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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결코 그 길을 멈추지 않는다
- 영화 <에밀 졸라의 생애>(1937)
‘전기 영화의 달인’이라 불리는 윌리엄 디털리 감독은 1936년에 루이 파스퇴르의 일생을 다룬 <과학자의 길>(The Story of Louis Pasteur)을 연출하고, 1937년에는 또다시 폴 무니를 주연으로 내세워 훌륭한 전기 영화 <에밀 졸라의 생애>를 만들었다. 에밀 졸라의 ‘생애’라고 했지만 그의 일생을 다뤘다기보다는 드레퓌스 사건에 관련된 그의 활동에 집중된 스토리이기 때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을 붙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작가의 생애 중 일정한 활동기를 조명하면서 사회와 개인이 지녀야 할 중요한 가치를 오롯이 담아낸 이 영화는 85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정의감 강하기로 소문난 <플래툰>(1986), <7월 4일생>(1989)의 감독 올리버 스톤도 <JFK>(1991)를 연출할 당시 <에밀 졸라의 생애>의 많은 부분 참고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이 영화는 살아있는 교범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검사였던 예전이나 변호사인 지금이나 내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될 때면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곤 한다. ‘드레퓌스 사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현실에서 에밀 졸라가 선택한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양심’은 이념이나 사회분위기 같은 것에 의해 조성된 편견을 넘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실과 정의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862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다락방 같은 파리의 어느 궁벽한 월세방에 사는 가난한 두 젊은 예술가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한 사람은 헌 옷가지로 칼바람이 들어오는 깨진 유리창을 틀어막고 있고, 한 사람은 차갑게 언 손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화가인 친구 폴 세잔과 함께 월세도 제때 내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지내던 에밀 졸라는 다행히 한 출판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그가 발표한 글이 정부와 지도층을 너무 심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니 더 이상 그런 글을 쓰지 말라고 협박성 권고를 하고 간다. 그러자 출판사 사장은 회사 일만 하고 그런 글은 쓰지 말라고 지시하지만 졸라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해고하고 만다. 졸라는 사장에게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나온다.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하층민의 생활이나 눈여겨보며 지내던 졸라는 어느 날 식당에 갔다가 우연히 경찰에 쫓기는 창녀를 구해 주게 된다. 그런 직업을 유지하기에도 한물간 그녀는 자기가 겪어온 일들을 이야기해주고 그동안 써온 일기도 보여준다. 그 일기에는 파리의 각계각층 남자들의 추잡한 뒷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데, 졸라는 그녀의 신세타령과 일기를 바탕으로 열일곱 살에 파리로 올라와 청춘을 진흙탕 속에 내던진 한 창녀의 반생을 소설로 써서 출판한다. 이것이 바로 『나나』의 탄생이다. 이 소설은 외설이 심하다는 악평 속에서도 짐짓 위선의 가면을 쓴 파리의 신사와 귀부인들은 물론 전 유럽의 호사가들의 은밀한 기호를 자극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그 후로도 졸라는 하층민 여자나 광부 등의 열악한 노동 현장, 철도 공무원인 사이코패스 살인마 등 프랑스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거나 처참한 인간군상의 범죄를 다룬 문제작들을 연속적으로 써내어 드디어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따내고 부를 거머쥔다. 그런데 정작 현실 세계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고 인간의 음울한 내면을 숨김없이 그려낸 작가 자신은 그 대가로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게 된다. 아내 알렉산드린과 함께 값비싼 가구로 장식한 고급 주택에서 각종 사치품을 즐기는 그의 모습은 졸부나 다름없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 날 졸라는 친구 세잔을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함께한다. 세잔은 여전히 가난에 찌든 화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예술가의 혼과 시퍼런 정의감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었다. 졸라가 신이 나서 그동안 수집한 진귀한 애장품들을 보여주지만 세잔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시큰둥하다. 그러면서 부를 추구하면 진실이 없어지고 재능에도 기름이 끼면 끝장이라며, 물질적 부와 예술은 양립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세잔은 뼈가 시리던 그 다락방에서 위선자들의 책을 태우며 언 몸을 덥히자고 했던 그 순수했던 시절을 되새기는데, 결국 자신은 탐욕과 허영의 도시 파리를 떠나겠다며 작별을 고한다.
졸라가 과거의 자기를 기억나게 해줄 친구가 필요하다며 파리에 남아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나 세잔은 냉담하게 내뱉는다.
