 연화문 주위를 고사리형의 당초문으로 두른 약간은 도식화된 형태로서 통일신라 종에 비해 아래쪽으로 치우친 하대 바로 위에 배치되었다. 특히 1058년에 제작된 청녕4년명 종에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4개의 당좌를 구비하고 있는 점에서 용주사 종은 절대로 통일신라 종이 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통일신라 종의 명문 기록은 성덕대왕 신종을 제외하고 종신 표면에 이처럼 보기 싫게 음각시킨 예는 결코 볼 수 없다. 물론 글씨의 형태도 유려한 통일신라 서체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종 가운데 이 정도의 크기를 지닌 종에 처음부터 명문을 새기지 않은 예가 그리 흔치 않지만 원래부터 명문이 없다는 것이 불행이 되었는지 용주사 종은 결과적으로 후대에 왜곡된 명문을 새길 수 있었던 빌미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용주사 종은 원래의 명문이 없더라도 단정한 외형과 정교한 문양, 주조기술 면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으로서 국보로 지정받아 전혀 손색이 없는 종이라고 평가된다. 그 제작 시기는 일단 청녕4년명(1058) 종보다 뒤늦으며 새로운 형식의 삼존상이 등장한 점으로 미루어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중반쯤 제작된 범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여음(餘音)
용주사 종의 명문은 문화재 가치를 파악하는데 있어 남겨진 기록뿐 아니라 같은 시기의 유물을 비교하여 형식과 양식의 분석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미술사 연구 방법론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좋은 사례이다. 비록 제 나이를 잃어버렸지만 이제라도 국보 용주사 종이 지닌 의미와 그 가치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기대된다.]
[용주사 효행박물관 소장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
불교신문3644호/2021년1월13일자
기자명 :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불교중앙박물관 팀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 칭송
현세부모 봉양 안주하지 않고
윤회苦까지 종식…‘해탈’ 지향
불교 효행문화의 진수 알리는
‘세계 유례없는 성보문화재’
“부모은혜 고마움 느끼는 것은
자기의 중심을 세우는 것으로
어려운 세상 살아가는 버팀목”
서울에서 1시간 거리 정도 지척에 위치한 화산 용주사(조계종 제2교구본사)는 지금은 우리가 쉽게 가 볼 수 있는 정겨운 사찰이다. 융건릉에서 병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이 넓게 트이면서 용주사가 반긴다. 정조는 이 길을 가기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고 길 위의 백성들을 만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났었다. 용주사 일주문을 들어가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용주사효행박물관이 있다. 효행이란 종교와 이념을 넘어서는 인간의 소중한 가치이다. 효행박물관이라는 박물관 명칭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요즈음은 사찰에 가면 성보박물관을 종종 볼 수 있다. 수많은 사찰의 성보문화재는 신앙의 힘과 원력, 뛰어난 장인이라는 삼박자가 잘 맞아 조성된 것이다. 사찰에 봉안된 성보문화재는 당연히 예경의 대상으로 불전에 모시지만, 도난과 화재 등에서 보호하기 위한 대안으로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현재 박물관에 소장된 성보문화재는 다른 사찰과 구별되는 독창성이 있어 그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찰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이 뚜렷하다.
용주사 효행박물관의 대표적 문화재는 과연 이름에 걸맞게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이다. 이 경판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모님의 은혜의 귀중함과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새긴 것이다. 이 경판이 용주사에서 만들어진 배경에는 조선의 성군 정조대왕이 있다.
➲ 정조의 효심 가득한 용주사
조선시대의 중흥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군주로 영조와 정조를 꼽는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관리를 골고루 등용하는 등 시회적·정치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83세까지 천수를 다한 조선에서 가장 장수한 왕이며, 52년 동안 왕위를 누린 인물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어렵게 얻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도세자 죽음의 배경에 대해 당파 싸움에 희생되었다는 설과 영조가 보기 드물게 장수하여 그 정적이 바로 그 아들이 된 것이라는 설 등 분분하지만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드라마틱한 내용이다. 결국 손자인 정조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정조는 할아버지의 장점을 본받아 사회개혁을 이루어 내어 역사의 진전된 발전을 이루어낸 현명한 왕이었다.
특히 정조시대는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라 일컬을 정도로 문화의 부흥을 일으켰는데, 이는 본인의 문화적 소양에 기인한 바가 큰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동국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정조가 그린 파초도에서 그의 예술적 기량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여러 저술과 강론을 남겼으며, 그의 기개가 느껴지는 서예도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본인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1762)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할 정도로, 그의 부친의 삶을 애달파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花山)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였다.
현릉원의 능사(陵寺)로 용주사를 중창하고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능침사찰은 대부분 운영되는 사찰 가운데 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용주사는 왕실에서 주도하여 세운 특이한 경우이다.
정조는 용주사의 설립계획을 치밀하게 구상해서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1790년 2월에 용주사의 입지를 선정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9월에 대웅전에 불상을 점안하여 마무리 하였다. 용주사 건립에는 총 216일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총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정조의 측근이자 수족들이 총동원 되었는데, 채제공(蔡濟恭, 1720~1799)과 김홍도(金弘道)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친숙한 인물이다.
