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간신 이인임
인임(仁任)의 증조(曾祖) 이장경(李長庚)은 고려의 경산부(京山府) 아전이고, 할아비는 정당문학(正堂文學) 이조년(李兆年)이며, 아비는 동지밀직(同知密直) 이포(李褒)이고, 인임의 아들은 대호군(大護軍) 이환(李環) ?고공좌랑(考功佐郞) 이민(李珉)이며, 일찍이 고려에 벼슬하였고, 사위인 판승녕부사(判承寧府事) 강서(姜筮)와 상주목사(尙州牧使) 권집경(權執經)이다
이장경(李長庚, ? ~ ?)은 고려시대 중기의 호족으로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5형제의 아버지이자 이인기, 이승경의 할아버지였다.
이인임의 증조부, 이숭인의 고조부였다. 아들 5형제의 출세로 거듭 증직되고 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가 손자 이승경의 출세로 원나라로부터 농서군공(?西郡公)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성주이며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본다. 경상북도 출신.
성주의 호족으로 신라 말의 재상 이순유(李純由)의 12대손이며[1] 이득희(李得禧)의 아들로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장경의 아버지인 이득희는 태몽에서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본 후 이장경이 출생한 까닭에 이름을 장경(長庚)이라 하였다고 한다. 장경은 문창, 태백성의 다른 칭호였다.
그 뒤 성주군수로 부임한 합천이씨 이약(李若)은 이장경의 재능을 간파하고 후세에 반드시 창성할 것이라 예상,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부인 합천이씨에게서 아들 5명이 태어났다.
생전에 상호장(上戶長)과 안일호장을 지냈고 사후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이백년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이천년은 참지정사, 이만년은 문하시중, 이조년은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아들들의 출세로 고려조로부터는 삼중대광 문하좌시중(三重大匡 門下左侍中) 흥안부원군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都僉議政丞 知典理司事 上濩軍)에 추증된 뒤 원나라 황제로부터는 농서군공에 추봉되었다.
사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선석산(禪石山)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선석산에 조선 세조의 태를 묻게 되자 세종대왕이 특명을 내려 길지를 택해 하사하여 성주의 서쪽 서오치(西梧峙)의 남쪽으로 이장되었다. 흥양 성산사(星山祠), 단성 안곡사(安谷祠), 울곡 보본사(報本祠), 정평 보덕사(報德祠) 및 김천 상친사(尙親祠), 옥천 평산사(坪山祠) 등에 제향되었다.
고손자(아들 이백년의 증손)는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자 고려 멸망 이후 두문불출한 절신 이숭인이었다.
이인립(李仁立)의 아들이자 이장경의 고손자인 이제(李濟)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사위가 되어 조선 왕실과도 인척관계가 되었다.
이인임의 본관은 성주(星州).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이조년(兆年)이고,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포(褒)이다.
그의 가문은 고려 후기의 향리(鄕吏) 출신으로 성주 지방에서 대대로 호장직(戶長職)을 이어오다가 중앙에 진출한 신진세력이다.
이인임은 문음(門蔭)으로 전객시승이 된 후 전법총랑을 거쳐 1358년 좌부승선이 되었다.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를 함락하자 서경존무사(西京存撫使)에 임명되어 서경을 방비했으며, 1361년에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은 복주로 피난가고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 개경 수복전에 참여했다.
1363년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충선왕의 셋째 아들)을 고려 왕으로 삼아 고려에 들이려 할 때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윤이 되어 식량조달을 맡았으며, 당시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려던 공민왕에게 그 불리함을 설득해 압록강을 고수하게 한 공으로 1365년 삼사우사가 되었고, 순성동덕보리공신(純誠同德輔理功臣) 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신돈(辛旽)이 정치표면에 나타나 개혁조치로 추진했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에서 그는 주무(主務)를 맡아보는 등 신돈의 여당(與黨)으로 정치실무를 장악했다.
1371년 공민왕이 신돈을 숙청하고 모니노(牟尼奴: 뒤의 우왕)를 명덕태후(明德太后)에게 들일 때에도 다시 등장한 보수성향의 무신세력과 제휴하여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져나갔다.
1374년 공민왕이 죽음을 당하자 도당에서 후사를 논의할 때, 우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어린 우왕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은 그는 이전의 외교정책과는 달리 원·명나라에 두 다리를 걸치는 양단외교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이 보수적·친원적 성향을 띤 권문세족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지만 보다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친명정책을 추구했던 공민왕의 피살사건과 뒤이어 일어난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의 살해사건 때문이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전환은 신진세력의 맹렬한 비난과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김구용(金九容)·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은 연일 정부의 친원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이첨(李詹)은 이인임의 목을 벨 것을 상소했다.
이에 최영(崔瑩)·지윤(池奫) 등과 함께 반대하는 신진세력을 거의 다 몰아냈다.
1382년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을 느껴 임견미(林堅味)에 의해 한양 천도가 추진된 이후 정치적 실권이 약해졌다. 1386년 다시 좌시중이 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했다.
염흥방(廉興邦)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자신의 토지를 빼앗자 이에 격분한 전직 밀직부사 조반이 이광을 죽이자 염흥방은 조반을 국가모반죄로 몰아 옥에 가두고 심하게 고문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1388년 우왕은 최영·이성계(李成桂)와 의논하여 오히려 염흥방·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다. 이때 그도 경산부에 안치(安置)되었다가 곧 죽었다
고려의 마지막 간신 이인임 그는 누구였을까?
이인임은 원나라 말기이자 권문세족으로 가득찼던 충렬왕 시절 청백리로 유명했던 이조년의 손자이다. 덕분에 이인임은 태어날 때부터 명문가문의 자제로 과거제도가 아닌 음서제도 (명문가문의 자손은 벼슬에 그냥 오를 수 있음) 로 벼슬길에 올랐다. 유년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벼슬에 오른 후 뛰어난 정치적 수행 능력으로 승승 장구하게 된다.
또한 공민왕 당시 고려와 원나라의 골칫거리였던 홍건적을 무찌르고 신돈의 개혁작업에도 큰 공을 세우며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돈이 죽고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등에게 피살되자 간신으로 변하게 된다.
이인임과 우왕 이야기
이인임은 공민왕이 죽자마자 피살범인 최만생, 홍륜 등을 체포하여 죽이고 그 권력을 장악했는데 여기서 이인임은 공민왕의 아들 우를 왕으로 올려 세우니 그가 바로 우왕이다.
사실 우왕의 탄생에는 미스테리한 점이 있다. 우왕은 공민왕의 장남이지만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의 소생으로 1365년에 태어났는데 우왕은 어렸을 적 궁이 아닌 신돈의 집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 사연은 왜 그런고 하니,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죽고 공민왕은 자식이 없었는데 신돈이 노국공주와 닮은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치며 공민왕에게 아이를 얻게 하기를 권했다. 그 아이가 바로 우왕인것이다. 이후 우왕을 낳은 반야는 1년 동안 궁이 아닌 신돈의 집에서 기거하였고 1371년 신돈이 역모죄로 유배되자 공민왕은 자신의 아들 우를 갑자기 궁으로 불러들인다.