“아냐, 자네는 이미 그 세계로 되돌아올 수 없다네. 잘 있게나.”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통의 편지를 입수한다. 익명의 발신인이 보낸 그 편지 안에는 일급비밀인 프랑스 군의 대포 개발 현황 등이 기재된 ‘명세서’(le bordereau)가 있었으며,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 슈바르츠코펜 대령으로 되어 있었다. 군 수뇌부의 분노는 극에 치달았고 참모진 중에 있을 범인 색출 작업에 들어가는데, 진범 에스테라지는 무사히 빠져나가고 대신 유대계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조지프 쉴드크로트)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혐의자로 체포된다.
물론 드레퓌스는 혐의사실을 극구 부인하였고, 그 문서의 필적이 그의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확증도 없다. 참모본부는 곤경에 처한다. 이때 극단적인 반유대 신문과 보수 언론들이 ‘드레퓌스는 유죄다!’라고 대서특필로 보도하며 군이 ‘매국노’를 비호하고 기소를 주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성난 대중들은 반역자를 빨리 처단하라고 계속 시위를 한다. 군검찰은 여론에 밀려 일부 필적이 유사하다는 어설픈 감정만을 근거 삼아 드레퓌스를 반역죄로 기소하고, 비밀리에 급히 이루어진 군사재판에서는 드레퓌스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한다. 유죄판결을 받은 드레퓌스는 공개행사로 군모가 찢기고 계급장이 떼이며 군도(軍刀)까지 부러뜨림을 당하는 치욕적인 군적 박탈 조치가 되고, 이어서 남아메리카의 프랑스령 기아나에 위치한 악명 높은 ‘악마의 섬’에 유배된다.
그로부터 상당 기간이 지나 정보국에 부임한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내부 첩자 색출 작업을 진행하던 중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과 문제의 ‘명세서’ 문건의 필적이 동일함을 발견한다. 이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에스테라지라는 결정적인 증거(슈바르츠코펜이 에스테라지에게 보낸 전보)까지 찾아낸 그는 이를 상부에 보고한다. 그러나 군 수뇌부는 위대한 프랑스 군대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는 그런 큰 치욕은 있을 수 없다면서 이를 그냥 은폐하려 하고, 피카르가 진실을 밝힐 것을 고집하자 그를 아프리카로 전출시킨다. 군 수뇌부와 이에 결탁한 검사와 판사는 후일의 바람막이용으로 일단 에스테라지를 형식적으로 기소한 다음 무죄를 선고하여 면죄부를 준다.
드레퓌스의 부인 뤼시는 남편이 무죄임을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그의 석방 운동을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마지막으로 에밀 졸라를 찾아간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피카르한테서 받아둔 자료들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에스테라지가 진범이라는 것을 참모본부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졸라는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이미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졌기에 뤼시에게 지금 프랑스에서는 모두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믿고 있고 이미 재판이 종결됐기에 달리 구제 방법을 찾기 어렵다고 말하며 난색을 표한다.
마지막으로 졸라에게 기대를 걸었던 뤼시가 절망에 빠져 뛰쳐나간 뒤 졸라는 책상 앞에 앉아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온 초청장을 읽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본다. 거기에 걸려 있던 세잔의 자화상을 보고는 졸라는 정신이 바짝 들어 그 초청장도 찢어버리고 뤼시가 놓고 간 서류들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졸라는 이 사건의 진실을 묵살할 수 없어 감연히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다.
1898년 1월 13일 자 『로로르(L'aurore)』(제호는 ‘여명’이라는 뜻임) 지 1면에 전면으로 에밀 졸라가 쓴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글이 게재된다. 이 글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과 이를 은폐한 군부의 음모를 천하에 공표하고, 국방부장관 이하 군 관계자와 세 필적감정사, 그리고 엉터리 재판으로 인권유린을 한 군사법정을 고발한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파리를 통째로 뒤흔들었다. 『로로르』 신문은 10배나 늘려 인쇄했음에도 동이 났고, 시민들은 드레퓌스파와 반드레퓌스파로 나뉘어 온통 격론을 벌인다. 격노한 군부의 사주를 받은 자들과 반유대주의자들은 신문과 졸라의 책을 모아 불태우고 졸라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목매달거나 화형시키는 등 난동을 피운다.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시위 군중들에게 극도로 시달리던 졸라는 결국 군 관계자 등이 고소하는 바람에 명예훼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법정에서 재판장은 드레퓌스 사건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는 이유로 이에 대한 언급을 일절 못하게 한다. 증인으로 나선 피카르가 진실을 증언하려 하지만 군 수뇌부가 군인으로서 군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이를 제지하고, 일부 방청객들이 ‘군대여, 영원하라!’는 등 소리치고 소란을 피우며 방해한다. 뤼시 드레퓌스에 대한 증인신문에서도 아무것도, 심지어 ‘드레퓌스 대위는 어떤 사람인가요?’라는 신문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그녀를 증언석에서 끌어내린다. 에스테라지에 대한 신문도 재판장은 결정적인 사항은 국가안보 등의 이유로 답변을 못하도록 막는다.
