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抗日獨立運動家姜平國追悼碑
위치 ; 제주시 화북2동 5618번지(제주시 기와5길 117-22) 황세왓 천주교인공동묘지 순교자묘역 동쪽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비석(추도비)
강평국(姜平國․본명 연국. 1900~1933)은 천주교인 강두훈과 홍씨(洪召史. 세례명 유리안나) 사이에 3녀로 제주읍 일도리 1390번지에서 1900년 6월 17일에 태어났다. 강씨의 원적은 광령리이다. 그녀는 일찍이 영세를 받아 세례명은 '아가다'이다. 부모는 1901년 '이재수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희생되었고, 8살 위인 오빠 강세독은 제주공립보통학교(4년제)를 제1회로 졸업하고 관비유학생으로 1916년 경성고등보통학교와 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후에 일본 동양대학까지 졸업하였으며 제주도내에서 초등교장으로 퇴임했다. 그녀의 소녀시절에는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었다.
제주도에 신축교안을 불러온 초창기 프랑스 출신 천주교 신부 구마슬이 세운 신성여학교에 1909년에 입학해 최정숙․고수선 등과 제1회로 졸업했다. 신성여자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수선과 함께 서울 유학길에 올라 경성여자고등학교(현 경기여고) 사범과에 진학했고, 서울에서 삼일운동에도 학교간 연락 임무를 맡아 밤중에 기숙사를 탈출하여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는 등 적극 참여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경험이 있었으며,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전남 진도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제주 여성으로서는 제1호 교사였다.
1919년 3월1일 오후 서울 경운동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반 학생 최정숙은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종로로 나갔다. 무교정(무교동)을 거쳐 대한문 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자 그 대열에 함께 참여해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제 헌병에 체포됐다. 최정숙의 ‘신문조서’(1919년 6월 26일)에는 “발이 아파 기숙사에 누워 있었다. 그날 오후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기숙사에 있던 학생이 모두 뛰쳐나갔다. 최은희, 강평국 등과 상의한 적도 없고, 3월1일에야 알았다”며 우연히 시위에 참여한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최정숙의 3·1만세운동 참여는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당시 일제 경찰의 경성여고보 시위관련자 동정 및 성행조사 결과를 보면, 2월27~28일께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최은희 등이 독립운동 소요를 상의했다고 돼 있다. 경성여고보의 학생과 직원들은 시위 주동자로 최정숙과 강평국, 최은희를 꼽았다고도 했다. 이 보고서에는 최정숙과 관련해 “학생들을 이끌며 강평국, 최은희 등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모의하고 3월1일에는 경성여고보 부속 제동여자보통학교에 교수실습을 가기로 했으나 2월28일부터 발이 아프다며 기숙사에 누워있다가 1일 오후 2시께가 되자 자리를 차고 일어나 학생들을 이끌고 파고다공원으로 달려갔고, 발이 아프다고 누워있었던 것은 (만세운동) 준비를 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인 2월28일 오후 5시 박희도(33인 중 1인·당시 기독교 중앙감리교 전도사)와 오래전부터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던 경성여고보 본과 졸업반 학생 최은희(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는 박희도의 부름을 받고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박희도의 집으로 갔다. 최은희는 회고록 <조국을 찾기까지>(탐구당, 1973)에서 “경성여고보는 박희도의 지도로 1917년부터 학생들의 비밀써클이 조직돼 항일투쟁을 벌여왔다”고 말했다. 이 ‘비밀써클’을 최정숙은 사범과 학생 79명으로 조직된 ‘소녀결사대’라고 했다. 박규훈이 기숙사 소사 숙소의 창문에 지게를 세워두면 강평국은 지게를 타고 밖으로 내려가 연락을 취하고 독립운동 정보를 얻어와 공유하곤 했다. 3월1일 오후 1시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연락이 다 됐었는데 갑자기 낮 12시에 만세를 부르게 되자 박규훈이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숙사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이미 독립선언서를 쓴 유인물이 학교 운동장에 살포돼 있었다. 교직원들은 수업을 중단한 채 긴급회의를 열었고, 기숙사 대문은 자물쇠로 잠궜다. 학생들은 화장실 벽에 ’불의코 백년 살지 말고 의코 하루 살아라’는 문구를 써붙였다. 기숙사 밖에서는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들렸다.
