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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왼쪽)과 중봉, 그 앞 왼쪽은 새봉
지리산 우뚝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智異巍巍鎭海東
올라가보매 마음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登臨心眼浩無窮
험한 바위는 장난한 듯 솟아 봉우리들 빼어났으니 巉巖只玩峯巒秀
아득히 넓은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리 磅礴誰知造化功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 일으키고 蓄地玄精興雨露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含天粹氣產英雄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 맑게 하였으니 嶽祗爲我淸煙霧
천 리 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일세 千里來尋誠所通
――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 「지리산 반야봉 올라 하룻밤을 묵으며(宿智
異山般若峯)」(신정일 역)
▶ 산행일시 : 2017년 11월 4일(토), 맑음
▶ 산행인원 : 13명(영희언니, 중산, 악수, 대간거사, 산정무한, 인치성, 수담, 사계, 두루,
구당, 오모육모, 무불, 메아리)
▶ 산행거리 : 도상 13.2km(1부 8.5km, 2부 4.7km)
▶ 산행시간 : 9시간 33분(점심과 이동시간 제외)
▶ 교 통 편 : 두메 님 24인승 버스
▶ 구간별 시간(산의 표고는 가급적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따름)
00 : 20 - 동서울터미널 출발
02 : 00 - 죽암휴게소
04 : 29 ~ 04 : 44 - 대원사와 소막골 사이, 산행준비, 산행시작
07 : 00 - 지능선 진입
07 : 48 - 치밭목능선 1,022.3m봉
08 : 22 - 1,014.5m봉
08 : 42 - 1,026.5m봉
08 : 55 - △1,026.0m봉
09 : 46 - 안부
10 : 08 - 844.4m봉, Y자 능선 분기, 왼쪽으로 감
10 : 36 - 672.4m봉
11 : 32 - 평촌마을, 1부 산행종료, 점심, 이동
12 : 42 - 유평리 유평농장, 2부 산행시작
13 : 16 - 지능선 진입
13 : 53 - 지리주릉 1,048.6m봉
14 : 14 - 왕등재
15 : 27 - 외고개마을, 유평농장, 산행종료
16 : 30 ~ 18 : 46 - 산청, 목욕(경호탕), 저녁(행님아흑돼지)
22 : 05 - 동서울 강변역, 해산
1. 산행지도(2008년판 영진지도)
2. 왕등재에서, 뒷줄 왼쪽부터 악수, 사계, 두루, 구당, 중산, 대간거사, 산정무한, 인치성,
수담, 앞줄 왼쪽부터 무불, 오모육모, 메아리
3. 천왕봉에 구름이 쉬고 있다
4. 웅석봉
5. 삼신봉과 남부능선, 그 앞 능선은 구곡능선(황금능선)
6. 치밭목능선, 저렇게 아름다운데 가서 보면 더할 수 없이 사납다
▶ 치밭목능선
옛말에 ‘가을비 한 번에 내복이 한 벌’이라고 했다. 어제 가을비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졌
다. 밤새 고속도로 달리는 중에 차내 히터를 가동하였다. 두메 님은 더운지 간혹 차창을 열라
치면 그 뒷자리로 들이치는 바람이 차디차다. 대원사(大源寺) 일주문을 지났다가 산행 들머
리를 지나쳤다기에 차를 돌려 소막골 근처까지 뒤돌아간다.
보름달이다. 치밭목능선 위에 머물렀다. 한여름에는 달빛도 덥더니만 늦가을 이 밤에는 싸늘
한 느낌이다. 대원사계곡 덕천강(德川江)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유평 후미진 산골 대원사
앞 덕천강은 한밤에도 소리 내어 설법을 강한다. 우리는 모르쇠하고 강을 건넌다. 바위 징검
다리를 만든다. 예전에 경험했다. 낙엽에 덮인 물가를 무심코 딛었다가는 풍덩하고 빠지는
수가 있다고.
강 건너 마른 계곡을 오른다. 암릉 같은 너덜은 미끄럽고 산자락을 더듬는다. 인적이 있다 해
도 햇낙엽에 덮였다. 새로이 길 낸다. 가다가 절벽이나 덤불숲에 막히면 너덜 지나서 건너편
펑퍼짐한 산자락을 쓸어간다. 울창한 왕대숲도 지난다. 헤드램프 불빛에 비춰보니 무수한 장
대 숲이 볼만하다. 인원수를 확인해 본다. 두 사람이 비었다.
