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59
9월25일 [연중 제2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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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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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한 가지는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는데 천국에서 주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는 라자로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 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영원불변의 진리를 떠올립니다.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ㅈ 주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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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wgEtrEzrZ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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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라자로처럼 ‘안 좋은 것’을 받아야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한국계 출신인 자니 킴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기 힘들 정도의 경력을 쌓아온 인물입니다. 1984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한국계라는 사실 역시 그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과 인종적 차별을 스스로 극복해나가며 남다른 성장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미 해군 특수작전사령부에 우수한 성적으로 네이비실의 일원이 되어 이라크에 두 차례 파병되어 은성무공훈장과 동성 무공훈장을 받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라마디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의무병의 한계를 느끼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고 메사추세츠 종합병원 응급실을 비롯해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의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알게 된 NASA의 우주비행사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높은 경쟁률을 뚫고 NASA 우주비행사 선발 프로그램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지원자 1만 8천 명 중에서 선발된 우주비행사 후보 13명 중 첫 한국계 미국인 우주비행사였습니다.
이런 그의 경력은 미국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가난한 아시아계 가정에서 미국 최정예 특수부대원이자 하버드 의대 박사, 우주비행사 등 한 사람이 한번 가져볼까 한 직업들을 갖고 있어 ‘지상 최강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렸을 적 삶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2002년 어느 날, 술 취한 아버지가 총과 아령을 이용, 일가족을 살해하려고 했고, 조니 김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얼굴에 아령을 맞아 크게 찢어졌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잠잠해지고 다락방에 가자, 가족은 경찰과 구급차를 부른 뒤, 경찰은 아버지와 대치하다가 아버지가 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경찰 총격으로 사살당하게 됩니다. “강해져서 엄마랑 가족을 지키자.”
최우수 고교 성적임에도 대학 진학 포기하고, 신념을 지키고자 미군에 입대합니다. 미국 최고의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 합격하여, 의무병 + 저격수 + 돌격병을 혼자 다 하며, 이라크 등에서 100회 이상의 전투 참여하고, 셀 수도 없이 많은 공적을 세웁니다.
하지만 군의관의 잘못된 응급처치로 인한 동료 사망 목격합니다. 군 응급의료를 발전시키기 위해, 돌연 의대 진학을 고려하게 되고, 험난한 준비 과정에 돌입합니다. 미국 의대는 의학전문대학원이므로, 대학교 졸업장이 필요했습니다.
군 장학생으로 네이비 씰 본부에서 제일 가까운 샌디에이고 대학교 수학과를 25세에 늦깎이로 입학했고, 28세에 3년 만에 최우등 졸업합니다. 또한 사병에서 해군 장교 전환 과정 합격. 이후 위대한 전우들의 추천서를 받아, 여러 의대에 원서를 넣게 되고, 하버드 의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의대 졸업 후 해군 군의관으로 전환되었으며, 하버드 부속 병원 응급의학과 인턴 과정 수료합니다.
2017년 군의관으로 일하던 도중, 의사 출신 우주비행사를 만나고, 더욱 원대한 비전과 꿈을 갖게 됩니다. 나사 (NASA)의 우주인 프로젝트에 지원, 1600:1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 2024년 달 착륙을 예정한 아르테미스 프로젝트의 핵심 요원이 되었습니다. (장기 거주용 달 유인기지 건설 목적, 이 때문에 특수부대 출신 응급의학 군의관은 꼭 필요한 인적자원임)
자니 킴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친부와 싸웠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슈퍼 솔져가 됐으며, ‘동료’를 지키기 위해 의사가 됐고 ‘인류’ 미래를 위해 달 기지 우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빱빠쁄루’라는 불은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야기를 가슴에 묻어두지 않고 꺼내주셔서 너무 감사하네요. 의미 없는 인생 살다가 죽고 싶단 생각을 여러 번 한 제가 너무 부끄러워져요. 여태까지 환경 탓하며 열심히 살지 않은 저를 되돌아보게 되네요.” ‘오씨네곳간’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습니다.
