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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荷江書院誌, 1977년》에서 옮김.
<하강서원 모습>
<모현정과 모현정기, 상량문 모습>
상량문에 단기 4307년(서기 1974년) 갑인 이월 이십육일 사시 입주 상량이라고 써있다. 양력으로 1974년 3월 19일이며 甲寅年 丁卯月 己未日 巳時가 된다. 지금 모현정이 이 날 상량식을 한 것이다.
지금 걸려있는 현판은 11대손 洪承箕氏가 쓴 것이다.
歲甲寅槐月上澣은 음력으로 1974년 4월 上旬을 말한다. 양력으로 1974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 사이가 되니 대략 4월말로 보면 상량식을 하고 나서 한달후 <모원정기>를 쓰고 현판을 단 것을 알 수 있다.
《荷江書院誌, 1977년》를 살펴보면 後孫 洪承箕씨가 쓴 <慕賢亭重修記>와 지금 현판에 쓰인 <慕賢亭記>는 내용이 일치한다. 즉 <慕賢亭(重修)記>인 셈이다.
아래 인용하는 <모현정기>는 11세손 洪承均씨가 쓴 것으로 <蘂城春秋, 1959년>, <荷江書院誌, 1977년>,
<豊洪寶監, 1980년>에 수록되었으나 예성춘추는 오자(誤字)가 많아 하강서원지를 참고했다. 하강서원지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협약된 기관에 원문서비스하고 있으니 가까운 도서관에 가면 사본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충주에서 출판된 책이다.
<원문>
荷江書院概況
位置:忠淸北道 中原郡 金加面 荷潭里 四二八番地의一
腏享: 慕堂洪先生
※沿革:
〇正祖十年 丙午五月、創建, 扁楣 荷江書院
〇高宗 八年 辛未、因朝命毀撤
〇光武 七年 癸卯春、遺墟設壇發通、翌年 甲辰 八月、荷江齋室 創建、越三年 丁未 封壇、稱名 荷江壇所
〇檀紀四三〇七年 甲寅 四月 重建、扁楣 荷江書院、五月 十一日、(陽 六月 三十日) 奉安位版行祀
※建物:
祠宇 一棟 四間半
〇神三門 一棟 三間
〇齋室 一棟 一二間
〇庫舍 一棟 六間
慕賢亭概況
高宗辛未, 以朝令荷江書院毁撤後, 七十年丁丑冬, 慕堂先生後孫承夏·寬植等, 與一鄕章甫諸人士, 以追慕先賢之意, 一乃心力, 創建一亭於中原郡金加面荷潭里山四百一番地之五, 卽荷江書院西崗上也.
扁額曰慕賢亭. 後己丑·庚寅年間, 數次畧加修補, 而猶未完功. 甲寅(禮祀 四三 〇七年) 四月, 先生後孫忠州居承箕等, 重建荷江書院時, 並重修慕賢亭, 金碧丹雘, 面目一新.
蓋此亭, 俯瞰南漢江, 對挹薔薇山, 爲中州勝景之一. 而每花朝楓辰, 騷人遊客及學生, 逐日登覽, 人波不絶焉.
