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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 위 성경 구절을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교회를 다녀본 적 없는 사람도 기독교가 거짓말을 죄로 여긴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심상치 않게 늘고 있다. 이들은 지난 총선 결과가 조작되었으며, 여기에는 중국의 개입이 있었다고 믿는다. 비록 객관적인 증거도 없고, 지금까지 제기된 부정선거 의혹은 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었지만 말이다.
사실 기독교와 음모론 혹은 허위 정보의 결합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정부 방역 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한 허위 정보였다. 일부 목회자들은 백신을 맞으면 빌 게이츠와 같은 자본가들의 노예가 된다거나, 정부가 코로나19 방역을 핑계로 기독교를 말살하려 한다는 둥 음모론을 퍼뜨리며 대면 예배를 강행한 바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근본주의 혹은 극우주의 성향을 지닌 기독교인들의 문제로 축소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음모론을 믿는 ‘일부’ 기독교인만의 문제일까? 세간에 알려진 대로 상식이 부재하고 비합리적인 사람만 음모론을 믿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팩트체크와 열띤 토론을 통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면 문제가 해결될까? 아니면,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강화해 허위 정보를 스스로 걸러내도록 예방하면 되는 문제일까? 많은 사람이 믿고 있고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과 음모론은 상당히 복잡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연극 〈다우트〉(Doubt: A Parable)를 경유해보자.
다큐멘터리 같은 희곡 〈다우트〉
200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연극 〈다우트〉는 존 패트릭 샌리의 작품으로, 2008년에는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호평을 받았다. 작품은 1964년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 위치한 가톨릭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는 학생들에게 엄격한 질서와 규칙을 강조하는 원장 수녀(알로이시스)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신부(플린), 그리고 조금은 순진하지만 학생들을 사랑하는 젊은 수녀(제임스)가 있다.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제임스 수녀의 수업 시간에 신부가 학교에서 유일한 흑인 학생인 도널드를 따로 불러낸 사건으로 시작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부를 만나고 돌아온 도널드의 입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난다. 같은 날 오후, 제임스 수녀는 도널드의 사물함에 내의를 넣는 신부의 모습까지 목격하게 된다. 혹시나 신부와 학생 사이에 부적절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괴로워하던 수녀는 원장 수녀에게 자신의 의심을 토로한다. 그런데 원장 수녀의 반응은 놀랍도록 빠르다. 그녀는 수년 전에도 그런 신부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남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니 우리 힘으로 신부를 쫓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며칠 뒤 원장실에 모인 세 사람은 크리스마스 행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행사 논의는 핑계일 뿐, 원장 수녀는 곧장 신부에게 그날 일을 묻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대답을 회피하던 신부도 원장 수녀가 몰아붙이면서 추궁하자 하는 수 없이 털어놓는다. 신부가 설명한 그날의 진실은 이렇다. 도널드가 미사주를 몰래 마셨고 그 장면을 본 성당 관리인이 신부에게 알렸다. 신부는 도널드를 따로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고 복사(服事)에서 배제해야 했지만, 울면서 애원하는 아이를 측은히 여겨 아무도 모르게 그 일을 덮기로 했다. 원장 수녀가 알게 되는 순간 엄한 징벌이 내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신부의 말에 제임스 수녀는 안도했지만, 원장 수녀의 반응은 이번에도 놀랍도록 빠르다. 그녀는 자신의 의심을 조금도 거두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건을 도널드의 엄마에게 전한다. 결국 분노한 신부는 원장 수녀에게 따져 묻는다.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나를 모함하느냐. 아이가 평소 아버지에게 맞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느냐.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거센 항변에도 원장 수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원장 수녀는 자신이 지옥에 간다고 할지라도 신부의 잘못을 반드시 밝힐 것이라 말한다. 도대체 그녀는 무엇을 근거로 신부의 잘못을 그토록 확신하는 것일까?
비록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많은 학자는 음모론을 확실한 증거 없이 혹은 공식적인 설명과는 다르게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숨겨진 배후 집단의 은밀한 활동으로 주장하는 소문’으로 정의한다.1) 선거관리위원회가 내놓은 해명과는 다르게 ‘제22대 총선 결과가 조작되었으며 배후에는 중국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전형적인 음모론이다. 물론 이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진중한 의혹 혹은 은폐된 진실로 가정되지만 말이다.
음모론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데, 일단 그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허위 정보와 맞닿아있다. 즉, 모든 허위 정보가 음모론은 아니지만, 음모론은 대체로 허위 정보를 포함한다. 둘째로, 음모론은 정부 및 공식 기관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멀리 갈 것 없이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음모론은 반증 불가능(unfalsifiability)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논리적 반증 자체가 오히려 음모론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에게 아무리 법원의 판결문을 보여주어도 그것을 ‘법원이 중국에 포섭된 증거’로 해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음모론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음모론이나 허위 정보에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보고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은 영적 존재나 신의 섭리를 가정하는 종교적 세계관이 ‘세상에는 우연적 요소가 없으며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된다’는 음모론적 사고와 연결될 가능성을 지적한다.2) 특히 심리학자들은 종교인이 무종교인보다 분석적 사고 성향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3) 여기서 분석적 사고란,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고 논리적으로 천천히 사고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음모론의 논리적 오류를 감지하고 허위 정보를 판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요소이다.