정조는 직접 ‘용주사’라 사명(寺名)을 지었다. <정조실록>에 실린 부친인 장헌세자의 꿈에 용이 구슬을 안고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정조가 태어났다는 기사와 <화산용주사상량문>에 “아 대궐의 임금이 처음으로 사찰의 이름을 내리신 것은 평상시 부처의 덕을 갚고자 한 까닭이다”라는 부분에서 그 사연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세계의 유례없는 효행본찰(孝行本刹)이라는 이름으로 용주사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 부모의 은혜를 새기다
사람들은 보통 불교에서 효는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 초기 경전에서부터 석가모니부처님 스스로가 효행을 실천한 인연 설화를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서 효는 현세의 부모 봉양에 안주하지 않고 윤회 속 괴로움을 종식시켜 해탈로 지향한다는 점이 효행을 구현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부모은중경>은 내용이 길지 않으나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게 구성되어 있는 완성도가 높은 경전이다. 정조는 보경당 사일스님에게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섣달그믐과 단옷날에 <부모은중경> 게송을 인쇄하여 배포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1796년 목판과 동판의 간행을 완성하였고, 이후에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자 돌에 새겨 용주사에 내려 주었다. 석판은 경문을 반전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새긴 석경(石經)인 것이다. 용주사본은 당대 최고 기량을 갖춘 자비대령화원에 의해서 밑그림이 그려지고, 주도한 인물은 김홍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용주사 <부모은중경>은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종분은 본문 격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이 고골(枯骨)에게 예배하고 이가 곧 전생의 부모일지 모른다고 설명하는 여래정례도(如來頂禮圖)를 시작으로 한다.
이어 임신에서 양육까지의 은혜를 10폭으로 그린 것을 담았다.
①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은 임신을 하여 몸가짐을 조심하는 은혜
②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은 해산에 임박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③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은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④연고토감은(咽苦吐甘恩)은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여 키우시는 은혜
⑤회건취습은(回乾就濕恩)은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누이는 은혜
⑥포유양육은(哺乳養育恩)은 젖을 먹여서 기르는 은혜
⑦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은 손발이 닳도록 깨끗하게 씻어주신 은혜
⑧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은 부모의 곁을 떠날 때 걱정하시는 은혜
⑨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은 자식을 위해 악업으로 나아가시는 은혜
⑩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은 자식을 평생 애처롭게 여기고 걱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음은 불효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지수제건(指數諸愆)과 부모의 은혜가 막중함을 비유하여 설명한 원유팔종(援喩八種)의 내용이다. 용주사판은 원유팔종 가운데 주요수미(周遶須彌周) 장면만 변상으로 새겼다. 수미산을 백 번 천 번 돌더라도 부모의 깊은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장은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계발참회(啓發懺悔)는 사경ㆍ독송하며 삼보를 공양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아비타고(阿鼻墮苦)는 불효를 행하면 아비무간지옥(阿鼻無間地獄)에 떨어진다는 과보를 설하고 있다. 상계쾌락(上界快樂)은 이 경전을 조성하면 은혜를 갚는 것이 되어 부모가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상계쾌락도를 새긴 것은 용주사판이 유일하다.
유통분은 설법을 들은 대중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겠다는 맹세와 부처님이 경전의 이름을 ‘대보부모은중경’으로 정한다는 내용이다. 이 경전은 부모에게 보은하는 방법으로 <부모은중경>의 간행과 배포가 중요함을 설하였다. 오늘날 용주사 간행의 <부모은중경>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전으로 칭송하고 있다
필자가 첫 번째로 소개하는 성보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판을 꼽은 것은 새해를 맞아 불심에 담긴 효심을 음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부모의 은혜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자기의 중심을 세우는 것으로,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데 버팀목이 된다”는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코로나19로 효행의 길은 더욱 멀기만 하다. 힘든 세상살이를 헤쳐오신 모든 부모님들이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 필자 이분희 문화재전문위원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학예업무 총괄’을 맡고 있다. 동국대 대학원에서 조선 전기 아미타불상에 대한 내용으로 석사, 한국 탑안에 봉안된 불상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재전문위원으로 불교문화재 관리에 대한 업무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화성 용주사 삼세불상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불교신문3351호/2017년12월6일자
불교신문 기사 입력 : 2017.12.04. 13:36
기자명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조선 정조의 ‘효심’ 깃든 당대 최고의 성보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 반영
왕실 대작불사 진행과정 보여줘
언뜻보면 닮은 듯하지만 개성 뚜렷
전국서 활동한 조각승 대거 참여
사찰불사에 효심이 녹아든 사례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에 위치한 용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로 효행의 본산이라 일컬어지는 절이다. 조선후기 효심이 깊었던 정조대왕(1752~1800)이 아버지 사도세자(1735~1762)를 위해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창건했기 때문에 ‘효의 사찰’이란 이름을 얻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정조는 아버지 능침 사찰을 용주사(龍珠寺)로 정했다.