수대로 연호한다. 메아리 끊기면 한층 고요하다. 이런 때 도~자 님이 애용하는 수법이 널리
통용되기에 그 의심을 한다. 그렇지만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데를 헤매거나 다쳐서 운신을
못하는 경우를 염려한다. 줄 맨 뒤에 선 사계 님이 찾으려고 목청 높인 연호 앞세우며 뒤돌아
간다. 이래서 언감생심 잠시 휴식할 틈이 주어진다.
도~자 님이 애용하는 수법이란, 후미로 가면서 선두가 궁금하여 부르면 그 부르는 소리를 뻔
히 듣고도 아무 대답하지 않는다. 이때 즉시 대답을 하게 되면 선두는 ‘별일 없이 잘 따라 오
는구나’ 하고 계속 가버린다는 것이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기다려주는데 말이다. 그래서 기
다리고 있는 선두 일행과 가까이 접근하여 몰래 휴식하고 나서 헐레벌떡 나타나면 선두의 배
려로 또 휴식하게 된다고 한다.
계곡은 너덜이다. 낙엽 쓸어 너덜을 지난다. 마을에서 이어진 고로쇠 물 뽑아내는 호스와 함
께 오른다. 고로쇠나무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 역시 이른 봄날 한때 벗들과 어울
려 몸에 좋다는 고로쇠 물 좀 먹겠다고 지리산 자락 여관방에서 짜디짠 멸치 씹어가며 화투
치면서 밤을 새기도 했다. 그 맛이란 밍밍했던 기억이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으려고 전날
마시는 장청결제의 맛이었다.
마침내 계곡도 가팔라지고 이럴 바에는 사면을 치고 오르는 편이 낫다. 낙석을 염려하여 서
로 어긋나게 오른다. 잡목이나 잡초 움켜쥐고 오른다. 산등성이는 가파르고 넙데데한 사면은
낙엽이 깊다. 어디로 오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06시 34분 헤드램프 소등. 06시 58분 일
출. 보름달은 치밭목능선 너머로 지고, 해는 웅석봉 달뜨기능선 위로 솟는다.
07시. 지능선 붙든다. 아침 요기한다. 오늘은 상고대 님이 곁에 없어(회사 가을행사로 직원
들과 설악산에 갔다) 내 아침이 부실하다. 인절미 몇 개 먹고 만다. 입산주 탁주는 예의 덕산
명주다. 해피~ 님 본인은 오지 못하더라도 탁주는 보내왔다. 그 정까지 담아 술맛이 더 난다.
안주도 걸다. 수담 님이 샐러드, 탕수육, 훈제오리 등을 준비했다. 얼근하여 일어난다.
이제나저제나 맞닥뜨릴게 될까 기다리고 기다리며 내심 불안해했던 산죽 숲을 만난다. 울창
한 키 큰 산죽이다. 어설프게 고개 들면 산죽 잎새가 얼굴을 스치니 마치 면도날에 살짝 베인
듯 순간 쓰리다. 아예 엎드리고 양팔 벌려 가느다란 대숲을 헤친다. 산죽 터널을 간다. 인적
은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앞사람 뒤를 쫓는다.
바로 위가 치밭목능선 마루이고 1,022.3m봉이니 산죽 숲은 이러다 조금 지나면 풀리겠지 했
는데 내 생각이 짧았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따금 발돋움하여 산죽 숲 위로 머리 내밀어 제대
로 가고나 있는지 주변을 살피곤 한다. 등로 약간 벗어난 바위에 영희언니가 먼저 올라 웅석
봉을 감상하기에 나도 합세한다. 이때 07시 30분, 산행 시작한 지 거의 3시간 만에 하늘을
보고 산을 본다.
7. 가운데는 왕등재에서 밤머리재로 가는 지리주릉
8. 웅석봉, 그 오른쪽은 달뜨기능선
9. 천왕봉(왼쪽)과 중봉, 이른 아침에는 정상 부근에 상고대 눈꽃이 피었었다
10. 가운데는 동왕등재(936.5m)
11. 왕등재에서 밤머리재로 가는 지리주릉, 오른쪽 뒤는 필봉산
12. 천왕봉
13. 멀리는 웅석봉 능선, 왼쪽은 동왕등재(936.5m)
14. 장당골 주변
1,022.3m봉 정상을 불과 몇 미터 남겨두고 서진한다. 산죽 숲에 갇혀 보이지 않을뿐더러 이
런 산죽 숲을 뚫기가 버거워서다.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 1559∼1623)이 1611년 봄
에 지리산 세진대(洗塵臺) 마적암(馬跡庵, 함양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부근)을 오르기가
이와 비슷했다. 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을 보면 바로 우리 일이기도 하다.