한편, 분석적 사고와 대비되는 직관적 사고가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의해 강화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음모론 연구의 선구자인 호프스태터는 개인적 신앙 체험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와 초기 기독교처럼 단순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시주의가 미국 개신교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전문 지식 및 학문적 탐구보다는 직관·감정·실용성을 중시하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가 미국 사회 전역으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한다.4) 한국 개신교가 미국 복음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다면 부정선거 음모론이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작금의 현상도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음모론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종교성과 음모론 믿음 사이에는 정치적 성향, 정부에 대한 신뢰, 정체성 관련 동기 등 다양한 요인이 개입한다. 따라서 필자는 음모론에 빠지는 원인을 종교적 신념이 아닌 ‘종교적 신념에 대한 태도’로 보고자 한다. 종교적 신념과 결합된 음모론의 근본적 문제와 해결책은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믿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는 위험한 확신
다시 〈다우트〉로 돌아가보자. 원장 수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신부 앞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느냐는 제임스 수녀의 질문에도 ‘나는 안다’고 대답한다. 비록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나는 안다.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경험해봤다.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앞에 결국 신부와 제임스 수녀는 입을 다물고 만다.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원장 수녀는 신부가 학생을 추행했다고 ‘확신’한다. 그녀의 확신은 신부가 제시하는 정보를 모두 기각할 정도로 굳건하다. 전문 용어를 사용해서 설명하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신념에 비추어보았을 때 우호적인 정보만 수용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기각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확증편향이 반드시 비합리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은 인지적 한계를 갖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수용할 때는 누구나 자신의 기존 관점을 이용한다. 문제는 객관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초월적 신념’(distal belief)이 기준점이 될 때, 그리고 그 신념에 대한 ‘태도가 매우 강할 때’ 발생한다. 심리학자 스타노비치는 이를 ‘우리편 편향’(myside bias) 개념으로 제시하며 다양한 인지 오류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편향이라 설명한다.5)
특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이를 믿는 사람의 정체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확신으로 변하기 쉽다. 종교적 신념을 자신의 소유물로 삼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정보는 무조건 기각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은 실제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며 사회를 분열로 이끈다. 아니, 이끌고 있다.
게다가 성(聖)과 속(俗)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종교의 특성은 강한 결속력과 확고한 정체성을 구성원들에게 부여한다. 교회에서만 사용하는 언어나, 찬양 및 기도회 같은 의례는 기독교인들에게 높은 소속감을 제공하고, 그럴수록 우리편 편향도 강화된다. 같은 맥락에서 신앙의 언어로 포장된 부정선거 음모론은 종교적 신념을 강하게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음모론 내용이 진실이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는다.
그러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길 바란다.
나에게 하나님과 교회는 어떠한 존재인가. 나는 구원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고 있는가. 나는 기독교 이외의 영역에도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나와 얼마나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공존할 수 있는가.
만약 이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다면, 당신도 음모론에 빠질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현재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부정선거 음모론은 극우 개신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종교적 신념을 가진 기독교인 모두의 문제이다.
나를 향한 의심, 타인을 향한 망설임의 윤리
종교적 신념을 가지면서도 음모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정답은 ‘의심’에 있다. 희곡 〈다우트〉는 끝까지 그날의 진실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연극 속 등장인물도, 지켜보는 관객도 막이 내릴 때까지 무엇이 사실인지 알 수가 없다. 마치 신과 달리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을 알려주기라고 하듯이.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점은 원장 수녀의 잘못이 신부를 의심한 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부를 의심할 만한 정황은 있었다. 학생은 그날 술에 취했고, 신부와 학생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존재했으며, 무엇보다 유사한 사건이 이전에도 발생했기 때문에 원장 수녀는 그를 의심했다. 의심은 언제나 권력을 감시하는 도구이자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원장 수녀의 의심은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 의심 없는 맹목적 확신은 결국 그녀를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지옥으로 몰아넣었다.
특별히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이 믿는 진실을 의심한다는 것은 더 깊고 성숙한 믿음으로 가기 위한 열쇠이다. 내가 신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 내가 믿는 진실이 타인에게 어떤 효과를 미칠지 성찰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함부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 이 망설임의 윤리가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 주
1) Coady, D. (Ed.), 《Conspiracy theories: The philosophical debate》(Routledge, 2006)
2) 대표적인 연구로 Robertson, D. G., & Dyrendal, A., 〈Conspiracy theories and religion; superstition, seekership, and salvation〉, In J. E. Uscinski (Ed.), 《Conspiracy theories and the people who believe them》(Oxford University Press, 2019), 411-421쪽.
3) 대표적인 연구로 Pennycook, G., Cheyne, J. A., Seli, P., Koehler, D. J., & Fugelsang, J. A., 〈Analytic cognitive style predicts religious and paranormal belief〉, 《Cognition, 123(3)》(2012), 335-346쪽.
4) Hofstadter, R.,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Vintage, 2012)
5) Stanovich, K. E., 《The bias that divides us: The science and politics of myside thinking》(MIT Press,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