용주사는 억불숭유 정책을 내세운 조선시대에 오대산 상원사와 함께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찰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정조가 사도세자로 잘 알려진 아버지 장헌세자의 무덤을 이장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용주사는 짧은 공사기간으로 1790년에 건립되었다. 왕실의 원찰이자 왕의 능침을 관리하고 명복을 비는 재를 지내는 능사(陵寺)의 역할을 수행한 사찰로 전체 조영을 계획해 새롭게 창건한 절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조선의 왕으로서 대표적인 효자를 상징하는 정조대왕이 살았던 18세기의 조선은, 사대부 중심의 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대대적인 혁신이 요청되던 시기였다. 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강력하게 실현시키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펴 나갔는데 정조는 그 명분을 효에서 찾았다. 그는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묘를 경기도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으로 옮기고, 여러 차례 능행(陵行)을 갔으며, <대부모은중경>과 <오륜행실도>를 간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효라는 대의명분을 강조하여 보수적인 세력이 왕권 강화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조 자신의 정통성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정조는 보경당 사일스님에게 <부모은중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다. 국왕이 발원하여 <부모은중경>을 간행하였다는 것은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정조는 섣달 그믐과 단오날에 <부모은중경> 게송을 부적 대신 집안에 붙이도록 인쇄해 나누어주게 할 만큼 백성들에게 배포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용주사에는 나무, 돌, 금속으로 만든 세 종류의 <부모은중경>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 경전은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김홍도로 하여금 밑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부모님의 은혜가 지중함을 10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경전의 첫 장면은 부처님께서 전생의 부모의 뼈를 보고 절하는 ‘여래정례(如來頂禮)’로부터 시작된다.
용주사본 ‘여래정례’ 장면은 제자 18인이 땅에 엎드려 절하는 석가여래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다. 한 무더기의 뼈를 보고 엎드려 절하는 석가여래의 주변에는 눈부신 광채가 햇살처럼 퍼지고 있다. 서서 목례만으로 예를 나타내던 이전의 석가여래에 비해 완전히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혀 합장하고 있는 모습은 파격적이다. 한 무더기의 뼈는 곧 사도세자의 유골이고, 허리를 굽혀 절하는 석가여래는 정조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킨 것은 아닐까. 이를 반영하듯 화면 향우측 끝 스님들 사이에 세속 인물이 보이는데 정조로 추정된다.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건립한 정조는 능행 때마다 용주사를 찾았을 것이다. 1790년 용주사를 세운 6년 후인 1795년에 정조는 손수 부처님께 복을 비는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를 지었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한 조선시대 국왕이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게를 짓고 이를 책으로 간행한 것은 정조가 유일하다. 그는 <기복게>에서 자신을 소자(小子)로 지칭해 게를 지어 바치는 대상이 부처님인지 아버지인지를 모호하게 하였다. 부모님께서 길러주신 은혜가 있으니 부모님을 공양하고 잘 공양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福田)이라고 해, 게를 작성하는 목적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공양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용주사의 중심 불전은 대웅보전으로 불전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의 높은 불단에 사바정토의 석가여래,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여래,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있는 세 부처님의 명칭은 용주사 창건에 관련된 인물들을 기록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후기 삼세불 사상은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적 의미를 뜻하는 삼세불 개념에 공간적인 개념이 더해지고, 극락왕생을 바라는 아미타신앙과 현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약사신앙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다. 정조는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뒤로 하고 아버지 장헌세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할 목적으로 용주사에 삼세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의 삼세불상 위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조각된 닫집이 있고 뒤에는 김홍도가 그렸다는 웅장한 후불도가 있다. 대형의 불상이 사라지는 18세기 후반에 1미터가 넘는 크기로 조성된 용주사 삼세불상은 왕실의 원찰이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용주사 삼세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부처님의 모습이 각기 다르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닮은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개성이 뚜렷한 다른 모습이다. 조선후기에 조성된 삼세불상은 대부분 수조각승 한 명의 지휘 아래 여러 보조 조각승들이 동참했기 때문에 유사하게 표현되었던 것과는 다르다.
세 부처님 모두 유난히 큰 귀, 머리 중앙의 반달형 중간 계주, 머리와 육계를 구분하지 않은 채 육계 위에 원통형의 정상 계주를 표현한 것은 공통점이다. 넓게 열린 가슴 앞에 연꽃잎 형태의 주름, 두 무릎 사이에 펼쳐진 율동감 넘치는 옷주름은, 비슷하면서도 세부 표현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한 자비로운 모습의 석가여래, 입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간 아미타여래, 근엄한 모습이 강조된 약사여래의 얼굴 표정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감지된다.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가진 이유는 세 불상의 조각승이 서로 달랐던 데서 찾을 수 있다.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삼세상원문(三世像願文)’과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조각승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는데, ‘삼세상원문’에는 불상 제작에 상계(尙戒), 설훈(雪訓), 계초(戒初), 봉현(奉玹) 등 20명의 조각승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본존인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 내장사의 계초스님이 담당했고, 아미타여래는 전라도 지리산 피근사의 봉현스님이 조성했고, 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상직(尙植)스님이 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세상원문’에는 상계로 기록된 조각승이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에는 상직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같은 인물이 잘못 기재된 예이다.
석가여래를 조성한 계초스님과 아미타여래를 제작한 봉현스님은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조각승 상정(尙淨)을 계승한 유파로 생각된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왕실 주도로 단기간에 완료해야 했던 불사였기 때문에 강원도와 전라도 등 전국에서 활동한 조각승들이 참여하였다.
‘삼세상원문’에 의하면 불상은 8월16일부터 시작해 9월30일에 완성했으며 10월 초에 점안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렇듯 빠른 시일 안에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각 지방의 뛰어난 조각승들이 동참했을 것이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세 명의 수조각승이 개성적인 조형 감각으로 각자의 기량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불상이다.
용주사 삼세불상은 아버지 장헌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이 사찰 불사에서 어떻게 반영되었고, 18~19세기의 불상제작이 줄어든 상황에서 왕실 불사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자료이다. ]
[능사(陵寺)
능(陵)을 지키기 위하여 세웠거나 지키도록 지정한 절.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가장 큰 목적 외에도 왕릉을 관리하기도 하고 도굴 등으로부터 능을 지키는 감시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내려와서도 그대로 따랐다. 조선시대의 능사로는 개경사(開慶寺:조선 태조의 健元陵의 능사), 봉선사(奉先寺:세조의 光陵의 능사), 신륵사(神勒寺:세종의 英陵의 능사)가 있다. 3대 태종(太宗)만은 그의 유언에 따라 능사가 없다.]