“정말 선한 영향력, 긍정적인 영향력, 본받고 싶은 영향력인 분이네요…. 문득 이분 영상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 없이 힘든 날들을 보내 갈 아이들…. 학대받았던 아이들…. 괴롭힘당하던 아이들, 그냥 모든 아이에게 보여주면 정말 좋겠다…. 이런 생각….”
자니 킴은 말합니다. “가진 것 없이 태어나도 다음 세대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인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인류 최고의 인간, 조니킴’, 유튜브 채널, ‘터닝포인트’]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고 라자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한 심판의 이유를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라자로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나쁜 것을 선택했을까요? 라자로는 자기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개들이 먹게 하였습니다. 개들은 여기서 자신들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사는 인간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그런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말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믿어 새로 태어나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단순히 인간이라 여길 때 그보다 더 큰 존재임을 깨우쳐주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에서 흘러나오는 살과 피를 마시고 우리가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닐 수 있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세례로 새로 태어납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유일한 이름을 지닌 사람입니다. 라자로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죽어 썩어가는 사람까지 살리시는 분임을 믿게 하도록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친구였음에도 죽음의 고통을 이 세상에 희망을 주기 위해 당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삶이 이 세상에서 안 좋은 것을 받는 삶입니다.
하지만 안 좋은 것을 받고 좋은 것을 받는 것은 우리 선택입니다. 우리 선택이기 때문에 심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니 킴은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찾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안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십자가 덕분으로 많은 이들이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라자로의 삶입니다.
세상에 줄 선한 영향력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삶, 이것이 안 좋은 것을 받아 라자로처럼 천국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는 안 좋은 것을 받는 삶, 이 삶으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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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들이 와서 며칠 지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표를 샀습니다. 요즘은 핸드폰으로 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당일 날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되었고, 다음날 2경기가 연속으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경기장에 가서 표를 보여주니 문제가 있다고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보라고 했습니다. 티켓 판매 직원에게 문의를 하니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30분은 기다렸는데 전산에 문제가 있는지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직원은 저쪽 벽에서 기다리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참고 있었는데 감정이 상했습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물었더니 답이 없었습니다. 정 그러면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5분이 지나니 직원이 표를 핸드폰으로 보내 주었습니다. 다시 입장하려 하니 이번에는 좌석이 이미 지정되었다고 했습니다. 함께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자고 하니 자기는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합니다. 동창들에게 면목도 없고, 다시 티켓 판매 직원에게 가서 이번에는 입구까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직원은 저와 함께 입구로 갔고, 드디어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1시간이 지났습니다.
저와 비슷한 문제로 판매 직원에게 온 사람들은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 무시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동양인이라서 무시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벽 쪽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도 저를 무시한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직원은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였고, 나중에는 함께 입구까지 가 주었기에 오해는 풀렸습니다. 전산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은 그래도 미국에서 몇 년 살았기에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며 저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이방인으로 타국에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난민이 되어서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첫째는 언어의 소통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직업을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부담이 됩니다. 둘째는 차별입니다. 차별은 인격적인 차별도 있고, 경제적인 차별도 있습니다. 셋째는 자녀의 교육입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주민과 난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생각하면 성서는 이주민과 난민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난민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인류의 시작이 바로 난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잘 지낼 수 있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가뭄을 피해서 풍요로운 땅인 이집트로 가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난민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을 끌려갔습니다. 낯선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난민이 아닌 포로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지키지 않았음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이집트로 피난 가서 살았습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저의 집안도 신앙 때문에 박해를 피해서 서울에서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냈지만 잘 지켜 주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하였고, 이집트에서 가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유배지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고레스 왕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가장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에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주민과 난민 그리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가진 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저도 미국 땅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가진 것을 나눌 수만 있었다면, 헐벗고 가난한 라자로에게 자비를 베풀 수 만 있었다면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눌 수만 있다면 부자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만 있다면 라자로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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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난주일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고 하셨다. 재물이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사회는 갈라지고, 사회적 불안을 초래하고,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재물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은 그 위험성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에게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직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찾아드는 모든 파멸적 모습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마음을 굳게 닫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풍요한 의식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들이 식사 후에 손을 씻는 빵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돌아다니는 개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는 정말 자기 집 문간에 드러누웠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처지가 바뀐다. 라자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 잡게 되고,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생애 동안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한다. 그러면서 생전과 같이 누구에게나 명령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24절) 하여간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전통적인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à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간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대답은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2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균형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그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28절) 그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음을 들어 그것도 거절하고 있다.