몇몇 학생이 ’대문을 부수자!’고 소리쳤다. 고수선과 동료 학생 김일조가 도끼로 문을 부쉈다. 최정숙은 생전에 “죽을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속옷에 주소 성명 학교 고향 부모 이름까지 써 붙이고 파고다공원에 갔다”고 회고했다. 부서진 대문을 밟고 나간 학생들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오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동료 학생들과 파고다공원으로 가다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나오는 인파와 마주쳐 대열에 합류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3·1만세운동 당일 붙잡힌 최정숙은 닷새동안 경무총감부에서 고문을 받았다. 최은희는 회고록에서 “우리 학교 학생 32명이 잡혔는데 학교로 연락한 결과 교장이 명단을 조회하고 ‘최정숙과 최은희는 그쪽 처분대로 해달라’고 하는 전화가 걸려온 뒤 교무주임을 보내 30명의 학생만 데려갔다”고 회고했다. 5일 오후 검사에게 심문을 받은 최정숙은 유치장 안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최은희의 치마 주름이 많이 터졌다며 자기 치마를 벗어 바꿔 입고 나갔다. 그러나 최정숙은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고, 뒤이어 최은희도 같은 곳으로 이송됐다. 최정숙은 3월20일 풀려났다. 강평국은 당일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3월5일 2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고수선과 몇몇 학생들은 당시 3·1만세운동 연락책을 맡은 유철경 경성여고보 선생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일편단심’을 뜻하는 수천여개의 빨간 머리띠를 만들어 경성고보 학생들을 통해 각 학교 학생들에게 나눠줘 2차 만세시위에 사용하도록 했다.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5일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남대문 역으로 나가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때도 강평국은 동료 학생들과 붙잡혔다가 3월24일 풀려났다. 고수선도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손가락 고문을 당해 평생 손가락에 상처가 남았다. 최정숙은 “나는 사상범으로서 써클 대표로 올라 있기 때문에 면회가 금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실은 고수선, 강평국씨 등이 나보다 더욱 수고했는데 내가 주동으로 몰린 것이다”고 말했다. 고수선은 훗날 남긴 3·1만세 시위와 관련해 이렇게 회고했다. “강평국과 나는 외부 연락을 했다. 박규훈씨가 창으로 상황 설명을 하고 우리는 끝까지 종로경찰서 앞까지 갔다. 서울역에 당도, 용산서 총을 쏘아대자 바로 세브란스병원으로 피신. 4인(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박규훈)이 약속키를 우리는 끝까지 계속 일할 것을 약속. 제동 유철경 선생댁에서 등사, 머리띠를 만들어 박규훈씨에게 전달, 최 선생은 종로로 가다 대중에 휩쓸렸다가 체포. 수고는 강 선생이 많이 했다.”
1919년 3월25일은 경성여고보의 졸업식날이었지만, 강평국과 최정숙은 일본 국가를 부르며 참석할 수 없다며 바로 제주로 내려와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은 우편으로 받았다. 강평국은 같은 해 4~5월 대정면 대정공립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최정숙은 아픈 몸을 치료하며 요양하다 4월15일 경성지방검사국의 소환 통보를 받고 붙들려 올라가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고 결사대 주모자로 몰려 거의 매일 고문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보석으로 풀려난 뒤 제주로 귀향했다가 11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최정숙과 강평국은 여성교육에 앞장서기로 하고 1921년 제주에 ’여수원’이라는 사숙을 세워 여성계몽운동에 나섰다. 고수선은 그 해 4월 충남 논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군자금을 모금해 일본과 상해를 옮겨다니는 활동을 하다 이듬해 1920년 4월 도쿄 요시오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간토대지진이 발발하자 1923년 9월 귀국한 뒤 이듬해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이들은 1925년 12월에는 제주 여성들의 권익을 찾기 위한 제주여자청년회를 결성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강평국은 여성해방운동에도 열성적이었다. 강평국은 <동아일보>(1925. 6.1, 7.20)에 기고한 ‘여성해방의 잡감’이라는 글에서 “우리 여자는 노예였다. 천하의 노예는 감옥을 벗어나 장차 향할 길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여자를 노예로 취급하려는 자와는 힘이 없고 돈이 없지만 싸워야한다. 결혼 자유, 연애 자유, 사회에 대한 사교 자유 등 여자의 자주독립에 관한 문제는 공상적 이론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물질적 유물주의의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주장했다.