이에 공민왕은 당시 수시중으로 있던 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있던 아름다운 여인에게 아들을 낳은 것이라며" 말을 전했고 이후 어린 우왕은 태후 홍씨에게 맡겨져 궁궐의 교육을 배우며 자라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 공민왕은 자신의 아들 우가 신돈 집의 반야의 소생이 아닌 이미 죽은 궁인 한씨의 아들이라며 궁인 한씨의 집안에 벼슬을 내리며 궁궐의 많은 사람들을 속이려 하였다.
이후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왕위에 오른지 2년, 진짜 어머니였던 반야가 자신의 아들이 우왕이라며 주장하다가 우왕을 세운 이인임에게 살해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만다.
공민왕과 이인임이 신돈의 여종이였던 반야가 아닌 궁인 한씨라고 거짓을 말한 이유는 반야를 우왕의 친모라고 말할 경우 공민왕의 핏줄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고 여길 것이고 후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고 물론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후에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성계와 정몽주 등에 의해 신돈의 씨라 하여 우왕은 폐위를 당하게 된다.
공민왕이 죽고 우를 왕으로 세울때 우왕을 맡았던 명덕태후 홍씨는 이를 반대 했으나 이인임 세력은 우왕을 왕으로 세우려 했고 두 세력간의 팽팽한 설전이 오가다 왕실의 종실들이 공민왕의 유지를 받을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우왕이 왕위에 오르고 이인임이 모든 정권을 장악했다.
이 때 이인임 세력의 신임을 받으며 급부상한 인물이 바로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로 유명한 충신 최영 장군이다. 또한 이성계 역시 자신의 장남(이방우)와 이인임 일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지윤의 딸을 결혼시키면서 정계에 자리를 잡아간다.
여튼 권력을 잡은 이인임은 뜨는 명나라 대신 무너져가는 원나라에 힘을 지탱하려 했고 이인임과 그 세력 지윤, 임견미 등이 권력의 요직에 앉아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하며 고려 왕실은 물론 백성들을 끊임 없이 수탈하였다. 이 때문에 이인임과 그 권문세족들이 고려가 멸망하는데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인임 세력은 그의 신임을 받던 최영이 이인임 세력의 거듭되는 만행에 변심하며 반기를 들며 급속도록 무너지기 시작했고 당시 홍건적과 왜구를 연달아 무찌르며 정계에 스타로 부상하기 시작한 이성계와 그리고 우왕이 함께 이인임을 공격하기 시작하며 이인임은 결국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나마 과거에 최영을 이인임이 아꼈기에 그의 모든 세력들이 주살 당했음에도 이인임은 유배를 가는데 그친 것이다.
이인임은 사실 최영을 신뢰 했을 당시에 최영에게 이성계를 경계하라고 끊임 없이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이인임의 정치적인 안목은 분명 무시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후 최영과 고려 왕실을 위협하자 최영은 그때서야 이인임의 말을 생각해 내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인임. 그는 분명 고려 말 기득권으로 대변되는 권문세족의 일파로 부패한 고려 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간신이었고 조선 건국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악역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러나 분명 한 것은 충신으로 대표되는 최영과 이성계 역시 이인임의 세력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고려의 왕을 바꿔 세울 정도로 눈치 빠른 정치가이자 역사에 변수로 작용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종계宗系변무辨誣) 종계(宗系)는 종가의 혈통을 말하고 변무(辨誣)는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몰아내고 종친 중에 한 명을 골라 왕으로 세우니, 이가 고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공양왕(34대)이었다. 1389년 11월에 즉위식을 가졌다. 그런데 공양왕은 전혀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미 모든 정권은 이성계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고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왕 노릇을 제대로 못 할 것임은 물론이고 까닥 잘못하다가 꼬투리라도 잡혀 목이 달아날 수도 있기 때문에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 따르면 공양왕은 희한하게도 제비뽑기로 왕이 되었다. 제비뽑기로 왕이 된 경우는 아마 세계사적으로도 전무후무 할 것이다. 이성계 일파가 종친 들 중에서 몇 명을 골라 제비뽑기를 한 결과 45세의 왕요(공양왕)가 뽑혔다는 말이다. 새 임금으로 뽑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거듭 사양했으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왕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공교롭게도 공양왕은 이성계와 사돈지간이었다. 공양왕 형의 딸이 이성계의 7남인 방번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공양왕 즉위 2개월 후, 즉 1390년이 밝아오기가 무섭게 이성계 일파는 1차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조작한 사건에 연루시켜 유배지에 있는 조민수를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고, 이색 부자에게 주었던 관직을 거두어 버렸다. 이어 이색 계열에 있는 신하들을 명분만 생기면 옭아매어 몰아내어 버렸다. 이제 이색 계열로는 조정에 우현보와 정몽주만이 남았을 만큼 씨가 말라 버렸다.
그런데 이해 봄에 명나라에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종계변무)
윤이와 이초라는 고려 사람이 명의 황제 주원장을 찾아가서 고려에 불온한 기색이 돌고 있다고 고자질을 했다.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수시중으로 있는 이성계가 군권을 틀어쥐고서 그의 사돈을 왕 자리에 앉혀 놓고 무고한 대신들과 백성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고 있다. 그래서 재상들이 우리를 몰래 보내 황제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군사를 보내 이성계 무리를 토벌해 달라.」
명나라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요동을 정벌하라는 고려 왕에게 이성계가 반기를 들고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명나라였다. 때문에 윤이와 이초의 고자질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마침 작년 말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조반이라는 고려 관리가 명나라에 와서 아직 머물고 있었다. 대질 심문을 해 본 결과 윤이와 이초가 무고를 했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그들은 명나라에서 귀양을 갔다. 사실 윤이와 이초를 고려에서 반대파들이 보낸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냥 무고였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성계를 무고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아마 이성계 일파 때문에 고려에서 살수 없다 보니 원한이 생겨 그리했을 것이다. 아무튼 단순히 무고 사건이었는데, 이성계 일파는 이것도 숙청 작업에 이용해 먹는 것이다.
5월에 조반이 명나라에서 돌아와 윤이와 이초의 사건을 보고하자 이 사건을 역모로 몰아갔다. 2차 숙청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먼저 윤이의 사촌형 윤유린과 이색 계열의 우현보를 잡아들였다. 윤유린은 고문을 당하자 다른 몇 사람을 찍어 넣었다. 그 자신은 울분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이어 이색, 이림, 정지, 이숭인, 권근 등 명망이 있는 대신들을 유배지에서 청주 감옥으로 잡아 들였다. 고문을 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천둥이 치고 홍수가 들어 청주성의 남문이 무너지고 옥사도 물에 잠기게 되었다. 이 보고를 받은 공양왕이 이성계를 불러 천재지변의 핑계를 대며 죄수를 풀어 주자고 애원해 간신히 이색 등이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도 계속해서 이 사건과 연관을 시켜 조선 개국에 반대할 만한 사람들을 역모죄로 몰아 가두거나 죽여 나갔다. 윤이와 이초의 무고 사건은 오히려 그들의 의중과는 반대로 고려에서 이성계가 반대파를 몰아내는데 이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윤이와 이초가 명 황제에게 무고를 할 때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말도 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은 믿지 않은 명나라가 무슨 속셈인지 이 말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법령과 제도를 나타낸 책)에 그대로 기록해 버린 것이다.