사실 형제적 사랑이나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11,46-53; 12,10-11 참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이웃을 바라보려고 하여야 한다.
이 부자는 어찌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그것은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7)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것은 재물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유한 모든 재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려 더는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위험성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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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루카 16,19-2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의 앞에, 예수님께서 재물에 관해서 가르치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당신을 비웃은 바리사이들을 겨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고, 재물을 섬기느라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열성적으로 섬기는 경건한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그 모습은 위선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루카 16,15)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드러나게 표시가 나는 큰 죄를 짓지는 않는 사람, 그러나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겉으로는 율법을 충실하게 지켰을 것이고, 다른 바리사이들처럼 불우이웃돕기 성금도 잘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 그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 냈을 것입니다. 그의 위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충실한 신앙인’이라고 그를 칭찬했을 것이고, 그의 부유함과 풍족함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비유의 주인공이 아니라, 부자의 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설정한 배경 같은 인물입니다. 라자로의 모습을 통해서 부자의 죄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부자의 첫 번째 죄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라는 계명을 실천하지 않은 죄입니다. 라자로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마치 개에게 던져주듯이 빵 부스러기를 조금씩 던져주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자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일, 오히려 자기 죄를 더 키우기만 하는 일입니다. 그의 두 번째 죄는, 자기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한 죄입니다. 그런 부자는 12장에도 나옵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재물도 목숨도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의 세 번째 죄는,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육신의 쾌락만 추구한 죄입니다. 혹시라도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지옥에 갈 정도로 큰 죄를 짓지는 않았다.” 라고 변명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위대한 사도이면서 선교사인데도, 자신이 실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1코린 9,27) 하느님 나라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다음에 겸손하게 주님께 간청해서 겨우 얻게 되는 자비이고 은총입니다. 대충 아무렇게나 막 살다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네 번째 죄는, 가난한 이들과 자기 사이에 높은 장벽을 세워서 소외계층 사람들을 더욱 소외시킨 죄입니다. 26절에 있는,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라는 아브라함의 말은, 그 부자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한 짓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큰 구렁은 부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의 생생한 현실입니다.) 부자들은 그 구렁을 건너가려 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은 그 구렁을 건너갈 힘이 없습니다. <그 상황은 내세에서 그대로 역전됩니다.> 인간 세상의 그 구렁을(장벽을) 없애는 일은 부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읽을 때 라자로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조금만 참아라. 하느님 나라에서 복을 누리게 될 테니.”라고 위로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종교는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의 다섯 번째 죄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 죄입니다.(29절) (비유의 내용에 따라 다섯 번째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한 죄는 그의 죄를 모두 종합한 것입니다.) 29절과 31절의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은 ‘성경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이 말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무슨 거창한 극기고행도 아니고, 무슨 엄청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신앙인답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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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현세의 부유함과 가난함이 각각 하느님의 축복과 저주의 결과라 믿어 왔던 구약 시대의 이해를 수정하고(19-26절), 회개와 구원의 길이 성경 말씀 안에 있음을 선포합니다.(27-31절) 비유 속 라자로는 언뜻 무력하고 수동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그의 이름은(엘아자르: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뜻) 그가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가난하고 고된 삶을 성실히 살아 낸 의인임을 드러냅니다. 반면에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면서도 대문 앞 라자로를 계속 외면하였던 부자의 삶은,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기원전 760-750년 무렵 활동)가 꾸짖으며 심판을 경고한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의 향락과 사치를 빼닮았습니다. 부자의 삶은 겉으로는 호화롭게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맡기신 재화를 자신만을 위하여 쓰고 도움이 간절한 이를 외면한 까닭에 영원한 상실과 절망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부자는 자신처럼 향락만 꾀하는 형제들을 돌이킬 유일한 방법이 특별한 이적이라 생각하지만, 그는 또 틀렸습니다. 믿음이 없고 회개할 의지도 없는 이에게 이적은 특이한 체험 정도에 그칠 뿐, 그의 삶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은 이적이 아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곧 성경 안에 이미 들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성경을 읽고 하느님 말씀을 가슴에 새겨, 거룩한 삶을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는 그 노력 안에 우리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주님께 꾸어 드리는 이, 그분께서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잠언 19,17)라는 구절을 마음에 새겨 실천한다면, 비유 속 부자와 같은 이기적인 삶은 피할 수 있겠지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의로움과 믿음,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며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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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현민 가밀로 신부님]