“벼랑길을 따라가다가 끝내는 길을 잃고 말아 관목이 우거진 가운데로 들어갔다. 풀 이슬이
옷을 적시고 등나무 가시가 얼굴을 찔렀다. 밀고 당기면서 가시덤불을 헤치고 산허리를 비스
듬하게 돌면서 올라갔다. (…) 산비탈을 기어오르면서 열 번에 아홉 번은 넘어졌다. 이렇게
힘들게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얼굴엔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다리는 시큰거리면서 발은 부
르텄다.(遂緣厓而行迷失路。入灌叢中。草露濡裳。藤梢刺面。推且挽披荒榛。仄轉山腹而
登。(…)夤緣山冢。十步九折。陟降之勞。無不汗顔。酸股繭足。)
이것이 만일 사람에게 부림을 당해서 억지로 하는 일이라면 원망하고 성나는 마음을 아무리
꾸짖고 금한다 하더라도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길을 가며 함께 쉴 때는 웃
음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는 기쁨이 아니겠는가!(若使
被人役使爲也。其怨咨嗔怒。雖呵禁難止。而群行朋息。嘻笑盈路。豈非賞心之可娛也
歟。)”(유몽인 외 지음, 전송열 외 옮김, 『조선선비의 산수기행』에서)
치밭목이 무슨 뜻일까? 물론 ‘목’은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뜻한다. 치밭은? 꿩 치(雉)는 아무래도 어색하다(꿩은 들판에서 살지 고산에서는
보기 드물다). ‘칡밭(葛田)’이 ‘치밭’으로 변성된 것이 아닐까. 혹자는 ‘취밭목’이 쉬운 발음인
‘치밭목’으로 변성되었다고 한다. 취나물이 많이 나던 곳이라고 한다.
치밭목능선에 올라선다. 산죽 숲이다. 아까보다는 인적이 뚜렷한 편이다. 그래도 엎드려 간
다. 이 좋은 가을날, 산죽 숲에서 이렇게 허우적거리다 말 것인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굳
이 소득이라면 어느 시인이 “바다를 보고 난 후에는 강물은 물로 여기지 않는다.”라고 얘기했
듯이 이곳 말고 다른 산의 산죽은 산죽으로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대간거사 님은 이럴 때를 염려하여 3개 안의 산행코스를 마련했다.
1안은 치밭목능선 △1,026.0m봉에서 서진하여 장당골로 내려 무제치기폭포 위쪽까지 올랐
다가 한판골, 용수동으로 하산하는 것이고, 2안은 치밭목능선 1,022.3m봉에서 서진하여 골
로 가서 지능선을 잡아 1,216.9m봉까지 올랐다가 한판골, 용수동으로 하산하는 것이고, 3안
은 치밭목능선 △1,026.0m봉까지 진행한 다음 844.4m봉 직전 안부에서 평촌리로 골 따라
하산하는 것이다.
1안과 2안은 산죽 숲이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경우다. 3안으로 낙착한다. 다행히 산죽 잠깐 비
킨 1,014.5m봉의 전망바위에 올라 목말랐던 전망을 다소 해갈한다. 남한 뭍의 맹주인 천왕
봉의 위용을 오래도록 우러르고 다시 산죽 숲에 잠긴다. 1,026.5m봉은 산죽 숲을 헤치다보
니 넘은 줄도 모르고 넘어버렸다. 저 앞의△1,026.0m봉은 암봉이다. 내 기어이 오르리라 다
짐한다.
산죽은 암봉까지는 침범하지 못하였다. 가파른 바위 슬랩을 오른 △1,026.0m봉은 치밭목능
선에서 제일가는 경점이다. 정상은 너른 암반이다. ‘삼각점은 산청 31?, 1983 재설’이다. 여
기 조망으로 오늘 산행 몫은 다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앞은 골 건너로 웅석봉의 장쾌한 능선
이 펼쳐지고, 뒤로 고개 돌리면 황금능선(그야말로 누런 황금능선이다)과 남부능선을 적상
으로 길게 드리운 천왕봉이 웅혼한 기상이다. 이러니 더욱 술맛이 날 수밖에.
△1,026.0m봉을 길게 내린 안부. 산죽 숲이 소강하니 등로 주변의 가을이 눈에 들어온다.