조선 개국 이듬해인 1394년 4월에 조선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6월에 명나라 사신 황영기가 귀국할 때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후 조선에서는 계속해서 사신을 보내어 종계변무를 요청했다. 종계(宗系)는 종가의 혈통을 말하고 변무(辨誣)는 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힌다는 뜻이다.
나라를 건국한 사람의 가계가 엉터리로 명나라의 실록과 책에 기재되어 있으니 조선에서는 통탄할 일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명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금방 해결될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장 200년이나 끌어 겨우 해결이 되었다. 명나라에서는 이미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라 고치기가 불가하다면서 조선이 종계변무사를 보낼 때 마다 핑계를 대며 미적대었다.
조선을 길들일 이유로 그랬는지 아니면 그들 말마따나 이미 기록된 것을 고치기 어려워 그랬는지 아무튼 200년의 세월을 끌었으니 조선의 왕과 관리들의 속이 얼마나 탔을까.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시일만 끌던 종계변무가 결국 선조 시대까지 흘러갔다. 대사간 이이가 수모를 당한 지 2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이를 고치지 못해서는 말이 안 된다며 인재를 주청사로 뽑아 명나라에 보내어 강력하게 고쳐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청했다.
1581년(선조 14)에 김계휘를 주청사로 보내고 다시 1584년에는 황정욱을 보냈다. 황정욱은 명나라에 가서 대명회전을 정정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때 따라갔던 통역관 홍순언이 종계변무를 달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1588년 유홍이 고쳐진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와 일단락되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선조는 얼마나 기뻤던지 유홍이 중국에서 돌아올 때 친히 모화관까지 나아가 명나라의 칙사를 맞았으며, 공을 세운 유홍에게는 벼슬을 올리고 노비와 논과 토지도 내렸다고 한다.
이인임, 이성계, 그리고 최영1(정권 장악과 반야의 죽음)
1374년 9월 공민왕이 비명횡사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공민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포스트에 정리해 놓았다. 이 사건은 이후 정치적으로 비화되지 않고 당사자만 제거하는 선으로 끝이 났다. 후계 왕을 놓고 왕실과 조정 내에서 알력이 생겼다.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는 경복흥과 더불어 공민왕의 아들 강녕부원군이 아직 어려서(10세) 정무를 처리할 수 없으므로 종친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이인임은 정무는 모후가 섭정을 하는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고 공민왕의 유지대로 강녕부원군을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 세력 사이에 팽팽한 설전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이인임의 뜻대로 강녕부원군이 왕에 오르니, 고려 32대 우왕이었다.
형식상으로는 명덕태후가 섭정을 하는 것이지만 들러리에 불과했다. 실제 정권은 당연히 우왕을 밀었던 이인임이 잡게 되었고, 그의 신임을 돈독하게 받았던 최영도 정계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훗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권문세가를 싹쓸이할 때 이성계는 이인임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최영이 끝까지 비호해 준 덕택으로 이인임은 고향에 유배를 가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려 말기는 국제 정세가 혼돈스러운 상태였다. 중국 본토에서는 신흥 명나라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북원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고려는 이쪽저쪽의 눈치를 다 살펴야 했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죽음을 북원에도 알리고 명나라에도 알렸다.
그리고 마침 고려에 와 있던 명나라 사신 채빈이 본국에 돌아가면 그의 입지가 위태로워질까 두려워 사람을 시켜 몰래 살해하여 버렸다. 공민왕이 펼쳤던 반원 정책을 버리고 이인임은 다시 원나라와 가깝게 지내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 쓰려져가는 북원이 끝까지 고려 정부에 영향력을 끼치려 들어 막 정권을 잡은 이인임 일파를 곤란스럽게 했다. 이름뿐인 심양왕 탈탈불화를 공민왕을 대신해서 새로운 고려 왕으로 임명해서 보내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북원은 고려 정부에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끼치고 또 압박해서 명나라와 맞서는데 고려의 힘을 얻어 낼 속셈이었다. 다행히 이인임이 탈탈불화 일행을 저지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문제는 더 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양분되었다. 정권을 잡은 이인임이 친원으로 돌아서자 정도전 등 신진 세력들이 강력하게 반대를 한 것이다. 그들은 죽은 공민왕이 계책을 내어 명나라와 손을 잡았는데 이제 와서 북쪽의 원과 다시 손을 잡는 것은 옳지 않다는 논리로 이인임 정권에 도전을 했다. 북원과는 일체 손을 끊고 철저하게 명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강경하게 요구했던 것이다.
정도전을 유배 보내고 나니까 이번에는 정몽주와 박상충이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인임은 신진 세력의 주장을 어느 정도 선에서 들어 주는 것으로 해서 약간 양보했다. 아무튼 이때부터 정도전은 신진 세력 사이에서 주목 받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전라도 지방 농민들의 삶을 직접 목격했다. 그가 보기에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권문세가의 횡포와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 지옥의 그것이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역성혁명을 꿈꾸었다면, 그것은 아마 가슴속에서부터 솟구쳐 나오는 분노가 일으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유배 보내고 어느 정도 양보하는 선에서 조정의 분란을 대충 봉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정도로 일이 끝나지 않았다. 신진인 이첨이 이인임을 목 베어 죽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최고 실권자를 죽이라고 했으니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최영이 국문을 맡아 관련자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이첨은 명이 길어 심한 고문을 받고도 죽지 않고 유배를 갔다. 전녹생과 박상충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유배지에 가는 도중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정몽주도 뒤이어 유배되었으나 1년 만에 풀려났다.
바야흐로 조정은 친원으로 돌아선 기득권 세력과 친명파인 신진 세력의 대결로 치닫는 상황이 되었다. 초반은 기득권인 권문세가의 독무대였다. 그동안 공민왕과 신돈의 비호아래 내 세상을 만난 것처럼 활개를 쳤던 신진 세력은 이인임 일파에 눌려 힘을 쓸 수 없었다. 기득권층은 권력을 틀어지고 토지와 벼슬을 독점해 나갔다. 이인임은 공민왕과 신돈이 벌여놓은 개혁 정책을 하나씩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 와중에 반대파들도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다. 그들은 무신 정권이 저질렀던 횡포를 그대로 따라 했다.