慕賢亭記
地以人名 人以德顯 故有人立德垂惠後民 則苟 於其人之杖屨所止 聲咳所及 人必瞻依彷彿 或祠院俎豆 以尊之 或牌坊亭觀 以紀之 蓋懼 先民遺烈之久而或墮 而人心隨晦也 故凡天下名山勝區 捨是而獨以山川之秀 泉石之奇 名焉者 則猶夫山水耳 惡在其必貴也 忠州之洌江 貫州而西 枕山爲彎 泓然而聚者 爲荷沼 卽我文敬公慕堂洪先生遺躅所在也 後之學者 建書院而享先生 而額之 曰荷江 於是荷江遂爲地名 而名於一國 逮高宗 辛未歲 朝廷 令撤全國祠院 荷江亦與焉 乃就其址 而壇之春秋香幣 僅倣院儀 書所以慕羹墻之餘意然是邦學者之藏修則 失其所矣 况近世學術多門 士趨日下 迨其甚者 賤舊而貴新 指黑以爲白 囂囂粉粉 罔知底定 噫 豈不大可懼哉 族兄承夏氏 以先生十一世孫 居是州 主儒林之盟 而爲是之慷慨
刱(創)亭舍於壇傍 詢多士 集衆力 積年月 而始成於丁丑之冬 亭凡若干楹 弊其軒而廣其
堦(階의 俗字) 可以容數十人之棲息 額之曰慕賢 徇士論也 功旣竣 訪承均於漢上 曰吾之矻矻於斯役也 豈敢以後孫 故私於吾祖 盖亦有賴乎 儒門衆謀之勤且識也 從此士子之訪先生遺風於荷江者 進拜壇下 退登斯亭 仰觀巖阿碏(원문은 碠자이나 碏자로 고침)磚之精光 猶昔 俯瞰江潭涵澤之神功 不息追想當年德化之盛 轉念季世士氣之衰 則能不油然而興慕 愓然而知懼者乎 夫然則斯役也 復可得以已乎 請子記其事 嗚呼 先生之道炳烺乎歷千世 而不渝者 存焉 則一區荷江之顯晦 於先生何有然爲是地 則實有大關焉 七十年中替之名 今由斯亭 而得益彰 則 豈非是地之幸 進而由是地之幸 而志先生之道者 得益興則尤吾道之大幸也 願承均 亦余先生之列孫 願趍多士之後塵者 義何敢辭 乃作而謹書其壁 曰世或有遺其先 而輕其本不知吾民之所以爲吾民者 盍觀乎斯亭
先生易簀後 三百二十二年 丁丑 孟冬 十一世孫 承均 謹記
<표점>
※荷江書院概況
*位置: 忠淸北道 中原郡 金加面 荷潭里 四二八番地의一
*腏享: 慕堂洪先生
*沿革: 正祖十年 丙午五月,創建。 扁楣:荷江書院。
〇 高宗 八年 辛未,因朝命毀撤。
〇 光武 七年 癸卯春,遺墟設壇發通。翌年 甲辰 八月,荷江齋室 創建。越三年 丁未 封壇,稱名 荷江壇所。
〇 檀紀四三〇七年 甲寅 四月 重建,扁楣:荷江書院。五月 十一日(陽 六月 三十日),奉安位版行祀。
*建物:
〇祠宇 一棟 四間半
〇 神三門 一棟 三間
〇 齋室 一棟 一二間
〇 庫舍 一棟 六間
慕賢亭概況
高宗辛未, 以朝令荷江書院毁撤後, 七十年 丁丑冬, 慕堂先生後孫承夏·寬植等, 與一鄕章甫諸人士, 以追慕先賢之意, 一乃心力, 創建一亭於中原郡金加面荷潭里山四百一番地之五, 卽荷江書院西崗上也.
扁額曰慕賢亭. 後己丑·庚寅年間, 數次畧加修補, 而猶未完功. 甲寅(檀紀 四三〇七年) 四月, 先生後孫忠州居承箕等, 重建荷江書院時, 並重修慕賢亭, 金碧丹雘, 面目一新.
蓋此亭, 俯瞰南漢江, 對挹薔薇山, 爲中州勝景之一. 而每花朝楓辰, 騷人遊客及學生, 逐日登覽, 人波不絶焉.
慕賢亭記
地以人名,人以德顯。故有人立德垂惠後民,則苟於其人之杖屨所止、聲咳所及,人必瞻依彷彿。或祠院俎豆以尊之,或牌坊亭觀以紀之,蓋懼先民遺烈之久而或墮,而人心隨晦也。故凡天下名山勝區,捨是而獨以山川之秀、泉石之奇名焉者,則猶夫山水耳,惡在其必貴也?
忠州之洌江,貫州而西,枕山爲彎。泓然而聚者爲荷沼,卽我文敬公慕堂洪先生遺躅所在也。後之學者,建書院而享先生,而額之曰「荷江」,於是荷江遂爲地名,而名於一國。逮高宗辛未歲,朝廷令撤全國祠院,荷江亦與焉。乃就其址而壇之,春秋香幣,僅倣院儀,書所以慕羹墻之餘意。然是邦學者之藏修,則失其所矣。况近世學術多門,士趨日下,迨其甚者,賤舊而貴新,指黑以爲白,囂囂粉粉,罔知底定。噫!豈不大可懼哉!