3안은 이 안부에서 골로 하산하는 것이었으나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앞의 844.4m봉을 올라
그 북동릉을 내리자고 한다. 드디어 산죽 숲을 벗어난다. 어찌나 양팔이 홀가분한지 도리어
심심할 지경이다. 쭉쭉 내린다. 군데군데 전망바위가 나온다. 꼬박 들려 치밭목능선과 그 동
쪽 너른 사면을 들여다본다. 저토록 예쁜 능선인데 다가가서 보면 더없이 사나웠다. 얼굴도
몇 군데 할퀴었다.
능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다 잠시 주춤한 672.4m봉은 소나무 숲이다. 암릉이 나온다. 왼쪽
사면으로 길게 돌아내린다. 다 돌아내리고 나서 암릉을 뒤돌아보니 직진하는 잔재미를 놓친
것이 아닌가. 줄달음한다. 가을 홍염 속을 간다. 감나무밭 농로를 내리고 덕천강 건너 평촌마
을 근처다. 양광 따스한 큰바구펜션 마당이 점심자리로 명당이다.
15. 장당골 주변
16. 멀리는 통곡봉 불무장등으로 이어지는 능선 그 앞은 남부능선
17. 삼신봉과 남부능선, 그 앞은 황금능선
18. 중간이 남부능선, 그 앞은 황금능선과 국수봉
19. 멀리는 웅석봉
20. 오른쪽 멀리가 천왕봉
21. 천왕봉과 중봉(오른쪽), 중봉 앞은 써리봉
22. 삼신봉과 남부능선
▶ 왕등재
2부 산행 들머리인 외고개마을로 우리 버스 타고 이동한다. 덕청강 거슬러 산굽이굽이 돌아
오른다. 이 산골에도 많은 차들이 오간다. 대원사를 지나고부터는 좁은 도로다. 마주 오는 차
량과 비키느라 가다 멈추고 또 후진하기도 한다. Y자 삼거리마을에서 오른쪽으로 잠수교 지
나 오른다. 차도는 농로로 이어진다. 유평농장 사과나무밭 아래 너른 공터에서 멈춘다.
서둘러 배낭 매고 내린다. 농로 옆에 마을주민 네댓 분이 밭일 하던 중 탁주 마시며 휴식하고
있다. 우리를 보더니 대뜸 탁주를 권한다. 멀리서 그들을 보고 은근히 긴장했다. 여기는 등로
가 없다거나 관리공단에 신고하겠다며 가지 못하도록 막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어디 우리
가 한두 번 당했던가. 사람이 그리운 토박이 주민임에 틀림없다. 우리 덕산 명주도 맛보시라
한 잔 따라주고 간다.
농장 길 한참 올라 막다른 산기슭에 이르고 농장 외곽의 녹슨 철조망을 오른쪽으로 돌아 오
른다. 주인 잃은 묵밭 한가운데 세 그루 거목의 감나무에는 감들이 노랗게 주렁주렁 익어간
다. 넙데데한 생사면을 오른다. 사면에는 햇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상당히 미끄럽다. 낙엽
지치다 지친다. 겉옷 벗고 반팔차림 한다. 맨살에 맞는 소슬한 바람이 상쾌하다.
생사면을 30분 남짓 치고 올라 지능선 마루다. 멀리 왕등재에서 밤머리재로 향하는 지리주
릉이 장성 장릉이다. 저기를 간다. 두 팀으로 나눈다. 산행 후 막소주를 마실 수 있겠느냐며
한 팀은 주릉 1,048.6m봉을 생사면 쓸어 오르고, 다른 한 팀은 좀 더 수월한 길인 능선마루
로 오른다. 나는 이제 자청하여 능선마루팀이다.
그렇다고 능선마루를 오르는 8명이 산천경개와 단풍만 구경하는 것은 아니다. 등로 주변의
풀숲을 유심히 살피고 덩굴마다 건드려본다. 다만 이미 오른 터에 뒤돌아보지는 않기로 마음
먹는다. 더덕이 보이면 그는 죽고 나는 죽어난다. 점점 가팔라지고 비례하여 비지땀을 눈 못
뜨게 흘린다. 갈지(之)자 대자로 그리며 오른다.