우왕의 친모는 반야이다. 훗날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는 명분으로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폐가입진을 내세우기는 했다. 반야는 신돈의 여자이고, 따라서 우왕도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내몰기 위한 구실로 조작했다는 설이 많다. 우왕이 가짜라면 그의 아들인 창왕을 세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창왕까지 세우고 나서 가짜라고 하니 논리상에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공민왕은 반야가 분명히 우왕의 어머니이고 친아버지는 그 자신이 맞다는 사실을 이인임에게 벌써 알려 놓았다. 그러나 죽기 얼마 전에 우왕의 생모가 궁인 한씨였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를 왕자의 친모라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반야가 몰래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를 찾아가서 주상의 친모라고 주장했다. 태후는 반야에게 입단속을 시키고 내몰았다. 이인임이 반야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임진강에 던져서 죽게 했다. 우왕 2년에 있었던 일이다. 물에 빠져 죽게 한 것은 무신 정권 지도자들이 반대자를 처리할 때 많이 써먹던 방법 중의 하나였다. 이인임은 비천한 출신의 반야를 죽임으로써 우왕이 궁인이 나은 자식이라는 보다 확실한 정통성을 확보해 그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려 했던 것이다.
이인임, 이성계, 그리고 최영2(신돈과 반야)
1365년 2월, 36세의 공민왕은 생애 가장 큰 슬픔을 겪는다. 아내인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아이도 낳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미 그동안 조일신의 난, 김용의 난, 최유와 덕흥군의 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임 등 오만 풍상을 다 겪었지만 꿋꿋하게 극복한 공민왕이었다. 허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과 충격만큼은 그가 이겨 내기에 너무 버거웠던 것 같았다. 이후 공민왕에게 이상 성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공민왕이 노국공주의 장례와 능을 조성하는데 너무 지나치게 돈을 쓴 나머지 장례가 끝났을 때 국고가 빌 정도였다고 한다. 공민왕의 지나친 행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그려 산 사람처럼 받들었으며, 음식상을 밤낮으로 대할 때마다 슬피 울었다고 한다. 삼년동안 육식도 삼갔다고 하니 그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슬퍼하는 정도로 끝낸 것이 아니었다.
이후 정치는 신돈에게 맡겨 놓고 종종 술에 절어 있거나 궁 밖으로 미행을 하거나 하다가 나중에는 궁중에 미청년들을 불러 동성연애를 즐기는 등 총명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정신병자적인 행태를 나타내다가 어이없이 살해되고 만 것이다.
이전부터 공민왕은 신돈을 알고 있었다. 종종 궁에 불러서 자문을 구하기도 했는데 노국공주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그에게 거의 정치를 맡기다시피 한 것이다.
신돈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어머니가 옥천사의 종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 한 사람만 종이라도 그 자식은 자동적으로 종이 되는 것이 고려의 법도였다. 그런데 고려에서 종은 아예 출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신돈의 어머니가 종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전한다.
안동에 피난을 가 있는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칼을 빼들고 그를 찌르려고 할 때 한 승려가 구해주는 꿈을 공민왕이 꾸었다. 괴이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마침 다음날 호종하던 신하 중 한 명인 김원명이 어떤 승려를 데리고 왔길래 보았더니 꿈에서 본 사람이었다. 바로 신돈이었던 것이다. 신기하게 여기며 공민왕이 말을 나누어 보니 글은 몰랐지만 지혜가 깊은 사람이었다. 이후 신돈은 개경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공민왕이 종종 불러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사실 이때 공민왕은 기득권 세력에 질려있었다. 반원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서 현실의 모순을 바로잡아 나가려고 했으나 기득권층의 완강한 저항에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빈부 격차의 심화, 기득권 세력의 부패, 중소 지주의 몰락, 천민과 노비의 신분 상승 욕구 등 아직 근본적으로 개혁해 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지만 기득권에게 막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이 점을 항상 아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신돈은 신속하게 개혁에 착수했다. 집권 석 달 만에 공민왕이 불안스럽게 여기던 대신들을 거의 파면 축출하고 무장을 대표하는 최영마저 조정에서 쫓아냈다. 이제 조정의 중추 기능을 맡는 관리들은 모두 신돈을 따르는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하지만 고려 사회가 급진적인 신돈의 개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한 그가 나중에는 처음의 의지와 달리 뇌물을 받고 축재에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그가 여자를 너무 밝힌 것도 걸림돌이었다. 비록 과장된 면은 있겠지만 그는 노소미추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사통을 했다고 한다.
사실 신돈의 역모죄는 조작의 냄새가 짙다. 신돈이 잡혀서 죽을 때 까지 걸린 시간이 4일이었다고 하니 미리 제거 계획을 짜놓았다가 후다닥 해치운 것이다. 이후 공민왕은 예전의 공민왕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다른 포스트에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생략한다.
공민왕이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자 임신을 잘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여종을 연결시켜 주었는데, 반야라는 여자였다. 반야는 아들을 낳는데 성공했고, 이 아이에게 모니노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모니노는 비밀스럽게 신돈의 집에서 양육이 되었다. 훗날 이 일이 밝혀져서 이성계 일파가 공민왕과 신돈을 비난하는 꼬투리가 되었고, 또한 폐가입진의 명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신돈을 제거한 뒤 백관들에게 아들이 있음을 밝히고 모니노를 궁궐로 데리고 오게 했다. 뒤이어 이름을 ‘우’라고 고쳐서 원자로 공표하고 또 강녕부원대원군이라는 봉작을 내렸다. 다만 이때 어머니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공민왕은 죽기 얼마 전에 원자의 어머니가 궁인 한씨라고 공표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거짓말로 짐작이 된다.
이후 공민왕이 죽고 나자 이인임은 종친 중에서 왕을 구하자는 명덕태후의 요청을 뿌리치고 왕우를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왕우를 왕 자리에 앉히고 정권을 잡았는데 반야가 친모라고 나섰으니 이인임이 그냥 둘 리 없었다. 앞 이야기에서 언급했다시피 반야는 임진강물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인임, 이성계, 그리고 최영3(공민왕과 신돈)
공민왕은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신돈을 종종 궁궐로 불러들여 설법을 듣기도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신돈은 글을 몰랐지만 언변이 좋아 공민왕이 빠져 들었다. 그리고 노국공주가 죽고 난 뒤에는 공민왕이 사부로 삼아 국정을 맡겼다. 공민왕 치세 제2의 개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은 왜 신돈을 통해서 개혁을 시도하려 했을까? 사실 공민왕은 많이 지쳐있었다. 초기에 열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외침, 내부의 반란, 기득권층의 저항 등 많은 제약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홍건적이 물러가고 난 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제2의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노국공주가 죽는 바람에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돈을 대행자로 삼은 것이다. 공민왕이 보기에 신돈은 똑똑하면서도 욕심이 적었다. 또한 미천한 출신에 일가천척도 없어 눈치를 살피지 않고 거리낌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여겼다.
예전에 몽고가 침입했을 때 고려 사람들은 저항하여 산이나 섬으로 피난을 하였다. 거기서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조금이라도 이용할 수 있는 토지를 개간했다. 즉 고려 말에 토지 개간이 확대되어 생산력이 향상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힘 있는 권문세족들이 토지와 농지를 점탈하는 바람에 오히려 백성들의 삶은 더 곤궁해졌다. 어쩔 수 없이 농민들은 귀족들에게 의탁을 해 그들의 농노 신세가 되어야 했다. 결국 토지 제도를 개혁해서 빈부 격차를 줄이고 기득권 세력의 부패를 척결하는 것으로 개혁의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여기다가 천민과 노비의 신분 상승 욕구도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신돈이 조정에 나오게 되자 하급 관리들은 재빨리 그의 밑에서 줄을 섰다. 이들은 권력의 추이를 쫓는 추종세력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는 의미도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은 훗날 반드시 변고를 일으킬 인물이라며 신돈을 헐뜯기에 바빴다. 공민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신돈이 하는 대로 따랐다.