마지막 공판에서 졸라는 배심원들을 향해 최후변론 아닌 일장연설을 한다. 자신은 이 싸움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국가에서 불러서 이 법정에 나온 게 아니라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기 스스로 원해서 나왔다. 지성과 양심을 갖춘 여러분은 프랑스와 군대는 반드시 구해야 할 것이지만, 자기와 함께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누명을 쓴 사람이 억울하다고 울부짖고 있는데, 훨씬 더 큰 국가도 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면서 드레퓌스는 무죄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예상대로 ‘애국심’에 불타는 배심원들은 유죄평결을 내리고, 재판장은 졸라에게 금고 1년과 벌금 3천 프랑을 선고한다. 졸라의 측근은 그에게 일단 영국 런던으로 떠나라고 권유한다. 졸라는 그렇게 하면 잘못을 인정하고 도망을 가는 것 아니냐고 펄쩍 뛴다. 런던에 가서 계속 자신의 주장을 펼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길이라는 재차의 망명 권유에 졸라는 바로 망명길에 오른다. 런던으로 간 졸라는 신문에 기고하는 등 계속 활동을 하여 각국에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주요국의 언론은 진실을 밝히라고 프랑스 정부에 공세를 펼치게 된다.
결국 드레퓌스와 졸라의 사건이 국제적인 이슈로 떠오르자 신임 국방부장관 카베냐크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간다. 우여곡절 끝에 진실이 밝혀지자 군 수뇌부의 최고위층과 드레퓌스 수사를 총괄했던 책임자, 가짜 서신을 조작하면서까지 ‘군의 명예’를 지키려 했던 정보참모 등 관련자들은 잠적 또는 불명예제대를 하거나 수감되어 수사를 받던 중 자살하게 된다.
날씨가 몹시 추운 런던에서 건강이 안 좋은 상태에서 이런 소식을 들은 졸라는 ‘진실을 향한 졸라의 싸움, 드디어 승리하다!’라는 신문 기사에도 기뻐하기보다는 재심을 통한 드레퓌스의 신원(伸冤)이 가능한지에 더 신경을 쓴다. 그 사이에 숨어 지내던 에스테라지가 (모 신문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자신이 군 참모본부에 자신이 진범임을 자백했었다고 폭로하여 다시 프랑스 사회가 더 요동친다.
1899년 마침내 세계의 여론에 굴복한 프랑스 정부는 드디어 드레퓌스에게 재심의 기회를 준다. 재심이 결정되자 법원은 지난 군사재판을 무효화한다. 이 소식을 들은 졸라는 파리로 돌아오고, 드레퓌스 역시 악마의 섬에서 귀환한다. 드레퓌스는 참혹한 유형 생활을 한 탓인지 이미 백발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실제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에 불과했다.
영화의 끝 부분에 졸라가 서재에서 열심히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서재에서의 부인과의 대화 중 내일 드레퓌스의 군대 복귀 행사에 가야겠다고 하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재심이 열려서 드레퓌스에 대한 종전의 판결이 뒤집혀 무죄가 확정됐는지 군 장교 신분도 복원되는 것 같다. 그런데 밤늦도록 졸라가 일하는 서재의 석탄 난로에서는 배기가 잘 안 되어 연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드레퓌스의 군대 복귀식장, 드레퓌스는 다시 멋진 군복을 입고 지휘관으로 임명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데, 정작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귀빈인 졸라는 보이지 않는다. 식이 끝날 즈음 신문팔이 소년이 ‘졸라 씨 사망,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는 특종 기사가 실린 신문을 흔들며 돌아다닌다.
1902년 10월 5일 몽마르트르 묘지에서 엄숙하게 치러지는 에밀 졸라의 장례식에서 같은 양심적인 동료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졸라를 떠나보내며 추도사를 낭독한다.
“오늘을 슬퍼하지 말고 대신 평생 그의 정신을 기억합시다. …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사악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모욕의 더미 위에 모두가 우러러볼 높다란 영광의 탑을 우뚝 쌓아 올렸습니다. … 그 덕분에 프랑스에는 정의가 실현되었습니다. …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의 운명과 그의 용기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여기서 일단 끝난다.
