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이 '권태'를 유발할 때가 있습니다. 단순히 반복되기 때문에 삶이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기대감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기대는 무엇인가. 필자의 삶은 '결핍 vs 권태' 중 대부분은 결핍이어서 권태에 대하여 아는 게 많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망이고, 결핍은 욕망 좇기 현재 진행형 입니다. 그러면 과연 권태는 욕망이 없어서 늘어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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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에예공을 좌 청용 우백호로 두고 적십자 구국 기도회를 했어요. 좋아요, 이런 시간. 엄마가 장염에 걸렸고 예주가 늘 부족한 자신과 대면할 때 당혹스럽다고 했어요. 아비는 예공이 좀 더 자만하고 뻔뻔해질 것을 주문합니다. "홍도야!우지 마라 아빠가 있다" '상실의 시대’는 원제 ‘노르웨이의 숲’으로써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입니다. 의정부 3상 9방에서 시간을 때우려고 책을 읽었고 출소 후 영화로 한 번 더 본 기억이 맞을 것입니다. 감방에 책을 넣어준 년이 살짝 보고싶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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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건으로 자숙하고 있는 유아인의 ‘버닝‘이 한국판 19금, 상실의 시대인데 볼만 합니다. 후기를 기록해 놓으면 가끔씩 시간벌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예주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작가는 시대를 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허무주의가 일본에 팽배하던 시절, 그는 서구 문화에 굉장히 익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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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즐겼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체는 굉장히 서구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집니다. 더불어 허무함이 문체를 감싸 그의 작품을'고독'으로 하는 것이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간혹 들려오곤 합니다. 그는 시대와 더불어 개인의 인생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작가 중 하나입니다. ‘상실의 시대’는 역시 영화보다는 책이 더 낫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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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와타나베라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상실의 시대 스토리 라인은 이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와타나베의 1인칭 시점으로써 그가 만나는 기즈키,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와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삼각관계식으로 이루어져 가는 그들의 사랑은 와타나베가 30대가 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분명 사랑 이야기이건만,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무언가 가득하고 기름진, 그런 긍정적인 감정으로써의 사랑이라고 볼 수 없는 이미지들입니다. 와타나베는 무언가 텅 비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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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여자로는 끝나지 않는 그의 연애생활. 질투와 고독, 미움까지 그런 허무한 감정들을 망라하여 집어넣은 것이 바로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을 읽고 같이 고독을 느끼며, 자신이 느꼈던 고독에 공감하며 보는 터라, 현실 시대에서 상처가 많은 이들을 대변하는 그런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상실해가는 젊은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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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얻어 가는 것을 잃어가는 그들. 허무한 나날 가운데 사랑마저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 조금 고인 자리는 썩어버리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공허하고 상처받았다는 뜻인데, 이런 사회현상이 그렇게 썩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걱정되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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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것은 진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나는 아무 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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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심금을 울리는 명대사들은 상실의 시대 한가운데 살고 있는 와타나베의 상실감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뭐야, 이 센티멘털은 허무일까 우울일까? 흠, 상실은 어떻게 치유하는 것일까? ……등대……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2024.8.25.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