먼저 개각을 단행하여 이인복, 이공수, 경천흥 등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파면시키고 최영도 좌천을 시킨 뒤 유배를 보냈다. 다만 이인임은 그대로 남겼다. 신돈은 조정의 개각을 신속하게 해치웠다. 노국공주가 죽은 지 불과 석 달 후에 전광석화처럼 일을 진행했다. 아마 신돈은 예전부터 밑그림을 그려 놓았다가 기회가 생기자 바로 밀어 붙였을 것이다. 신돈은 집권하자마자 공민왕이 불안하게 여기던 대신들을 쫓아버리고 그를 쫓는 인물들로 채웠다. 이제 조정은 신돈의 차지나 마찬가지였다. 공민왕이 거의 대권을 주다시피 했으니 신돈은 이제 왕권 대행자라 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조정에 나올 때 관복을 입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두고 비승비속(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다)이라고 쑥덕거렸다. 1366년 5월, 신돈은 아무도 감히 손대지 못할 일을 과감하게 시행했다. 토지 개혁이었다. 전민추정도감을 설치해서 그 스스로 책임자인 판사에 앉아 토지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이 일의 실무 책임자 중 한 사람은 이인임이었다. 그동안 불법으로 농장을 확대했던 귀족들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강제로 농노가 되었던 양인들은 신분을 되찾게 하는 법이었다. 조정과 고려 전국이 떠들썩했다. 좋아 날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농장주들은 일단 아무 말도 못하고 사태의 추이만 살필 뿐이었다. 많은 천민과 노비들이 신돈에게 직접 찾아와 양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신돈은 이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신돈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고 민중들은 그를 성인이라며 추앙했다. 비록 신돈이 중도에 죽임을 당해 다시 원위치 되는 바람에 토지 개혁이 실패를 했으나, 훗날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인수하기 전에 과전법을 시행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토지 개혁이 이루어진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개정된 과거 시험을 보았다. 전례 없이 공민왕이 직접 참여하여 시험 내용을 검토하고 합격자를 뽑았다. 그동안 시험 관리들이 결탁해 자기의 문생을 뽑아주는 등 부정이 심했는데, 이제 부정으로 합격자를 내는 폐단이 없어졌다. 이 개편은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이 과거제를 통해 벼슬에 나온 사람들이 신진 사대부였다. 이와 함께 권문세가와 공신 자제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특혜를 주던 국자감시라는 시험을 없앴다. 이제 오로지 과거를 통해서만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했으므로 기득권의 팔다리를 자르는 조처였다. 한편 신진 사대부들 중 급진파들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여는데 앞장섰으니, 결국 공민왕은 적을 키운 셈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
6년간 신돈은 개혁 정치를 실시했으나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득권층이 계속 적으로 저항을 하자 공민왕도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신돈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감당하기가 버거워졌고 또 의심도 하게 된 것이다. 신돈도 처음의 의지와는 달리 재물 축재에 욕심을 부렸다. 또 비록 후대에 과장된 면이 있기는 하겠지만, 여자를 너무 밝힌 면도 있었던 것 같다. 예전에도 공민왕은 어느 신하에게 일을 맡겨 진행시키다가 그의 세력이 너무 커지면 제거해 버리는 방법을 곧잘 써먹었는데 신돈에게도 똑같이 했다. 신돈의 죄명은 역모죄였다. 공민왕이 그를 의심해서 내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능으로 행차하는 길에 복명을 숨겨두었다가 시해를 할 계획을 세웠으나, 내부에서 고발자가 나옴에 따라 역모 사실이 밝혀졌다. 고발자에 의해 사건 진상이 밝혀진 것이다. 즉각 공민왕이 신돈 일파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신돈은 체포되어 일단 수원으로 유배를 갔다가 즉시 목이 잘리고 사지가 찢어졌다. 그의 두 살 난 아들도 죽임을 당했고 따르는 무리 20여 명이 목이 잘림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1371년의 일이었다. 신돈의 역모 사건은 조작의 냄새가 짙다. 복병을 숨겼다는 증거가 없고 무엇보다 신돈이 잡혀서 죽을 때 까지 걸린 시간이 나흘이었다. 미리 역모 각본을 짜놓았다가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는 말이다. 신돈의 개혁 실패는 본인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공민왕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신돈의 능력을 보다 노련하게 써먹는 수완을 부렸어야 했는데 기득권층에 밀려 왕 스스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신돈의 좌절과 더불어 공민왕의 개혁에 대한 의지도 사그라졌다. 이후 공민왕은 예전의 공민왕이 아니었고 고려도 사양길에 접어들어 결국에는 이성계가 인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인임, 이성계, 그리고 최영4(채빈 살해사건과 친원파와 친명파)
1374년 4월에 명나라 사신 채빈과 임밀이 고려에 왔다. 이 사람들이 온 이유는 제주도의 말을 쓸어가고자 함이었다. 당시 명은 원을 몰아내는 중이었으므로 전쟁을 치르기 위해 말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도 말을 구하러 명에서 사람을 보냈으나 제주도에서 불상사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1372년 4월에도 말을 보내라며 명에서 사신 유경원을 파견했다. 이때 원나라가 아직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힘이 거의 빠진 상태였고, 무엇보다 남쪽의 왜구에게 고려는 엄청 시달리고 있었다. 때문에 신흥 강국 명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려는 마지못해 오계남을 유경원에 딸려 제주도로 보냈다. 유경원이 먼저 제주도에 상륙했는데 일이 터져 버렸다.
그가 목자들에게 위협과 공갈을 하면서 거들먹거렸던 모양이었다. 몽고 출신의 목자들이 들고 일어나 순식간에 유경원과 함께 있던 고려의 벼슬아치 그리고 군사들까지 모두 죽여 버렸다. 늦게 도착한 오계남이 군사 300명을 이끌고 싸웠지만 이들마저 모두 죽고 오계남만 겨우 탈출해서 돌아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제주도에는 몇 천 명 정도의 목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었다. 애써 키워 온 말을 대가도 주지 않고 빼앗아 가려 했으니.
2년 후에 채빈과 임밀이 제주도의 말 2천 필을 가져가야 한다면서 또 왔는지라 고려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들어 주지 않으면 명에서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공민왕은 망설이다가 한방언을 제주도로 보냈다. 그리고 명의 사신들을 위해서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면서 극진한 대우를 했다. 이들을 대접하느라 곳간의 재물이 바닥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극진한 대우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채빈은 고려 사람들의 속을 태웠다. 속말로 채빈은 지랄 같은 성질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벼슬아치들을 구타하기 일쑤였고 걸핏하면 큰 소리를 질러댔다. 오죽했으면 그의 노여움을 풀어주려고 공민왕이 염제신이라는 신하를 유배 보냈을 정도였다.