族兄承夏氏以先生十一世孫,居是州,主儒林之盟。而爲是之慷慨,刱(創)亭舍於壇傍,詢多士,集衆力,積年月,而始成於丁丑之冬。亭凡若干楹,弊其軒而廣其堦(階),可以容數十人之棲息,額之曰「慕賢」,徇士論也。
功旣竣,訪承均於漢上,曰: 「吾之矻矻於斯役也,豈敢以後孫故私於吾祖?盖亦有賴乎儒門衆謀之勤且識也。從此士子之訪先生遺風於荷江者,進拜壇下,退登斯亭,仰觀巖阿碏磚之精光猶昔,俯瞰江潭涵澤之神功不息。追想當年德化之盛,轉念季世士氣之衰,則能不油然而興慕、愓然而知懼者乎?夫然,則斯役也,復可得以已乎?請子記其事。」
嗚呼!先生之道炳烺乎,歷千世而不渝者存焉,則一區荷江之顯晦,於先生何有?然爲是地,則實有大關焉。七十年中替之名,今由斯亭而得益彰,則豈非是地之幸?進而由是地之幸,而志先生之道者得益興,則尤吾道之大幸也。願承均亦余先生之列孫,願趍多士之後塵者,義何敢辭?乃作而謹書其壁。
曰:世或有遺其先而輕其本,不知吾民之所以爲吾民者,盍觀乎斯亭!
先生易簀後 三百二十二年 丁丑 孟冬,十一世孫 承均 謹記。
<번역>
*하강서원 개황 (荷江書院概況)
위치: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428번지의 1
제향: 모당(慕堂) 홍선생(홍이상)
*연혁:
정조 10년 병오년(1786년) 5월, 창건하다. 현판은 '하강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8년 신미년(1871년), 조정의 명령으로 인해 헐어 내다.
광무 7년 계묘년(1903년) 봄, 서원 터에 단(壇)을 설치하고(設壇) 통문을 돌리다(發通). 이듬해 갑진년(1904년) 8월, 하강재실을 창건하다. 3년 뒤인 정미년(1907년)에 제단(祭壇)을 만들고(封壇) 이름을 '하강단소'라 칭하다.
단기 4307년 갑인년(1974년) 4월, 재건하고 현판을 '하강서원'이라 하다. 5월 11일(양력 6월 30일),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다.
건물:
사우(사당) 1동 4칸 반
신삼문 1동 3칸
재실 1동 12칸
고사(창고) 1동 6칸
모현정 개황 (慕賢亭概況)
고종 신미년(1871년)에 조정의 명령으로 하강서원(荷江書院)이 헐려 철거된 후, 70년 뒤인 정축년(1937년) 겨울, 모당(慕堂) 선생의 후손인 승하(承夏)·관식(寬植) 등이 온 고을의 여러 선비(章甫)들과 더불어 선현을 추모하는 뜻으로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하여 중원군 금가면 하담리 산 401의 5번지, 즉 하강서원의 서쪽 언덕 위에 정자 하나를 창건하니, 편액(현판)을 ‘모현정(慕賢亭)’이라 하였다.
이후 기축년(1949년)과 경인년(1950년) 사이에 몇 차례 대략 보수하였으나 아직 온전히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가, 갑인년(단기 4307년, 즉 1974년) 4월에 충주에 사는 선생의 후손 승기(承箕) 등이 하강서원을 중건할 때 모현정도 함께 중수(重修)하니, 단청을 화려하게 칠하여(金碧丹雘) 면모가 완전히 새로워졌다.
대개 이 정자는 아래로 남한강을 굽어보고 앞을 바라보면 장미산(薔薇山)을 마주하고 있어, 중원(충주) 지역의 뛰어난 경치(勝景) 중 하나이다. 그리하여 꽃 피는 봄과 단풍 드는 가을(花朝楓辰)마다 시인(騷人)과 유람객, 그리고 학생들이 날마다 올라와 구경하니 사람들의 물결이 끊이지 않는다.