11:00~11:25 경기 화성시 안녕동 164-35 번지에 있는 정조효공원으로 이동
11:25~11:35 정조효공원을 탐방
11:35~11:50 경기 화성시 안녕동 187-35 번지에 있는 융건릉 매표소로 이동
11:50~12:05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번지에 있는 융릉(隆陵)으로 이동
[융건릉(隆健陵)
융건릉(隆健陵)은 사적 제20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장조(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융릉(隆陵)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또는 장헌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 ~ 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이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 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묘지 이장을 준비하고 곧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 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죽은 후 그 곁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대한제국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건릉(健陵)
건릉(健陵)은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21년 후 순조 21년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다 김조순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주장으로 길지를 찾아 순조 21년 1821년 정조의 릉을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2:05~12:15 조선 정조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또는 장헌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 1735년 ~ 1762년)와 혜경궁 홍씨로 널리 알려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 1735년 ~ 1815년)가 함께 모셔진 능인 융릉(隆陵)을 탐방
[장조(莊祖)
조선국 추존왕
대한제국 추존황제
조선의 왕세자
재위 1736년 3월 15일 ~ 1762년 윤5월 13일 (음력)
전임 : 효장세자 (조선의 왕세자. 묘호는 진종(眞宗), 시호는 소황제(昭皇帝). 세자로서 받은 시호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이다. 휘는 행(緈), 자는 성경(聖敬). 영조의 장남이며, 사도세자의 이복형, 정조의 양아버지 겸 큰아버지다. 만 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했지만 뜻하지 않게 정조가 그의 양자가 되면서 추존왕으로, 뒤에 정조의 계통상 4대손이 되는 순종에 의해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서자(모: 정빈이씨)이기는 했지만, 숙종이 생전에 본 유일한 친손자이기도 하다.)
후임 : 문효세자 (조선의 왕세자(王世子)이자 제22대 정조의 장자이며,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첫아들이기도 하다. 휘는 양(㬀),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제23대 순조의 이복 형이다.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미시(未時)에 5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창경궁(昌慶宮) 자경전(慈慶殿) 동쪽 행각에서 갑자기 훙서하였다.)
이름
휘 이선(李愃)
이칭 사도세자(思悼世子) · 장헌세자(莊獻世子)
묘호 장종(莊宗) → 장조(莊祖) (1899년)
시호 사도수덕···장헌광효의황제
능호 융릉(隆陵)
융릉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 1-15
신호 뒤주대감
신상정보
출생일 1735년 1월 21일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사망일 1762년 5월 21일(27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경궁 문정전
부친 영조
모친 영빈 이씨
배우자 헌경왕후 홍씨
자녀 5남 3녀
의소세자 · 정조 · 은언군 · 은신군 · 은전군
청연공주 · 청선공주 · 청근옹주
장조(莊祖, 1735년 2월 2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일(음력 윤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다. 정조의 아버지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영조 25년) 어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어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아들 정조에 의해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는 후일 저서 《한중록》에서 그가 의대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였다가 후에 고종 때 국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莊宗)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대감이었다.
생애
탄생과 세자 책봉
아버지 영조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영빈 이씨의 소생인 영조의 서장자(차남)로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생후 1년만에 원자(元子) 정호를 받았다. 그가 태어날 때 부왕 영조는 친히 어머니 영빈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빈 이씨가 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낳았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중략)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종(三宗, 효종 · 현종 · 숙종)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하였다.
—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년 청 옹정(雍正) 13년) 1월 21일 (임진)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그는 후궁 출신 서자였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가 되고,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부왕 영조를 적대시하던 왕대비 선의왕후가 거처하던 저승전(儲承殿) 이었고, 저승전 옆에는 지난 희빈 장씨가 거주하던 취선당(就善堂)이 있었다. 세자는 그들로부터 경종 독살설과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접하게 된다. 이때 저승전의 나인들 중 한상궁과 이상궁이 주로 세자를 대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역할을 분담하여 세자를 훈육하였다.
정비는 후에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이다. 1736년 3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8세 때는 직접 친필로 동몽선습 등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베끼기도 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10세 때 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 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 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니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 등 날이 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 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하고 영조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했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영조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영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해도 곧바로 기절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새로 태어난 세손에게 각별하였다.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병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산을 출산한다. 한편 세손 정을 각별히 아꼈던 영조는 어린 세손의 장지와 묘비문, 행장을 직접 지어서 남기며 애통해 하였고, 둘째 세손 산을 원손이나 세손에 책봉하는 것도 의소세손의 3년상을 마친 뒤에 하도록 했다.
영조가 귀애하던 화평옹주의 상 중에 태어난 터라 영조는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 이씨에게도 책망 할 정도로 아기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세자는 나 하나도 버거운데 아이는 어찌하나 한탄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후일의 정조가 된다.
대리청정 기간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세손이 태어난 해 영조가 병석에 눕자 사도세자는 부왕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의 처벌, 추탈을 요구했지만 세자는 거절하였다.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고해바쳤다.
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받았다.