제주에서 학교 교사로 있던 강평국은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항일운동에 더 열성적이었다. 1927년 1월 유학생 50여명이 모여 발기한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 집행위원장과 신간회 도쿄지회 부인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1928년 1월에는 여성의 권익 옹호를 위한 근우회 도쿄지회를 창립해 핵심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강평국은 일본에서 활동하다 몸이 아파 학업을 포기하고 귀향해 1933년 11월 세상을 떴다.
고수선은 1926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부터 4개월 남짓 개성에서 의사로 지내다가 귀향한 뒤 제주 최초의 여의사로 활동했다. 제주여자청년회 등의 활동도 활발하게 했다. 제주도 최초의 의사인 김태민과 결혼한 뒤 태평양전쟁 말기 충청도 강경으로 떠났다가 한국전쟁 때인 1951년 귀향한 뒤 한글강습소와 보육원 운영 등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을 했다. ’세친구’ 가운데 맏언니였던 고수선은 가장 늦은 1989년 눈을 감았다.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최정숙의 수의를 입힌 고수선은 그의 추도사에서 “60여년 전 당신은 10세요, 내가 14세 때인 우리 신성학교 시절부터, 기미 3·1운동 당시 당신과 최은희씨, 그리고 강평국씨 등은 서울 진고개로 들어가 체포당하자 그날 강당에 모여 석방 운동을 하다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구타당했다”고 회고했다. 1981년 11월 황사평 묘역에 ‘아가다 강평국 선생 추도비’를 세울 때도 84살의 나이의 고수선이 참석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강평국을 기리기도 했다. 맏언니의 역할을 한 고수선은 1989년 8월 눈을 감았다.
(한겨레 2019.02.28. 허호준 기자)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최정숙과 함께 1920년 여자장학회를 조직했고, 1921년에는 이 장학회를 토대로 최정숙과 함께 여수원(女修園․현재 중앙성당 일대)을 개설해 여성의 문맹 퇴치와 여성의 지위향상을 목표로 봉사활동을 했다.
강평국이 여수원에 근무할 당시 제자였던 이들은 "최정숙 선생은 성격이 온순하고 온화한 반면, 강평국 선생의 성격은 날카롭고 불같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당시 강평국 지사 밑에서 공부한 제자들은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3.1만세 운동 당시 최정숙 선생님은 종로로 나가다 붙잡혔고 강평국 선생님은 일본 기마병에 쫓길 때 어느 집으로 들어가 병풍을 치고 앉아 머리를 쪽지고 앉았다고 해요. 그래서 새색시처럼 보여 붙잡히지 않았던 것이지요" -제자 김서옥(1989년 당시 81살)
"그때 1학년 담당이었던 강평국 선생님이 너희들은 훌륭한 국민이 되어야한다고 항상 일깨줬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와함께 공부하러 갔던 김소제가 와서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났다며 울음을 터뜨렸어요. 학생들에게 조선글을 알아야 한다며 <유년필곡>을 가르치던 강평국 선생님이 같은 학교 직원의 밀고로 잡혀갔던 것이지요" - 제자 한여택(1989년 당시 91살) (오마이뉴스 2019.11.19.)
여수원은 1924년 이후에는 일제의 부당한 간섭으로 제주공립보통학교(현 제주북교)에 흡수된다.
강평국은 제주도 최초의 진보적 청년단체인 '반역자구락부' 창립에도 참여했다.
1925년에는 제주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해 최정숙, 김시숙, 이재량 등과 함께 여성의 의식향상과 권익 보호를 위해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해 근대민족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최정숙, 고수선 지사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고,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간 강평국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함으로써 제주여성으로서는 최초의 해외 대학유학생이 되었다.