에밀 졸라의 지지자들이 제작하여 헌정한 메달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이 영화를 전에 나와 함께 본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는 더 이상 해설이나 각주가 필요 없어.”
맞는 말이다. 이 영화 자체가 양심 있는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지침서라 할 것이어서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되기에 거기에 뭐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정말이지 드레퓌스 사건과 에밀 졸라의 ‘고발’은 역사가 요구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교과서라 할 것이다.
원래 역사적 인물을 다룬 전기는 영화이건 소설이건 별로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을 너무 의도적으로 미화시킨 나머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니라 하나의 박제(剝製)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도 그런 점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전기 영화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는 윌리엄 디털리가 만든 작품인데가, 에밀 졸라 역을 맡은 폴 무니의 약간 피곤한 듯하면서도 강한 의지력을 보이는 연기가 워낙 뛰어나고, 드레퓌스 역을 맡은 조지프 쉴드크로트도 희생양다운 호소력 있는 연기를 하여(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영화제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전기물의 그런 약점도 충분히 커버하고 남는다.
이 영화가 시작될 때 자막에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의 내용은 사실과 다를 수 있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고 있다. 영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제를 강조하고 관객에 더 큰 감동을 주기 위한 의도적 변용은 얼마든지 허용된다고 하겠다.
이 영화에서는 에밀 졸라가 뤼시 드레퓌스의 간곡한 청을 받고 1898년 1월 31일 자 『로로르』 지에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함으로써 드레퓌스 대위의 구명운동에 나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졸라는 그 이전인 1897년에 이미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끔찍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음을 밝히면서 재심을 요구하는 등 언론 캠페인을 벌여 왔었다.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언론에 첫 번째 기고한 글은 1897년 11월 25일 『르 피가로』 지에 발표한 「무슈 쉐레르-케스트네르」인데, 그 글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진실은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또 영화에서는 졸라가 드레퓌스의 군적 회복 및 지휘관 취임식을 하루 앞두고 집필 중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그려져 마치 드레퓌스가 졸라 사망 전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처럼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졸라가 사망한 것은 1902년이고 드레퓌스는 1906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드레퓌스 사건 재판에 관한 전말은 박형남의 『재판으로 본 세계사』(휴머니스트, 2018) 중 「드레퓌스 대위는 독일의 스파이였나?」(236~263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군부와 언론과 법조에 의하여 진실이 은폐되고, 그들이 왜곡·조작한 사실로 한 사람은 자유와 명예를 잃고 인생이 완전히 무너졌으나 끝끝내 진실을 밝혀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은 희생양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고, 정의롭지 못한 뒤틀린 세력과 맞서 싸움으로써 진실을 밝히고 그 희생양에게 자유와 명예를 되찾게 해준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꼭 그 일을 해야 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또 그 일에 뛰어들기에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가난하다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이미 프랑스에서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라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얻었고, 물질적으로도 상당한 부를 이루어 호화로운 집에서 하인을 두고 값비싼 애장품을 수집하며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이 일에 뛰어들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이 영화 초반에 보여준 그의 젊은 시절처럼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냉대받는 그런 처지라면 오히려 의분이 치솟아 그런 일에 바로 대들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잃을 것이 너무 많을 정도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더구나 명예를 특히 더 소중히 여기는 작가인 그는 이미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았고(이 일을 하다가는 이 훈장 수훈 자격을 박탈당할 염려가 있고 실제로 후에 박탈당했다), 그토록 가입하고 싶었던 문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초청장도 막 받아 놓은 상태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소중한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하면서 이 일에 뛰어들게 한 동력은 무엇인가? 단순한 정의감에선가, 아니면 울면서 뛰쳐나간 뤼시 드레퓌스에 대한 동정심에서인가? 물론 이런 것들이 복합되었겠지만 나는 결정적인 것은 초심을 잃지 않게 해준 친구 세잔과의 우정이라고 본다. 영화에서 졸라가 서재에서 세잔의 자화상(팔레트를 들고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잠깐 바라본 다음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보내온 초청장을 찢어버리고 뤼시가 놓고 간 서류들을 읽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졸라에게는 세잔이 헤어지면서 부를 추구하면 진실이 없어지고 재능에도 기름이 끼면 끝장인데 자네는 이미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따끔하게 해준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는 이제라도 자기는 초심으로, 순수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음을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서 에밀 졸라에게 세잔이라는 좋은 친구가 없었더라면 과연 ‘나는 고발한다!’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그만큼 친구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에밀 졸라는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목숨까지 걸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발한다!」가 발표된 후 졸라는 맹목적으로 분노한 폭도들에게 쫓기며 여러 번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만 했고, 그의 집은 수없이 투석으로 유리창이 깨지곤 했으며, 자택 마차 출입문 아래에 놓인 상자에서 사제 폭탄이 발견되기도 했다. 1902년 졸라는 침실에서 자다가 조개탄 난로의 연통이 막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하였는데(영화에서는 서재에서 집필 중이었던 걸로 나온다), 그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고 반대 세력이 꾸민 ‘사고를 위장한 계획된 타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렇게 졸라는 줄곧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 왔고, 훗날 두 차례의 조사 결과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믿음에 상당한 근거가 있음이 드러났는데, 1978년 한 신문은 앙리 뷔롱포스라는 난로공이 자기가 고의로 침실의 벽난로 굴뚝을 막았다고 고백했다며 그 자세한 경위를 보도하기도 했다.