주릉에 가까워서는 가파름이 수그러들고 펑퍼짐한 키 큰 나무 숲속이다. 1,048.6m봉에 들른
다. 조그만 돌탑이 있다. 정상에서의 사방 조망은 수렴에 가렸다. 정상 남쪽으로 약간 내리면
되똑한 바위가 나오고 그 위에 올라서면 새봉과 그 왼쪽 뒤로 중봉과 천왕봉이 훤히 보인다.
거의 동시에 일행이 다 모이고 왕등재를 살금살금 향한다.
가팔라 미끄러운 흙길 한 피치 내리면 목책 두른 왕등재 습지다. 물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습
지 가운데 도랑에 졸졸 흐른다. 단체기념 사진 찍고 능선 따라 습지 한 바퀴 순찰 돌아준다.
선답의 인적이 흐릿하다. 훤한 등로 쫓아 990m봉을 왼쪽 사면으로 돌아 넘고 ┳자 갈림길에
서 왼쪽으로 간다. ┳자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990m봉 쪽을 조금 오르면 전망이 아주 좋
다. 천왕봉, 중봉, 새봉, 치밭목능선과 그 산주름이 수묵화 대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외고개와 새봉으로 가는 주릉 벗어나 남진하는 엷은 지능선 잡는다. 길 없는 우리의 길이다.
산죽은 우리를 배웅이라도 하려는 듯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머지않아 치밭목능선 산죽
을 그리워하게 될 것. 산자락에 기와집이 보이고 이대로 가면 그 집 마당을 지날 것 같아-그
건 민폐다-미리 사면을 길게 돌아내린다. 풀숲 헤치고 농로에 다다른다. 어느덧 산빛은 어스
레하고 외고개마을 깊은 산골 농로는 낙엽 뒹굴어 한층 고적하다.
23. 중간이 남부능선, 그 뒤 오른쪽은 불무장등, 멀리 왼쪽은 왕시리봉
24. 천왕봉
25. 치밭목능선
26. 치밭목능선
27. 치밭목능선, 왼쪽은 884.4m봉
28. 평촌마을 감나무밭
29. 외고개마을 사과나무밭에서
30. 치밭목능선, 가운데가 1,022.3m봉
(부기 1)
지난 7월 29일 오지산행은 무박산행으로 지리산에 왔었다. 내원골에서 황금능선을 올라 써
리봉과 비둘기봉을 넘고 장단골로 내려오는 아주 힘든 산행을 했다. 그때 저녁을 맛있게 먹
었다는 산청시내의 한 음식점을 이번에도 이용하려고 30분 가까이 백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때 산행한 여러 사람들의 기억이 흐릿하고 그나마 달랐다.
두메 님부터 그날은 자기가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여러 사람들이 그때 두메 님의 버스를
이용했다는 데는 기억이 일치하였고, 모닥불 님의 산행기에 “교통편 : 두메 님 버스”라고 적
시했어도 정작 두메 님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간거사 님은 그날 경호탕에서
목욕하고 길 건너 인근의 몇 군데 음식점에 들렸으나 공기밥이 2,000원이라고 하여-오케이
사다리 시절의 안 좋은 추억도 있고-함양에서 먹자하고 버스를 돌려 시내를 빠져나가다가
마지막으로 한 군데 더 들러본 음식점이 다행히 공기밥이 1,000원이었고, 흑돼지 삼겹살도
맛이 썩 좋았다고 했다.
산정무한 님은 산청이 아니라 덕산(?)에서 목욕했고, 저녁도 거기서 먹었노라고 하고, 오늘
은 나오지 않아 전화로 연락하여 물어본 총무인 신가이버 님조차 산청에서 먹었던가 하고 고
개 갸웃하고, 머리 좋다는 오모육모 님도 기억하지 못하고, 향상 님은 산청이었다고 하였으
나 두루 님이 향상 님의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훼방하고 ……. ‘흑돼지’ 삼겹살이 특징이었다고
하였으나 음식점마다 흑돼지를 취급하여 이 또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마트 앞을 지났다고
하여 마트 앞을 여러 번 지나보고 하는 등 산청 시내 음식점을 가가호호 방문하듯이 뒤졌으
나 결국 찾지 못하였다.
배도 고프고 아무 음식점에나 들어가자 하여 산청시내 외곽의 주차장이 넓은 음식점인 ‘행님
아흑돼지’ 집(음식점 대표 이름이 전행님이다)을 골랐다. 문 열고 먼저 공기밥 가격을 물어
보았다. 우리에게는 삼겹살 가격이나 맛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1,000원이라고 한다. 됐다!