한방언이 제주도에 내려갔지만 목자들이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최선의 성의를 보여 300필을 보내 주었다. 공민왕이 명나라 사신들에게 300필의 말로 달래 보려 했으나, 오히려 임밀이 “우리가 2천 필이 못되는 말을 가지고 명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황제에게 죽음을 받게 되어 있으니 차라리 지금 왕에게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하며 애원했다. 이에 공민왕은 어쩔 수 없이 제주도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최영이 전함 314척과 2만 5,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향했다. 원래 원나라에서 제주도에 목장을 만들어 말을 길러 왔으니 그 관리들이 아직 제주도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3천여 명의 기병을 조직해 최영과 맞섰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최영이 이들을 전멸시키고 1천 필의 말을 빼앗음으로써 제주도에 있는 원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어차피 한번 치를 일이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명에 보낼 말 때문에 그랬다는 흠집을 남겼다.
9월에 공민왕은 300필의 말을 더 마련해 채빈과 임밀 일행이 명나라로 떠나도록 해주었다. 이들이 떠나기 전에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김의를 시켜 요동까지 말을 갖다 주게 했다. 그런데 이들이 떠나기 직전 공교롭게도 공민왕이 암살되어 버렸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는 채빈 일행과 함께 장자온에게 고애사(임금의 죽음을 알리는 사신)의 임무를 주어 명나라로 출발시켰다.
일이 또 꼬이려고 그랬는지 명나라로 돌아가던 채빈이 가는 곳 마다 술을 퍼마시고 주사를 부리면서 김의를 죽이려고 하자 김의가 채빈과 그의 아들을 죽여 버린 사건이 터졌다.
이어 김의는 임밀을 사로잡아 300필의 말과 더불어 원나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원래 김의는 원나라 출신인데 고려에서 벼슬을 살았다고 한다. 장자온은 도망을 쳐서 다시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이인임이 조작한 냄새가 짙다는 것이다. 이때 이인임이 공민왕의 아들 우왕을 밀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인임에게 “임금이 시해를 당하면 재상이 먼저 죄를 받게 됩니다. 명 황제가 선왕이 시해된 사실을 알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으면 화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자 이인임이 그를듯하게 여겼다.
그래서 일단 북원에만 고애사(임금의 죽음을 알리는 사신)를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그만 이 사실이 탄로가 나서 채빈의 귀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채빈이 명나라에 돌아가서 있는 그대로 말을 하면 이인임이 문책 받을 것이 명백하므로 채빈을 살해하고 사건을 조작했다는 말이다. 결국 채빈이 가는 곳 마다 주사를 부리고 김의를 죽이려 했다는 말도 꾸며내서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장자온도 처음부터 갈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끝내 비밀에 부쳐질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명나라에게도 알려지고 말았다.
이제 고려 조정에서는 명나라로 고애사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데 누가 나서려고 했겠는가. 할 수 없이 북원에 고애사를 먼저 보내게 되었다. 북원에 고애사를 보내고 난 뒤 조정에서 북원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명을 섬길 것이냐? 하는 의논이 일었고, 여기에서 친원파와 친명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당연히 친원파의 수장은 이인임이 되는 것이고 이와 맞서 신진 세력들이 친명파가 되는 것이다. 정몽주, 정도전 등이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애사를 보내야 한다고 이인임에게 주장했다. 마침내 최원이 뽑혀 명나라에 갔다. 그는 우려한 대로 명에서 구류를 당하고 문초를 받았다.
공민왕이 살아있을 때는 명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초창기에는 양면외교를 벌이다가 나중에 명의 힘이 강해지자 명의 요구에 순응하는 듯 하면서도 실리를 찾느라 갈등을 벌이기도 했다. 즉 공민왕은 외교에서 자주적인 면을 보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고 나서 친원파가 등장했고, 이에 맞서 신진 세력들이 친명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이인임, 이성계, 그리고 최영5(우왕 시기의 원과 명)
공민왕이 비명횡사하고 나서 후계를 두고 조정에서 힘겨루기가 있었으나 이인임의 지지를 받은 열 살짜리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고려 32대 우왕인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모후 명덕태후가 섭정을 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인 정권은 이인임의 차지가 되었다. 열 살짜리 소년이 정치를 할 수 없었을 터, 결국 우왕 초기의 정치는 이인임이 좌우했다고 보면 된다.
이때 고려는 주원장이 일으킨 명의 홍무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반원 정책을 편 공민왕의 결정이었다. 명은 1368년에 건국했다. 우왕은 1374년에 즉위 했으니, 이때 홍무7년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인임이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보수, 친원 정책으로 회귀하게 된다.
먼저 공민왕이 폐지한 국자감시라는 시험을 복귀시켰다. 원래 이 시험은 권문세가의 자제들에게 특혜를 주던 시험이라 공민왕이 없애고 과거제를 도입했던 것인데, 이인임이 원위치를 시켜 버린 것이다. 이인임이 친원으로 돌아서자 신진 세력이 강력하게 반대를 하게 되고, 이에 이인임은 정도전이나 정몽주 등을 유배 보내어 버린다. 이때 이인임을 도운 사람이 지윤이었다. 잠시 후에 살펴보자.
우왕 3년째이자 홍무10년째인 1376년, 북원에서 사신을 보내 묘한 제안을 했다. “우리를 섬기지 않고 명을 섬겨 봤자 주구(주원장을 적대하여 일컫는 말)는 침탈을 즐겨 고려를 편안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함께 명나라를 협공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어 북원은 책명사를 보내 우왕을 인정하자, 이인임은 명의 연호를 버리고 북원의 연호인 선광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이인임 일파에서 내분이 생기게 된다.
무녀의 소생인 지윤은 원래 군졸로 출발했으나 점차 무공을 세워 공민왕 말년에는 판숭경부가 되었다가 우왕 때에는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제일 높은 자리까지 오른 사람인 것이다. 세력이 커지게 되면 교만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지윤도 차츰 이인임에서 탈피해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려고 했다. 당연히 이인임이 그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지윤은 김윤승, 김승득, 이열, 하지원, 이렇게 네 사람에게 실권을 주어 부려 먹었는데 이들이 지문사걸이라 불리었다. 이들은 큰 권력을 잡은 듯 방자하게 굴었다. 이인임이 가만 두고 볼 리 없었다.
이인임은 지윤의 무리들을 제거하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 염탐꾼을 붙여 감시를 시킨 것이다. 이인임이 그들을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하지원과 김승득이 이열의 집에 모였다. 그들의 대화에서 ‘홍무 연호를 쓰지도 않고, 원나라 사신을 후대하면서 선광 연호로 바꾼 것은 너무 빠르지 않는가!’하는 불평이 나오게 되자 이들을 바로 순위부에 가두어 버렸다.