<사랑의 눈으로 라자로들을 바라보자>
요즘 옛날 얘기하면,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면 꼰대라는 말을 듣습니다. 문득 제가 강론을 하다가 저의 어린 시절의 얘기를 하면서 요즘과는 다른 뭔가를 얘기했는데, 생각해보니 삼사십 년도 더 지난 일이라 깜짝 놀라면서 '나는 꼰대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적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함께’라는 말이 말뿐이 아니라 사람들이 진실로 함께 서로를 위해주고, 도와주고, 공존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해야 나는 라자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뭘 해야 내 자신이 변화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거지 라자로는 부자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 부자는 자신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집 대문 앞에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는 라자로를 보지 못합니다. 늘 그 대문을 지나치면서도 어떻게 그를 보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무관심의 존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와는 무관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도 보이지 않은 척하며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이 부자가 조금만 관심을 보여 주었다면, 거지 라자로는 인간답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옛날 예수님이 지어낸 이야기였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나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상황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으로 소외된 이웃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상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무관심이 아닌 사랑 가득한 관심으로 내 주변을 돌아볼 때입니다.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이 아닌, 남에 대한 배려를 간직하는 사랑이 나의 구원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사랑의 눈을 통해 자신 주변에 있는 라자로들을 바라보고 나누는 한 주이길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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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황주원 미카엘 신부님]
<“신부님의 나라는 부자입니까?”>
페루 선교사로 살던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자매 한 분이 뜬금없이 질문을 해왔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의 나라는 잘사는 나라입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적을 거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처럼 가난한 이들은 모두 구원받을 텐데 말입니다.”
앞뒤 없이 건네는 말에 당황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순간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얘기를 나눈 곳이 마침 무료 급식소였기에, 그곳의 예를 들어 대답했습니다.
“이 급식소를 무료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은 독일에서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한 끼니를 잘 먹고 지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단지 부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그들이 부자 나라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여러분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그 자매는 먹으면서 듣다가 “신부님, 그건 아니죠.” 하면서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떤 부자가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고 시작합니다. 그 부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대신, 라자로의 비참함에 집중하고 그 점을 잘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후반부에, 부자는 라자로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서 즐기는 것에 여념이 없어서 그 가난한 사람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이는 마치 행복이든 불행이든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뜻은 분명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바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려운 이를 돌보며 본인이 가진 것을 나누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살릴 뿐만 아니라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 행복한 죽음을 원한다면, 그늘진 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라자로를 기억하며 그들에게 사랑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부자나라 독일 사람들의 사랑이 페루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흘러간 것처럼 말이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게 무관심하지 않겠다는 고백에서 시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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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와 ‘너’>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와 ‘너’>
사람 사는 세상에는
단 하나의 ‘나’와
수많은 ‘너’들이 있답니다
수많은 ‘너’들 가운데에는
‘나’가 바라는 ‘너’와
‘나’를 바라는 ‘너’가 있답니다
‘나’를 바라는 ‘너’보다
‘나’가 바라는 ‘너’에게 끌리는
‘나’들이 많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
‘나’가 바라는 ‘너’보다
‘나’를 바라는 ‘너’를 품는
‘나’들이 많은 사람 사는 세상으로
아름답게 흐르기 위해서
다른 ‘나’들을 탓하기에 앞서
홀로라도 ‘나’부터 그리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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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인 물은 썩는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알맞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알고, 그것을 효과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옛날 한 마을에 구두쇠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 마당에는 우물이 있어 동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물을 길었습니다. 구두쇠 할아버지는 그것이 늘 못마땅하였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많은 돈을 들여 집 주변에 높은 담을 쌓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만 우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우물의 물맛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러운 냄새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물을 퍼갈 때는 계속해서 맑은 물이 솟아 올라왔지만, 물이 계속해서 고여 있으니까 썩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 좋던 물이 먹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제 때에 올바로 쓰지 않으면 그 가치를 잃고 맙니다. 