신발 벗고 들어갔다. 흑돼지 삼겹살이고, 밑반찬으로 번데기, 피조개, 묵은지, 나물 등 모두
괜찮았다. 바쁘신 남자 사장님 불러 생더덕주를 권했다. 맥주 그라스 가득 채운 2잔을 연거
푸 마신다. 대단하신 주호(酒豪)라고 박수쳤더니 뭘 이까짓 것 가지고 그러시냐고 한다.
이 산행기의 ‘시간별 구간’ 난에 음식점 이름을 괄호 안에 적어놓은 것은 오늘처럼 전에 들른
음식점을 몰라 헤매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부기 2)
오지산행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기연은 우리를 퍽 즐겁게 한다.
산행 마치고 저녁을 먹는 산청시내 음식점에서였다. 인치성 님과 오모육모 님이 명문인 서울
의 혜화초등학교 동문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중산 님이 합세하였다. 자기도 혜화초등
학교 나왔다며 아울러 보성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신다. 오모육모 님도 보성중․고등학
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보성중․고등학교는 한말의 정치가로 월남 이상재 등과 개혁당을 조직
하여 친일파와 맞섰던 석현 이용익(石峴 李容翊) 선생이 설립하였다. 선생은 해외에서 구국
운동을 펼치다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면 대학은 어디 나왔느냐고 했더니, 중산 님은 서울대 공대(기계과), 오모육모 님도 서
울대 공대(제어계측학과), 대학교 졸업 후 취업은? 두 분 다 엘지하니웰이었다. 그리고 두 분
다 오지산행 회원이다. 중산 님과 오모육모 님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물네 살이다. 세상에 이
런 일이 다 있다니!
전에 수영 님이 조프로(조건진) 님과 고교동창이다고 하여 놀랐고(산행 마치고 마주앉아 저
녁 먹던 중 수영 님이 조프로 님에게 동창이신데 혹시 조건진이를 아느냐고 물었었다), 킬문
님이 온내 님의 고교 선배라 하여 놀랐는데, 중산 님과 오모육모 님의 경우는 참으로 전대미
문의 기연이다. 식후 아이스크림을 두 분이 서로 사겠다고 하더니 함께 나가서 사왔다.
31. 외고개마을 감나무밭
32. 멀리 왼쪽은 천왕봉과 중봉, 앞 오른쪽은 새봉
33. 새봉, 한여름날 새재에서 새봉 오르는 길은 거의 죽음이다
34. 천왕봉과 중봉
35. 치밭목능선
36. 앞 오른쪽 골짜기는 유평계곡
37. 외고개마을 감나무
38. 외고개마을 사과나무밭의 능금나무
첫댓글 멋진 인연이구먼유~ 능금이 아직도 남아있다니....
결국 길이 없는 곳은 치발목산장에서 비들기봉, 한판재에 이르는 구간이었네요. 나머지는 희미한 흔적이 있고요. 눈물없인 보기어려운 천원짜리 밥한공기 찾아다닌 얘기가 정작 산행얘기보다 재미있어유. 초,중,고,대,직장까지 일치하는 인연은 처음 본 것 같구요. 이거 로또 맞을 확률 정도 될라나?
사진도 ~~~
댕겨오니 무언가 또 아쉬움이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요 ?
치밭목능선 첨과 끝을 다하지못해서 일까요.
그래도 치밭목의 정점을 다녀온거로 만족해야죠 !
지리산 동부의 폭과 깊이를 맘껏 누린 것도
복이라 여깁니다.
악수형님의 산행기가
당분간 드문드문 일거라 생각하니,
이또한 심히 안타깝습니다~~^~^~~
그때 제가 받았던 산청식당 명함입니다. 음식점 주인께서 곶감도 한다고 이리 연락하라고 했던 기억이납니다. 총대장남님의 산청 공기밥 2000원 경험 때문에 산청을 꺼려하다가 들린 곳이었는데 공기밥 1000원에 김치찌게 맜났던 식당이죠.
명함을 가지고 있다니~
7/29 그날이 오지 방학날이어서
대중교통 이용하려다
인원 껴맞춰 두메님 차량 이용한 날이고요~
천왕봉의 흰구름 모자가 중봉으로 갔어요
중산님과 오모님은 참~ 모진 인연이네요!!ㅎㅎ
가기전에 공포의 산죽밭이 기억났었는데 괜히 쫄았다는생각이..
방학 산행때 식당건은 뭐에 홀렸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더라구요.. 그날 산죽땜에 홀렸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