어찌 됐건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마다하지 않은 것은 맞는데, 재심 사건에서 드레퓌스를 변호하던 라보리 변호사가 괴한의 총탄에 맞는 그런 와중에서도 드레퓌스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은 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영화에는 소름이 쫙 돋는 장면이 나온다. 정보국장으로 부임하여 진상을 파악한 피카르 중령이 드레퓌스는 진범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하자 그 보고를 들은 참모본부의 상사는 짜증을 내며 “드레퓌스는 죽지도 않나?”라고 한마디 내뱉는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는가? 자기가 지킬 것이 무엇인지, 설사 그것이 국가안보이건 군대의 위신이라 한들 얼마나 고귀한 것이기에 한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을까?(물론 어느 교수의 말대로 ‘거짓에 근거한 국익은 국익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드레퓌스 사건’이란 것도,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도 드레퓌스가 끝까지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드레퓌스가 처음 간첩죄로 몰려 조사받을 때 군수사관이 권유한 대로 권총 자살을 했거나 악마의 섬에서 악독한 감금과 극도의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면 ‘재심’도, 졸라의 진실을 향한 끈질긴 집념도 결실이 이루어지지 않고, 드레퓌스와 그에게 행해진 악행도 역사 속에 잊혀버렸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나도 이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불행과 치욕을 안겨 주었을까? …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결백을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날마다 쉬지 않고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드레퓌스가 악마의 섬에서 아내 뤼시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이런 치열하고도 확고한 의지로 그가 버텨내어 살아남았기에 우리는 진실은 꼭 밝혀지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하나 더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살아남음이 고맙다.
오래 살아야 한다. 특히 거짓과 조작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은 더욱 더 끈질지게 살아남아야 한다. 꼭 살아남아서 그들이 저지른 악행들마저 ‘공소권없음’으로 흐지부지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편 이 영화에서는 그 시대를 휘감고 있는 편견이 하나의 망령처럼 그 사회를 어떻게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가 만들어낸 역사적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1880년대 이후 일반의 프랑스인에게는 유대인들이 금융계를 장악하고 관계에 숨어들어 진짜 프랑스 사람인 자기들로부터 나라를 빼앗아 가는 못된 종족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일부 가톨릭 성직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언론인들은 이러한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을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을 위해 교묘히 활용했다. 파산의 위기에 처한 소상공인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모든 곤경을 경쟁자인 유대인 동종업자의 탓으로 돌리도록 유도하고,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을 열악한 처지로 몰고 간 것은 오로지 유대인 자본가의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승승장구하는 공화파들에 의하여 밀려난 보수주의자들과 가톨릭 교도들에게도 유대인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당시 팽배해 있던 반유대주의를 믿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은 프랑스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면서 국민통합이라는 ‘국익’을 이뤄내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은 드레퓌스를 조사한 부하 장교로부터 드레퓌스의 글씨가 ‘명세서’의 필체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과 그가 유대인이라는 보고를 받은 정보국장 상테르 대령이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라고 외쳤다는 것만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참모본부 정보부서에 성실히 근무하고 있던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는 반유대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힌 타락한 군부와 관료화된 무능한 법관,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진실과는 한참 먼 길로 시민들을 몰고 갔던 언론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왜곡된 사회분위기가 한 인간의 존엄성을 철저히 짓밟고 끝없는 비극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도 한때 어느 고명하신 신부의 말씀대로 ‘어둠의 세력’이 이 나라의 모든 폭력을 전염시키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에 젖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드레퓌스는 악마의 섬에서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에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도 않았고 신을 찾지도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할 뿐이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라면 나는 신이 되고 싶지 않소.”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난센스의 배경에는 신문이 그 무엇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이른바 ‘여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형성하고 그 여론은 일반 대중의 생각까지도 지배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신상의 일들이 더 중요했고 그냥 여론대로 따르는 것이 편하기에 그냥 흘려보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신문뿐만 아니라 TV, 라디오와 각종 인터넷 매체들까지 범람하는 오늘날은 가히 언론이 온통 사람들을 뒤흔든다고 할 정도다.