재물이나 시간, 재능,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간에 제대로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똥은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나지만 뿌려지면 거름이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웃을 위해, 뿌려지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수고와 땀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마련해 놓으신 것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감사하고 기쁘게 쓸 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관리자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욕심을 경계하도록 일깨워줍니다. 무엇을 소유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소유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잃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으니,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공한 것은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지 하느님의 은총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여길 수가 있습니다. 멋진 삶에 완전히 빠져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늘 풍족하면서도 하느님을 위한,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의 대상이 되는 이웃을 위한 시간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면 문제가 됩니다. 그는“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은 탐욕, 바로 돈에 대한 지나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수녀님은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는가가 아니라 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많이 가졌는데도 왜 줄 것이 없습니까? 아홉을 가지면 하나를 채워 열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사실, 부자가 잊고 살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은 현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영원한 삶의 풍족함을 잊으면 이 세상의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자는 복이 많은 사람입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다 복이 없는 사람입니까? 역시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을 차지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경험으로 보면, 복을 간수하지 않으면 화가 돌아옵니다. 복 안에 화가 있습니다. 단순한 예이지만 로또 복권이나 토지보상 등으로 졸지에 부자가 된 사람의 거의 모두가 횡재하기 전보다, 더 비참한 생의 마감을 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가족의 유대관계가 깨지고 친구와 멀어지고 인생이 피폐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수고와 땀이 없는 복은 결코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난이 천국으로 가는 보증수표냐?
그것도 아닙니다. 가난이 주는 비참한 고통 때문에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매달린 사람이라야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물질에만 의지하려 하면 더 탐욕스러워지고 몰염치해지며 더욱 천박해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면 지금 당장은 어려울지 몰라도 복중의 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많이 가졌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실망할 것도 아닙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은 많이 베풀고 적게 가진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인내하고 희망을 키워가야 합니다. 지금의 처지를 불평 불만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은총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를 도우십니다. 따라서 믿으십시오! 믿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자로는 모든 것을 잃은 초라한 삶을 살았습니다.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 때문에, 불행 때문에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 나라에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나 몰라라 했지만 “라자로”라는 이름, 즉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는 의미대로 하느님께서 그를 도왔기 때문입니다. 라자로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으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처지와 상황을 반드시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지금 여기서 최선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잠언 30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구르의 말이 나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부른 김에 하느님이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가난한 탓에 도둑질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가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살아서도 천국이요, 죽어서도 천국이 될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시기 빕니다. 그리고 먼 훗날의 천국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 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12,15)
"너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
재물을 보물로 삼지 말고 주 하느님을 가장 귀한 보물로 삼고 살아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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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침에 뉴스를 보면 나쁜 소식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침울해지고 화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 뉴스가 주 뉴스로 발표되고, 반면에 좋은 소식은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쁜 뉴스를 다 마치고서야 잠깐 나올 뿐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많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소식에 눈길을 더 두는 우리이기에, 흔하지 않은 나쁜 일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너무 많기에 맨 뒷자리 그리고 흔한 일이기에 아주 적은 숫자의 좋은 뉴스를 발표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관심을 두면 우리를 환하게 미소 짓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기의 웃음에서, 사람들의 착한 사랑의 실천에서,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배려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습니다. 여기에 비오다가 갑자기 맑아진 하늘에도 큰 기쁨을 얻습니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개운한 마음으로 새 아침을 맞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좋은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온 세상에 나쁜 뉴스로 가득하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보시니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더 좋은 세상이 되는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과 이기심 속에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지 못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보게 됩니다. 부자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 둘이 모두 죽어 하늘 나라에 가서는 입장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옆에서 위로받고,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습니다.