모현정기 (慕賢亭記)
땅은 사람으로 인해 이름나고, 사람은 덕으로 인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덕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드리워 후세까지 미치게 했다면, 진실로 그 사람이 지팡이와 신발을 멈추었던 곳이나 목소리와 기침 소리가 미쳤던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우러르고 의지하며 마치 눈앞에 계신 듯 여깁니다. 그리하여 혹 사당과 서원을 세워 제사 지내며 존경하기도 하고, 혹 패방이나 정자, 누각을 세워 기념하기도 합니다. 이는 선현의 끼친 공덕이 오래되어 혹여 무너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도 어두워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천하의 이름난 산과 빼어난 곳 중에서, 이러한 인물(의 흔적)을 버려두고 홀로 산천의 수려함과 샘과 돌의 기이함만으로 이름난 곳이 있다면, 그것은 평범한 산수일 뿐이니 어찌 그리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충주의 열강(남한강)은 고을을 관통하여 서쪽으로 흐르며 산을 베개 삼아 굽이칩니다. 물이 깊고 넓게 모여 이루어진 곳을 '하소(荷沼)'라 하는데, 바로 우리 문경공(文敬公) 모당(慕堂) 홍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후학들이 이곳에 서원을 세워 선생을 제향하고 현판을 '하강(荷江)'이라 하니, 이때부터 하강은 마침내 지명이 되어 온 나라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고종 신미년(1871년)에 이르러 조정에서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하강서원 역시 헐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자리에 단을 모시고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올려 겨우 서원의 의식만 흉내 내며, 밥을 먹을 때도 우러러본다는 옛 생각(선생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고장 학자들이 학문을 닦고 수양할 곳은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근세에 들어 학술의 갈래가 많아지고 선비들의 지조는 날로 떨어져, 그 심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옛것을 천하게 여기고 새것만 귀하게 여기며, 검은 것을 가리켜 희다고 하고 시끌벅적 어지러워 도무지 안정될 줄을 모릅니다. 아!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친족 형님인 승하(承夏) 씨는 선생의 11세손으로서 이 고을에 살며 유림의 맹주를 맡고 계십니다. 그는 이 상황을 개탄스럽고 격분하게 여겨 단소 옆에 정자(정사)를 새로 지으려 하였습니다. 많은 선비에게 묻고 대중의 힘을 모아 여러 해 동안 정성을 쌓은 끝에 정축년(1937년) 겨울에 비로소 완성하였습니다. 정자는 모두 수십 기둥 규모로, 처마를 낮추고 기둥과 계단을 넓혀 수십 명의 사람이 머물며 쉴 수 있게 만들었으며, 현판을 '모현(慕賢)'이라 하였으니 이는 선비들의 여론을 따른 것입니다.
공사가 끝나자 형님은 한양에 있는 저(승균)를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일에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인 것이 어찌 감히 후손이라는 이유로 내 조상만을 사사로이 드높이고자 해서이겠는가? 대개 유림 여러분의 부지런한 도모와 식견에 의지한 덕분이네. 이제부터 선생의 남겨진 풍모를 찾아 하강에 오는 선비들은 나아가 단 아래에서 절을 올리고, 물러나 이 정자에 오를 것이네. 위로는 바위 언덕의 벽돌들이 여전히 옛날처럼 정밀하게 빛나는 것을 우러러보고, 아래로는 강물과 못이 은택을 머금고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신묘한 공덕을 굽어보게 될 것이네. 그리하여 당시에 덕화가 성했던 것을 추모하고 말세에 선비들의 기상이 쇠한 것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어찌 마음속에서 그리워하는 정이 솟구치고 스스로 삼가며 두려워할 줄을 알지 않겠는가? 상황이 그러하다면 이 정자를 짓는 일을 어찌 중간에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자네가 이 사실을 글로 기록해 주게."
아! 선생의 도는 밝고 빛나서 천 세대의 시간을 지나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으니, 하강이라는 한 지역이 널리 알려지거나 묻히는 것이 선생에게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땅의 처지로 본다면 실로 큰 관계가 있습니다. 70년 동안 쇠퇴했던 이름이 이제 이 정자로 인해 더욱 크게 드러나게 되었으니, 어찌 이 땅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이 땅의 다행으로 인해 선생의 도에 뜻을 둔 이들이 더욱 떨치고 일어난다면, 이는 더욱 우리 유학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 저 승균 역시 선생의 수많은 후손 중 한 사람이며, 많은 선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니 의리상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이에 글을 지어 삼가 그 벽에 써 붙입니다.
말하건대, 세상에 혹시라도 자신의 선조를 잊고 그 근본을 가볍게 여겨, 우리 백성이 왜 백성답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하여 이 정자에 와서 보지 않겠는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322년이 되는 정축년(1937년) 초겨울, 11세손 승균(承均)은 삼가 기록하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