또한 소론 출신 재상 조현명, 이종성 등은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 노론 중에서도 원칙론자인 유척기, 이천보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노론에서는 사도세자에게 소론 제거와 이광좌 등에게 추죄를 할 것을 계속 요구했지만 사도세자는 거절하였고, 오히려 소론 4대신에게 우호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이에 노론에서는 이인좌의 난 등을 언급했지만 세자는 듣지 않았다. 노론은 경계했고, 소론은 도리어 감격하였다. 노론에서는 세자가 자신들과 정견이 다르다고 보고 세자의 제거도 계획하는데, 훗날 벽파로 칭해지는 노론 내 일부 외에, 노론 내의 청명당, 노론시파 등 당내 다른 일부 인사들은 세자 배척에 반대하거나 불참한다.
영조, 노론과의 심각한 갈등과 정신질환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한 편지 사도세자는“내 나이가 금년 15살 봄을 넘긴 지가 오래 됐으나 아직 한 번도 명릉(숙종의 능)에 나아가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어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 가문을 선택하였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 1753년 또는 1754년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 (1749년에 보낸 편지)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 1756년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 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1754년 10월 또는 11월에 홍봉한에게 보냈을 편지에서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나라살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
— (1755년 11월 그믐날)
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들 중에는 우울증을 호소하는 대목도 나온다. 1756년 2월 29일, 사도세자는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 고백이다. 편지에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사도세자는 만 14세인 1749년 장인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다. 여기에 대해서는'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그러나 홍봉한이나 그의 집안에서는 사도세자의 서신에 응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혜경궁 홍씨 등은 사도세자의 행동을 자신의 친정에 알렸고, 이는 후일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음모론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노론의 대신들 역시 그의 실수와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정성왕후 생존에는 유화적이었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후에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세자궁에 있던 관료 조유진은 형수이기도 한 효순 현빈의 친정 조카였는데 사도세자는 그를 통해 자신의 형수의 동기간인 조재호와 연결,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소론계열이었던 조재호는 좌의정, 판중추 등을 지낸 인물로 정순왕후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으로 은퇴하였다가, 후에 사도세자의 구원요청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사사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환국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는데, 이 때문에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은 그를 수시로 탄핵, 비판하였고, 시댁이 소론 계열이었던 화완옹주 역시 그를 공격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하지만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모함했다는 증거는 다소 명확하지 않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 당원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난폭한 행동 문제
한편 1760년 이후로 그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혜경궁은 '경진년(1760) 이후로 세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세자를 폐위시키는 반교’에 따르면, 생모인 영빈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말하면서 내관과 나인 백여 명을 죽였고 불에 달궈 지지는 악형을 가했다고 했다. 세자는 주로 만만한 아랫사람들만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학증의 대상이 점차 확대됐다. 후궁은 물론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쫓아가 공격하려고 했다. 영조가 술을 마셨다고 의심했을 때였다. 아마 시강원 스승들이 일러바쳤다고 생각한 듯하다. 죽기 직전에는 생모 영빈까지 죽이려고 했다. 이런 와중에 그는 창덕궁 낙선재 우물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평양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일반불안장애,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를 겪던 세자는 1760년부터 정신분열증까지 겪게 된다. 헛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욕하기 시작했다. 세손(정조) 등이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는 “부모도 모르는 내가 자식을 어찌 알랴”라며 쫓아냈다.
1761년 1월 세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빙애를 죽였다. 옷을 갈아입다가 의대증이 발병해 죽였는데, 얻어맞은 빙애는 세자가 나간 뒤 신음하다가 절명했다. 수칙 박씨는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그 이름은 빙애였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빙애를 구타할 때 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恩全君)도 칼로 쳤다. 그리고 그는 칼 맞은 은전군을 문밖 연못에 던졌다. 평소 사도세자를 경계하고 미워했던 정순왕후의 측근들 중에 세자의 주변에서 세자의 비행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 영조는 자신의 서손자 은전군의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
생애 후반
나경언의 고변과 의문의 관서행
영조 37년 4월 세자는 평안도를 다녀오게 된다. 서명응이나 윤재겸등의 비판상소가 있었으나 장인인 홍봉한과 평안감사이자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의 도움으로 이일은 영조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약관의 나이이던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세자가 평양에 가도록 이를 막지 못하고 영조에게도 알리지 않은 홍봉한과 정휘량을 비판하는 밀봉상소를 영조에게 올렸다가 영조로부터 질책을 듣는다. 이일로 사건발생 5개월후에야 영조는 세자가 평양에 놀러간 걸 알게 된다. 또한 한중록에 의하면 이때 궁궐 바닥에 땅을 파고 공간을 마련하고 군기붙이를 숨겨두려 했다 한다.
그가 불시에 평안도를 방문한 목적과 단시간 내로 오고 간 방법, 한중록에서 지적하는, 그가 궁궐 밑에 비밀리에 땅을 파고 무기를 숨겨둔 사유에 대한 것은 실록이나 한중록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1762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이런 사실들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질책한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1762년(영조 38년) 윤5월 13일, 생모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하여 세손을 보호하라며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다.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수 없는 일을 행한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 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 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 영빈 이씨의 고변
당시 세자를 폐하며 영조가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에는 생모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고변한 내용이 나온다.
불길함을 예상한 사도세자는 일부러 아들 세손이 쓰던, 크기가 작은 휘항(방한모자)를 쓰고 고의로 학질병에 걸린 것, 혹은 정신질환이 심각해진 것처럼 연기하려 했다가 혜경궁 홍씨의 제지를 받았다.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한 그는 자신은 폐하고 세손은 효장세자의 아들이 될 것이라 하기도 했다. 한중록에 의하면 혜경궁이 휘항모자를 빼앗자, 일부러 쓰는 것인데 빼앗는다며 나는 죽고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라고 말했다 한다.