왜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을까요? 부자가 악인이고, 라자로는 선인이기 때문일까요? 부자가 자기 형제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했던 선한 행동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가 보였던 자기만 잘 사는 삶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주님 말씀에 맞춰서 좋은 세상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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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 중심, 기도, 회개 -
어제 형제와 주고 받은 대화시 저의 재치있는 대답에 만족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대답이었습니다.
“여기 수도원 개들은 참 순하네요!”
“사랑을 많이 받아서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람은 물론 생명있는 모두가 사랑받을수록 본연의 자연스럽고 사랑스런 제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강의후 질문하겠다는 분에게 한 답변입니다. 답변할 상황도 아니었고, 직감적으로 질문을 위한 질문이란 예감이 들어 즉시 답하고 형제도 흔쾌히 받아드렸습니다. “답은 강의록과 기도문에 있습니다. 잘 읽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새벽, 잠깨어 방안의 전등불을 켰을 때 방안이 밝고 따뜻해 참 좋았습니다. 날씨가 약간 쌀쌀해져 방에 불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새삼 마음의 방을 생각했습니다. 예전 겨울철 피정을 안내했을 때 피정집 방이 밝고 따뜻했을 때 공통적으로 누구나 좋아했습니다. 방은 따뜻하고 창도 빛이 잘 들어와 밝아야 하듯 마음의 방도 그래야 함을 오늘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과연 여러분 마음의 방은 밝고 따뜻한지요? 과연 마음의 방은 마음의 창문을 통해 은총의 빛이 잘 들어오고 있으며, 마음의 방은 주님의 사랑으로 따뜻한지요?
이래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 절실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때 각자의 마음의 방은 그리스도의 빛이 환히 밝힐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의 방을 따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토요일은 모처럼 참 분주한 날이었습니다. 오전에는 서울대교구 하늘땅물벗 20명 형제자매들의 하루 피정중 오전 강의가 있었고, 오후에는 청담동 성당 ‘기쁨의 모후’ 레지오 팀 8명을 위한 피정 강의와 더불어 고백성사가 있었습니다. 강의 주제는 “베네딕도회 영성-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 이었고, 강의 전후로는 제 자작 ‘행복기도문’과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기도문을 함께 낭송했습니다.
특히 강조한 것이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었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회 영성은 유행을 타지 않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영성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제108차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이며 교황님의 ‘이주민과 난민과 함께 미래 건설하기’란 주제의 담화문 내용도 참 깊고 좋았습니다. 교황님의 넓고 깊은 시야는 그대로 하느님의 시야를 반영한다 싶었습니다. 감동적인 기도문을 나눕니다.
“주님, 저희를 희망의 전달자가 되게 하시어,
어둠이 있는 곳에 주님의 광채가 빛나고,
절망이 있는 곳에 미래에 대한 확신이 다시 싹트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주님 정의의 도구가 되게 하시어.
배척이 있는 곳에 형제애가 꽃피고,
탐욕이 있는 곳에 나눔의 정신이 자라나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이주민과 난민과 함께
또한 변방에 사는 모든 이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건설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가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깨닫게 하소서.”
얼마전 카자흐스탄 사도적 방문을 마치고 귀국중 비행기에서의 관례적인 기내 회견 내용에서 이민에 대한 교황님의 답변이 신선했습니다.
“오늘날 유럽 이곳은 인류의 가장 큰 묘지입니다.
서방이 사람들을 필요로 할 때 환영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인구통계학적으로 겨울을 생각하면 우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에는 빈 마을이 많습니다. 그곳에는 소수의 노인들만 있고 그 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는 이민자를 환영하고, 동반하고, 촉진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원칙과 이민자를 포함하는 정책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서구는 이주민의 나라입니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당장 우리 나라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중심의,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영성이 얼마나 절박한 보편적, 세계적 영성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깊고 넓은 시야를, 하느님의 시야를 지녀야 할 작금의 위기의 시대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첫째, 삶의 중심의 회복이요, 그리스도 중심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자리에 또아리 틀고 있는 온갖 우상들을 과감히 퇴치하고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심 자리에 위치한 탐욕이 문제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은 돈이나 재물의 우상이 아닌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자리잡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참 좋은 가르침입니다. 부자는 완전히 탕욕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사람이라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재물에 중독되어 자기속에 갇힌 자기 감옥의 수인, 폐인, 괴물입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예 없기에 온통 관심사는 재물이요 자족의 삶에 문옆의 라자로 이웃과는 완전히 무관한 삶입니다.