이어 조정의 정사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열어 혹시 문서라도 만든 것이 있는지 캐내려 심하게 문초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하가 어지러워 전쟁이 종식되지 않아 선왕께서 계책을 내어 남쪽을 섬겼는데, 이제 선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갑자기 선광 연호를 쓰는 것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하여 다만 의논하였을 뿐이요, 문서로써 이 말을 낸 것은 아닙니다.”하며 문서를 만든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들은 곤장을 맞고 귀양을 갔다. 이제 지문사걸 중 김윤승만 남게 되었는데, 김윤승마저 제거하면 지윤이 혹시라도 크게 반발할까 일단 봐준 것이다. 즉 지윤에게 더 이상 날뛰지 말라고 경고를 해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이인임은 사람을 시켜 김윤승이 당파를 만들고 주색에 빠졌다며 김윤승마저 탄핵해 버렸다. 이에 김윤승이 지윤을 찾아가서 “세 사람을 귀양 보낸 것은 이미 날개를 없앤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마저 탄핵 한 것은 앞으로 공도 없애려는 의도이므로 먼저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오.”하면서 선수를 치도록 부추겼다.
위기의식을 느낀 지윤이 김윤승과 공모해 그의 도당 20여 명과 더불어 옷 속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궐내에 있다가 이인임이 나오는 것을 엿보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인임과 최영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만다. 이 일로 그의 가족과 함께 도당 모두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면 세력을 키우려는 지윤을 이인임이 먼저 싹을 자른 것이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지윤은 친명파를 이용해 이인임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 하다가 결려든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인임이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원 정책을 쓴 것은 순전히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했다. 명나라 사신인 채빈(채빈 살해사건과 친원파와 친명파 참조)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인임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계속 원나라와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1378에 명에 사신을 보내어 퇴짜를 맞았으나 1379년에 또 사신을 보냈다. 이때는 연호를 다시 홍무로 바꾸었다. 즉 이인임은 원나라를 이용해 먹은 것이지 끝까지 원나라와 함께 할 생각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지는 해보다는 떠오르는 해를 따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이후 채빈 사건으로 화가나 있는 명의 홍무제(주원장)에게 고려는 박대를 당하면서도 계속 사신을 보낸다. 물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서 마련한 엄청난 조공품을 들고서 그리한 것이다. 나중에 우왕과 이인임은 명에게 보낼 물품을 마려하는 담당 부서인 ‘진헌반전색’을 설치하기 까지 했다. 몽고와 30년 전쟁을 치렀던 기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명의 비위만 거스르지 않도록 노심초사하게 된 것이다.
1384년(우왕 9)에 들어서서 홍무제는 화를 약간 누그러뜨렸다. 7월에 고려에서 홍무제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냈는데 정몽주가 이끌었다. 이를 홍무제가 받아줌으로써 채빈이 죽고 난 뒤 고려의 사신을 비로소 정식으로 접견한 것이다. 이해 가을 북원에서 고려로 사신이 왔으나 받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이제는 원나라가 더 이상의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1387년(우왕 13)에 좌시중 이인임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사임을 요청했다. 이때 그는 그의 추종자들인 염흥방·염정수 형제, 임견미, 그리고 이인민(이인임의 친동생) 등에게 두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뒷일을 부탁했다. 추호의 사심이 없는 최영이 병권을 잡고 있어서 안심이 되지만 무조건 방심만 하지 말고 이성계를 잘 감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는 최영에게 이성계가 반골이므로 빨리 내쳐야 한다고 종용하기도 했으나 최영은 이성계가 그럴 위인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무시했다.
이인임은 떠나면서까지 이성계를 경계하라고 일렀건만 후임들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성계가 판삼사로 있으면서 별 힘을 쓰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풍질에 걸렸다는 소문도 들었으므로 염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늙어지면 잔걱정이 많아지는 것 같다면서 오히려 이인임을 안쓰럽게 여겼다. 이성계를 경계하라고 한 이인임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의 목을 칠 줄 이때 만해도 그들은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조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나중에 윤이와 이초가 명의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고 또 명을 치려한다고 무고를 할 때 마침 명나라에 가 있다가 그것이 아님을 밝히 사람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포스트(이인임의 아들 이성계)에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1388년 1월, 조반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가 바뀌는 일이 발생한다. 조반은 밀직부사를 지낸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1월의 어느 날 조반의 대문 밖에 수십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다. 깜짝 놀란 조반이 내다보니 그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이광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조반이 이광에게 도대체 당신이 누구이며 또 무슨 일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느냐고 따졌을 때 그는 염흥방 대감의 문객으로서 염흠방의 명을 받고 오는 길이라 밝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이제부터는 이 집이 그의 소유가 되었으니 사흘 안으로 비워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반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일단 그들을 돌려보내고 즉시 개성의 염흥방 집으로 말을 달렸다. 염흥방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니까 염흥방은 몰랐던 일이라고 사과를 하며 없었던 일로 처리를 하겠으니 조반더러 돌아가라고 달랬다. 조반은 화가 났지만 염흥방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지라 그 정도로 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고 났을 때 조반은 식구들과 쫓겨나고야 말았다. 알고 보니 이광은 염흥방의 종이었다. 그런 이광이 장정들을 몰고 와서 저항하는 조반의 식구들을 구타해 가면서 결국은 쫓아내 버린 것이었다. 분통이 터진 조반은 일가친척들을 모아서 밤에 잠을 자고 있는 이광을 습격해서 죽여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염흥방이 가만있지 않았다. 대전으로 찾아가 우왕에게 조반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변을 한 것이다.
곧 조반은 삼사에 끌려갔고 그의 처와 어머니는 시골 관가의 옥에 끌려갔다. 염흥방은 형틀과 벌겋게 달아 오른 쇠막대기와 숯불 등 무시무시한 고문 준비를 해놓고 조반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조반은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다. 탐욕스럽게 남의 땅을 빼앗는 자를 죽인 것이 어찌 모반이냐고 하면서 끝까지 버텼다. 온 개경에 조반의 국문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이성계가 최영을 찾아가서 담판을 벌였다. 이때 최영은 백발이 성성한 73세의 노인이었고 이성계는 54세였다. 이성계는 이러다가 권문세가들에 의해 나라가 결딴나고야 말 것 이라며 최영더러 나서서 바라 잡아 달라고 촉구했다. 최영이 어떻게 하면 바로 잡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을 때 이성계는 병권을 쥐고 있는 최영이 명령을 내려 망국의 길로 이끌고 있는 국적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최영은 비록 병권을 쥐고 있다고 하나 왕의 명령이 없이는 사사로이 처리할 수 없으므로 이성계에게 일단 돌아가라고 말했다. 다음날 혈기왕성한 24세 나이의 우왕이 몸소 최영의 집을 방문해서 다른 사람들은 내보내고 한동안 밀담을 나누었다. 왕의 허락을 받은 최영은 조반을 석방하고 개경 시내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성계가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맡겼다. 다만 이인임만은 국가 원로이고 또 국가에 끼친 공로가 많으므로 건드려서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염흥방, 임견미, 그리고 이 외의 이인임 일파에 속했던 사람들이 속속 순군부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성계는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하룻밤에 체포해서 그 다음날 모두 처형해버린 속전속결의 친위 쿠데타였다. 그동안 이들이 남들에게 빼앗았던 토지를 조사하여 모두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백성들은 살맛나는 세상을 맞이했다면서 기뻐했다.