최후
임오화변
1762년 7월 4일(윤 5월 13일) 결국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쌀 담는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세손이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달라 하자 영조는 내관을 시켜 세손을 내보냈다. 세자시강원의 사부였던 윤숙과 임덕제가 현장에 달려왔고, 윤숙은 세자의 처벌은 안된다고 거듭 주장하다가 내쳐졌다. 윤숙은 당시 정승이던 홍봉한, 신만이 세자사(世子師)라는 직책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방치했다며 홍봉한, 신만을 현장에서 탄핵하기도 했다.
영조는 곧 여승 가선과 환자 박필수, 평양 기생 5명을 체포하여 추국한 뒤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사형에 처했다. 한편 홍봉한, 신만, 김성응 등은 상소를 올려 세자의 스승인 윤숙, 임덕제를 유배했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세자(孝章世子)가 훙(薨)하여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는데,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10여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중략)
임금이 경희궁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점점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또 환관, 기녀와 함께 절도 없이 놀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 인사를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번 나라를 위해 근심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의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중략)
세손(정조)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세손이 또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중략)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정조)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혜경궁 홍씨)과 세손 및 여러 왕손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그 뒤 동궁의 관료들이 그에게 미음(죽)과 물을 넣어주자 영조는 이들의 출입을 금기하였다. 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죽)과 물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는다. 사도세자는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이미 소지하고 있던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셨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만다. 8일 뒤인 윤5월 21일 아사한 세자의 죽음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정조는 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와 원호 영우원을 상시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사후 시신은 염습한 직후 홍낙임 등 처가 친정 일족이 관곽을 메고 7월 23일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 남중량포(南中梁浦, 현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 29-1번지) 배봉산 갑좌(甲坐, 동북동쪽) 경향(庚向, 서쪽을 바라보는 자리), 후일의 서울시립대학교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현위치(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산1-1)로 옮겨진다.
금기와 복권
사도세자가 살인을 수시로 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성한 기록이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 영조의 말 등을 볼 때 일부 사실로 추정된다.
정축년(1757년)과 무인년(1758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으로 인하여 병이 심하게 되었다.
—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1762년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 (을해)
죽은 지 보름만에 복권되었다. 이때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종사를 위해 결단을 내린 후 은정을 베푼 것이라고 영조가 말한 바 있다. 사도라는 시호의 뜻은 追悔前過曰思 , 年中早夭曰悼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일찍 죽었다는 의미이다)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홍봉한등이 너무 화려하게 지었다는 이유로 허물고 동년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영조 40년 음력 2월 20일 세손은 사후 세자의 처분을 뒤집어 추숭할 것을 우려한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며 영조에게 다시한번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것을 다짐받는다.
사후
즉위 후 정조는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垂恩墓)[11]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국왕의 생부로서 존대했다. 정조는 경모궁안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항상 아버지의 사당을 바라보게 하였다 한다. 이어 수덕돈경(綏德敦慶)의 존호를 올리고, 1784년 홍인경지(弘仁景祉)의 추가 존호를 올렸다. 1789년 10월 7일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생전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의 반대와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결국 고종 때 가서야 그는 왕으로 추존된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추존하려 시도했으나 여러번 반발과 반대에 부닥쳤다. 금등 문서를 공개한 뒤에도 사도세자 추존 상소문은 계속 올라왔고, 정조는 사도세자 복권 여론, 사도세자 추존 여론을 청하는 상소에 대해 읽어보고 비통해하면서도, 그들을 처벌하여 영조의 유지를 지켰다. 그러나 정조는 못내 아쉬워하여 서유린(徐有隣) 등에게 사도세자를 추존하고 싶어하는 속마음을 털어놓았고, 이는 서유린의 아들 서준보(徐俊輔)와 증손자 서상조(徐相祖)에게도 전해졌다. 순조 때에 일각에서 사도세자 추존 여론이 나왔다가 오래된 일을 다시 꺼낸다며 거절당하면서 잊혀졌지만, 1855년(철종 6) 서준보가 사도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899년 8월 3일 서상조가 다시 사도세자를 추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고종이 최종적으로 수락하게 된다.
황제 추존
1899년(광무 3년) 9월 1일 고종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11월 13일 묘호는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
1899년(광무 3년) 10월 17일, 고종은 개국 시조인 태조와 자신의 4대 조상인 장종(사도세자), 정조, 순조, 익종(효명세자)을 소급하여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장종의 묘호를 장조(莊祖)로 개칭하였다.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헌경왕후(獻敬王后)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 제21대 영조의 아들 장조(莊祖)의 왕비.
이칭 : 혜경궁 홍씨
인물/전통 인물
출생 연도 : 1735년(영조 11)
사망 연도 : 1815년(순조 15)
주요 저서 : 한중록(恨中錄)
본관은 풍산(豊山). 아버지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1743년(영조 20) 9세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세자빈(世子嬪) 삼간택에 뽑혔고, 10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세에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낳았으나 곧 죽었고, 2년 후 정조(正祖)를 낳았다. 그리고 이어서 2년 터울로 청연공주(淸衍公主), 청선공주(淸璿公主) 등을 낳았다.