강평국은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도쿄조선여자청년동맹(1928년 2월 22일 해체)의 초대집행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동경지회가 창립되자 부인부 책임자로 선임되어 활약하였고, 1928년에는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유일당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 일본지부를 창설하여 도쿄지회의 의장단으로 활약했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395쪽)
1928년 1월 21일 근우회 도쿄지회 창립대회에서 정치문화부 소속 역원으로 뽑혔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313쪽) 〔槿友會의 東京支會 22일에 성대히 설립〕 제하의 당시의 신문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경에서 근우회 동경지회 설립준비중에 있다 함은 기보한 바이거니와 제반 준비가 종료되어 설립대회를 지난 22일 정오부터 본향구(本鄕區) 추분정(追分町) 제대기독회관(帝大基督會館)에서 열었는데 각층을 망라한 60여명이나 되어 매우 성황을 이루었다. 먼저 박화성(朴花城)씨의 의미심장한 개회사로 개회하여 의장으로 박화성․강평국 양씨가 당선되고 서기로 양봉순(梁鳳順)․김현실(金顯實) 양씨를 선임한 뒤 계속하여 우익단체로부터 온 축사 및 축문 낭독에 들어갔는 바 제1착으로 일본 부인동맹(婦人同盟)과 신간회 동경지회를 위시하여 내외국의 각층 단체 약 10여 개소에서 열렬한 축사가 있어 만장한 인사의 가슴을 끌리게 하였으며 또 20여장의 축전이 뒤를 이었으며 모두 정성과 우애로 차서 만장의 공기를 극도로 긴장케 한 뒤 의안토의(議案討議)에 들어가 격렬한 이론 투쟁이 장시간 계속한 끝에 아래와 같이 위원과 의안 의결이 선정되었다더라.(동경) 결의 사항 ①선언 강령 규약 ②운동 방침에 관한 건 ③노동 부인에 관한 건 ④인신매매에 관한 건 ⑤신간회 지회에 관한 건 ⑥일본 부인동맹과 제휴의 건 ⑦교양에 관한 건 ⑧대중신문 지지에 관한 건 ⑨회유지 및 기타"(제주항일독립운동사 1113~1114쪽)
강평국 지사와 절친했던 고수선 지사의 아들인 김률근 선생은 "어머니는 늘 강평국 지사께서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3.1만세 운동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유학시절에도 강평국 지사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말씀을 어머니를 통해 들었습니다. 강평국 선생은 1927년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 초대 집행위원장을 맡으셨고 또한 1928년에는 동경에서 근우회를 창립하여 도쿄지회 의장으로 활약하신 분이십니다"라고 증언했다.(오마이뉴스 2019.11.19.)
강 지사는 일본에서 활동중 늑막염으로 몸이 극히 쇠약해지자 귀향한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직후인 1933년 1월 광주에서의 여성 비밀 결사에 연루돼 일제 경찰에 의해 광주로 연행되었다. 그러던 중 병이 악화됐고 그해 11월 10일 쓸쓸히 사망했다. 지사의 시신은 제주시 황사평 천주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제민일보 2006년 3월 14일)
1981년 11월 10일 고인의 업적을 기려 동지․후배들이 추도비를 세웠다. 다음은 추도비에 새겨진 글이다.
"슬프다. 시대의 선구자요 여성의 등불인 그는 3․1운동 때 피흘려 청춘을 불살랐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품은 이상을 이루지 못한 채 애달픈 생애 딛고 여기 길이 자노니. 지나는 손이여 비 앞에 발 멈춰 천사의 고혼(孤魂)에 명복을 빌지어다. 여기 뜻있는 이 모여 정성들여 하나의 비를 세우노니 구천에 사무친 외로운 영이여 고이 굽어 살피소서."
강평국 지사의 무덤은 이 넓은 묘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순교자 묘역 한쪽에 추도비만 세워져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제주에서 33살에 숨진 강평국 지사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1933년 숨졌을 때 현재의 황사평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했지만 당시 묘비를 세우지 못한 관계로 현재까지도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추도비는 죽마고우였던 고수선 지사를 비롯한 장시우, 김정순, 한려택, 김소아, 김계숙 등 친구, 동지, 후배, 제자 16명이 강평국 지사의 유지를 받들어 1981년 11월 10일 이곳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안에 세운 것이다.(오마이뉴스 2019.11.19.)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1921년에는 강 지사의 생가 터에 '서른세 해 짧은 생을 온전히 조국독립과 여성해방을 위해 바치신 애국지사 강평국 / 님의 뜨겁고 고귀한 그 마음 후세에 기리고자 88번째 기일을 맞아 이 표지석을 세웁니다. / 2021.08.12. 신성학원총동문회 최정숙기념사업단'이라는 글귀를 새겨 표석을 세웠다.
《작성 2010.04.03. 보완 2026.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