이성계는 악의 우두머리인 이인임도 죽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지만 최영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인임은 고향인 경산부로 귀양을 가서 위화도 회군이 일어난 얼마 뒤인 6월에 병사하게 된다. 이인임의 생년은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최영보다는 많았을 것이니까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친위 쿠데타의 성공으로 문하시중의 최영이 조정의 핵심이 되고 그 아래 수문하시중은 이성계가 된다. 그러나 최영의 시대도 얼마가지 못한다. 이해 5월 말에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 이인임의 예언이 적중하고 마는 것이다. 우왕의 죽음과 김저사건 조선 왕조에서는 폐위되어 죽임을 당한 왕이 공식적으로 단종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고려 왕조를 통틀어 도중에 죽음을 당한 왕이 꽤 되었다. 32대 우왕도 거기에 속한다. 그렇지만 우왕의 경우는 죽음의 원인이 좀 독특하다. 그의 아들 창왕과 더불어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이성계가 우왕을 쫓아낼 때 내세운 명분이 소위 말하는 폐가입진, 즉 가짜를 없애고 진짜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신돈의 자식을 왕으로 둘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앞뒤가 안 맞는 점이 있다. 만약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 분명했다면, 이성계 일파가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그 후계로 세우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우왕과 창왕이 가짜라는 이야기는 조선의 건국 세력들이 조작해냈다고 보아야 한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명의 요동부로 귀속시키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이에 우왕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산된 사실은 모두들 잘 알고 있다. 최영은 진압군을 구성했지만 이미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최영은 귀양을 갔다가 죽임을 당했고 우왕도 폐위되고 말았다. 정확하게 1388년 6월에 폐위된 우왕은 곧장 강화도로 추방을 당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우왕이 쫓겨난 후 바로 창왕이 뒤를 이었는데, 이때 반대한 조정의 중신들이 아무도 없었다. 우왕의 정통성에 의심이 간다는 말이 이 시점에 나돌았다면, 창왕이 즉위할 때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반대를 한 신하들이 반드시 나와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성계와 그의 일당들이 창왕을 세울 때 반대한 것처럼 보이는 일부 기록도 있다. 그것은 나중에 고려사를 편찬할 때 그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강화도에서의 우왕의 삶을 잠깐 살펴보자.
「7월 기묘일에 우왕의 생일이라 하여 도당에서 삼사좌사 조인벽과 동지밀직 구성로 강화에 보내~ , 무신일에 창왕의 생일이어서 죄수를 석방했으며~ , 도당이 추석이어서 지밀직 이빈등을 우왕에게 보내~ , 9월에 왕완덕을 보내 우왕을 위해 잔치를~ , 계유일에 이성계가 우왕을 위해 잔치를 ~ ,」
위의 내용을 보면 우왕이 강화도에 가 있는 동안 전 왕으로서 예우를 충분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죽임을 당하기 불과 5개월 전인 1389년 7월에는 이성계가 직접 우왕이 거처하는 곳에 찾아가서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비록 폐위를 당하기는 했으나 우왕은 좋은 대접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죽음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이해 11월에 발생한 김저 사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뭔가 조작의 냄새가 풍기고 있다. 아무튼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때 우왕은 황려부(여주)에 옮겨와 살고 있었다.
「전 대호군 김저와 전 부령 정득후가 가만히 황려로 찾아가서 우왕을 알현했다. 김저는 최영의 생질이었고 정득후 또한 최영의 족당이었다. 그들을 만났을 때 우왕이 울면서 말하기를 “답답하게 이곳에 손을 묶고 앉아 있으면서 죽음을 받을 수는 없다. 단지 역사(力士) 한 사람만 있어 이성계를 해치울 수 있다면 내 뜻을 성취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곽충보와 잘 지냈으니 네가 가서 만나보고 일을 도모하라.”라고 말하고는 칼을 한 자루 내어 주어 곽충보에게 전하게 했다.
김저가 곽충보를 찾아가서 우왕의 뜻을 알리니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 나서는, 곧장 이성계에 달려가서 고변했다. 약속된 거사 날에 김저와 정득후가 이성계의 집에 갔으나 김저는 사로잡혀 옥에 갇히게 되고 정득후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어 김저를 문초하니 전 판서 조방흥이 관련되었다고 말하므로 그도 곧 옥에 갇혔다. 계속해서 김저는 변안열, 이림, 우인열, 왕안덕, 우홍수가 공모하여 우왕을 맞아 내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우왕을 강릉으로 옮기고 창왕을 내쫓아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전 왕과 현 왕을 폐하여 한꺼번에 서인으로 내몰고 곧 죽음까지 몰고 간 사건치고는 그 전개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다. 무엇보다 우왕이 김저에게 곽충보를 찾아가서 거사를 도모하라고 한 말이 웃기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곽충보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해서 최영의 군사들을 무너뜨렸을 때 우왕의 눈 앞에서 최영을 끌고 나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이성계를 죽이라고 부탁한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다. 이후 곽충보는 조선이 개국 되었을 때 벼슬은 도총체까지 오르고, 태종 3년에 죽는다.
또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김저의 거사 바로 다음날에 이성계 일파가 모여 공양왕을 옹립해야 한다면서 후계 왕에 대한 계획을 짠 것이다. 왕이 쫓겨날 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 이런 일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장면이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따라서 이미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맞춰 일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김저를 고문하는 과정에서 그 연관자들의 이름이 튀어 나왔는데도 이들에 대한 조사를 전혀 하지 않고 바로 창왕을 쫓아 내 버리는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을 내모는 일을 이렇듯 엉성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은 우왕과 창왕을 폐서인하고 난 뒤 이루어 졌다고 하니 앞뒤가 완전히 거꾸로 되어 버렸다. 결국 공양왕을 뽑는 일이나 창왕을 내모는 일이나 모두 계획에 의해 착착 진행되었다고 보면 된다.
김저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이성계 한 사람을 죽이려고 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김저를 문초하는 과정에서 우왕 복위 운동이 포착되어 사건이 비약적으로 확대된 것인데, 그 처리 과정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후다닥 진행되어 버린 것이다. 보통의 살인 사건이나 무고 사건도 완전히 전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두 명의 왕을 폐서인 하는 일임에랴 두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우왕과 창왕을 폐서인 시킨 뒤 이성계 일파는 그들을 겨우 한 달 만에 죽이고 만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공양왕이 죽이는 것이다. 공양왕이 이때 집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허수아비였다. 모든 정치는 이성계 일파에서 나왔다.
공양왕이 우왕과 창왕을 죽이는 문제에 대해 말을 꺼냈을 때 재상들은 아무 말이 없었고 오직 이성계만이 반대를 했다고 한다. 그는 죽일 의도가 없었는데 다른 신하들이 죽였다고 발을 빼려는 의도로서, 소위 말하는 ?서비스였을 것이다. (이형우의 논문 ‘우왕의 정치에 대한 일고찰 : 출생배경과 폐위, 죽음을 중심으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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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木鷄之德) 원문보기 글쓴이: 대륙철도횡단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