20대 초반부터는 사도세자의 병증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762년 29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맞았으나 혜빈(惠嬪)으로 추서되면서 세자빈의 위치를 그대로는 유지하였다. 이후 아들 정조를 할아버지 영조에게 보내 함께 기거하면서 왕세손 수업을 받게 하였다. 정조가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정조를 자신에게 보낸 것이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효를 다한 것이라고 하며 갸륵하다는 뜻에서 ‘가효당(嘉孝堂)’이라는 당호를 내렸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라 혜경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순조(純祖) 즉위 초부터 정조의 유지임을 강조하면서 아버지 홍봉한과 친정 집안의 신원(伸冤)을 요청하였고, 순조 14년(1814) 신원과 복권을 받았다. 1815년 창경궁에서 81세로 사망하였으며,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에 남편인 장헌세자(사도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학문과 저술
1795년 환갑에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서술한 『한중록(恨中錄)』을 펴냈다.
상훈과 추모
고종의 5대조 추존에서 장종과 함께 헌경왕후(獻敬王后)가 되었고, 대한제국 때는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다시 격상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이며, 능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릉(隆陵)이다.]
12:15~12:33 경기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번지에 있는 건릉(健陵)으로 이동
12:33~12:45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인 건릉(健陵)을 탐방
[정조(正祖)
조선 후기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
출생 – 사망 : 1752 ~ 1800
정조는 조선후기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776~1800년이며,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아들이다.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임금이자 스승임을 자부하며 당파적 분쟁을 뛰어넘어 개혁과 통합을 이루어냈다. 규장각을 정권의 핵심기구로 삼고 실학파와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완성해갔으며, 문물제도의 정비사업 완결, 사고전서 수입과 각종 서적 편찬, 친위군인 장용영 설치, 신도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강한 왕권으로 왕도정치의 모범을 보이며 조선후기 문화부흥을 이루었다.
조선의 제22대왕 정조는 지난한 여정을 거쳐 왕위에 올라, 갖가지 개혁 정책 및 탕평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재위기간에 추진했던 각종 정책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왕위에 오르는 지난한 여정
조선의 제22대왕 정조, 1759년(영조35) 세손에 책봉될 때까지는 왕가의 일반적인 코스를 밟으며 순탄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1762년 생부 사도세자(후일의 장헌세자, 고종때 장조로 추존됨)가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지난한 여정을 거쳤다. 생부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생부를 살려 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던 어린 정조의 마음이 오죽했으랴.
영조는 장헌세자 사후 정조를 앞서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후일의 진종)의 후사(後嗣)가 되어 왕통을 이었다. 사실 여부야 어찌 되었든 장헌세자가 죄인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의 아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계통을 바꾼다고 해서 장헌세자와 정조의 부자 관계가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명분상으로는 죄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허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세손이지만 세자의 지위를 가지고 생활하던 정조는 영조 말년 경인 1775년 국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다가 다음 해 영조가 승하하면서 25세로 왕위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갖가지 방해공작이 이루어져, 정후겸등이 정조를 해치려고 하였고, 그를 비방하는 내용으로 투서하거나 그가 거처하던 존현각에 괴한이 침입하여 염탐하는 사건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리청정이 결정될 당시에는 홍인한이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라는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제기하며 세손의 권위에 흠집을 내면서 대리청정을 반대한 적도 있었다. 정조가 비록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과정은 참으로 지난하였다.
학습과 훈련을 통해 향상된 정치리더십
리더십은 천부적으로 타고나기도 하지만, 생후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제왕학(帝王學)은 정치리더십을 향상시키는 학문체계라 하겠다. 제왕학은 모든 군주가 갖춰야 할 학문을 말한다. 조선시대 군주들이 학습하는 제왕학은 정치의 득실과 인물의 능력, 민생의 고락을 파악하는 현실적인 학문으로, 학습을 통해 터득한 논리는 정치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할 수 있었다. 정조의 경우도 이 같은 제왕학의 학습체계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정조는 1752년 출생 이후 원손으로 책봉된 후 왕세손->동궁->국왕 등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지위가 바뀔 때마다 교육도 내용과 격을 달리하였는데, 보양청교육->강학청교육->시강원 교육->경연교육 등의 네 개 과정이 이에 해당되었다. 성장 과정에 지속적인 교육 과정이 동반되었다. 정조는 이들 과정을 통해서 유교의 주요 경전을 비롯한 역사서와 조선시대 제왕학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성학집요]나 [정관정요] 등을 학습하였다.