우리도 역시 근래에 들어 언론이 내뿜는 광기에 휘둘린 기분 나쁜 경험을 몇 차례 한 바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들의 거짓 정보에 넘어가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잘 지켜야만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뒤로 물러나거나 외면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며 역사도 공부해야 하고 현장도 확인해야 한다.
사실 어느 누구도 언론의 영향력에서 쉽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언론은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바람처럼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스며드는데 그러면 아무도 거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매체들이 마치 공명상자처럼 다른 매체에서 막 보도한 것을 다시 인용하여 퍼뜨리기 때문에 하나의 잘못된 기사는 금방 ‘사실화’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더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이 영화는 ‘재심’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재판은 인권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말살하기도 한다. 드레퓌스의 재판을 보면, 군과 언론이 진실과 정의에 입각한 개인의 존엄성보다는 국가안보와 군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를 스파이로 몰고 갔고, 수사기관의 조작과 재판부의 현실에 대한 타협으로 드레퓌스는 법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반역자로 확실히 낙인찍히게 된다. 결백함이 분명한 그가 그토록 고통받아야 했고 무죄임을 확인받는 데 1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왜 그래야만 했는가?
잘못된 재판은 확정되었어도 재심으로 시정될 수 있음이 그 당시의 프랑스에서나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나 다 법률상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형사 사건에서 재심 청구가 받아지려면 유죄가 선고된 판결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사실상 쉽지가 않다. 이 사건에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법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잘못된 사회분위기 전체를 바꿔야 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개의 경우 그것을 바꾸는 일은 법률가의 몫이 아니라 진실을 꼭 밝혀야만 하겠다는 열정을 지닌 소수의 진정한 지식인의 몫이었다.
일부 의식 있는 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보편적 기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정말 그런가? 많이들 걱정하고 한탄한다. 나는 그래도 겁나지 않는다. 수백만 명이 거짓을 짖어대고 저열한 언론이 아무리 이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선동한다 해도 우리에게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한 명의 에밀 졸라만 있다면 진실은 계속 전진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 진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에밀 졸라가 이미 예언한 바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진실이 가는 길을 가로막고, 또 얼마간 진실을 땅속에 묻어두는 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때에도 진실은 땅속에서 자라며, 땅속에서 엄청난 힘을 얻고, 어느 날 폭발의 굉음과 함께 모든 것을 날려 버리리라.”(「프랑스에게 보내는 편지」 중)
에밀 졸라는 그의 무기인 글쓰기를 통하여 ‘고발’을 함으로써 진실과 정의의 역사의 한 장을 창조해 내었다. 그러나 그의 고발은 폭력도 영광도 아니었고 의문의 가스중독사가 말해주듯이 하나의 희생이었다. 그는 고통을 통하여 진실을 진행시킨 것이다. 그는 진실과 정의를 위해 고통받았기에 이제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 모두가 또 한 명의 에밀 졸라가 되어 고통을 받아 보자. 진실과 정의에 가치를 두고 또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진실을 가로막는 모든 거짓됨을 한 방에 날려 보내어 우리 모두 이미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는 존엄을 되찾기를 소망한다. ☼
추기(追記):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또 다른 영화로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장교와 스파이>(2019)가 있는데, 정의감을 지닌 양심적인 군인 피카르 중령을 중심으로 하여 풀어나간 작품으로 충실히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잘 만들어졌다.
그리고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관련하여 쓴 여러 격문과 인터뷰, 연보 등 자료들을 모아 수록한 『전진하는 진실』(2014, 은행나무)을 읽으면 이 사건에 관한 좀 더 상세하고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엮은 분(박명숙)이 매우 치밀하게 자료를 모으고 유려하게 번역을 하여 더욱 그 진한 감동이 전해지는데,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일부 인용하기도 했다.
(경제포커스 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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