둘 사이에는 너무 큰 구렁이 있어 건널 수 없었다 하니 그 보이지 않는 단절의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깨닫습니다. 하늘 향한 문도 닫혔고, 이웃간의 문도 완전히 닫힌 고립단절의 삶,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문제는 부자가 이런 현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의 부에 중독되면, 하느님 중심을 잃어버리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 지, 마음이 양심이 썩을 수 있는지, 오늘 제1독서 아모스서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찌 사람이 이럴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오늘날도 이런 부자들 어디엔가 있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이들,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 먹는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나라가 망하든 전혀 무관한, 공동체 의식이나 사회의식, 역사의식이 전무한 괴물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중심을 잃고 탐욕에 노예되면 십중팔구 불치의 괴물이 됩니다.
둘째, 기도가 답입니다.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은 기도로 하느님 중심을 회복하고 견고히 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부자나 아모스서의 부자는 기도가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도 완전 실종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과 완전 단절입니다.
만나지 않으면 사람관계도 절로 멀어지듯 하느님도 예수님도 기도를 통해 만나지 않으면 절로 멀어져 완전히 무관한 남남이 됩니다. 믿음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믿음도 훈련이요 기도도 훈련입니다. 도대체 영성생활에 훈련 아닌 것이 없습니다. 참으로 영적 삶을 추구하기를 권하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기도의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여,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이 모두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바로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평생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해야 하는 주님의 전사입니다. 기도의 전사, 믿음의 전사입니다. 결코 분투의 노력과 훈련이 없는 값싼 은총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 드릴 분인 하느님의 모습이 바오로 사도의 기도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그리하여 제가 호흡에 맞춰 늘 바치길 권하는 화살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 삼위일체 하느님을 숨쉬며 바치는 기도영성훈련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오소서, 주 예수님!”.
“오소서, 주 성령님!” 하고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셋째,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가, 제1독서 아모스서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오늘 우리의 회개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 재난의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함께 나눠야 할 나자로는 없습니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돌아가 만나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인생 허무와 탐욕의 무지에 대한 답도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한 순수와 열정,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의 선물입니다. 감사와 기쁨, 평화와 희망도 회개의 선물입니다.
제1독서 아모스서 후반부 말씀도 회개를 촉구하며 복음의 후반부 말씀도 경청과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경청하고 회개하는 일이 구원에 화급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영성을 굳건히 해주시고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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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영원한 생명!>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 16,25)
그리스도인들은 왜 성당엘 다니는가?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첫 번째 성사인 세례성사예식 때 주례사제로부터 받는 질문과 세례자의 대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을 믿겠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종착지'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다리 건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희망'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입니다. 두 사람의 처지가 여기(현세)와 저기(내세)에서 뒤바뀝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가 죽음 저 너머에서는 '영원한 벌'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먹을 것이 없어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누워 있었던 라자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부자의 인색'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2.14)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고, 그들이 바로 당신 자신이라고 말씀하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입니다. '나의 사랑과 나눔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나의 인색을 드러내지 말고, 그래서 영원한 벌을 받지 말고, '사랑의 나눔'을 통해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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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yfWsVznN0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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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 25)
머지않아
고운 단풍잎도
나뭇가지를
떠날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떠남의
이 여정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탄생이 있기에
죽음이 있습니다.
보다 나은
삶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더욱
소중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는
영적인 삶이며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죽고 떠난다는
영원한
사실 앞에서
이기적인 욕심을
내려놓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우리들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근원적인
결핍을
채워주시는 분은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릇된 욕망을
경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잘못된 욕망은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죽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다시 하느님께
되돌려드리고
아픈 이웃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자리에서
다시 아름답게
열리는
삶의 교훈을
다시 뜨겁게
받아들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만남의
소중함입니다.
부자는 라자로가
라자로는 부자를
향해 열려야 할
삶의 나눔입니다.
나누고 떠나는
우리들 삶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생명의 나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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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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