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 형제 6남매 중 두 누나와 나는 서울 유학차 성수동에 있는 외삼촌댁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은 2-3개월에 한 번 정도 서울에 오셔서 제철 과일 등 우리들 먹을거리를 챙겨 주셨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안했다. 그래서 우리 남매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 수 있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우리 남매들을 위해 신경을 많이 써주셨는데 특히 남매 중 가장 먼저 9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에 올라와 함께 산 나를 예뻐해 주셨다.
그러나 좋은 날은 마냥 지속되지만은 않았다. 그때 나는 어렸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외삼촌의 사업이 망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외삼촌이 가만히 나를 불러 외삼촌 가족들이 지금 피난을 가야 하니 사람들이 와서 찾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라고 했다.
며칠 후 낯선 사람들이 집에 들어와 TV등 가재도구에 빨간 딱지를 붙여놓았다.
그 당시 우리가 살던 집에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해주던 가사도우미(그 당시에는 ‘식모’라고 했다)가 있었는데 미처 월급을 받지 못했는지 집을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월급을 챙겨줄 우리 부모님의 상경이 차일피일 늦어지자 그만 집을 나가고 말았다. 부모님은 사태를 수습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상경을 미루고 계셨는데 그 때문에 우리들은 겨우 버스비만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사도우미가 나가버리자 학교에 싸가지고 갈 도시락이 문제였다. 그 당시 우리 반에서는 담임선생님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아이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사정이 있어 도시락을 못 싸 가지고 온 학생이 있으면 선생님이 도시락 뚜껑에 십시일반으로 밥과 반찬을 거두어서 먹도록 했다.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간 첫날, 선생님은 밥과 갖은 반찬을 도시락 뚜껑에 담아 내게 건네주셨다. 나는 그 밥이 차마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배는 고팠지만 알량한 내 자존심이 밥을 삼키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선생님과 친구들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 밥을 꼭꼭 씹어 남김없이 먹었다.
다음 날은 내 당번 날이었다. 나는 더운 물이 든 커다란 주전자를 들고 아이들의 도시락 뚜껑에 물을 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주전자를 교실 뒤편에 살그머니 내려놓고 선생님 몰래 교실을 빠져 나왔다. 그렇게 교실을 빠져 나왔지만 막상 가려니 갈 곳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무작정 구내식당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내 교복 주머니에는 집에 돌아갈 버스비 밖에 없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가에서 서성대기를 5분여, 그러자 같은 반 친구 K가 식당으로 들어가려다 나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 식사 안했지? 나랑 같이 식당에 들어가서 우동 먹자.”
순간 나는 울컥한 것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나는 우동 한 그릇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내가 그때까지 먹어본 우동 중 가장 맛있는 것 같았다.
“친구야, 정말 고맙다. 언젠가 내가 형편이 풀리면 꼭 갚아 줄게.”
“친구 사이에 우동 한 그릇 가지고 무슨 소리야? 네가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내 기분도 좋은걸.” 나는 그 친구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며칠 후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셨다. 그리고 한없이 길 것 같던 우리의 고생도 일단 끝이 났다. 아버지는 우리 남매를 위해 문화촌에 오래된 집 한 채를 사셨다. 비록 낡고 허름했지만 분명코 남의 눈치를 볼 것 없는 우리들만의 집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우리들을 위해 큰 매형과 큰 누나를 함께 살게 해주셨다. 고향에 남아있던 두 남동생까지 올라옴으로써 우리 6남매가 모두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겨울이 되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가만히 교실을 나와 구내식당으로 갔다. 따끈한 우동이 먹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식당에 막 들어가려는데 친구 K가 식당 문가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친구에게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우연 치고는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바로 지난 가을 녘의 내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식당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된 일이니?”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시던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겼어. 구속은 되지 않았지만 재판이 진행 중이야.”
“그러면 생활은 어떻게 하니?”
“형편이 말이 아니지.”
“우선 우동이라도 먹으면서 차근차근 이야기하자.”
친구가 허겁지겁 우동 먹는 모습이 어쩌면 예전의 내 모습과 똑같았다. 나는 내 우동을 덜어서 친구의 그릇에 담아 주었다. 그러자 친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우동 국물 까지 말끔히 다 마셔 버렸다. 배고파 본 사람만이 그 서러움을 안다고 했던가? 식사를 다하고 나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요 며칠 동안 배고픔이란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오늘 너를 통해 친구의 소중함도 새삼 느꼈어. 그리고 아무래도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풀려나시면 남미로 이민을 가야할 것 같아. 이제 닷새가 지나면 나도 학교를 그만 두게 될 거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친구들 중 너 밖에 몰라.”
“그런 어려움이 있었구나. 친구로서 네 아픔을 미처 헤아려주지 못해 미안해.”
“아니야. 너와 나는 배고픔의 동지잖아, 하하. 세월이 많이 흐르더라도 우동 한 그릇의 추억이 결코 잊히지 않을 거야. 너는 정말 좋은 친구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그나저나 네가 떠나 버리면 내 마음이 너무 허전할 것 같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가기 전까지 만이라도 점심은 나랑 같이 하자.”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너한테 너무 신세를 지는 것이 아닐까?”
“친구끼리 신세는......”
닷새 뒤 친구가 학교를 떠났다, 우동 한 그릇의 추억을 내 가슴에 남기고서.
(끝)
첫댓글 어릴 때 그 추억이 오래 남아있군요.
그 친구 다시 만나서 우동 한 그릇 함께 먹으면서
옛 얘기 하면 더욱 좋을텐데요.
조금 안타깝네요.
소식을 알 길이 없네요. 우연 아닌 우연이었는데.....
두분 모두 평생 기억될 일이네요.
누군가에게 준다는것,받는것보다 즐거운 일이었으면 합니다
55년전의 일인데 아직껏 생생하게 기억되네요.
슬픈 추억이네요
그 친구가 잘 살고 있기를 빌고 있습니다
진한 울림이 파도칩니다.
잘 감상합니다 ()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건승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