정조는 이와는 별도로 할아버지 영조의 훈육도 받았다. 영조는 국왕이 신하에게 교육받는 수준에서 벗어나 국왕이 직접 학문을 연마하고 신하를 가르치려고 한 국왕이었다. 영조는 정계는 물론이고 학계까지 주도하는 군주가 되려고 하였으며, 그 이념은 유학에서 이상적인 사회라 말해지는 삼대(三代)의 군주상인 군사(君師; 군주가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고 가르치는 존재)였다. 영조는 보양청 단계에서부터 정조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1757년 6살인 어린 원손을 불러 [동몽선습]을 외우게 하였고, 이듬해 경연자리에는 원손을 불러 [소학]을 외우게 함으로써 학습 진도를 점검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수시로 정조를 데리고 경연에 참석하여 신하들과 토론하도록 하였고, 유교적 덕치와 군사로서의 국왕의 위상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후일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정조는 여러 방면에서 할아버지인 영조의 정치를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개혁과 대통합을 위하여
즉위 이후 정조는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를 홍국영을 통해 추진하였다. 동시에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다. 왕위에 오른 지 4년 정도 경과한 시점까지 자신의 정적들의 제거에 일단락 성공한 정조는 이후 각종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선왕 영조를 계승, 탕평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이른바 청류(淸流) 세력들을 끌어들였다. 영조 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노론의 우위를 주장하는 척신 세력과 이들을 타파하려는 노선인 청류를 자처하는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정조는 그동안 척신 세력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탕평을 펼쳤다. 아울러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세력을 등용하여 정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공개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을 통해서 보면 그의 정적이었다고 말해지는 벽파 세력까지도 협력 세력으로 포섭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런 탕평책의 추진과정에서 정권의 물리력 확보를 목적으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정조는 또한 규장각을 통해서 학문정치를 구현하며 인재 육성을 추진, 이를 위해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 교육해 국가의 동량으로 키워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학문 정치의 명분 아래 세손 때부터 추진한 [사고전서]의 수입에 노력하는 동시에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이며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였다. 또한, 규장각 내에 검서관제도를 두어, 서얼신분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등을 등용하였다. 이들은 모두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의 제자들인데,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소통을 기대하였다.
정조는 이 밖에도 지방인재 선발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정국이 주로 서울 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조는 각 지역에 측근들을 파견해 과거를 시험보고, 그 결과로 여러 책자를 간행하였다. 교남(嶠南;영남)․호남․관서의 빈흥록(賓興錄) 등이 그것이다. 아울러 영남이나 호남의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 영남인물고, 호남절의록 등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도 상업적으로는 통공정책을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이란, 금난전권의 혁파와 자유상인 즉 난전 상인의 안정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단행된 상업정책을 말한다. 기존의 특권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도성 중심의 경제권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시장공간의 확대(경강, 누원, 송파 등) 등을 도모한 정책이었다.
개혁의 총아, 화성 건설과 좌절된 개혁군주의 꿈
정조가 추진한 개혁의 총결산은 아마도 화성의 건설로 모아지지 않을까 한다. 화성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 이장을 계기로 조성된 성곽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단순한 군사적 기능을 수행한 성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곳을 무대로 자신이 개혁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를 시험하는 무대로 삼고자 하였다. 일단 축성 과정에 당시로써는 가장 선진적인 축성 기술을 도입하였고, 그가 즉위 이후 육성했던 정약용등 측근세력을 대거 투입하여 주도하게 하였다. 또한, 화성을 포함한 수원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국영 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을 위한 물의 확보를 위해 몇 개의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선진적인 농법 및 농업 경영 방식을 시험적으로 추진하였다. 통공정책을 통해서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해져 수원 일대 상인들 유치가 쉬워졌다. 화성은 개혁의 시험 무대이자 개혁의 결과물로 응축된 그야말로 정조대 개혁의 총아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의 산물은 만개하기도 전에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다. 현재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장용영이 혁파되고, 정조가 육성했던 세력들이 대거 축출되는 불운을 겪었다. 서울 중심의 벌열 세력에 의한 정치, 사회, 경제적 독점은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정조가 꿈꾸었던 목표나 이상은 무엇일까?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로 자처하였다. 율곡 이이의 설명에 따르면, 태초에는 백성들이 새처럼 거처하고 생활이 도리가 구비되지 않았으며, 인문(人文)도 구비되지 못하였고, 임금도 없이 소박한 생활을 하다가 시간이 경과하면서 분란이 생겼는데, 이때 성인(聖人)이 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이 성인을 임금으로 삼음으로써 군사(君師)의 직책을 갖게 되었고, 이로써 백성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하늘의 질서가 밝아졌다고 하였다. 유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제시하는 요․순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정조 역시도 선왕인 영조가 그랬던 것처럼 군사가 되기를 원했고, 개혁과 대통합을 통해 백성들의 생업이 편안해지고 질서가 잡힌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효의왕후 (孝懿王后)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후기 제22대 정조의 왕비.
출생 연도 : 1753년(영조 29)
사망 연도 : 1821년(순조 21)
출생지 : 한성
본관은 청풍(淸風).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증찬성 홍상언(洪商彦)의 딸이다. 한성부 가회방(嘉會坊) 사제(私第)에서 출생하였다.
1762년(영조 38) 세손빈(世孫嬪)으로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本宮)에서 가례(嘉禮)를 올렸고, 1776년 영조가 죽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를 지성으로 모시니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和緩翁主)가 그를 몹시 괴롭혔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청연(淸衍)·청선(淸璿) 두 군주(郡主)와는 더욱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청선군주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비통해하였고,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주었다.
성품이 개결(介潔: 성품이 절개가 굳고 깨끗함)하고 사정에 흐르지 않아서 사가(私家)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경계하여 수진궁(壽進宮)과 어의궁(於義宮)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화(宮貨: 궁궐내에 있는 재물)는 공물이라 하여 사사로이 사가에 물화를 내린 적이 없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창경궁 자경전(慈慶殿)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尊號)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시호는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이고,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안녕리에 있다.]
12:45~12:58 경기 화성시 안녕동 187-35 번지에 있는 융건릉 매표소로 원점회귀하여 화성 융릉과 건릉 탐방을 완료
12:58~14:10 경기 화성시 떡전골로 97 번지에 있는 병점역 3번 출구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4:10~14:25 병점역에서 신도림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14:25~15:50 1호선 전철을 타고 신도림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합정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1시간25분 소요]
용주사 지도
[융건릉&용주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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